17일 - 스톡홀름신드롬의 이면을 추적하는 세 여성의 이야기
롤라 라퐁 지음, 이재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2월
평점 :
절판


오래 전 아마도 퍼트리샤 허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하게 그녀의 사건을 인식한 것은 한 팟캐스트에 이 이야기가 소개된 것을 들었던 그때다. 그리고 얼마 후 이 소설이 출간되었다. 인터넷에 퍼트리샤 허스트를 검색하면 그녀를 납치한 공생해방군과 스톡홀름 증후군이 함께 나온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녀의 행동을 스톡홀름 증후군이 아니라고 보면서 그 이면을 추적한다. 대부호의 딸이 갑자기 극좌조직의 일원이 되어 강도짓을 하는 상황을 단순하게 보면 협박과 세뇌 말고는 쉽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단순화를 피해 그 당시의 사건들을 하나씩 검토하고 분석한다.


‘17일’이란 제목은 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화자가 아닌 체포된 퍼트리샤 변호에 사용될 내용을 취합하기 위한 작업 일수다. 이 작업을 의뢰받은 인물은 진 네베바이고, 그녀는 작업 도우미로 비올렌을 선택한다. 이 소설의 앞부분에서 네베바의 자료를 찾고 요약하는 일들 비올렌이 한다. 네베바와 함께 한 시간이 17일이다. 퍼트리샤의 납치와 그녀가 처음 보낸 비디오 성명서 등이 나온다.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것을 활자로 읽게 되면 나의 의미가 전달되는데 이 테이프들이 그런 역할을 한다. 납치된 후 그녀가 자발적으로 SLA(공생해방군)에 참여하는데 걸린 시간도 불과 두 달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녀의 참여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그녀 재판의 핵심이다.


1974년 2월 4일 미국 언론재벌 상속녀 퍼트리샤 허스트가 납치되었다. 보통의 납치범들은 돈을 요구할 텐데 이 조직은 조금 다르다. 극좌 조직인데 돈 대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것을 요구한다. 이 선언문을 보고 비올렌이 놀라는 것은 미국에 존재하는 빈곤자의 숫자다. 비올렌은 68혁명의 나라에서 정치적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소녀다. 수많은 자료 속에서 퍼트리샤의 심리 변화를 따라가고, 그 이면에 놓여 있는 감정을 파헤친다. 이것은 다시 네베바의 저서 <머시, 메리, 패티>로 이어진다. 그들은 각각 다른 시간 속에서 기존의 질서를 거부한 여자들이다. 물론 머시와 메리 이야기는 아주 간결하게 다루고 있다.


퍼트리샤의 전향을 두고 보여주는 부모의 모습은 다음의 문장으로 대변된다. “부모는 자기 자식을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자식이 부모가 마련해놓은 정체성을 거부하고 다른 정체성을 가지려 하면 부모는 자식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요.” 실제 이 문장의 많은 부분이 사실이다. 하지만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작가가 말한 것처럼 이 문장을 단순화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그리고 전향한 그녀를 두고 과거의 그녀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평가와 감상이 뒤섞여 나온다. 약혼자에 대한 퍼트리샤의 신랄한 비판은 실제 가부장적 남성의 모습 그대로다. 어머니가 걱정하는 것도 딸의 안위보다는 자신들의 위신이지 않는가. 딸의 변론에 많은 돈을 쓴 것도 딸에 대한 사랑보다는 다른 감정이 더 우선했을 것이다.


소설은 단순히 퍼트리샤 허스트 사건에 국한해서 머물지 않는다. 네베바가 경험했던 처참한 현실과 체제를 흔들 수 있는 조직에 대한 강력한 조처 등이 눈길을 끈다. 70년대 중반은 베트남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릴 때다. 인종 차별 문제가 사회적 문제가 되던 시절이다. 작가는 이 SLA 조직을 무너트리는 과정을 생중계로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몇 명의 SLA 조직원을 무력진압하기 위해 FBI 둥이 사용한 금액이 6백만 불이 넘는다. 이 조직이 요구한 것을 실행하는데 드는 비용이 훨씬 저렴하다. 물론 이 조직을 요구 사항을 따라하면 그 여파는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이다. 체제는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가끔, 아니 자주 상상도 할 수 없는 돈을 쓴다.


제목과 퍼트리샤 허스트란 이름이 나에게 작은 선입견을 불어넣었다. 단순히 퍼트리샤 허스트가 SLA에 가담하고 활동한 내용만 다룰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스톡홀름 신드롬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 이 사건을 단순화했다. 개인적인 습관 중 하나가 단순하게 보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이런 단순함의 집합들이다. 퍼트리샤가 타니아로 이름을 바꾸고, 은행 강도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을 많은 사람들이 세뇌라고 말하지만 작가는 그녀의 자유의지란 결론에 도달한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인물인 화자가 긴 세월을 지나 이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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