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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ㅣ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평점 :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중 2번째 작품이다. 작가의 두 번째 발표작이기도 하다. 다 읽은 지금은 상당히 만족하지만 읽을 때는 엄청 고역이었다. 느리고. 답답하고, 어둡고, 억눌린 듯한 분위기가 계속 나를 짓눌렀기 때문이다. 세라 워터스의 소설을 3권째 읽는데 늘 중반까지 더딘 진행과 장황한 묘사 등을 보면서 힘겨웠다. 한참 고전소설을 탐닉할 당시라면 이런 묘사들이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겠지만 최근 빠른 전개와 진행에 익숙해지다 보니 이런 문장에 쉽게 몰입을 하지 못한다. 주인공이라도 전작 <티핑 더 벨벳>처럼 변화가 심한 삶을 살았다면 더 흥미로웠겠지만 마거릿은 그런 삶과 상관없는 전형적인 빅토리아 시대 노처녀 숙녀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삶도 살지 못하는 그녀의 심리를 일기라는 형식으로 섬세하게 표현했다.
일기란 형식으로 두 여인의 삶을 그려낸다. 주로 나오는 것은 마거릿이다. 그녀의 일기는 현재를 다룬다. 밀뱅크 감옥에 갇힌 셀리나의 일기는 과거의 일을 다룬다. 재밌는 것은 셀리나의 일기나 현재와 만나지 않고 과거의 한 시점에서 멈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일기와 문장에서 이 고딕풍의 심리 스릴러가 서술 트릭을 사용했고, 멋진 반전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단숨에 드러낸다. 물론 마거릿을 둘러싼 일들을 보면서 그 가능성을 충분히 생각했다. 하지만 열정이 욕망으로 피어나고, 심리적으로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의 열정이 빚어내는 파국을 이렇게 마무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읽지 않았다면 누리지 못한 재미다.
마거릿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우울증에 빠진다. 그녀의 우울증 원인 중 하나는 동생과 결혼한 헬렌이다. 그녀의 키스는 그녀를 과거 속에 머물게 하고,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게 한다. 화려한 미모를 가진 여동생에 비해 자신은 너무 평범하다. 누군가에게 구애를 받고,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긴 채 살아가는 방법도 있지만 그녀는 그렇게 살지 못한다. 이 우울증을 해결하기 위해 간 곳이 바로 감옥인 밀뱅크다. 이 당시 숙녀들에게 감옥은 하나의 관광지 같았던 모양이다. 소장이 아버지의 지인이다 보니 이곳을 방문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쉽다. 작가는 마거릿을 통해 빅토리아 시대 여자 감옥의 풍경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물론 그 감옥 속에는 다양한 범죄를 저지른 여성들이 갇혀 있다. 셀리나도 그 중 한 명이다.
셀리나가 마거릿의 시선을 끈 것은 그녀가 가진 꽃 때문이었다. 감옥에서 도스라고 불렸던 그녀가 마거릿에게 셀리나로 불리기 원한다. 첫 방문은 일반적인 감옥의 분위기 파악이었다면 횟수가 늘어나면서 여죄수들과 그곳의 삶이 눈에 들어온다. 가장 그녀의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도스다. 도스는 영매였지만 사고로 그녀와 함께 살던 여인이 죽으면서 사기 등의 혐의로 갇혔다. 셀리나의 일기는 그녀가 어떻게 영매로 살게 되었는지, 그 생활들이 어떤 것인지 하나씩 적어낸다. 이 일기의 분량은 마거릿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마거릿의 일기가 너무 사실적이고 적나라하다고 해야겠다. 그녀의 열망과 비밀들이 그대로 적혀있다.
빅토리아 시대를 다룬 소설을 읽다 보면 여성들의 삶은 굉장히 정적이다. 이 소설에도 나오지만 그녀가 결혼하면 그 재산은 남편에게 귀속된다. 여성의 사회 활동에 제약이 많다 보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다. 아버지와 함께 연구하던 것도 그녀 혼자서 할 수 없다. 그녀가 아버지와 함께 이탈리아 여행을 가려고 짠 세부적인 계획도 아버지의 죽음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이 아쉬움을 동생의 신혼여행 일정에 잠깐 털어놓는다. 그녀의 자살시도와 실패는 그녀의 일상을 더욱 옥죈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는 그녀에게 어머니는 수면제를 먹인다. 남동생과 결혼한 헬렌은 볼때마다 고통이다. 헬렌을 보면서 전작의 키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전작이 엄청나게 노골적인 장면들로 가득하다면 이 소설은 그런 것이 없다. 영매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초현실적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혹시’ 하는 가능성을 떠올리지만 너무 뻔한 트릭이다. 물론 이 트릭이 가능한 것은 작가가 마지막에 말한 하나의 사실 덕분이다. 내가 서술 트릭이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 부분 때문이다. 어둡고 답답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따라가다 보면 마거릿의 심리에 공감하게 된다. 다른 가능성도 계속 머릿속에 담고 있고, 파국을 예상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거짓을 간파하지 못하면서 너무 쉽게 속았다. 거짓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진실을 알게 하는 것은 마지막 문장이다. 이제 3부작 중 가장 번역 출간되었고, 영화로도 만들어진 <핑거스미스>만 남았다. 두께를 보니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좀 한가해지면 3부작을 마쳐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