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요일에 보냉백을 샀다. 전에 쓰던 파란색 카스보냉백은 엄마것이었는데 그게 이집 저집을 참 부지런히 오갔었다. 지퍼 하나가 진작 고장나서 남은 지퍼 하나에 주의를 기울여서 잠그면 잠겼다. 매번 둘이서 하나 사자~ 했다가도 아직 쓸 수 있는데 버리면 죄를 짓는 기분이라 고장나면 사자~가 되곤 했다. 물샐틈없게 아이스팩과 사랑의 마미푸드가 잔뜩 들어가는 카스보냉백은 고장이 아직 안 났는데, 가득찬 채로 동생이 먼 곳으로 들고 갔다. 나는 비교적 더 자주 왕래가 있는 편이고, 아무리 왔다갔다하긴 해도 그 물건이 엄마 것이라 내 것도 따로 필요하긴 해서 사려고 하긴 했다. 보냉백 하나 사야되겠다 D가 부산으로 가져갔어 그랬구나 하나 사야겠다 안그래도 10월부터 바로 필요하니까 하나 사려고 했어 그래 잘됐다 어차피 고장났으니까 한번 쓰고 버린다그러드라 그래 그럴수도 있지


엄마집은 차로 한시간 반 거리라 보냉백 기능이 엄청나게 좋지 않아도 된다. 아이스팩도 두집에 항상 많고. 물건이 적당히 들어가고 적당한 보냉기능이면 되는데 인터넷에는 너무 많은 디자인의 보냉백이 있었다. 고르기도 귀찮고 생각해보니 새 것일 필요가 없어서 당근마켓을 받고 검색했다. 놀랍게도 똑같은 색깔과 모양의 OB보냉백을 누가 5천원에 팔고 있었다. 마침 책을 빌려놓은 도서관 근처고, 미루는 게 싫어서 바로 약속을 잡았다. 아직도 낮에는 누구나 일을 하고 있다는 내 기준으로 저녁 이후에나 가능할걸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아무 때나 된다고 해서 오후 두시에 가기로 했다. 가는 김에 책도 회전시킬겸 읽고 대충 기록을 남긴 책들 위주로 몇권 골라내 챙겨뒀다. 


내가 사는 곳은 명의당 20권까지 2주간 빌려준다. 내 이름으로 20권, 동거인 이름으로 4권이 도서관 4곳에서 온 책들이라 계획에 없던 도서관행을 위해 반납할 것 빌릴 것을 또 치밀하게 골랐다. 완벽한 목록을 챙겨 새책 생각에 무척 신이 났고 다행히 주차장 자리가 몇칸 있었는데, 도서관은 휴관이었다. 다른 책들이 많이 쌓여있지만, 특히 전날 재밌게 읽어서 이어서 보고싶었던 책들 때문에 좀 실망이 컸다. 그래도 괜찮았다. 다음날 동거인이 백신맞는 날이라 그쪽 근처에도 빌려둔 책이 있어서 그쪽 책이랑 교환하면 된다. 


두시가 거의 다되서 OB보냉백을 교환했다. 의외로 중년의 여자분이 판매자였다. 엄청 깨끗했다. 앞으로 이 보냉백이 또 몇킬로미터를 이동할 것인가를 생각하니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소리가 절로 나왔는데 뜻밖에 판매자분도 잘 쓰세요~ 인사했다. 흥행에 성공한 앱이라 그런지 거래후 평가항목이 많고 꼼꼼해서 놀랐다. 거래후 판매자분이 아까 헤어지면서 인사를 했는데 또 인사메세지를 보내셔서 더 놀랐다. 평일 대낮 사회의 정서란 이런 건가.. 거래후 나도 판매자를 평가하고 판매자도 나를 평가하는 시스템이었다. 나는 이미 필요한 보냉백을 샀는데 이런 세세한 항목 평가라니 귀찮.. 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평가를 꼼꼼하게 누르고 자리를 떠났다. 이런 앱도 사용하고 엄청 트렌디한 사람으로 변신한 기분.


파란보냉백이 엄마집에서 떠나올때는 보통 가내수공음식이 담긴다. 내집에서 옮길때는 주로 공장음식이 담긴다. 그나마도 내가 먹을 걸 담기 시작한건 1년 정도밖에 안 됐다. 그래도 대부분은 빈그릇만 담을 때가 많다. 저탄고지 식단으로 바꾼지 2년 정도 되었고, 엄마도 그때쯤 하루 1~2끼 정도는 비슷한 식단으로 먹고 있다. 아무래도 식재료가 동네에서 구할 수 없는 게 많아 내가 한꺼번에 사서 나눠먹기도 하고 샘플재료들도 보내고 한다. 정성껏 직접 담근 김치를 보내는 건 아니지만 뭔가 먹을 걸 채워서 보낼때 조금 더 자란 기분이 든다.



예정에 없던 책교환을 가면서 신났던 건 이 책 때문이었다. 책이 정말 맘에 들어서 녹색광선의 다른 책들이 궁금했다. 무슨 대단한 사건같지도 않은데 감정길을 따라 귀신에 홀린 것처럼 순식간에 빨려들어갔다. 강렬한 지적 세계에의 갈망도 황홀했다. 이런 대학생이었던 적은 없지만 그런 대학생이 된 기분. 그냥 이 책을 읽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시 이런 대학생으로 살아보고 싶은 기분.


