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 조선의 마지막 황녀
권비영 지음 / 다산책방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모종의 일 때문에 속 태우다가 시간이나 때우려고 교보에 갔더니 마침 덕혜옹주 소설이 매대 앞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걸 봤다. 그러고 보니 독후감 공모전이 있었지, 하고 집어들기를 한 40분 남짓? 순식간에 후루룩 읽어 버렸다.   

솔직히 이 책은 내 취향은 아니다. 그렇지만 소재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필귀정이고 흥망성쇠라 했으니 왕조의 끝은 언제나 서글픈 법이고, 역사는 남아 있는 일원들에게는 더없이 잔혹하게 군다.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역시 비명에 갔고, 총탄을 피해 살아남았다는 아나스탸샤 공주의 이야기는 한낱 루머일 뿐이다. 조선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인물 중 하나인 덕혜옹주 역시 왕조의 마지막 일원들이 겪는 고단한 삶을 고스란히 맛봐야 했다.  

그런 덕혜옹주 개인의 역사를 일제에 짓밟힌 대한제국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물론 그녀가 겪었던 불행은 그녀를 둘러싼 환경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그녀 개인의 불행 때문에 덕혜옹주와 조선왕조를 선(善)으로, 일제와 덕혜옹주의 남편인 대마도 영주를 악(惡)으로 규정하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에는 문제가 있다. 어느 한쪽에만 치중하다 보면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한국 사람임에도 이 책에 끝까지 감정 이입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서술의 잣대가 한쪽으로 기울어 있는 게 눈에 확 보여서였다. 사실 대부분의 한국 사람 감정이 그렇다. 우리는 피해국이고, 일본은 가해국이기 때문이다. 민족적 정서에서 반일감정을 지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덕혜옹주를 다룬 매체 중에 어느 방송국에서 제작한 특별드라마가 있었다. 드라마는 덕혜옹주를 일본 정부에 의해 강제로 정략결혼을 한 끝에 일본인 남편과 딸에게 버림받고 미치다시피 한 비운의 여성으로 그렸는데, 사실 이 드라마는 한국 사람이 일본에 대해 갖는 반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드라마 속 덕혜옹주는 순전히 일제에 의한 피해자였고, 일본과 일본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악인으로 그려졌다.  

그런데 최근 발간된 저서 중에 혼마 야스코라는 일본 학자에 의해 쓰여진 [덕혜옹주]라는 책이 있다. 작가도 후기에 이 책을 거론하면서 글을 쓰는 데 많이 참고를 했노라고 적고 있다. 덕혜옹주를 둘러싼 축 중에 반대편에 속하는 이 글을 보고 있자면 우리가 몰랐던 사실들이 상당수 끼어 있다. 덕혜옹주의 남편으로 알려진 소 타케유키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의 기록에 따르면 옹주는 그와 결혼할 당시부터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고, 조선 사람들이 일인에게 시집을 간 조선의 왕녀를 잊지 않고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그들이 이혼했을 때 조선에서 보내는 항의 서한들이 빗발쳤다는 증언이 바로 그것이다. 혼마 야스코는 옹주의 결혼생활에 대한 대마도 측 사료를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했고, 그것을 찬찬히 보고 있자면 덕혜옹주의 남편으로서의 소 타케유키라는 인물의 고뇌가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병마에 시달리는 아내 수발에다 황족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사사건건 정부의 지시가 내려오고, 조선 신문에 안 좋은 기사만 났다 하면 집안 우체통은 조선사람들의 항의 서한으로 불이 난다. 사생활 없이 사는 요즘 연예인들도 간혹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관심에 버거워할 때가 있는데 한낱 국문학도에 불과한 어수룩한 젊은이에게는 도가 지나친 환경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의 혼혈이라는 이유로 딸 정혜가 겪어야 하는 차가운 현실을 아비로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민족과 황족이라는 입장을 벗어나 온전히 평범한 한 가정을 꾸리기에는 너무 가혹하다. 덕혜옹주를 매정하게 내친 일본인 남편으로만 알고 있었던 우리의 편견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학술적인 단서일 뿐이고, 덕혜옹주를 다룬 책은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책 말고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따라서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사실은 확인할 길이 없다. 

이 책은 그렇게 띄엄띄엄 이루어진 덕혜옹주의 파편들을 상상력이라는 아교를 이용해 이어 붙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작가의 서술은 한국인이 가진 이분법적 잣대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볼 수는 없지만, 대마도에서의 덕혜옹주의 모습과 가족들과의 생활은 일본 측의 기록도 참고했기 때문인지 우리가 몰랐던 소 타케유키의 일면을 설득력 있게 묘사하고 있다. 단지 이 책을 읽을 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우리 스스로가 가져야 할 균형적인 관점이다. 이 책은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한 허구적 재구성이다. 이 불행한 인물을 원인삼아 일본을 비난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달라져야 한다. 감정을 아예 없앨 수는 없겠지만, 조금은 그 감정에서 시선을 떼고 다른 관점으로 덕혜옹주를 바라볼 수는 있다. [소설 덕혜옹주]는 그러한 교훈을 가지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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