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은 하루 일을 하고 왔다. 일주일동안 크고 작은 마무리할 일들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마지막 일 때문에 그만둔 곳으로 돌아가야해서 쉬면서도 쉬는 것 같지 않았다. 화요일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야 온전하게 내장들이 이완하는 게 느껴진다. 별 일은 없었지만, 스스로 이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고 이름지었구나 싶은 게 느껴진다. 일했던 10년동안 내내 몸과 마음이 긴장하고 있었는데, 명상과 요가를 해보기 전에는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만두기 직전에서야 알았는데 일하는 동안은 심장과 가슴이 딱딱하고 뜨거워지고(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내장과 배는 얼고 뭉쳐진다. 이 똘똘 뭉쳐진 내장을 풀어주는 효과좋은 비법은 작년에 자기계발서 읽기에서 얻었다. 그동안 아무것(실용적이도 효용한것)도 아니라고 무시하고 외면했던 것들이었다. 자기 전에 누워서 딱딱한 내장을 가지고 입으로 '감사합니다~'는 소리를 내면 스르르 내장이 풀렸다. 뭐가 감사한지 상관없었다. 주문은 효과가 있었다. 그래봤자 몇시간 뒤 아침에 눈을 뜨면 일하러 갔다. 그런데 화요일 밤 자려고 누웠는데 내장들이 편안하게 같이 누워있었다. 


뜨거운 가슴이나 뭉친 배는 사실 실생활에 불편함은 없었다. 또 불편함이 없었던 건 마비된 통각이다. 베거나 까진 상처들이 아프지가 않았다. 오히려 실용적이고 편리한 몸이라서 좋아했다. 아프지 않고 피가 나고 밥을 먹다 눈에 보이면 발견됐다. 저녁에 씻다 물에 닿아도 쓰리지 않아 모를 때가 많았다. 내 눈이나 다른 눈에 띄어 시각적으로 인식하면 그제서야 아픔이 느껴졌다. 통각은 개별적이고 지나치게 주관적이지만 없는 것이기도 하고, 실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세상 눅눅하고 습한 책이나 영화를 보는 일도 얼마나 아무 일도 아닌 일이고, 동시에 참 아픈 일이다. 몸이 점점 참을 수 없을때까지는 언제든 경계태세를 하고 좀처럼 풀지 않아서 사소하고 사소하지 않은 몸의 일들은 모두 의식의 수면 아래에 잠겨있었다. 알아차렸다면 몇겹으로 채운 보호구를 효과적으로 풀어헤치려고 노력했을 텐데 그래본 적이 없어서 수면의 높이를 올리고, 또 올리려고 노력했고 그런 일에는 참 열심으로 다양하게 애썼다.


지난주는 예고된 하루 출근 때문에 뭐든 손에 잡히지 않고, 진득하게 뭘 하기 어려웠는데 책의 신은 참 다정하다. 궁여지책 시즌3는 그림책을 읽는다. 두 사람이 공유해준 추천 그림책주머니에서 두권을 골라 한달에 한번 이야기한다. 몽글몽글해지는 참 반가운 아이디어였는데 코로나로 단축 운영을 해서 도서관에 갈 수 없고, 일일이 사보고 고를 수는 없어서 은근 골치덩이였다. 그러니까 바로 그림책을 달릴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었다. 그래도 한달살이 한정으로 뭐든 달리지 마는 시간을 보내보자는 다짐은 매일 아침 하고 있다. 처음으로 큰도서관에 평일 대낮에 가서, 어린이 책 서가에 다녀왔다. 성인 책들도 진열이 신기하게 되어있어 우연을 가장한 책과의 만남을 주선하는게 특징인 큰도서관이다. 어린이서가는 원래 그런건지 여기가 그런건지 알 수 없었는데, 더 작은어린이와 더 큰어린이용 책이 나누어져 있었다. 역시 어린이들의 창의성을 기르려는 목적인지 알 수 없게 책들은 이곳저곳 흩어져 있었다. 어린이서가에서 헤매는 일의 기쁨과 슬픔을 접했다. 안 그래도 흩뿌려져 있는 책들이(실제로는 아마도 질서있게 흩어져있지만, 이용자가 단지 익숙하지 않아 그럴 확률이 높다.) 책등이 얇아 분류기호가 잘 안 보인다.


