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한성례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12월
평점 :
절판


정말 오랜만에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을 읽었다. 몇 년 전 에세이 한 편을 읽은 기억은 분명하게 나는데 소설은 기억이 가물가물한다. 인터넷 서점 목록만 놓고 보면 읽었다는 확신을 가질 만한 소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사 놓고 오랫동안 묵혀 두고 있는 소설만 눈에 들어올 뿐이다. 늘 이 책들을 보면서 언젠가는 읽어야지 생각했는데 다른 책들처럼 기약할 수 없다. 사실 이번 소설도 이벤트에 당첨되지 않았다면 읽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이벤트에 신청한 것이 오래전 읽은 에세이의 영향과 늘 보던 다른 책들 때문이지만 말이다. 최근 책읽기가 조금 더딘데 이 책은 용감하게 신청했다. 결과만 먼저 말하면 성공적인 선택이다.


두 편의 중편 소설이 실려 있다. 표제작인 <달에 울다>와 <조롱을 높이 매달고>다. 이 두 편의 소설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달에 울다>는 한 편의 산문시를 읽는 느낌을 받았는데 알고 보니 시소설이라고 분류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시어처럼 풀어낸 문장과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각 10년의 세월과 병풍 속 법사의 이미지가 겹쳐지고 엮이면서 이미지를 하나씩 만들어낸다. 10대, 20대, 30대, 40대의 화자는 사과 농사를 짓고, 야에코란 여성을 그리워한다. 10년 주기의 흐름 속에 급속하게 변하는 세상이 녹아 있는데 몇 개의 상징적인 이야기로 잘 요약하고 표현했다. 작은 산골 마을의 권력과 도시로의 이탈이 나오는데 산업화의 과정 속에서 흔히 보여지는 풍경이다.


이 중편 소설 속에서 나의 시선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소재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사과나무고, 다른 하나는 생선 껍질 옷이다. 야에코의 사과가 특별히 더 달고 맛있다고 할 때, 그 사과나무 숲에 그녀의 아버지가 묻혀 있다고 할 때, 그 죽음이 어떤 연유를 가지고 있는지 과거의 사건을 돌아볼 때, 과거의 사건 때문에 화자와 야에코가 맺어질 수 없다고 할 때 그의 삶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멈추어 있다. 다른 사람들처럼 도시로 나갈 수 있겠지만 그는 사과 농사에 집중할 뿐이다. 그것도 홀로. 그리고 생선 껍질 옷은 그의 아버지가 2차 대전 당시 중국에서 가져온 옷이다. 이 옷에 어떤 역사적 비극이 담겨 있을지 모르지만 그가 이 옷을 입고 나타났을 때 보여준 부모의 반응은 결코 유쾌한 기억은 아님이 분명하다. 야에코 아버지를 잡으러 갔을 때 입었던 기억도 한몫한다.


<조롱을 높이 매달고>는 읽으면서 영화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정신 이상 진단을 받고, 집을 나와 고향인 M마을로 돌아온 그의 일상과 심리 묘사를 황폐화된 마을 풍경 속에 풀어놓았다. 그가 피리새에 작은 집착을 보이고, 이 피리새 때문에 누구도 살 것 같지 않은 마을에 살고 있는 노인을 발견한다. 그 노인을 돌보는 빨간 하이힐의 여성은 또 어떤가. 그 여성이 매춘으로 노인의 생계를 돌보는데 그 사실을 알고 그녀를 뒤좇다가 발견한 먹먹한 울음은 삶의 저 밑바닥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것은 그가 집을 떠나기 전 전반기 40년과 M마을로 돌아와 보낼 후반기를 생각하면 그녀의 삶은 전반기에 해당할 것 같다. 끊어내지 못한 관계가 만들어내는 삶의 무게는 홀로 떨어져 나와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화자에 비교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3명의 기마무사 환영은 주인공이 자신의 환상과 대화하는 부분과 겹쳐진다. 현실과 환상을 오가고,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는 묘사 속에서 이 환상은 그가 온전한 상태가 아님을 보여준다. 황량할 것만 같은 M마을이 생각보다 많은 생명들이 살아 있음을 바다가 보여준다. 과거와의 단절을 바라며 찾아온 마을이 그가 어린 시절 한 순간을 보낸 곳이란 점도 의미심장하다. 어쩌면 이 곳은 생을 시작한 곳이기에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시발점으로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매춘하는 딸에게 기생하는 노인이 화자에게 “자넨 마음이 가난하고 비열해!”라고 말했을 때 분노했지만 이 문장은 그 노인이라고 별다를 것이 없다. 어쩌면 노인이 자신에게 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이야기의 줄거리만 따라간다면 이 두 편의 소설은 크게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간결한 문장과 시어 같은 문장들이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독자로 하여금 그 이미지를 이어가게 하면서 그 속에 머물고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 이미지들 몇 개가 지금도 머릿속을 휘저어 놓는다.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아마 만들면 흥행은 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그 이미지를 영상으로 옮기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했을 뿐이다, 이런 경험은 흔한 일이 아니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에 좀 더 관심을 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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