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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 - 역사적 자료에 기초한 초대교회 모습 1세기 기독교 시리즈 1
로버트 뱅크스 지음, 신현기 옮김 / IVP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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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역사적 자료에 기초하여 초대교회의 모습을 저술했습니다.70쪽이 살짝 넘는 분량입니다. 푸블리우스라는 주인공을 만들었고, 이 사람이 어느 가정에 초대받아 가는 상황입니다.

 

오후 3시 자기의 집을 나섰다가 한 밤중이 되어서야 돌아가는 내용입니다.

가정으로 인도되어 인사를 합니다. 손님으로 식사를 합니다. 이야기를 주고받고 여러 광경을 목격합니다. 기도를 하며 짧은 찬양을 하는 모습, 서로를 돌보겠다는 서약, 아이들이 소외되지 않고 자유로이 참여하는 현장을 봅니다.

 

저자는 푸블리우스의 시각을 통해 초대교회의 모임이 당시대 사람들이 볼 때에는 무엇인가 부족한 점이 있을 수 있음을 언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블리우스는 다시 한 번 지난 번 모임에 초대 받는다면, 다시 초대에 응할 것이라고 답합니다. 저자인 로버트 뱅크스는 푸블리우스의 마음을 통해 지금 우리의 교회는 어떤지 들여다보게 합니다.

 

지금 현재, 푸블리우스가 우리의 예배에 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에게 다시 한 번 우리 예배 모임을 청한다면 그는 우리와 함께할 수 있을까요?

 

아래에 공감이 되는 부분을 발췌했습니다. 나름 밑줄긋기라고 해야 할까요? 괄호 안은 쪽수입니다.

 

삶의 질에서 비롯되었다(8).

 

지난 2천 년 동안 우리는 결정적인 무언가를 잃어버렸다(11).

 

초기 그리스도인의 예배와 우리의 예배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 단순한 성경 주해나 강해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의사소통 방식에서 예수님이 실천하신 스토리텔링을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13).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글레멘드와 유오디아의 관점에 맞지 않았다. 그들에게 서광이 비친 것은 아굴라와 브리스가가 재등장했을 때였다. 이미 고린도와 에베소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둘은 자기들 집에서 정기 모임을 시작했다(22).

 

집에서 들어오면서 시작된 예배

이제 예배가 시작되는 건가?” 글레멘드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면서 입가에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집으로 들어오면서 실제로 예배는 시작되었지.”(29)

 

신분상 앉아야 할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었다. 좋은 자리에 높은 사람을 앉히지 않았다. 그런데 모인 사람 모두가 자리에 개의치 않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볼 수 있게 앉았다(31).

 

공동체 온 것을 환영하며 앞으로도 계속 돌보겠다는 서약을 하는 모습(61).

 

만찬에 초대받아 특이한 경험을 한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아미키우스 루푸스. 푸불리우스는 오후 3시에 집을 나섰다가 한 밤 중에 집으로 돌아갔다. 푸블리우스는 아래와 같은 소감을 남겼다. “내 예상과는 아주 달랐지만, 대체로 그날 저녁이 즐거웠다. 사람들 자체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들이 어떤 예절을 무시할지, 어떤 신조를 고수할지, 광신에 빠져 있지는 않을지 걱정이 많았었다. 그러나 만찬 중은 물론 만찬 후에 이루어지는 그들의 대회에는 이상하게도 그 자체로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모임은 종교적 관점에서는 부적합한 부분이 꽤 많았고, 그들의 어떤 행동은 아주 이색적이어서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초청을 받아들여 다음 주 모임에 갈지는 아직 모르겠다. 뭐라 말하기 힘들다. 확신이 없다. 하지만 어쩐지 응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73)

 

역자 후기

이 책은 얼마 안 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담아야 할 매우 다양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중과 주인, 여자와 남자, 가난한 자와 부자, 아이와 어른과 노인, 가족과 독신, 해방과 자유, 세상과 교회, 직업 소명과 신분, 성만찬과 세례, 논쟁과 조정, 상황과 말씀, 식사와 성찬, 일상과 초월, 공간과 시간, 의외성과 규칙성, 참여와 권위, 본질과 형식, 치료와 치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덩치만 크지 단조롭기 그지없는 오늘날의 어떤 대형교회보다도 열아홉 명으로 이루어진 이 작은 공동체에서 우리가 오랫동안 잃어버린 교회의 본질과 다양하고 풍성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교회를 믿는다. 교회는 나가거나 안 나가는 곳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교회고, 교회는 매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생명체이다. 푸블리우스와 함께 2천 년 전 로마에서 모였던 원초적 교회의 방문자가 되어 오늘의 교회를 위한 상상력과 확신을 길어 올리기를 바란다.(75)