책의 신은 크게 보면 다정하고, 너무 뜯어보면 혹독하다. 충분히 헤매면서 우연한 즉석만남을 가지면 좋았겠지만, 오래된 선약이 있는 책들만 후딱 챙겨올 생각이었다. 안온한 집에서 표지도 알콜솜으로 한번 닦고, 홍차도 우려서 느긋하게 효과적으로 볼 생각이었다. 에버노트 도서관별 재고 목록의 분류기호 지도에서도 이번에 방문할 곳만을 별표 표시를 해간 나는 (그 도서관 말고 도서관이라는 이데아 자체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타버리고 한 줌의 몸과 마음만 가지고 간 나는) 집에 돌아와서 시간을 보고 황당했다. 그래도 한달간 손목시계는 풀어두었다. 그래도 서둘러서 해야하는 일은 없긴 없다.



두 사람이 나눠준 많은 그림책들 중 아무래도 자기 자신에 대한 책들을 고르게 됐다. 어린거나 그대로 늙은거나 관심사는 비슷할 수밖에 없다. 내가 어렸을 때 그런 책들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요즘 어린이들이 좀 부러웠다. 좋은 책을 골라낸 목록에서 고르니 그렇기도 하겠지만, 책들이 정말 아름답고 풍성하고 재미있었다. 단순하고 천진해지는 시간이었다. 표지그림은 명장면 중 명장면이었는데, 역시 표지에 실렸다. 실은 책 전체가 명장면 모음집이다. 


"이제 비가 멈출 모양이에요. 먹구름이 저기까지 물러갔어요."

"정말 그렇구나."

고기오는 비가 멈춘 게 기쁘면서도 한편 걱정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닭인 걸 어떻게 증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거든요.

-51p


고기오는 작은 꼬꼬꼬를 데리고 비를 피하러 동굴에 들어와서 지금 비를 피하고 있기는 하지만, 비가 멈추는 것도 안 멈추는 것도 걱정이다. 내가 닭인지 아닌지 생각해야 하는건지 모르는데 우선 코앞에 닥친 내가 닭인지 아닌지 증명을 어떻게 해내야 할지.




 내가 누군지 나도 모르고 너희들도 모르는데 그래도 나를 좋아해주는 너희들을 떠날 수 있을까? 고기오가 두더지들을 떠나온 사건은 상상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그래도 마음 속으로는 습관적으로 이름표를 붙인다. 고기오는 건강한 몸과 충분한 먹이를 구할 수 있는 능력, 어떤 감지를 할 수 있는 인지력, 혼자라도 괜찮은 심지가 있어서 진짜 자기가 뭔지 헤매고 다닐 수 있는거야. 그래도 어쨌거나 고기오는 용감하고 멋진 게 맞다! 세상 진실한 용기 앞에서 감동받고 부러워한다. 디테일도 훨씬 더 많고, 담긴 메시지도 훨씬 더 많다. 


그냥님의 씩씩한 고오오오~기이이이~오오오오~~ 떠올라 배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문학상을 좇아 읽는 타입이 아닌데, 이 책을 읽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이 상의 전 수상작들도 찾아 보고 싶어졌다. 이이거는 진짜 어린이책 서가에 꽂혀 성인 독자를 소외시킨 명작이다. 글도 그림도 각각 아름답고, 그 조화의 아름다움은 말을 잇지 못한다. 그림책을 보며 이렇게 펑펑 눈물을 흘릴 거라 생각하지 못해서 기습으로 더 당했고, 그만큼 더 좋은 시간이었다. 


