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 조선의 마지막 황녀
권비영 지음 / 다산책방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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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모종의 일 때문에 속 태우다가 시간이나 때우려고 교보에 갔더니 마침 덕혜옹주 소설이 매대 앞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걸 봤다. 그러고 보니 독후감 공모전이 있었지, 하고 집어들기를 한 40분 남짓? 순식간에 후루룩 읽어 버렸다.   

솔직히 이 책은 내 취향은 아니다. 그렇지만 소재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필귀정이고 흥망성쇠라 했으니 왕조의 끝은 언제나 서글픈 법이고, 역사는 남아 있는 일원들에게는 더없이 잔혹하게 군다.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역시 비명에 갔고, 총탄을 피해 살아남았다는 아나스탸샤 공주의 이야기는 한낱 루머일 뿐이다. 조선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인물 중 하나인 덕혜옹주 역시 왕조의 마지막 일원들이 겪는 고단한 삶을 고스란히 맛봐야 했다.  

그런 덕혜옹주 개인의 역사를 일제에 짓밟힌 대한제국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물론 그녀가 겪었던 불행은 그녀를 둘러싼 환경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그녀 개인의 불행 때문에 덕혜옹주와 조선왕조를 선(善)으로, 일제와 덕혜옹주의 남편인 대마도 영주를 악(惡)으로 규정하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에는 문제가 있다. 어느 한쪽에만 치중하다 보면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한국 사람임에도 이 책에 끝까지 감정 이입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서술의 잣대가 한쪽으로 기울어 있는 게 눈에 확 보여서였다. 사실 대부분의 한국 사람 감정이 그렇다. 우리는 피해국이고, 일본은 가해국이기 때문이다. 민족적 정서에서 반일감정을 지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덕혜옹주를 다룬 매체 중에 어느 방송국에서 제작한 특별드라마가 있었다. 드라마는 덕혜옹주를 일본 정부에 의해 강제로 정략결혼을 한 끝에 일본인 남편과 딸에게 버림받고 미치다시피 한 비운의 여성으로 그렸는데, 사실 이 드라마는 한국 사람이 일본에 대해 갖는 반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드라마 속 덕혜옹주는 순전히 일제에 의한 피해자였고, 일본과 일본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악인으로 그려졌다.  

그런데 최근 발간된 저서 중에 혼마 야스코라는 일본 학자에 의해 쓰여진 [덕혜옹주]라는 책이 있다. 작가도 후기에 이 책을 거론하면서 글을 쓰는 데 많이 참고를 했노라고 적고 있다. 덕혜옹주를 둘러싼 축 중에 반대편에 속하는 이 글을 보고 있자면 우리가 몰랐던 사실들이 상당수 끼어 있다. 덕혜옹주의 남편으로 알려진 소 타케유키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의 기록에 따르면 옹주는 그와 결혼할 당시부터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고, 조선 사람들이 일인에게 시집을 간 조선의 왕녀를 잊지 않고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그들이 이혼했을 때 조선에서 보내는 항의 서한들이 빗발쳤다는 증언이 바로 그것이다. 혼마 야스코는 옹주의 결혼생활에 대한 대마도 측 사료를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했고, 그것을 찬찬히 보고 있자면 덕혜옹주의 남편으로서의 소 타케유키라는 인물의 고뇌가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병마에 시달리는 아내 수발에다 황족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사사건건 정부의 지시가 내려오고, 조선 신문에 안 좋은 기사만 났다 하면 집안 우체통은 조선사람들의 항의 서한으로 불이 난다. 사생활 없이 사는 요즘 연예인들도 간혹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관심에 버거워할 때가 있는데 한낱 국문학도에 불과한 어수룩한 젊은이에게는 도가 지나친 환경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의 혼혈이라는 이유로 딸 정혜가 겪어야 하는 차가운 현실을 아비로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민족과 황족이라는 입장을 벗어나 온전히 평범한 한 가정을 꾸리기에는 너무 가혹하다. 덕혜옹주를 매정하게 내친 일본인 남편으로만 알고 있었던 우리의 편견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학술적인 단서일 뿐이고, 덕혜옹주를 다룬 책은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책 말고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따라서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사실은 확인할 길이 없다. 