 

이상 앞 단락의 저의 밑줄긋기는 역자후기까지 발췌할 정도입니다. 책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제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저자가 그려내는 초대교회 예배의 모습을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

 

저에게는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습니다. 예배를 인도할 때의 아쉬움이었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며 설교단에 서 있는 목사 뒤에 앉아 회중석을 바라보았습니다. 회중들이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그들의 초점이 어디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앉아 있는 자리 위의 스크린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들의 앞에 있는 설교자를 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회중석에 앉아 계신 성도 한 분 한 분을 집중하며 바라봅니다. 그들의 눈은 어디를 보고 있는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자리에 앉아 성경책을 읽는 것인지?, 설교자에 집중하며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스크린으로 크게 보이는 화면에 나타난 설교자를 응시하고 있는 것인지? 회중석에서 성도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요? 저의 이런 생각과 감정은 무엇일까? 저도 회중석의 성도들과 똑같은 자리에 앉았습니다. 설교와 예배 인도 순서가 없을 때, 성도들과 동일하게 동료 목사가 설교하는 것을 바라보고 듣습니다. 함께 자리에 앉아 집중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긴 장의자. 앞줄과 옆줄에 앉아 있는 모르는 얼굴들. 시종일관 좌우를 바라보지 않고 앉아 있다가 일어나는 성도들. 예배당을 빠져 나가는 순간조차 배웅하는 목회자들의 악수가 부담스러운지 다른 출구로 서둘러 나가는 성도들. 그들은 예배 시간 시종일간 앞을 정확한 방향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부담스러운 좌우앞뒤가 아닌 앞을 바라보았지요. 저도 뒷자리에 앉아 앞에 서 있는 설교자를 바라봅니다. 성도들과 동일한 바라봄으로 살펴보게 되니 저의 시선도 앞자리에 앉아 있는 성도의 뒷머리를 바라보게 되더군요. 그렇습니다. 자칫 시선을 잃어버리면, 초점을 갖지 않으면, 앞에 앉아 계신 성도의 뒷모습만 그의 뒷머리만 바라보게 되더라는 겁니다.

 

저는 고민했습니다. 함께 얼굴을 바라보며 예배를 드릴 수는 없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서로를 바라보며 예배하는 교회가 되어야 함을. 서로 바라보고 예배드리는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렇게 고민하고 생각하다보니 그 시작은 바로 가정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가정이 살아나야 했습니다. 가정교회. 가장 이상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초대교회 때의 모습으로만 돌아가면 진정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니기에 역시 해결을 위해서는 가정교회로의 관심 갖게 되었습니다.

 

내가 살고 속한 가정에서 교회가 시작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현재 드리는 예배는 무언가 잘못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 속에서 맴돌 뿐 어떠한 해결안도 제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가정교회가 견고하게 시작되고 지역교회로 자라나고 성장하며 건강한 연합교회 될 때, 흩어지고 모이고, 모이고 흩어지게 될 때 어느 정도 교회 본연의 모습을 갖도록 가정교회가 교회의 자생적인 힘을 주지 않겠습니까!

 

푸블리우스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다시 가고 싶은 그런 교회를 꿈꾸며, 시작은 가정에서부터임을 깊이 새겨봅니다.

 

일전에 전화가 왔었습니다. 한두 달 전에 전화가 왔습니다. “평화와 화해를 이루는 교회지요?” “, 맞습니다.”길고 긴 통화가 이어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 참 진행된 통화 후에 상대방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군요. 제가 등록을 하는 것은 아니고 한 번 찾아는 가보겠습니다.”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어려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가는 것, 그 이전에 내가 교회라는 것을 진짜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임이 교회라는 것을 확인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교회라는 것을 확인한 후 우리 모두가 서로를 돌보는 가족임을 고백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교회면 좋겠습니다.