크고 큰 외로움과 텅텅 빈 마음과 그래도 하루하루 살아지는 날. 

겨우겨우 지나가는 날들에 또 또 계속되는 이별.

다시 슬금슬금 다르게 차는 마음.


역시 디테일도 훨씬 더 많고, 담긴 메시지도 훨씬 더 많다. 고기오와 다르고 같은 결말도 충격적인 아름다움이었다. 그냥님 만세~~



기록한 이후부터 알라딘이 정리해준 걸 보면 사노 요코의 책을 가장 많이 봤다. <사는 게 뭐라고>로 첫 발을 떼었을 때부터 진작 보기로 약속해둔 사노 요코의 그림책. <100만 번 산 고양이>를 처음 봤을 때 못생긴 고양이가 너무 충격이었는데. 솔직해서 심술맞아 보이는 고양이와 동화같지 않은 이야기가 점점 중독된다. 역시나 100만번 처럼 어린이들이 보기에는 충격적이고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이야기다. 역시 슬프게도 이야기에는 나오지 않는 표지 그림이 가장 명장면이다. 


"나더러 어쩌란 말이야? 나는 고양이야.

고양이라고!"

고양이의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숲 속에 울려 퍼졌어요.


숲 속은 조용했어요.

고양이는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여느 때와 똑같은 숲이었어요.

나뭇가지에서 작은 새가 노래하고,

나뭇잎 두세 장이 포르르 떨어졌어요.


발 밑에 고양이 고양이의 모자가 떨어져 있었어요.

파이프도 있었죠.

고양이는 모자를 쓰고, 파이프를 입에 물었어요.

여느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어요.


고양이는 또 한 번 숲을 빙 둘러보았어요.

숲은 여느 때와 똑같았고, 고양이도 여느 때와

똑같았어요.

고양이가 벌떡 일어섰어요.

"그럼, 오늘 저녁엔 오랜만에 고등어를 먹어 볼까?"

고양이는 다시 산책을 나섰답니다.




마지막 장면이 제일 좋다. 나도 숨을 고르고 숲을 둘러보고 떨어진 내 모자를 주워 쓰고 벌떡 일어나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하고 있다. 나는 고양이인가 아닌가 생각하고, 다디단 하루를 보내고, 나는 고양이라고! 역정내면서 아침에 홍차를 마시면서 책을 보고, 점심엔 오랜만에 홍차를 마시면서 책볼까? 차장과 책장 앞에서 콧노래를 하고, 발을 구른다. 공공의 책장 앞에서는 그러지 않는다.



모래알만 한 경험이라도 어떻게든 써서 뱉아내면 스르르 낫고, 약간은 슬그머니 나아졌던 적이 있다. 

보고 쓰면서 아주 작은 게 조금 살이 붙는 기분이 감사한 며칠.

묻어둔 자아를 살살 캐내면서 슬슬 기뻐해서 감사한 며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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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9-02 11: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긴긴밤 땡스투 들어온다면, 접니다.
:)

link123q34 2021-09-02 19:46   좋아요 0 | URL
꺄 이럴수가 땡스투란 누르는 것인줄만 알았지 뭐에요 감사합니다♡
 














1장 감정과 법


1 감정에 대한 호소

 영미 법률 전통이 감정에 대해 갖고 있는 태도와 이런 태도가 암묵적으로 기반하고 있는 감정 개념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감정은 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지배적인 사회규범과도 연관되어 있다. 중요한 이익과 불이익을 가르고, 어떤 혜택과 손해가 중요한지를 가른다. 이 시각에서 세 가지 법이 작동한다. 

①'타당한 도발'에 관한 법 

②정당방위에 관한 법 

③형사범에 대한 양형선고 과정에서 동정심에 대한 호소가 갖는 역할


2 감정과 믿음, 감정과 가치

 감정은 대상이 존재한다. 대상의 존재로 믿음과 평가, 타당성이 발생한다. 믿음은 감정 자체를 구성하는 일부가 된다. 대상에 대한 평가는 대상을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나눈다. 그러니까 특정한 대상에만 중요한 가치를 부여한다. 타당성은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평가할 때 중요하고, 진실성과는 다르다. 진실성은 증거와 신뢰성에 관한 문제다.


