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왜 미야베 미유키 빠 주제에 미야베 미유키의 흑백과 메롱을 읽고도 그것보다 이 책을 먼저 리뷰하냐고 물으신다면(물으실 정도로 내게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한다만) 이번 선거, 정치와 관련해서 내가 느낀 미묘한 무력감과 이 책을 보고 느낀 감정이 꽤나 흡사했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어가는지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실감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나도 너도, 이제 대한민국에는 '거의' 굶는 사람이 없고, 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인터넷을 할 수 있는 경제적 형편이 된다는것은 라면으로라도 끼니를 해결할 방도는 최소한 있다는 거니까. 나도 마찬가지다. 다이어트 때문에 주린 배를 움켜쥐며 잠든 적이라든가 귀찮아서 아침을 굶고 회사에 가서 점심시간이 오기만을 손가락 빨며 기다리는 것 같은 일을 제외하자면 말이다. 굶어 죽는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몸을 움직일 힘이 없어지고 어지러워지고 신체 대사가 제 기능을 못해서 배에 복수가 차오르고 면역력이 저하되어 각종 질병에 취약해지고 뼈만 남은 앙상한 꼴이 되어 예가 현실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한 와중에 조용히 숨이 멎는 그런 죽음.
이책을 읽고 가장 선명하게 떠오른 것은, 결국 인간의 욕심이 약자들을 죽인다는 것이다.식량은 분명 많다. 지금의 기술로 세계 곳곳에 식량을 배분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당장 전쟁을 해서 남의 것을 빼앗아 취하지 않으면 굶어죽어야 하는, 그런 일은 이제 없다. (아니 사실 그런 이유로 전쟁이 일어난 경우는 원시시대 뿐일 것 같긴 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당장 내가 저 사람의 것을 빼앗아 취하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처럼 이득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렇게 더, 더, 더 이득을 추구하는 것이 옳다고 박수를 친다. 그놈의 '경쟁력'을 위해 약자들이 먹고 살 곡식과 야채의 경작지, 사냥하고 채집할 풍부한 생태계의 숲을 없애고 대규모 플렌테이션 농장을 만들어 버린다. 아이가 먹을 옥수수를 저멀리 대규모로 사육되는 소공장의 사료로 팔아버린다.
혹은 우리의 무지. 좀더 고기를 먹고 싶다. 커피를 마시고 싶다. 초콜릿을 먹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이 그 이면에 깃든 지리적 불공평성을 만들고, 또 식량을 생산할 땅을 없애고 기호식물을 기르는 대규모 농장으로 만들어버린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다국적기업들은 우리를 무지하도록 방치하고 종용한다.
그런 욕심과 무지가 보편적인 세계에서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 명이라도 더, 체제에 의해 굶게 되는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게 될까? 이 부분에서 나는 답이 떠오르지 않아서 먹먹함을 느꼈다. 이러한 불공정성을 '당연한 세계의 법칙'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과연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멜서스의 인구론을 맹신하며, 기아는 자연의 섭리일 뿐이라고,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속담을 철칙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굶주리는 이들에게 감정이입하게끔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이 '경쟁력'만이 지상 최대의 과제인 것처럼 달리기만 하는 신자유주의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을까.
물음표만이 가득한 독서였다. 읽고 나서 악몽을 꿨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