 

 

삶의 질에서 비롯되었다 - P8

지난 2천 년 동안 우리는 결정적인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 P11

초기 그리스도인의 예배와 우리의 예배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 단순한 성경 주해나 강해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의사소통 방식에서 예수님이 실천하신 스토리텔링을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 P13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글레멘드와 유오디아의 관점에 맞지 않았다. 그들에게 서광이 비친 것은 아굴라와 브리스가가 재등장했을 때였다. 이미 고린도와 에베소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둘은 자기들 집에서 정기 모임을 시작했다 - P22

"이제 예배가 시작되는 건가?" 글레멘드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면서 입가에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집으로 들어오면서 실제로 예배는 시작되었지." - P29

신분상 앉아야 할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었다. 좋은 자리에 높은 사람을 앉히지 않았다. 그런데 모인 사람 모두가 자리에 개의치 않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볼 수 있게 앉았다 - P31

공동체 온 것을 환영하며 앞으로도 계속 돌보겠다는 서약을 하는 모습 - P61

만찬에 초대받아 특이한 경험을 한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아미키우스 루푸스. 푸불리우스는 오후 3시에 집을 나섰다가 한 밤 중에 집으로 돌아갔다. 푸블리우스는 아래와 같은 소감을 남겼다. "내 예상과는 아주 달랐지만, 대체로 그날 저녁이 즐거웠다. 사람들 자체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들이 어떤 예절을 무시할지, 어떤 신조를 고수할지, 광신에 빠져 있지는 않을지 걱정이 많았었다. 그러나 만찬 중은 물론 만찬 후에 이루어지는 그들의 대회에는 이상하게도 그 자체로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모임은 종교적 관점에서는 부적합한 부분이 꽤 많았고, 그들의 어떤 행동은 아주 이색적이어서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초청을 받아들여 다음 주 모임에 갈지는 아직 모르겠다. 뭐라 말하기 힘들다. 확신이 없다. 하지만 어쩐지 응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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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마로 카르마를 구원하자!

리더가 스스로 고통을 짊어지려 하지 않으면 따르는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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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워크의 배신
토마스 바셰크 지음, 장혜경 옮김 / 모멘텀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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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래 전에 읽고 이제야 글을 남긴다. 제목 팀워크의 배신.

그런데 제목 위에 날린 글이 이목을 끌었다.
"몰리다니면서 성공한 사람은 없다."

몰려다니면서 성공한 사람은 없다란 표지의 짧은 글.
맞는 말이기는 하다.
하지만 몰려다니면 왜 안 된다는 말인가?

책을 읽어 나갔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한국적인 상황에서 무조건 공동체와 조직에 순응하라는 것.
그것에 대항하라는 말이었다.

몰려다닌다는 것은 공동체와 조직의 뜻과 분위기가 중요하기에
그것을 따르라는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극구 그 명제에 반대한다.
몰려다니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을 성공과 결부시키며 여러 사례들을 꺼낸다.

이를테면 이런 말이다.
역사 속에서 성공한 사람은
타인과 함께 몰려다니거나 끌려다닌 게 아니라
독창적인 사고와 행동을 삶 속에서 이끌어 내었고,
그러한 과정에서는 갈등과 충돌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과 충돌을 피하지 말라는 것.
그것이 이 책의 요지.

나는 공동체도 중요하다고 본다.
개인의 창의성과 독창성으로 인해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도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소수라 할지라도 갈등과 충돌을 통해서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면 그것도 좋겠지만,
차라리 충돌로 인해 공동체의 아픔이 수반된다면
오히려 천천히 움직이며 나가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가난하게 살면 어떤가?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더 좋을진대...
물론 저자의 초점은 화목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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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전쟁 - 세상과 기독교의 문화 충돌 현장
칩 잉그램 지음, 황을호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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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의 제목을 은혜와 진리를 함께 안고 가는 것으로 잡았다. 이 제목은 14쪽에서 인용한 것이다. ‘은혜와 진리를 함께 안고 가는 것이란 말 속에 빨려 들어갔다. 이 시대는 사분오열되어 있어 각 영역에서 은혜가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우리는 혼란 속에 방치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어떤 누구에게도 선함과 선대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칩 잉그램은 거대 담론을 말하기에 앞서 이렇게 말했다. “함께 안고 가는 것이라고.