3 감정, 평가, 그리고 도덕 교육

 감정은 참인지 거짓인지 믿음을 판단 근거로 한다. 그렇다면 감정의 근거가 되는 믿음을 바꾸면 감정을 바꿀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래서 법과 도덕 교육이 중요해진다.


4 감정과 '이성적인 사람': 과실치사와 정당방위

 감정은 사람들의 평가를 포함한다. 법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 대한 평가를 유도할 수도 있다. 정당방위로 인한 살인의 경우 완전한 면책 대상이다.(영미법에서) 이것은 타당한 감정을 근거로 한다. 충동적 과실치사의 경우 죄가 경감된다. 이 경우 사람들이 자신이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특정한 형태의 피해를 입었을 때 분노할 수 있다는 점을 공적으로 인정해주길 원하고, 그런 감정 자체가 적절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5 감정과 변화하는 사회 규범

 감정에 대한 평가는 시대의 지배적인 사회 규범을 반영하기 때문에 달라진다. 간통과 가정폭력에 대한 시각의 변화도 바뀌고 있다.


6 타당한 공감: 양형 선고 과정에서의 동정심

 양형 선고시 동정심은 과정의 일부이다. 동정심이 타당하고 적절하다는 가정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타당한 동정심은 피고인의 권리가 되고, 동정심을 이끌어낼 수도 있는 증거를 제시할 권리도 생긴다.


7 감정과 정치적 자유주의

 감정을 평가의 기준으로 두게 되면 법 개념이 자유주의적이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사람에 대한 존중을 기본으로 하고, 자연히 일정 정도 '타당한 불일치'가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위에 대한 제한을 쉽게 정당화할 수 있게 된다. 반면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행위를 제약하는 것은 정당화하기가 훨씬 어렵다.


8 감정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자신의 아이를 죽인 사람을 살해한 부모의 경우 우리는 분노의 '형태'와 '역할'을 평가하게 된다. 분노와 두려움은 법률적으로 적절한 범주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혐오와 (제한된 범위의)수치심은 담고 있는 인지적 내용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혐오와 수치심은 법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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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살이를 시작했다. 7주살이가 되었어야 하는데 일주일을 지나고보니 6주살이가 되었다. 지난 주말 5년쯤 해오던 일을 그만뒀다. 이번에 그만두고 나면 1년쯤 여행이나 슬금슬금 다닐 차례였다. 한번 일을 시작하면 휴식이 거의 없이 일만 하니 쉬는 시간에는 일이 거의 없이 여행만 했어야 했다. 분명 일을 할 때는 그런 마음이었는데 마치려고 보니 나도 달라졌고, 바깥도 달라져있다. 6주살이를 무사히 마치고 나면 딴 마음이 들지 몰라도. 6주살이는 그간 잠자던 집에서 한다. 한국말도 잘 통하고, 와이파이도 잘 터지고, 고민고민하며 종이책을 몇권 고르지 않아도 되고, 내 목에 꼭 맞는 베개도 있고, 아침저녁으로 걸을만한 자연산책로도 있고, 늘 지나치게 충분한 홍차와 커피도 있고, 먹어보지 않은 가게들이 많고, 아침을 위해 핸드블렌더를 챙기지 않아도 되고, 시차도 없는 숙소. 3년 반동안 잠은 많이 자봤지만 별로 살아본 적 없는 집. 일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크고 작게 마무리할 일들이 계속 있었다. 아직 완전히 끝나진 않았지만 어제 저녁부터서야 조금 실감이 난다. 