이 책은 그렇게 띄엄띄엄 이루어진 덕혜옹주의 파편들을 상상력이라는 아교를 이용해 이어 붙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작가의 서술은 한국인이 가진 이분법적 잣대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볼 수는 없지만, 대마도에서의 덕혜옹주의 모습과 가족들과의 생활은 일본 측의 기록도 참고했기 때문인지 우리가 몰랐던 소 타케유키의 일면을 설득력 있게 묘사하고 있다. 단지 이 책을 읽을 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우리 스스로가 가져야 할 균형적인 관점이다. 이 책은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한 허구적 재구성이다. 이 불행한 인물을 원인삼아 일본을 비난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달라져야 한다. 감정을 아예 없앨 수는 없겠지만, 조금은 그 감정에서 시선을 떼고 다른 관점으로 덕혜옹주를 바라볼 수는 있다. [소설 덕혜옹주]는 그러한 교훈을 가지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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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천 가족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4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권일영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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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눈이 왔다. 9년만에 최악의 폭설이란다. 꼼짝 없이 달님공주와 단둘이 집에 갇혔다. 헬스위크라고 표현한 대로, 요 3주는 죽는 줄 알았다. 달님공주는 눈에 갇혀 있었던 요 근간 완벽하게 변신했다.  

만 4세, 최연소 오덕후 히키코모리로! (...) 

남들은 눈썰매를 탄다, 눈싸움을 한다, 눈사람을 만든다 하면서 25센티짜리 슈퍼울트라급 폭설을 맞아 밖에서 하루 종일 장난에 여념이 없는데, 우리 공주는 고고하게 안방 TV를 점령하고 앉아 절대 엉덩이를 떼는 법이 없다. 엄마표 플라스틱 대야 썰매를 들이대 봐도 "난 절대 그런 이상한 썰매에 내 엉덩이를 얹을 수 없어!" 하고 꿋꿋히 버틴다. 죽겠다.  

그러던 달님공주가 이번에 학원을 가게 되었다. 눈속에 엄마가 죽어라고 발품 팔아 물색해 낸 미술학원이다. 일주일에 5번, 8만 5천원이란다. 차도 보내 준단다. 앗싸 가오리 절로 춤이 나온다. 드디어 겨울 시즌 달님공주의 일과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열심히 일한 그대, 즐겨라! 이럴 땐 엄마도 좀 쉬어 줘야 한다. 이럴 땐 골치 아픈 책 읽으면 손해다. 감정과 감정이 뒤섞이고 치고박는 드라마틱한 소설은 절대 금물. 뿌듯한 기분을 유지하면서 기분 좋게 으하하하 웃을 수 있는 책이 좋다. 

그래서 이번 책은 아주 즐겁게 읽었다. "우리 몸속엔 주체할 수 없는 바보의 피가 흐릅니다!" 덜 떨어진 너구리 가족 이야기다. 우리는 둔갑하는 동물 하면 여우가 익숙한데 일본에는 너구리가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미신이 있단다. 일본 만화나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신통력을 가진 너구리'가 소재다.   

감상 포인트 1. 나사가 하나씩 빠졌지만 그래도 더없이 사랑스러운 4형제    

이 소설의 주된 포인트이자 이야기의 얼개를 만들어가는 이들은 단연 이들 미덥잖은 4형제다.  

장남의 위엄과 아버지의 대업을 이어받고자 하는 야망을 갖췄지만 정작 급할 때면 정신줄을 놓는 첫째. 의욕도 없고 기개도 없고 '사는 게 그냥 귀찮아' 우물안 개구리로 둔갑한 후 아예 너구리로 돌아오는 법마저 까먹은 대책 없는 둘째. 늙은 텐구 아카다마 선생과 아름다운 벤텐에게 휘둘리기 일쑤인 셋째와, 너무 어려 둔갑도 제대로 못하고 하릴없이 공돌이로 사는 넷째. 

이들이 한데 어울려 만들어가는 '한심한' 이야기는 더없이 친근하고 사랑스럽다. 