그렇다. 이제 함께 안고 갔으면 좋겠다. 은혜와 진리를. 특별계시와 일반 계시를. 성경과 상황을.

 

원서 제목은 CULTURE SHOCK. 우리말로는 문화전쟁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우리에게는 충격이란 의미의 “SHOCK”보다 전쟁이란 제목이 뇌리에 제대로 잘 꽂히는 것 같다. 문화전쟁. 그만큼 우리는 이 세대를 싸움터로 보고 있는 듯하다. 궁금하기도 한 것은 이 책을 쓴 저자가 살고 있는 미국사회야말로 전쟁이라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저자는 문화충격이란 말보다 문화전쟁이라고 제목을 달았어야 하지 않을까? 이 제목도 저자의 생각과 마음, 은혜와 진리를 함께 안고 가는 것속에 녹아 있는 건 아닐까? ? 세상과 함께 가야 하니까. 한마디로 쉽게 선포하는 기독교의 진리 주장(그런데 진심 기독교는 쉽게 선포하지 않는다. 성경을 해석하고 그에 따라 실천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세상의 믿지 않는 분들이여 이럴 때 여러분들이 말하는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라는 말을 함께 적용시켜 보자)을 독선적이고 독단적이라고 생각할 것이 분명하기에.

 

여기까지는 순전히 내 개인적인 궁금함과 나름 생각을 담았고, 이제는 문화전쟁의 대략적인 내용을 나눈다.

 

대략적인 소개이지만 이 책을 읽기 위해 구입하고 싶은 분들에게는 요약본 정도는 아니지만 서평을 쓰기 위해 밑줄 그은 내용들을 첨부합니다...

 

문화전쟁은 성, 동성애, 낙태, 환경, 정치의 5가지 영역에 대해 성경의 관점이 무엇이며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에 대해 다룬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1장과 2장에서 왜 우리는 방향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는지, 왜 우리는 절대적 진리를 떠나게 되었는지 짧은 분량 속에 세계사의 정신사적 철학사적 흐름을 단숨에 간결하게 정리해 준다. 압권이다. 그렇게 어려운 내용들을 이리 쉽고 간결하게 정리할 수 있다는 데에 놀랐다.

 

1장의 시작 부분에 저자는 미국이란 국가에는 보편적인 합의가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17쪽이다. “도덕적 행위와 윤리에 대한 미국의 기준은 많은 부분이 십계명, 그리스도의 가르침,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나왔다. 정치적 성향이나 인종, 사회경제적 지위를 막론하고 사회에는 인간 생명의 소중함, 충성, 존중, 신의, 가족과 결혼에의 헌신, 책임, 친절, 관대함, 용서, 사랑 드으이 핵심 가치와 절대 윤리에 대한 보편적인 합의가 있었다.” 문제의 핵심은 옳고 그름의 기준이 사라졌다는 것이 1장의 중심 내용이다.

 

2장에서는 옳고 그름의 절대적 진리와 기준이 사라진데 대하여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찾아 역사 이야기로 들어간다. 중세시대와 르네상스 시대, 종교개혁 시대 계몽시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미국의 실용주의와 더 나아가 상황윤리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급기야는 상대적 진리를 대세가 굳혀지는 일련의 과정들을 겁나게 쉽고 간결하게 이해하기 쉽게 머리에 쏙 들어가게 정리해 준다. 여기서 저자를 통해 지적 도움과 유익을 받는데, 다윈의 진화론의 영향, 존 듀이의 실용주의 여파.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상대적 이론이 그 내용과는 전혀 다른 상대적 진리를 인정하게 만든 것. 상황윤리 속에서 진리가 상황에 따라 바뀌는데 따른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대중 심리와 대중 매체의 힘이란 것이다.

 

3장에서는 본격적으로 문화전쟁의 주제를 다루는데 첫 주제는 성이다. 하나님은 섹스를 반대하시는가이다. 다들 짐작하시겠지만 하나님은 섹스를 반대하지 않으신다. 82쪽의 내용을 아래에 인용한다. “당신은 중요하다! 섹스는 신성하다! 최선이 아닌 것에 만족하지 말라하나님은 섹스를 찬성하시며 혼인 관계 내에서 최선을 다하라 말씀하신다. 더 궁금하시다면 내용을 책을 통해 더 살펴보시길. 여기에는 6가지 통념과 그에 반대되는 진실이 잘 소개되어 있다. 꼭 읽어보시길.

