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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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 오즈의 마지막 작품이다. 이제는 고인이 되었지만 그는 한때 매년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꼽혔다. 그의 인지도를 생각하면 내가 읽은 책은 거의 없다. 집을 뒤지면 몇 권의 소장 도서들이 나오겠지만 이상하게 손이 잘 나가지 않는다. 단순히 읽기 힘들어서도 아니고, 재미가 없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하면 낯익은 표지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확실한 것은 한 권 밖에 보이지 않는다. 저질 기억력이지만 아마도 맞을 것이다. 그의 책이 출간되면 늘 관심을 두었다. 읽어야지 생각을 그 당시는 했을 텐데 그 결과는 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번 책도 받기 전 쪽수를 보고 읽기 힘들 것이란 짐작을 미리 했다. 착각이었다. 물론 역주를 모두 찾아가면서 읽었다면 두 배 정도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르지만.


유다. 예수를 떠올리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유다하면 배신자가 먼저 떠오른다. 유다를 다른 식으로 해석한 책들이 나오는 소개를 봤지만 그 내용까지 읽은 적은 없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 쉽게 잊고 있는 유대인 예수를 이 소설은 정면에 내세운다. <다빈치 코드> 같은 스릴러 등에서 내세우는 음모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바라본 유대인 예수를 다룬다. 긴 세월 동안 유대인 학자들이 예수를 어떻게 보았는지 학술적인 차원에서 하나씩 풀어내는데 그 속에는 야훼의 아들이자 신인 예수의 모습은 없다.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발칙하고 무례한 소설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유대인들마저도 잘 다루지 않는 유다를 다루면서 아주 논쟁적인 소설로 만들었다.


이야기를 이끌고 나가는 인물은 유다를 연구하는 대학원생 슈무엘 아쉬다. 집안이 몰락하고, 여친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서 학업을 중단했다. 그러다 학식이 높은 장애인의 입주 말동무를 구하는 공고를 보고 그 집에 간다. 그를 고용한 여인은 아탈리야 아브라바넬이고, 마흔다섯 살의 미망인이다. 슈무엘이 돌봐야 할 인물은 그녀의 시아버지인 게르숌 발드다. 슈무엘은 아탈리야에게 매혹되고, 발드는 그 매혹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가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 배신자로 낙인 찍인 쉐알티엘 아브라바넬임을 알게 된다. 그는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 아랍인들과 화해를 주장했던 인물이다. 그 또한 유다처럼 유대인들의 역사 속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있었다.


두 배신자들의 과거를 파헤치고, 그들의 사상 이면을 파고든다. 작가는 유다를 첫 번째 기독교인이자 마지막 기독교이고, 유일한 기독교인이라고 말한다. 기존의 인식을 완전히 뒤바꾸는 주장이다. 슈무엘과 발드의 대화 속에 기독교가 가진 역사적 문제점들이 간략하지만 날카롭게 지적된다. 학문적이고 이성적인 관점에서 본 문제점들이다. 아브라바넬의 경우는 현실적인 부분에서 문제가 있다. 이스라엘 전체와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다비드 벤구리온은 아랍과의 평화적 공존이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그의 주장은 굉장히 이상적인데 현실의 이스라엘 국가 수립에서는 불가능한 주장이다. 물론 그가 염려한 미래의 모습은 현재도 진행중이다. 지금 시점에서 봐도 아브라바넬의 주장은 너무 급진적이다.


유대인들이 수천 년을 떠돌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유다와 유대인을 동일시한 기독교인들의 시선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도 유대인이었고, 기독교를 전파한 인물들도 유대인이었다. 이런 사실은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가려질 뿐이다. 유다에 대한 유대인들의 암묵적인 침묵을 다룬 부분은 그들이 겪은 역사적 고난과도 관계가 있다. 아브라바넬이 잊혀지고 배신자로 인식되는 과정에서 그 가족들 또한 유배자처럼 지낸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글들을 없앴고, 그 흔적은 사라진다. 그가 주장했던 의견들은 정치적 이유에서 역사 속으로 묻혔다. 작가는 유다처럼 그도 시간의 흐름 속에 다시 재평가 받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주장한 아랍인들과의 공존은 긴 세월 동안 중동에 머물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것이다.


슈무엘의 아탈리아에 대한 열정과 아탈리아의 냉정한 시선은 이 소설의 또 다른 재미다. 그 이전에 이 집에 온 남자들은 모두 아탈리아에 의해 내쳐졌다. 발드가 슈무엘에게 이를 경계하라고 한 것도 이유가 있다. 그는 벤구리온의 주장에 동조한 인물이지만 그의 아들이 죽은 후 생의 의욕을 많이 상실한 상태다. 이 끔찍한 사고의 기억은 아탈리아와 발드의 삶을 완전히 뒤흔든다. 입주한 젊은 이들과의 대화는 그에게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일이다. 각자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할 일만 하는 약간 기묘한 동거가 깨어지는 것은 슈무엘의 사고 때문이다. 아브라바넬의 방이 열린 것도, 아탈리아가 다가온 것도 이 사고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일들은 그가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몬다. 갇힌 세계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다듬었지만 밖으로 나아가지 못한 그가 이 집을 떠나 자연을 보면서 아름다움과 새로운 삶을 생각하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다.


결코 가벼운 소설이 아니다. 이번에는 주석을 대부분 스쳐 지나갔지만 나중에 천천히 읽으면서 더 많은 생각을 해보고 싶다. 어느 부분은 나의 편향적 시선이 작용했다는 것을 느끼는데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한 부분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전에 생각보다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시간 내어 한 권씩 읽어보고 싶다. 묵직한 내용이지만 주석에 집착하지 않으면 가독성이 생각보다 좋아 잘 읽힌다. 작가의 배신자에 대한 경험이 이 소설 속에 녹아 있을 테지만 다시 한 번 배신이란 단어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스라엘 건국을 다른 시각에서 보는 시간도 되었는데 역시 더 공부가 필요한 부분이다. 공부할 거리를 잔뜩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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