감상 포인트 2. 노년의 청춘, 벤텐을 향한 대책 없는 일편단심 아카다마 선생의 러브스토리 

화려한 도회적 이미지의 여자 텐구 벤텐은 이 이야기에서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이다. 그런 그녀에게 죽자고 목을 매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이빨 빠진 호랑이' 아카다마 선생이다. 왕년엔 누구나 그랬듯이 깃발 좀 날리고 살았던 위대한 텐구 아카다마 선생은 자신의 제자이자 정부이기도 했던 벤텐의 간계에 빠져 가진 것 다 내주고 집도 절도 잃은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벤텐에 대한 그의 사랑은 식을 줄을 모른다. 주착 없는 연애편지 공세에, 한번만 만나 달라고 애걸을 하지만 얌체에다 못돼 빠진 벤텐이 그의 마음을 알아 줄지는 미지수다. 

감상 포인트 3. 그래서 그집 아버지를 냄비요리로 만든 주범은 누구야? 

너구리와 텐구들이 어울려 지지고 볶는 사건들을 읽으면서 웃고 즐기던 독자는 슬슬 궁금증이 일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눔의 아버지는 대체 왜 그렇게 된 건데? 냄비 속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의연했다는' 위대한 니세에몬 소이치로의 죽음은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면서 사건 해결의 실마리이기도 하다. 소이치로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모든 사람의 증언이 맞물리면서 사건은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는다. 

감상 포인트 4. 이쪽도 만만찮은 바보다! 시모가모 가족의 라이벌 에비스가와 형제  

하는 일마다 훼방을 놓는 얄미운 에비스가와 형제의 현란한 바보짓을 보는 것도 나름 관전 포인트다. 사자성어를 좋아한다는 얼빠진 형제 금각과 은각이 사건마다 부르짖는 고사성어는 장면장면마다 폭소를 유발케 한다. 권토중래와 오월동주라는 사자성어로 크게 웃어 보고 싶다면 이들이 벌이고 다니는 소동을 놓치기 말길. 

감상 포인트 4. 모든 것을 감싸안는 엄마 너구리의 따스한 사랑 

낙천가 엄마 너구리는 이 소설에서 가장 행복한 인물인 듯싶다. 비가 오고 천둥이 치면 오금이 저려 둔갑도 풀리고 마는 겁쟁이 너구리지만, 이 엄마가 사람들 눈에 띄어 화를 당할까봐 네 명의 아들들은 천둥과 비가 오는 날이면 만사 젖히고 그녀가 있는 곳으로 뛰어온다. 화가 나면 아들에게도 나가 죽으라며 발길로 뻥뻥 걷어차는 터프한 엄마지만, 아버지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고 우물에 틀어박혀 버린 아들에게 분노하는 대신 다정하게 감싸안는 엄마이기도 하다. 이 엄마가 없었다면 과연 이 허무맹랑한 너구리 가족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었을까? 

모리미 토시히코라는 작가는 나에게는 매우 생소한 작가다. 띠지를 보니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가 이 사람 작품이라는데, 이걸 읽고 나니 그 책도 한번 읽어 보고 싶은 기분이 든다. 너구리 가족 이야기는 이게 1부고, 3부작 목표에 2부는 잡지에 연재중이란다. 다음 권도 부디 정발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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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미인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0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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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읽으실 때 주의하세요> 

작년에 구입한 PSP 게임 [당신을 용서하지 않아]를 클리어하고 난 후로 한동안 잠을 못 이룬 적이 있었다. 순간순간이 뇌리에 딱 박혀서 자면서까지 주인공 둘이 보트에 흘러가면서 나누던 대사를 몇번이고 되뇌였는지 모른다. 떠난 줄 알았던 남편이 실은 말기 암환자였고, 아내는 죽어가는 남편을 머리맡에 눕히고서 그들이 이룰 수 없었던 꿈을 하염없이 중얼거린다. 결혼하기 전에 당신이 말했지. 아마존에 보트를 같이 타러 가자고. 미안해, 안 들려. 못 들어도 괜찮아. 그리고 아내는 의식을 잃어가는 남편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 말못하는 남편과 끝없이 대화를 나누며 흘러가는 배에 몸을 맡긴다.  

