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평선
사쿠라기 시노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이 책 이전에 읽은 작가의 소설은 <유리 갈대>가 전부다. 검색하니 익숙한 표지가 몇 권 더 보인다. 아직 이 작가는 나에게 낯설다. 이번 단편집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읽으면서 낯익은 모습들을 만나게 된다. 비슷한 환경과 문화에서 비롯한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일본 소설을 읽으면서 고부간의 갈등을 다룬 작품은 거의 보지 못했다. 농촌이란 지역 특색이 나올 때 한국의 농촌과 이미지가 겹쳐지고, 몇 장면은 앞으로 한국에서 일어날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쩌면 내 생각보다 더 많이 진행되었을 수도 있다.

 

여섯 편의 단편들은 모두 홋카이도를 배경으로 한다. 그렇다고 한 마을에서 일어난 일은 아니다. 홋카이도 하면 가장 먼저 삿포로를 떠올리는데 홋카이도는 생각보다 넓다. 한반도의 삼분의 일 크기다. 왜 홋카이도의 크기를 말하느냐면 소설 속 주인공들이 사는 공간이 일반적인 우리의 인식보다 먼 곳이기 때문이다. 첫 작품 <설충>의 다쓰로가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간 곳이 삿포로다. 최근에 한국은 거의 수도권으로 인구가 집중되고 있지만 불과 수십 년 전에는 각 지역의 대도시로 인구가 몰렸다. 이 기억을 공유한다면 작품 속의 몇 가지 상황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또 다쓰로의 아버지가 필리핀 여자를 며느리로 데리고 온 것도 우리에겐 낯익다. 농촌 총각이 동남아 등지에서 여자를 사오는 것이 요즘은 흔하니까.

 

 

관능소설가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에로틱한 장면이 가득하지는 않다. 몸과 섹스에 대한 묘사가 있지만 그것은 관계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의도가 전혀 없지는 않다. <설충>에서 다쓰로와 시키코의 섹스는 익숙한 행위의 연속으로 다가온다. 감정의 밀도는 없고 행위만 있다. 하지만 이 행위의 이면에는 감정이 숨겨져 있다. 일상에 변화가 생길 때 이것이 드러난다. 그것은 돈을 주고 산 아내 마리의 존재다. <안개 고치>는 기모노 침선장 이야기다. 결혼 2년 만에 이혼한 마키와 그녀 밑에서 수련하는 야요이의 과거를 작가는 담담하고 건조하게 보여준다. 상황은 분명히 분노를 자아내는데 설명은 감정이 많이 배제되어 있다. 소재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재밌다.

 

<여름의 능선>은 결혼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착한 할머니는 시어머니가 되고, 온후한 남편은 착한 아들로 변해버렸다.” 이 문장은 결혼이란 제도가 만들어낸 현실이다. 아들 손자를 원하는 시어머니와 삶에 지친 아내, 시골에 온 젊은 선생, 작은 마을에서 도는 소문 등은 개인의 삶이 사라진 공간이 얼마나 힘겨운지 보여준다. <바다로 들어가다>는 유일하게 1974년 과거의 시점을 다룬다. 젊은 이발사와 그를 찾아온 술집 여자의 관계는 서서히 진행되면서도 은밀하다. 감정은 평온한 일상 속에서 조용히 소용돌이 친다. 이 이발사의 이후 삶은 어떤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물의 관>은 정체된 관계와 그 밑에 가려진 감정과 사실들이 치과 치료 등의 문제와 연결되면서 펼쳐진다. 작은 지방 마을의 의료기관이 부족해 의사를 공고해서 찾아야 하는 현실과 지금의 정체된 관계를 벗어나려는 충동이 엮이면 상황은 급진전된다. 소소하지만 재밌는 장면이 많다. 료코가 연상의 세이치로를 맡는 것은 사랑일까? 아니면 연민이나 집착일까? 표제작 <빙평선>은 이 작품집에서 가장 관능적이다. 성공이 보장된 도쿄대 출신 재무성 관료가 과거의 여자이자 몸 파는 여자에게 매몰되는 모습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직 젊기 때문일까? 아니면 과거의 집착일까?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한 중간 단계에 놓인 그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아버지다. 그런데 이 부모가 죽는다. 가장 먼저 의심하는 인물이 있는데 이 또한 반전으로 이어진다. 마지막 장면은 그 상황보다 그 다음에 벌어질 상황에 더 눈길이 간다. 장편과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는데 다른 소설은 어떤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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