 혹사를 통해 상처받은 육체는 보복을 망설이지 않는 법입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정신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미친듯이 넘어서려고 했던 자연법칙에 대한 몸의 경고 신호였습니다. 최면에 빠진 것 같은 피로는 점차 심해졌고, 감정의 표현은 더 맹렬해졌습니다. 예민해진 신경이 내면을 날카롭게 짓이기고 잠을 갈기갈기 찢어놓았으며 지금까지 억눌러 왔던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마구 자극했습니다. - 106p 


저탄고지식단은 하고싶어서 해본 게 아니다. 눈에 보이는 움켜쥐고 싶은 것과 무너져내리는 몸 사이에서 혹시나 하는 기대였다. 첫 방탄커피 한잔에 기적처럼 20대 때보다 더 짱짱한 힘이 솟아났고, 그 힘을 써보고나니 다른 걸 먹을 수가 없었다. 



여행을 할 때 3요소는 시간, 체력, 돈. 감사하게도 각 요소는 호환이 가능하다. 사는 건 놀랍게도 얼마나 공평한지. 여행을 많이 해본 건 아니지만 어릴때는 대부분을 시간과 체력으로 대신했던 것 같고, 일한 이후로는 체력과 돈으로. 그리고 체력이 꺾인 이후로는 여행의 모든 요소를 돈으로 대신하게 되었다. 여행은 사는 거고, 사는 게 여행이니까.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목숨줄처럼 붙잡고 사용하는 '프라나호흡'이라는 앱은 사기처럼 느껴질 정도로 호흡명상의 테마가 세분화되어 있다. 항스트레스/마음비우기/식욕억제/고요/힘 이런 식이다.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항스트레스는 당연히 스트레스가 극심할때 사용하는 호흡명상. 퇴근길에 출발하기 전 차안에서 5분 하고 출발하면 최악의 상황에서 일단 스탑!을 걸고 공간이동을 하게 되니 효과가 좋았다. 거짓말같지만 해보면 정말 효과가 있다. 이 앱의 우주최강 강력한 점은 막연한 호흡명상이란 걸 직관적으로 초보도 따라할 수 있게 되있는 거. 들이쉬고 멈추고 내쉬고 멈추는 걸 그래프로 보여주면서 동시에 강약의 사운드로도 제공한다. 그냥 보면서 따라하면 진짜로 된다. 항스트레스 외에는 다들 세속의 이해와는 다른 효과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힘'의 경우는 뜻밖에 '어려운 일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을 주고, 집중력을 높여줍니다'. 글씨로만 읽어도 너무 좋은 힘. 효과도 좋다. 너무 거대해서 어디서부터 손대야할지 막막하고, 시작하기 힘든 아침에 '힘'을 5분 하고나면 뭔가 시작하고 집중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그 수퍼 '힘'같은게 진짜로 있다는 걸 믿게 되었고. 어떤 불교적인 책도 좀 보고 싶고, 그런데 너무 경전같은것 말고 라이트한 것, 쉬운 것, 약간은 따라서 바로 해볼 수 있는 것도 들어있는 것을 찾다 틱낫한 스님의 힘에 도착했다. 정말로 쉬운 언어로 쓴 명상에세이. 뒷부분에 틱낫한스님의 인생과 플럼빌리지라는 공동체의 수행까지 같이 묶어 더 좋았다. 읽는 것만으로도 뭔가 정화되고 치유되는 기분이었는데 책을 따라 숨쉬어보고, 걸어보고, 웃어보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책머리에서부터 정말 좋았고, 책을 통틀어 가장 좋았던 부분은 수행은 깊은 산속에 숨어서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 일상에서 숨쉬고, 걷고, 먹고, 일하며 할 수 있다는 말이 가장 감동이었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귀중하다. 심지어 시간을 돈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시간은 돈이 아니다. 시간은 돈보다 훨씬 큰 무엇이다. 시간은 돈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시간은 무엇인가? 시간은 바로 삶이다. 시간은 생명이다. 매일 아침 해가 떠오르면 당신 앞에는 돈을 벌어야 하는 24시간이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 앞에는 삶을 살아가야 할 24시간이 펼쳐져 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지금 이 순간에서 달아나고 싶은 유혹에 지지 말고 버텨야 하는 이유이며 지금 이 순간을 생생히 살아야 하는 까닭이다. 당신이 투자해야 할 것은 돈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삶 그 자체다. - 98p, POWER14 돈에 투자하는가? 행복해지고 싶다면 당신 삶에 투자하라


경제적 자유를 꿈꾸며 시간이 돈이고, 돈이 시간을 빨아들이고, 돈이 시간을 만들어준다고 생각을 바꾼 게 작년인데. 틱낫한 스님은 또 아니라고 하시고...



