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영국 문학의 제왕 줄리언 반스가 쓴 단 하나의 연애소설.’ 이 얼마나 멋진 광고인가. 반스의 소설을 읽는데 늘 힘겨워하는 나도 이 문구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 반스는 개인적으로 잘 읽히는 작가가 아니지만 나오면 늘 관심을 두고, 여력이 되면 구입하는 작가들 중 한 명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재밌고 잘 읽히지만 왠지 쉽게 손이 나가지 않는 작가 말이다. 이런 반스의 신작에 눈빛이 반짝인 것은 당연히 연애소설이란 단어 때문이었다. 그리고 첫 문장의 강렬함도 한몫 했다. 그 중심에는 쉼표가 있었다.

 

문장에서 늘 그 중요성에 비해 홀대받는다고 말하는 것이 쉼표다. 나 자신도 문장을 쓸 때 쉼표를 잘 이용하지 않는다. 쉼표가 만들어내는 호흡을 잘 다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이 쉼표들은 아주 멋진 역할을 한다. 쉼표는 잠시만 한눈을 팔면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다른 문장으로 이해된다. 쉼표 원래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그 짧은 멈춤이 앞의 문장을 빠르게 복기하게 만들고, 강조하고, 뒤에 어떤 말이 나올지 궁금하게 만든다. 그 용도를 알지만 잘 사용하지 않고, 잊고 있던 쉼표가 소설 내용보다 먼저 눈에 들어왔다.

 

19세 청년과 48세 부인의 연애는 어떤 모습일까? 이 소설 속에서도 말했듯이 능숙한 부인이 초보를 잘 인도하는 모습일까? 쉽게 생각할 때, 다른 영화 속 장면들을 생각할 때 우리가 기대하는 모습들이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수전은 그렇게 능숙하지 않다. 남편으로부터 차갑다는 말을 듣는다. 두 서툰 남녀의 사랑은 우리가 예상을 뒤엎는 장면들로 가득하다. 혹시 뭔가 농밀하고 에로틱한 장면을 기대했다면 책을 덮는 것이 좋다. 실제로 자극적인 묘사가 나오지 않는다. 원 제목처럼 하나의 이야기(The only story)만 다룰 뿐이다. 거기에 열아홉 살 소년 폴과 마흔여덟 살 수전이 있었다.

 

십대를 돌아보면 세상을 냉소적으로 쳐다보고 비아냥거리기 바빴다. 아직 섹스혁명이 일어나기 전 영국 한 시골 마을에서 열아홉 살 대학생이 어른들의 사교모임인 테니스클럽에 가입했을 때 느낀 것도 이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혼합 복식으로 경기를 할 때 보여준 몇 가지 예의는 십대에게 답답할 뿐이다. 그러다 만난 수전은 자기와 키가 똑같고, 마음이 조금 통했다. 아마 처음부터 이 둘이 사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작은 마을에 작은 소문거리를 만들어내는 것 정도를 생각했는데 감정과 상황이 이 둘을 하나로 묶었다. 사랑에 서툰 두 남녀로 말이다. 재밌는 것은 수전이 둘의 관계 횟수를 세고 있었다는 것이다. 왜일까?

 

기억은 늘 혼란스럽게 찾아온다. 시간은 과거의 기억 속에서 순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상황과 장면들이 나오고, 그보다 앞에 있었던 일들도 나온다. 이런 기억들 속에 둘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빠진다. 대학생이었던 폴은 학교로 가서 수업을 받아야 하는 순간도 있었다. 밀회를 위해 짧은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남편을 속이고, 부모를 속이는 이런 행동이 지속될수록 알려질 확률이 높아진다. 결국 둘은 테니스클럽에서 제명당한다. 이 소문이 마을을 흔들고 다녀야 하지만 조용히 처리된다. 이때 이 둘은 헤어질 수도 있었다. 수전이 남편에게 맞는다는 사실을 몰랐고, 아직 사랑이란 것에 집착하는 십대가 아니었다면.

 

둘이 런던에 집을 구해 같이 살게 되었을 때는 그 사랑의 열정이 빠르게 식는 중이었다. 이제 이십대가 된 청년과 중년 부인의 관계는 누가 봐도 이상하다. 폴도 그녀의 대자라고 말한다. 실제 관계가 불러올 오해와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 바탕에는 현실의 무거움이 자리잡고 있다. 수전의 남편 고든이 술을 많이 마셨는데 어느 순간 수전도 술을 많이 마신다. 이 문제도 그들을 파국으로 이끈다. 폴이 주장한대로 둘이 결혼했다면 더 오랫동안 관계가 유지되었을까? 둘의 나이 차이와 다른 상황은 또 다른 문제를 불러왔을 것이다. 폴이 말하는 하나의 가정처럼 그녀가 능숙했고, 사랑 기술을 발전시킨 그가 떠났다면 한 편의 영화 같았을지 모른다.

 

역자의 글을 읽기 전에 생각하지 못한 것 하나가 있다. 수전의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둘이란 의미다. 홀로 몰래 한 사랑이 아니라면. 폴의 기억 속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는 그의 이야기다. 그의 감정이고, 사랑이고, 추억이다. 이것은 우리가 누군가를 추억할 때, 지나간 사랑을 되짚어볼 때 늘 있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다. 영화처럼 그의 말 한 마디에 수전이 보인 반응은 없고 현실적인 짧은 고민만 있을 뿐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기억 속 사랑은 있었던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윤색된다. 작가도 몇 번 이렇게 말했지 않은가. 이번 소설로 반스에게 한 발짝 다가간 것 같다. 나만의 착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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