 

4장에서는 동성애와 관련하여 동성애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가?, 란 주제를 다룬다. 답부터 말하자면 동성애도 당연히 용서받는 죄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죄에 대해서는 다른 여느 죄와 같다는 것이다. 93성경은 동성애적 유혹에 빠지는 것이 이성애적 유혹에 빠지는 것보다 더 죄스럽다거나 덜 죄스럽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렇지만 성경은 동성애 행위를 금한다.” 115쪽에서도 이와 같이 동일하게 말한다. “간통을 최악의 죄로 강조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혼이라면 어떠할까? 아니면 우리 가운데 있는 우상숭배는 어떤가? 하나님은 일이나 돈, 자녀를 숭배하는 것도 우상숭배라고 말씀하신다. 탐식하는 사람과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은 어떠한가?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하나님이 동성애 행위를 정죄하신다는 수많은 증거를 무시할 수 없다. 그렇지만 비도덕적 이성애 행위를 포함한 많은 다른 죄악도 똑같이 정죄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역시 중요하다.”

 

참고로 동성애 관련하여 읽을거리들이 이 책에 많이 있다. 동성애 찬성자들의 연구보고서가 잘 못된 것임을 밝히는 글들이 있다. 동성애 자체 커뮤니티의 글들이 있다. 대중매체를 통해 미화되었지만 그 실체를 밝힌 내용이다. 거기에는 성생활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들이 있다. 아래는 그 내용들이 있는 어디에 있는지 밝혔다. 95쪽에 사이먼 르베이르의 연구, 96쪽의 노스웨스턴 대학교의 마이클 베일리 박사와 보스턴 대학교의 리처드 필라드 박사가 수행한 연구, 존스 홉킨스 대학, 앨버트 아인슈타인 의과 대학, 친동성애 과학자인 이블린 후커, 마스터와 존슨 연구팀의 연구, 101쪽의 <모던 패밀리> 드라마, 104쪽의 킨제이 보고서(킨제이 보고서는 사실상 문제가 많다) 등등.

 

저자가 인용한 여러 연구들을 위에서 밝혔다. 저자는 동성애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당부한다. “내가 보게는 점점 많은 기독교인이 직접 성경 말씀을 읽고 공부하기보다는 이 문제를 헷갈려하며 전문가들이 하는 이야기에 의존하고 있다.” 칩 잉그램은 제발 우리로 하여금 진리의 기준이 되는 말씀으로 돌아가 직접 연구하라고 한다.

 

4장에서 저자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교회의 역사를 통해 동성애 감정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 교회는 늘 판단에 강했다는 것이다. “사랑과 보살핌에는 약했다.”(122)는 문제의식에 큰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나 또한 이 부분에 대해서 스스로 성경과 이 문제를 대조해 가면서 연구해 본 적이 없으며 동성애 문제에 대해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동성애 부분은 이 책에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다루고 있으니 꼭 읽어보시길 권해 드린다.

 

5장은 낙태에 대해, 산모와 태아 누구의 권리가 우선인가, 란 제목을 다룬다. 낙태 찬성/선택권 우선 진영과 낙태반대/생명권 우선 진영 간의 공방이 담겨 있다. 어쨌든 결론은 이렇다. 낙태찬성/선택권 우선 진영도 낙태 반대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이유는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해서인데, 4D 초음파 기술 덕분으로 태아도 인간과 다름없는 존재라는 것이다(의학적 증거에 대해서는 144쪽을 참고하시길). 세포조직 덩어리에 불과하지 않다는 것.

 

낙태와 관련하여 여기도 읽을 내용이 많다. 139~140쪽에 역사적 증거(아리스토텔레스), 19세기 페미니스트, 144쪽의 의학적 증거와 관련된 부분을 읽어보셔도 좋겠다.

 

매 장마다 그렇지만 항상 실천의 장이 이 책에 놓여 있다. 158쪽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란 주제로 책임지고 한계를 정하는 삶을 살라는 내용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6장은 환경 문제를 다룬다. 제목은 이용할 것인가, 관리할 것인가?, 이다.