[렛미인]을 덮고 나서 기분이 딱 그랬다. "May I come in?" "Yes." 수키 스택하우스 시리즈에도 비슷한 설정은 있다. 주인의 허락이 없으면 그 집에 들어갈 수 없다는 룰은 여기에도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여기서의 요청과 허락은 단순히 마음의 벽을 허무는 데 있다. [렛미인]의 경우는 조금 더 강렬한 의미다. 필요가 없는 한 사람을 해치지 않는 빌과는 달리 엘리는 분명히 살상력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엘리는 여타 뱀파이어 로맨스물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깔끔하지도, 세련되지도 않다. 에드워드나 빌이 보면 천리만리 도망칠 듯한 지저분한 몰골에 제대로 된 집도 없이 아무 인간에게나 기생해서 살아가는 식객 신세. 관에서 자는 건 차라리 양반이다. 엘리의 은신처는 어두컴컴한 아파트 구석의 '피에 잠긴 욕조'니까. 설정도 제대로다. 엘리에게 물리면 그 즉시 뱀파이어 직행이다. 가장 최악인 것은 엘리가 항상 굶주려 있다는 것이다. 열두 살의 외모에 비해 조금이라도 굶으면 그 예쁘다는 얼굴의 몰골이 초췌해지고 없던 새치까지 휘날린다. "비참하고, 역겹고, 고독한" 그야말로 우리가 생각하는 무시무시한 뱀파이어의 모습 그대로다. 빌이 "들어가도 되겠소?" 하고 물었을 때 수키의 심정은 어땠을까? 물론 무서웠을 것이다. 이 남자 들여놔도 될까? 그렇지만 오스카르만큼 목숨을 걸고 허락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빌은 사람 피를 빠는 대신 우아하게 합성혈액을 가방에 넣고 다니지만, 엘리는 사람 목을 물고 쭈쭈바 먹듯 쭉쭉 빨아대는 리얼 뱀파이어니까. 

이 소설의 매력은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구질구질하고 헐벗었다는 데 있다. 오스카르는 허구헌날 괴롭힘을 당하고 사는 학교 왕따에, 편모슬하에서 도둑질을 밥먹듯 하는 최악의 주인공이다. 주인공을 괴롭히는 아이들도 각자의 문제를 안고 산다. 엘리에게 기생당해 사는 호칸은 소아성애자인 데다 잇달아 성범죄를 일으키고 다니는 탓에 직장도 잃고 가정도 잃었다. 이들이 얽히고 설키며 전개되는 사건은 혐오스러움과 공포의 절정이다.  

하지만 공포와 잔인이라는 단어를 한데 뭉쳐 시궁창 속에 빠뜨린 듯한 사건과 사고들 속에서 주인공들의 로맨스는 빛을 발한다. 어른들의 무관심 속에 피어나는 둘의 은근한 관계는 황순원의 [소나기]를 연상케 한다. 엘리는 굶주려 있고, 자신의 존재성에 대해서도 '그냥 그런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잔혹하지만, 오스카르의 피는 탐하지 않는다. 오스카르 역시 엘리의 존재가 살떨리게 무서우련만, 망설임과 공포심을 무릅쓰고 그가 결국 선택한 것은 엘리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아이들이 모르스 부호로 소리 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인간의 피 없이는 살 수 없는 엘리가 살육과 추격으로 얼룩진 일상을 벗어나 맘 편히 또래와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은 오스카르의 더럽고 작은 방이다. 자신에 대한 추격이 점점 가까워짐을 깨닫고 오스카르 방 벽에 붙여 있는 모르스 부호표를 떼가는 엘리의 모습은 차라리 짠하다. 오스카르는 뱀파이어인 엘리의 정체를 알았고, 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묘한 살인 사건들의 원인을 확실하게 깨닫고 있다. 그렇지만 엘리를 향한 마음은 거둘 수가 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는 부모와 도망칠 길 없는 학교에서의 따돌림으로 점철된 일상을 지키느냐, 모든 것을 버리고 엘리를 선택하느냐, 오스카르에게는 두 갈래의 갈림길이 놓여져 있다. 

소설의 엔딩은 논란이 많았다고 들었다. 오스카르의 선택은 아름답고 감동적이지만, 결국은 호칸이 그랬듯이 조력자 신세로 전락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은 지금 막 책을 덮은 나로서도 부정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작가는 그러한 부정적인 견해를 적극 부인함으로써 이들 커플에게 펼쳐질 희망적인 미래 또한 암시하고 있다. 오스카르와 엘리는 각자 선택을 했고, 선택의 결과는 이제 운명의 몫이 되었다.   