한달살이를 하면서 양껏 읽고 써보고 싶은 마음이다. 항상 한번쯤 가져보고 싶었던 휴가를 바로 지금 가장 편안한 곳에서. 대신 혼자 규칙을 세워봤는데 지나치게 열심히 읽고 쓰지 말 것. 쉬면서 지난 시간들도 돌아보고, 늘 바쁘다고 미뤄둔 생각들도 조금씩 해보려고 한다. 그중 일하면서 생겼던 어떤 문제들은 항상 뭐든 지나치게 하고싶어하는 마음에서 왔던 것 같아 정말 좋아하는 일도 과하지 않게 해보려고 한다. 솔직히 지금도 보고싶은 책들을 한아름 골라 펼쳐놓고 계획을 세우고 동그라미 치고싶은 마음이다. 구름에 태워 흘려보내도 자꾸 떠오르는 욕구. 나에게 가장 어려운 거니까 이럴 때 집중적으로 연습하자는 생각. 실은 이런 의도와 생각 자체가 취지에 어긋난다. 실은 내가 그랬구나~ 하는 깨달음을 받아들이고, 다르게 해보고자 하는 것 자체로 계단 하나를 올라서는 기분. 기분만으로 만족이 안 되는 기분. 그래도 한번 그러지 말아보자는 생각.


이전까지는 쓰기 싫을 때 읽고, 읽기 싫을 때 썼는데 아직까지는 마찬가지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매일 일기를 써보고 싶었는데 막상 쓰려니 귀찮아서 책만 읽다 읽는 게 심심해서 일기를 쓴다. 3주차쯤에는 읽고 싶을 때 읽고, 쓰고 싶을 때 쓰고 있으면 좋겠다.




박완서 선생님의 에세이. 나는 왜 이제야 봤을까? 너무 억울했다. 억울한만큼 감사했다. 곶감처럼 하나씩 아껴서 빼먹을 글이 아직 많다. 단정하고 따뜻한 마음이 가득하다. 이번 휴가는 크게는 안 바란다. 그저 보통의 시간이면 된다.


"크게는 안 바라요. 그저 보통 사람이면 돼요." 가장 겸손한 척 가장 욕심 없는 척 이렇게 말했지만 실은 얼마나 큰 욕심을 부렸었는지 모른다. 욕심 안 부린다는 말처럼 앙큼한 위선은 없다는 것도 내 경험으로 알 것 같다. 아마 나의 가장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가장 까다로운 조건만 내세워 자식들의 배우자를 골랐더라면 생전 시집 장가 못 보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제 마음에 드는 짝을 제각기 찾아내어 부모의 승낙을 받고 슬하를 떠났으니 큰 효도한 셈이다. 아직도 보내야 할 자식이 남아 있긴 하지만 보통 사람을 찾는 일은 그만두기로 한지 오래다.

- 보통 사람,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57p


선생님이 자녀들의 배우자로 생각한 보통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


살기는 너무 부자도 아니고 너무 가난하지도 않을 것, 식구끼리는 화목하되 가끔 의견 충돌쯤 있어도 무방함, 부모가 생존해 계시되 인품이 보통 정도로 무던하여 자식에게 보통 정도의 예절과 공중도덕을 가르쳤을 것, 학력은 내 자식이 대학을 나왔으니 대학은 나와야겠지만 일류냐 이류냐까지는 안 따지기로 하고 그 대신 적성에 안 맞는 엉뚱한 공부를 해서 대학을 나오나마나이면 절대로 안 되고, 용모나 키도 보통 정도만 되면 되지만 건강할 것, 돈 귀한 줄 알고 인색하지 않을 것, 등등이었다. - 54p


나는 탈락이었다.. 괜히 동그라미 엑스표를 쳐가며 열을 내며 읽어본 보람도 없이. 글의 끝에서 선생님은 그냥 이마에 뿔만 안 달리면 다 보통사람이라며 마치신다. 6주살이의 끝에서는 나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막 일을 마친 지금은 모든 사람이 이마에 뿔이 달린 것 같고, 그게 아주 보통이라고 여긴다.