저자의 생각이 서두에 빨리 등장하는데 우리는 고래를 살려야 하는가? 당연하다. 그렇지만 일부 환경운동 커뮤니티가 당신의 개나 고양이 혹은 도마뱀이 당신처럼 살아 있는 종의 일부이므로 당신과 같은 (또는 더 많은)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고 선언한다면, 그것은 오류이다.”(175) 칩 잉그램은 어려운 말로 번역하기는 했지만 우리를 섭정하는 사람이 아닌 부섭정자로 불렀다.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말함으로써 환경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바로 잡았다. 우리는 부섭정자로 섭정자이신 하나님의 것을 맡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철저히 이용하여 환경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잘 관리해야 하는 책임이 주어진 것이다.

 

7장은 정치 문제로서 교회는 정치에 참여해야 하는가?, 란 주제이다. 분리주의자와 행동주의자를 주장 전제를 살펴본다. 참으로 간결하고 좋은 분류인거 같다. 그리고 성경의 절대 원칙이 무엇인지 저자는 성경 속에서 기준을 찾아낸다. 절대원칙으로 1. 두 나라(하나님 나라와 이 땅)가 대립관계에 있다. 2. 모든 신자는 이중국적자다. 3. 하나님은 악을 억제하기 위해 인간 정부를 임명하신다. 4. 하나님은 제자를 삼기 위해 교회를 임명하셨다. 글의 전개를 볼 때 저자는 정치와 교회의 문제를 분리주의자와 행동주의자로 보지는 않지만 분리주의자적인 경향이 있음을 간간히 확인한다. 그것은 저자에게 있어서 교회의 사명이 국가의 사명과 다르다는 확연한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교회는 교회되는 것이 중요함을 설파한다(206). 그래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교회가 하고, 신자로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개인이 해야지 교회보고 하라고 하지 말라는 의견을 피력한다. 지혜로운 대답이 아닐 수 없다.

 

이상으로 이 책의 전반을 간략하게나마 다루어 보았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부록이 있다. 동성애에 관한 질문과 답변인데 참으로 유용한 것이다. 실제적인 질문들과 사랑과 보살핌을 담아낸 답들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전반적으로 느낀 점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저자와 공감되는 부분이다. 저자도 프란시스 쉐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나 역시 방황하는 20대 대학 청년 시절에 프란시스 쉐퍼의 저서를 통해 방황과 혼란의 시대에 종지부를 고했다. 저자는 계속해서 공부하고 연구하여 쉐퍼의 뒤를 잇는 귀한 목회사역과 연구사역 가르침의 사역들을 감당했다. 세상을 향한 저자의 마음과 믿은 이들과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을 향한 마음의 울림이 공감이 되었다. 나도 또한 이러한 삶을 목회자로서 더욱 더 열심을 내어 살아가야겠구나 마음 먹게 되었다.

 

둘째, 매 장마다 칩 잉그램의 목회자이면서 진지하게 학문을 연구하는 자세가 도전이 되었다. 현실 문제와 상황에 대해 성경에서는 무엇을 진리로 말하는지, 그리고 그 진리가 성경에서 나와서 현실에서 다루어질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노심초사하며 현대 연구의 결과물, 대중매체의 결과물들을 깨어 살피며 진실과 거짓을 드러내는 그의 작업에 찬사를 보낸다. 그가 다룬 연구물들은 매장마다 있으니 참고하시길.

 

셋째, 저자의 솔직함이다. 저자는 처음부터 본인은 편견(bias)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한다. 근데 이 솔직함은 버릇없는 솔직함이 아니다. 우물에 독치는 그래서 할 말을 없게 만드는 솔직함이 아니다. 겸손함과 진실된 마음으로 사랑으로 보살피고 살피겠다는 낮은 마음의 자세인 솔직함이다. 우리 대부분의 믿는 이들은 이런 솔직함으로 주어진 문제 속에서 마주치는 자들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하지 않던가. 이런 솔직함을 갖고 저자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감정적 낮아짐의 허술함이 아닌 정확이 연구된 내용들을 하나하나 나누어 주는 것이다. 여기에 강함이 있지 않겠는가.

 

우리 믿는 자들이 겸손함과 낮은 마음으로 솔직함을 갖고 최고의 질서정연한 논리로 전쟁 시대에 살아남기를, 뿐만 아니라 곳곳에 사랑과 살핌의 아름다움을 실천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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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그 뜻밖의 모험 - 지루한 일상을 날려버릴 6주간의 영적훈련
리 스트로벨 외 지음, 홍병룡 옮김 / 포이에마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포이에마에서 나온 책 치고는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책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리뷰는 이제 쓴다.