영화를 보지 못해서 공포영화다운 부분이 어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뱀파이어들의 또 다른 로맨스를 기대하고 산 나로서는 간만에 물건 한번 잘 골랐네, 하는 흐뭇한 심정이다. 살이 찢기고 피가 튀는 그로테스크한 잔혹을 보고 나서도 가슴 한켠에 공포 대신 따스한 감정이 솟아나는 책. 혹여라도 이 책을 읽을지 말지 고민하고 있을 이에게 망설이지 말고 한번 읽어 보시라고 적극 추천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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夢影 2010-01-07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영화로 봤어. 여자애가 참 예쁜데 내용이 너무 음울하고... 뭐랄까... 그냥 매혹당한 건지 아니면 진짜로 사랑하여 선택한 건지 영화상에서는 좀 헛갈린달까. 따스하다기보다는 황량하고 쓰리고 서늘한 느낌이었음. 난 이 소년도 호칸처럼 조력자 신세로 전락할 거 같아 무서웠지..

달님엄마 2010-01-07 19:33   좋아요 0 | URL
난 끝이 완전 낭만적이어서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영화는 안봐서 모르겠지만 난 그냥 책으로만 볼래(덜덜덜)

그게 책 마지막 부분에 작가가 자기 생각을 적은 게 나오는데... 에필로그를 조금 덧붙여서 다시 쓸 생각이래. 아마 그걸 보면 독자들 생각이 좀 달라질 거라나 어쨌다나... 뭐 그러거나 상관없이 이런 건 받아들이기 나름 아니겠어?^^;
 
어두워지면 일어나라 수키 스택하우스 시리즈 1
샬레인 해리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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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요새 뱀파이어물에 빠졌다니까 친구가 말했다. "언니 요새 버닝 중이구나 ㅋㅋ"  

 요새도 버닝이란 말을 쓰는지 몰랐기에 친구가 쓰는 말이 참 신선했다. 나 때는 뭔가에 열중하는 것을 두고 불타오른다는 뜻의 영어 burn을 써서 버닝이라고 했는데, 장담하지만 지금 내가 뱀프물에 열광하는 건 예전에 "버닝"했던 것들에 비하면 얌전하게 구는 거다. 난 책밖에 사지 않았단 말이야! 거기다 뉴문도 안봤어! ...볼 것 같긴 하지만 

 솔직히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재미있게 보긴 했다. 손발이 오그라든다는 영화 트와일라잇도 챙겨 봤고, 뉴문과 이클립스는 책으로 읽고 브레이킹 던까지 손댈 뻔했는데 그만뒀다. 이번에 개봉한 뉴문은 보지 않았지만 대체로 성별에 따라 평이 극과 극으로 나뉘는 것 같다. 떡칠화장빨이니, 손발이 오그라드니 하는 악평이 난무하는지라 남편은 손도 안 댄 영화지만 난 나름대로 재밌게 봤다. 확실히 이런 류의 하이틴 로맨스물은 취향을 많이 타는 것 같다. 시리즈 중 뉴문이 제일 재밌었고 브레이킹 던이 베드씬 없어서 난 오히려 더 짜증나던데... 뉴문도 이렇게 뒷말이 많은데 브레이킹 던으로 가면 평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할 지경이다. 남들은 어떻게 느낄지 몰라도 시리즈의 완결판인 브레이킹 던에 나오는 남주인공은 좀 많이 찌질했다. 한참 재미나게 읽다가 중간에 그만둔 이유도 결국 그거였다.

 하여간 2% 모자란 느낌으로 뱀프물을 접했고, 그 다음에 성인삘 팍팍 난대서 고른 것이 미드 트루블러드다. 와우, 벨라와 에드워드의 감질나는 러브씬에 비하면 이쪽은 본격적인 성인남녀간의 연애물이다. 거기다 설정도 훨씬 전통에 가깝다. 솔직히 트와일라잇의 뱀프들은 얘들에 비하면 너무 편하게 산다 싶을 정도로. 결정적으로 걔들은 햇빛에 데미지가 전혀 없잖아 -_- 고드릭이 불쌍할 지경이랄까.  

