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3월 1주
작년 2월에 졸업한 후로 모교에 거의 갈 일이 없었는데, 오늘 모종의 일로 학교 사무실에 들르게 되었다. 졸업한 지 얼마나 됐다고 학교가 많이 변했다. 등교가 아니라 등산이라고 불평하던 우리 때와는 달리 입구에서부터 떡하니 에스컬레이터님의 자태가 빛나고 있고 학교 곳곳이 카페다. 아아, 이 눈부신 에스컬레이터님의 위용이라니! 하긴 우리 때도 설치를 하니 마니 떡밥은 많이 뿌렸었다. 어느 핸가는 계획서가 떴길래 이제는 우리도 좀 우아하게 학교를 다녀 보려나 했더니 에스컬레이터는 온데 간데 없고 생뚱맞게 버거X이 입점해 있는 걸 보고 열불을 터뜨린 기억이 난다. 크으, 그 곡절 많은 에스컬레이터를 오르자니 기분이 영 묘하다.
일을 마치고 보니 시간도 넉넉히 남았길래 오랜만에 학교 앞 극장에 들르기로 했다. 낮이라 그런지 극장 안은 휑하니 비었지만 해가 지고 나면 사람 물결로 바글바글할 터다. 신입생 때부터 해오던 버릇 그대로 코너에 비치된 팜플렛을 종류별로 뽑아들었다. 포스 카인드는 취향이 아니고, 솔로몬 케인은 왠지 돈만 쳐바른 것 같고, 무법자...감우성은 좋아하지만 시놉시스가 어째 별론데? 팜플렛은 최신 영화들이지만 나는 어느새 꽃피는 3월의 앳된 대학 초년생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오늘밤은 개학을 맞아 이 휑뎅그레한 극장도 오랜만에 학생 손님으로 붐빌 거다. 그런데 난 뭘 볼까?
이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봐야해-[사랑은 언제나 진행중]
이런 컨셉 격하게 취향이야! 뉴욕 수퍼 싱글맘과 훈남 내니의 짜릿한 스캔들이란다. 캐서린 제타 존스라면 원래부터 좋아하는 배우지만 연하남 꼬시는 얘기라니 예의로라도 봐줘야 한다. (...무슨 예의?;) 가사일에 애보기, 데이트까지 풀옵션을 갖춘 남주인공이라니! 우리 집 남편하곤 천지차이 물론 현실에서 이런 남자를 찾긴 어렵겠지만, 가끔은 이런 귀여운 판타지에 모른 척 속아주는 것도 즐거울 것 같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직장일과 애보기로 현실이 아무리 퍽퍽하더라도 꿈꾸는 건 언제나 공짜니까. 시놉시스는 "잘나가는 커리어우먼이자 두 아이의 엄마 샌디"가 "지나가는 누나들을 뒤돌아 보게 하는 스물다섯 커피보이 애덤"과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란다. 이번 주말은 이거나 볼까나... 남편이 맘에 들어할지 아닐지는 이따 밤에 물어 봐야 알겠지만, 그이가 안 본다면 나 혼자서라도 예매표 끊을 영화다.
봄과 함께 찾아온 남자-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셔터 아일랜드]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했던가. 내 학창시절을 같이 하던 세기의 미남 디카프리오와 지금의 디카프리오는 사뭇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깎은 듯한 얼굴 대신 지금의 그는 다소 통통한 체구에 수염이 덕지덕지 자란 동네 아저씨 같은 인상이다. 한때 파파라치의 카메라에 찍힌 디카프리오의 비만 시절 모습은 예전의 그를 알던 팬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지만,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빠져 나온 그의 얼굴은 예전의 미소년과는 달리 일종의 관록이 풍긴다. 어디선가 본 인터뷰에 따르면 그 자신도 예전의 모습보다는 지금의 얼굴이 더 마음에 든다고 한 것 같은데,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던 그가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셔터 아일랜드]를 가지고 극장가를 노크한다. 그의 변화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는 나에게는 이 영화 역시 놓칠 수 없는 기대작이다. ...그러고 보니 [타이타닉]도 이맘때쯤 개봉했던 것 같은데... 으음, 착각이려나?