글 하나하나가 보석같다 생각하며 아껴보고 있다. 예전같으면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다 읽고는 샀을 것이다.



몇년 전쯤 정말 좋았다며 친구가 선물한 책. 한겨레에서 만든 손바닥문학상 수상작품 10년치를 모아 엮었다. 이때만 해도 단편집도 안 볼 때고, 한국문학은 더 안 볼 때라 난처해하지만 고마워하며 받았다. 마음 한구석에 숙제처럼 남아있기도 했고, 연말에 이사도 앞두고 있어서 데리고 가지 않을 책들은 정리도 해야 했다.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지만 마음이 어지러워 바로 묵직한 장편소설에 덤빌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단편이니까 하나씩 읽어보지 뭐 가벼운 마음으로 들었던 책. 세상 눅눅한 이야기 모음집. 나는 그냥 쉬고 싶은데. 이래서 한국소설 안 봤었지. 스트레스받으며 이야기 하나씩둘씩 쪼개 읽었다. 소설이란 건 둘째치고 현실에 정말 있을법한 이야기들만 있었다. 그런데 대체 박완서 선생님의 아무리 찾아도 내 주변엔 없던 보통 사람 사윗감처럼 내 주변에는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이 이야기들이 바로 손바닥문학상 수상작 모음집인가 하기도 했고. 본 적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인가 보려고 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인가 볼 시간이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인가 가려져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인가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인가 보기 싫은 이야기인가 하면서 막장을 덮었다. 평균과 중위같은 걸 조금 생각해보다가 중고책으로 팔 책더미에 얹었다. 


14작품 중 12작품이 여성작가, 2작품이 남성작가의 단편이었다. 읽어본 작가는 이슬아 하나였는데, 같이 읽는 책이 아니면 스스로 고르는 일은 거의 없으니 당연하다. 오랜만에 읽었던 한국소설이 여전히 찝찝하고 눅눅함을 반복해서 시기를 잘못 골랐다고 생각했다. 한국소설을 안 읽게 되는 건 순전히 가난한 사람들의 부자에 대한 생각이랑 비슷하다. 제대로 읽어본 작품도 별로 없으면서, 한국소설은 상 타려고 사회문제만 다루려 들거나 눈물을 쥐어짜려고해 지긋지긋하고 그냥 구질구질하다는 생각, 싫은 기분. 그러면서 외국소설은 인생을 다루어야 좋고, 스케일이 커서 좋고, 이국적이라서 좋다는 사대주의. 아마 6주간 한국소설을 보는 일은 없을거야.



곧 옮기지만 지금 사는 동네는 규모가 큰 주도서관 외에 마을마다 작은도서관을 운영하는데, 이 시간이 직장인들은 일하는 시간이라 한 번도 이용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번주에 한번 들러보니 참 좋은 복지였다. 장서는 3천권 정도에 신청받은 책들 중심인지 아무리 둘러봐도 신기한 서가였지만 그래도. 가까워서 궁금했던 책 몇 권을 빌려왔지만, 그래도 빌려야 했던 책들은 없어서 주중에 결국 큰도서관에 다녀왔다. 가져올 책들이 중구난방이고 진열이 좀 특이한 곳이라 느긋하게 서가 이곳저곳 구경할 생각과는 다르게 빌려올 책만 찾았다. 그래도 새로 들어온 책 책장은 둘러봤는데 알라딘 서재에서 보이던 책표지가 있어 일단 빌려왔다. 