드라마에서도 느꼈지만 수키 스택하우스 시리즈의 설정은 참 흥미롭다. 일단 여타 뱀프물에서의 뱀파이어들이 타인에 노출되지 않게 자신들만의 폐쇄적인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반면 이곳의 뱀파이어들은 문명의 혜택을 톡톡히 받았다. 즉 설정에 따르면 일본에서 개발된 합성혈액 "트루블러드"로 인해 뱀파이어들은 더는 인간의 피를 필요로 할 이유가 없으며, 이들은 음지에서 비밀스럽게 살아가는 존재가 되기를 거부하고 일반인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한다. 소설의 세계에서 인간과 뱀파이어는 함께 공존한다. 그들이 가진 특성은 공포의 대상이 될지언정 더 이상 비밀은 아니다. 뱀파이어의 혈액은 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지니고 있으며 좀더 강력한 성적 흥분을 원하는 자들에게는 매력적인 정력제가 되기도 한다. 소설은 뱀파이어라는 전통적인 공포의 대상이 음지에서 양지로 부각되면서 이들을 받아들이는 인간 군상의 다양한 방식을 사실적이고도 절묘하게 담아냈다. 여기에 비하면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뱀파이어들은 여전히 타인의 접촉을 달가워하지 않는 폐쇄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다. 물론 재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초절정미남 에드워드도 좋았지만 같은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늑대인간과 뱀파이어간의 대립구도도 흥미롭게 봤었다. 다만 서로 다른 두 세계관 중 뱀파이어로서 어느 쪽에서 사는 것이 더 편하겠느냐고 물어본다면 내 생각엔 후자가 압도적일 것 같다. 정체 안 들키게 남 눈치 보고 사는 게 좀 불편하긴 하겠지만, 그것 빼고는 솔직히 생활하는 데 아무 지장 없잖아? 누구는 새벽 동트는 것만 봐도 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반해 햇빛에도 죽지 않고 피부만 빤짝거린다면 트루블러드의 뱀파이어들은 인생에 많은 회의를 느낄 것 같다.  

 드라마를 시즌 2까지 단숨에 달린 다음 내친 김에 책까지 주문해 읽었다. 시즌 3은 아직 제작중이라는데 이미 소설을 다 읽어 버렸으니 어쩔까 싶기도 하다. TV시리즈와 원작을 동시에 접해본 건 참 오랜만의 일이지만, 같은 인물들을 서로 다른 매체를 통해 보는 것도 괜찮았다. 시점이 수키 스택하우스의 1인칭으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여주인공 캐릭터의 개연성이나 현실감은 드라마가 소설보다 덜하다는 느낌이지만, 남자 주인공의 경우는 드라마 쪽이 좀 더 몰입하기 좋았다. 소설 속 캐릭터가 아무래도 좀 덤덤한 느낌이라면, 드라마 속의 빌은 그야말로 열정적인 캐릭터다. 소설과 드라마의 엔딩처리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내 느낌이 그쪽으로 쏠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소설의 결말을 읽는 것보다는 드라마 마지막회가 더 짜릿했다.  

 버닝은 무슨, 난 그저 트렌드에 낚였을 뿐이야! 하고 친구에게 도도히 답문을 날렸던 나지만, 오늘 드디어 새 뱀프물에 도전했다.(...) 뱀파이어 다이어리라고 이것도 주인공이 뱀픈데 이번엔 여자애 하나 둘러싸고 뱀프형제 둘이 싸우는 삼각관계물이란다.(.......) 오늘 첫회 본것 치고는 남주인공 얼굴이 영 취향 아니던데 이것도 하이틴 로맨스물 티가 팍팍 나던데 9화까지 달릴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공식커플은 스테판&엘레나 같은데 스테판으로 나오는 애가 얼굴이 너무 느끼해서 나한테는 비호감이었다. 9화까지 달릴 수 있을까? 이거 트렌드에 낚인 것치곤 좀 오래 가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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夢影 2009-12-29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뱀파이어물이라면, 전통인 버피 더 뱀파이어를 봐야하는 게 아닐까 싶다. 나도 몇 편 못봐서 평가를 해주긴 그렇지만. 소설로는 애니타 블레이크 시리즈 추천.(그러나 3권까지밖에 없..)

달님엄마 2009-12-29 15:34   좋아요 0 | URL
나한테 더이상 뱀프물 던져주지마(...) 나 장바구니에 벌써 3권이나 들어있다구우 ㅜ0ㅜ
...하지만 고마워. 그것도 기억해 놓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