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없는 세계
미우라 시온 지음, 서혜영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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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삭막한 내용을 담고 있을 것 같지만 이 소설은 사랑으로 가득하다. 사람보다 식물을 더 사랑하는 여자와 그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이야기다. 사랑 이야기라고 해서 알콩달콩하거나 밀당을 담고 있지 않다. 대학 식물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연구를 이야기의 주변에 풀어놓고, 그들의 일상을 더 많이 보여준다. 읽다 보면 학창 시절 과학시간에 배웠던 것 일부를 떠올리게 되고, 자신이 좋아하는 연구에 빠진 사람들의 열정을 잔잔하게 들여다보게 된다. 평범한 일상과 우리 주변의 모습을 큰 자극 없이 보여주는데 이것이 상당히 재밌다.

 

요리를 수업 중인 후지마루는 작지만 정겨운 양식당 엔푸쿠테이의 음식에 반했다. 처음엔 사람 필요 없다고 해서 채용되지 않고, 시간이 흐른 다음에는 보자마자 채용되었다. 이유라면 주인이자 요리사인 쓰부라야가 연애를 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해야 할까. 동경대로 추정되는 T대학 근처에서 동네 장사하는 식당이다. 점심시간이면 작은 줄을 서는데 홍보를 더하면 긴 줄도 가능하다. 하지만 쓰부라야는 그럴 마음이 없다. 그리고 이 식당은 양식당이라고 하지만 일식도 같이 한다. 밤이 되면 동네 손님들이 오거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 식사한다. 이들이 바로 마쓰다 연구실의 연구원들이다.

 

갑자기 쓰부라야가 비교적 한가한 시간에 배달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이 시간은 지켜지지 않는다. 마쓰다 연구실에 점심 배달 간 후지마루는 몇 번 배달하면서 연구원 모토무라에게 반한다. 고백한다. 며칠 뒤 돌아온 대답은 사랑 없는 세계인 식물 연구에 모든 것을 바쳤다고 한다. 차였다. 흔히 예상하는 다음 이야기는 후지마루의 연애 쟁취 분투기일 테지만 이야기의 중심이 바뀐다. 후지마루가 아니라 모토무라다. 요리사와 식물학자의 연애 이야기로 흘러갈 것 같은 분위기가 식물학 연구소로 일상이 바뀐다. 이때부터 후지마루는 조연처럼 잠시 등장하다 사라진다. 모토무라의 연구와 연구소가 전면에 나선다.

 

처음 주연이 바뀐 것을 보고 다음 이야기에서는 후지마루가 등장하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식물 연구에 모든 것을 바친 개성 강한 연구원들과 그들의 이야기가 하나씩 흘러나온다. 선인장에 빠진 사토나 고구마 등을 연구하는 교수 등이 나오면서 우리가 그냥 무심하게 보고 지나간 것들을 열정적으로 연구하는 과학자들을 만나게 된다. 이 순수한 열정은 그 자체로 빛을 발한다. 아마도 이것이 큰 이벤트 없이도 강한 몰입도를 유지하게 만든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기에 후지마루의 요리에 대한 열정과 식물 연구를 대하는 모습 등이 엮이면서 작은 재미들을 준다.

 

읽다 보면 모토무라의 후지마루에 대한 감정의 변화가 조금씩 드러난다. 하지만 그 변화는 너무 적고, 순식간에 사라진다. 작가는 이것을 바로 표현한다. ‘그래도’라는 기대를 품고 읽게 되는데 이 연애사에 작가는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식물의 세계와 그 연구원들 이야기가 더 많다. 그래서 조금씩 나오는 둘의 만남과 후지마루의 감정 표현에 더 눈길이 간다. 후지마루도 모토무라도 순수한 사람들이다. 자신의 분야에 열정적이다. 흔한 연애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 이 소설에서는 없다. 사랑을 시작하면서 발산하는 에너지는 없지만 사랑으로 연결된 세계에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랑 없는 세계는 역설적 표현이다. 괜히 ‘혹시’란 단어를 이용해 다음 이야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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