"너무 가까운 건 무섭거든요. 내가 매일 덮는 이불이나 매일 쓰는 그릇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야 더 객관적으로 보이지 않나요?" - 55p


소설의 주인공은 여행사 직원이고, 재난여행상품을 개발한다. 최근 국내에도 쓰나미가 있었는데 (작품 속에서) 비싼 돈 주고 해외로 재난여행을 떠난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답이다. 민음사의 젊은 작가 시리즈 3번, 2013년에 나온 책이었다. 사회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흡입력있는 스토리와 미스테리가 잘 버무려져 속도감있게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최근 인기있는 이유는 올해 영국의 대거상 수상작이어서. 그럴만한 책 같았다. 어쩌다 봤던 민음사의 모던클래식, 젊은작가 시리즈 모두 대단해서 차분히 보고싶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 어떤 상을 받는다는 건 좀더 많은 사람들이 어떤 책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조금은 더 생기는 일이라 좋은 일이다. 그런데. 잘 읽고 난 소설이 하필 보통 사람과 보통 사람의 이야기에 이어져서. 한국소설을 안 보려고 하는 내 마음이 다 까발려진 기분이었다. 너무 가까운 이야기라 무섭고 싫어서. 안온한 잠자리에 묻는 게 싫어서. 그랬던 거구나. <밤의 여행자들>은 최소한 무대가 외국의 한 섬으로 옮겨져 있어서 괜찮았구나. 



퉁쳐서 어떤 문학이라는 건 없겠지만 그래도 고른다면 러시아문학을 좋아한다. 아마도 담고 있는 주제들 때문에. 그래서 왜 이건 좋고 저건 싫었나 한번 생각해보면 역시 그냥 정확하게 같은 이유같다. 체호프를 좋아하는데 다양한 소시민들이 등장하고, 사소한 감정들을 보여주고, 큰 사건이 없어서다. 


체호프의 희곡에서 인물들은 서로 진정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횡설수설에 가까운 불필요한 대사들이 행위의 진행을 방해하여 집중된 대화체가 낳는 극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체호프의 인물들은 대화를 나누는 듯하지만 독백하고 있는 것이다. - 270p 


해설을 읽고 나니 그런 줄 알았는데 읽을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통쾌함이나 우스꽝스럽다는 느낌은 있었는데, 다시보면 아마 스스로 중요하게 대접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말 뒤에 저런 대화의 특성이 합쳐져 그렇게 느낀 것 같다.


이건 왜 특별히 좋았지 생각하니 참 단순하고 바보같았다. 주인공 이름이 외국 이름이면 덜 불편하고, 배경이 외국 이름이면 남의 이야기였던 것 같다. 홍차를 마시면서 영역을 넓혀갈 때도 똑같았다. 절대 싫어하면서 마시지 않았던 차들도 결국에는 야금야금 맛있게 느껴지는데 그럴 때면 마시지 않는 차로 남겨뒀던 차들이 있다는 게 행운처럼 느껴졌다. 마셔봐야 알지. 건엽 냄새만 맡고 덮어놓고 싫어하지 말고.



법은 '이성적인 사람'이 '평균적인 사람'과 일정 정도 동일하다는 가설을 가지고 운영되는 경향이 있지만, 나는 법에 대해 고찰하는 사상가들은 이러한 가정의 이면을 살피거나 이를 문제 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평균적인 사람도 한 사람의 인간인 이상 다양한 긴장과 모순을 드러내며, 규범적 측면에서 비이성적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어떠한 감정이 특별히 그러한 비이성적 특징을 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는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그러한 감정이 수행하는 법적 역할을 검토할 특별한 이유를 갖게 된다. - 75p


이번주 책들은 끈덕지게 보통, 평균을 집어던졌다. 보통 직장인이나 비직장인들이 마주치는 하루는 이성적으로 보내기 어려운데. 이성적인 사람이 어느 정도 평균이고 정상적인 상태로 가정된다. 나는 평균적으로 비이성적이고 비감정적으로 지내던 시간들에서 빠져나오려고 겨우 마음먹었는데. 



그래도.

맘에 드는 안 읽던 책들을 만나서 들뜨고 감사한 첫주.

쓰기 싫어서 읽거나, 읽기 싫어서 쓰거나

어쨌거나 읽고 쓸 시간을 내서 감사한 첫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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