나문희 여사 한분만 믿고 갑니다-[육혈포 강도단]
팜플렛을 봐도 뭔 내용인지 모르겠고, 김수미 여사 욕 잘 하시는 거야 다들 알고 있는 거고, 빠방한 스타군단이 포진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나문희 여사 네임벨류 하나만 믿고 리스트에 올린 영화다. 드라마 [장밋빛 인생]에서부터 꾸준히 스토킹 해왔던 나문희 여사, 언제나 엄마 같은 수더분하고 맑은 인상도 좋지만 내가 언제나 감탄하는 것은 나문희 씨가 맡는 역에 따라 색깔을 확 바꾼다는 거다. 재벌가 부인에서 길바닥 인생 전전하는 노친네에까지 배역에 따라 분위기가 전혀 달라진다. 김수미 씨의 경우는 [전원일기]에서의 인상이 너무 강해서 그런지 무슨 역을 해도 비슷비슷해 보이는데, 내가 보는 두 분의 차이라면 카멜레온같이 연기의 색을 바꾸는 사람과 오랜 세월에 걸쳐 독자적인 캐릭터를 만들어온 사람의 그것이다. 아무튼 한국에서 내노라 하는 관록의 여배우들이 포진해 있는 영화임에는 틀림 없으니 기대해도 될 듯, 여기다 고인이 되신 여운계 씨가 계셨다면 완벽했을 텐데(눈물).
봐줄까 말까 그것이 문제로다-유승준 출연으로 화제가 된 [대병소장]
사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유승준에게 별 감정은 없다. 물론 병역 문제가 불거졌을 당시만 해도 그는 명실공히 대한민국 톱싱어 중 한 사람이었다. 한창 사춘기 나이였으니 내 주위에도 당연히 그의 팬들은 많았지만, 내가 그에게 가진 인상을 말하라면 "물렁해 뵈는 사람"이었다. 그저 끝도 없이 사람 좋을 것 같고 왠지 귀도 좀 얇을 것 같은 근육질 가수라는 게 내 인상이었는데, 내 취향이 특이해서 그런진 몰라도 그가 입국조치를 당했니 어쩌니 해도 내 주위 친구들만큼 애통해하지는 않았었다. 다만 그런 일이 있었지... 정도로 기억하는 수준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그가 한국 땅을 밟...는 게 아니라, 정확히는 스크린을 통해 한국에 선보인다. 흠, 유승준을 용서하니 마니 수준을 떠나서 (애초에 나한테는 용서할 껀덕지가 없다니까?)성룡표 사극이라는 게 좀 걸린다. 내가 아는 성룡은 절대 무거운 주제를 선택하는 법이 없다. 언제나 그가 선택하는 방식은 무겁고 어두운 것이 아닌 밝고 가벼운 소재들이다. 물론 재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러시 아워] 시리즈나 [80일간의 세계일주]의 경우는 정말 즐겁게 봤으니까. 그런데 사극이라? 다양한 소재에 도전하는 것도 좋고 유승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으음... 성룡의 역량이 절대적으로 기대되는 부분이다. (제발 웃긴답시고 재미 없는 영화는 만들지 말기를!)
[사랑은 언제나 진행중]의 샌디는 아니더라도 요새 내 일상이 좀 퍽퍽한 건 사실이다. 애는 늦게 잤고 영어공부는 하기 싫고 하루종일 바쁘게 뛰어다니긴 했는데 뭘 하고 다녔는진 모르겠다. 그나마 얘기 상대가 되어 주어야 할 남편이란 작자는 하필 가장 기분 드러운 날 술에 떡이 되어 들어왔다! 성질 같아선 그냥 뽈때기 쥐어잡고 짤짤짤 해줬으면 좋겠지만, .....................훌쩍. 좋아서 마시는 게 아니니 뭐랄 수도 없다. 쳇. 쳇쳇쳇.
밤늦은 열한시 반, 바가지 긁는 대신 남편에게 이번 주말 통닭이나 한마리 뜯을까? 넌지시 물어 봤더니 좋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이런 세월은 한번씩 쉬어 가며 견디는 게 최고지. 통닭과 맥주도 좋지만 이번 주말이야말로 남편하고 사이 좋게 볼 영화나 한편 골라 봐야겠다. 뭐가 좋을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