 

우선 제목은 좋았다.

책 제목과 포이에마가 주는 이미지로 구입했건만.

내용에 있어서는 쉽게 공감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전혀 엉뚱한 얘기하고 있는 건 아니고.

 

왜 그럴까 생각해 보면.

문화적인 차이라고 할까.

그리고 더 나아가 한국의 독자들은 이미 이와 관련된 비슷한 내용들을 많이 듣거나 읽었겠다 싶다.

 

그렇다면 뭐.

독자들은 진짜 방법론을 원하고 찾는 거 아닐까?

이렇게 전도하니까 뜻밖이었다는.

그런 뜻밖의 놀라움을 이 책에서 찾지 않을까.

막상 찾아보았으나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아무쪼록

그래도 부록 비슷하게 이 책이 선사하는 내용이 있기는 한데

교육시 활용하면 좋을 것 같아

일부를 정리하여 소개한다. 밑줄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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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하나님과 가장 풍성한 관계를 누리는 그리스도인은 전도라는 뜻밖의 모험을 감행하는 사람이다. 그들의 하루는 평범하게 시작될지 모르지만, 누군가의 삶을 변화시키고 영원을 바꿔놓는 뜻깊은 만남으로 이어질 잠재력을 항상 갖고 있다.

 

1주 첫 번째 모험

 

행동 지침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 역시 자신의 신앙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이 뜻밖의 모험에 초대받은 사람이다. 우리가 구원 받은 이유 중 하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증언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구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그분의 메시지를 전하기 전에는 결코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누릴 수 없을 것이다.

 

모험에 뛰어 들기

 

그들은 좋은 사람이지만 위험이나 모험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설사 그런 생활을 한 적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아주 먼 과거의 일일 뿐이다.

 

당신이 속한 교회의 문화를 바꾸려면, 먼저 당신의 영혼에 하나님의 부흥이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가 창조한 사람들을 끔찍이 사랑하시고, 온 세상을 향한 당신의 구원 계획을 위해 우리 각 사람이 놀라운 방법으로 복음 전하는 것을 기뻐하시며,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길 기대하신다. 이 모험에 당신도 초대를 받았다.

 

기억할 말씀

 

여러분을 이끌어 이 영적 모험을 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이시며 우리 주님이신 예수의 생명을 우리와 함께 나누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점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고전 1:8~9, 메시지).

 

 

1주 두 번째 모험

 

행동 지침

 

답변이 곤란한 반론을 누군가가 제기할 때 혼자 냅다 지껄이거나 샐쭉해지거나 당황하거나 화를 내거나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설명을 꾸며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상대방에게 솔직히 모른다고 말한 뒤에 함께 답을 찾아보자고 권하는 것이 좋다.

 

모험에 뛰어들기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을 받을까봐 두려워서 신앙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모험에 뛰어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자칫하면 한 번의 대화로 끝날 수 있는 만남이 그가 답을 찾는 걸 돕기 위해 책과 인터넷 등 여러 자료를 활용하면서 계속 대화를 진행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식으로 반응해 보라. “, 그건 무척 까다로운 주제군요. 어떻게 답변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문제에 관해 우리가 읽을 만한 책을 찾으면 다음 주 화요일 저녁에 커피숍에서 만나 함께 얘기하면 어떨까요?”

 

만일 비슷한 의문을 갖고 있는 친구가 여럿 있으면, 소그룹을 만들어서 일정 기간 함께 답을 찾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구도자를 위한 소그룹이란 책에서 이런 소그룹을 인도하는 법을 잘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어려운 질문에 부딪혀 저는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해야 할 상황에 처할까 봐 두려워서 이 뜻밖의 모험을 놓치지 않도록 하라.

 

기억할 말씀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하나님의 진리에서 떠난 사람들을 알고 있거든, 그들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들을 찾아가십시오. 그들을 돌아서게 하십시오. 이는 귀한 생명들을 파멸에서 건져내는 일이며, 하나님을 등지는 일이 전염병처럼 퍼지는 것을 막는 일입니다.(5:19~20,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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