 모든 인간은 24시간을 부여받는다. 자산 불평등이 정점을 찍은 지금, 부모에게 많은 부를 물려받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과거 세대처럼 많은 기회가 열려 있지도 않은 우리에게 있어 공평한 건 '시간'밖에 없다. 유일하게 공정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동등한 기회다. 그렇다면 어떻게 쓸 것인가? 가진 건 몸뚱이, 아니 시간밖에 없어서 그것이라도 살뜰하게 '시테크(시간+재테크)'를 할 수밖에 없다는 염세적인 결론에 매번 닿고 만다. -49p 


시간을 동등한 기회로 생각하고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마음이 된다는 건 잘 알지만 역시 동등하지 않다. 시간이 공정하고 동등한 기회라 해보더라도 돈으로 기본적인 생활에 소요되어야 할 시간을 살 수 있고, 살 수 없다. 현대사회에서 숨쉬고 아침에 눈을 뜨기 위해 필요한 것을 위해 밤에 눈감기 전까지 모든 시간을 쏟아부어야만 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하더라도 모든 시간을 쏟아붓지 않으면 동등한 지점에 설 수도 없으니까. 어떤 시간과 공간이어도 차곡차곡 숨쉬고 감사히 먹고 걷는 일이 가장 중요하겠지. 어쨌든 삶의 총체적인 부분은 언제나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삶이라는 걸 이해하고, 하루하루 숨쉬고 먹고 걸으며 수행하는 것까지 포함해야 하지만.





아침에 갓 구운 식빵을 사서 딸기잼을 발라 반으로 접어 먹는 행복이라니. 너무나 부러웠다. 태어나 한번도 누려본 적 없는 행복이다. 

1. 맛있는 식빵을 아침마다 직접 굽는 동네빵집이 있는 동네에 살아야 하고. 

2. 그 빵집이 내 출근시간보다 미리 문을 열어서 느긋하게 빵을 사와서 먹고 출근할 수 있어야 하고. 

3. 공복에 다녀올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 있어야 하고. 

4. 집에 딸기잼이 있어야하고. 

5. 집에 강아지가 있어야하고.

6. 결정적으로 식빵을 먹는 몸이어야 한다! 


너무너무 부러운 삶이어서 동거인에게 보여주면서 부러움을 나눠주는척 그림의 귀여움을 나눠줬다. 그랬더니 동거인은 '개는 없지만 빵은 있다고! 당장 사러가자!!'고 했다. 너무 재밌었는데 인터넷에 ~는 없지만 ~는 있다고! 말투가 유행한 적 있다고. 자꾸자꾸 써보고 싶은 말인데 아이디어는 없지만 마음은 있다고! 그러고보니 일하는 동안은 6가지 모두 X여서 완벽하게 누릴 수 없는 행복이었는데 한달살이중에는 5번의 '강아지는 없지만!' 부분만 빼고는 모두 해결 가능한 부분이었다. 당장 식빵을 사고, 간 김에 다른 빵도 사고, 딸기잼은 안 샀다. 아침은 아니었고, 막 구운 빵도 아니었지만 오늘의 행복.


2년동안 금동앗줄같았던 저탄고지식단을 하게 된 이유는 당연히 시간이었고, 체력이었다. 카페인으로 꺼내쓴 생명의 힘 같은 게 아니라 갖고 있던 세포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게 도와준다. 스스로 도와준다는 기분이 맘에 들었다. 탄수화물과 첨가물같은 즐거움은 잃었지만 새로운 식재료길에는 새로운 재미와 즐거움, 쾌감이 있었다. 잠시 일을 마치면서 이제 느슨하게 시간을 쓰려고 노력하면서 왜 식단은 돌아볼 생각을 못했는지. 당분간은 뭐든 막 섞어 먹어도 괜찮다. 식빵도 되고 딸기잼도 되고. 


지난주 일기를 쓰다보니 벌써 지난주도 아득하게 느껴진다.

새로운 경험들에 감사했던 며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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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9-18 12: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20권이나 빌릴 수 있다니 너무 부럽네요!! 누구는 나를 세상의 중심에 두라 하고 누구는 세상의 시각에선 개인이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하고. 근본적인걸 다룬다는 철학에서도 시간도 그렇고 많은 것들이 극과극이니 참 어렵습니다.😊

link123q34 2021-09-21 09:10   좋아요 1 | URL
진짜 어려운것 같아요~ 좀더 어릴 때는 무조건 맞을것 같은 절대적인게 있을줄 알고 그렇다는 가정하에 그걸 많이 찾아 헤맸던 기분인데.. 지금은 조금 달라진것 같긴 해요. 가지고 있던 생각이 깨뜨려지는 이야기들이 힘들지만 좋기도 하고요. 아직 이리저리 귀가 쫑긋해지는 단계를 사는 기분이에요~ 이 상태에 머물러있는게 가끔(!) 기쁨으로 느껴지기도 하고요. 뭔가 아직 여물어지지 않은 기분?ㅋㅋ

새파랑 2021-09-18 16: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 <감정의 혼란> 책이 자주 보여서 좋네요 ^^ 즐거운 명절 연휴 보내세요 😄

link123q34 2021-09-21 09:11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 연휴 마무리 잘하시고 푹 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