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내 친구는 그림책
타키무라 유우코 지음, 허앵두 옮김, 스즈키 나가코 그림 / 한림출판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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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엄마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책을 만납니다. 멈칫 하고 아이를 돌아보게 하죠.




단비는 시장에 갈 때 엄마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엄마가 아기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잡을 수 없었습니다.

단비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조금만 붙잡고 걸었습니다.




그림책은 늘 아이의 눈높이를 기억합니다. 아이의 책이야말로 엄마의 최고의 육아서이기도 합니다.
엄마는 조금 바빴기 때문에 무거운 우유도 '겨우겨우 조금만 따를 수 있었다'는 단비를 보면서
안쓰러움이 먼저, 그 다음은 '엄마 없이 조금씩 해보면서 크고 있을' 당연한 아이의 모습에 괜히 뜨거워집니다.

 




키우면서도 키우는걸 잊습니다. 사랑하면서도 잠깐씩 사랑을 까먹곤 합니다. 아주 조금만 성공한 단비의 단추끼우기는 
엄아의 사랑을 새삼 불러들입니다. 요즘 부쩍 엄마의 시간을 사수하기 위해 아이에게 '혼자 해보라'는 주문이 잦아졌습니다. 
한번은 잠꼬대를 이렇게 하더군요. "아니, 아니, 엄마가 해조." 마음은 조금 쓰렸지만 피차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는 엄마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사실을 잠꼬대가, 이 책이 가르쳐 줍니다.

이 시기의 아이에게는 무엇보다 공감 지수가 높습니다. 공감만으로도 아픈 곳이 어루만져지는 엄마의 경험은 아이에게는 특효약쯤 됩니다. 엄마와 자신의 상황을 대입하면서 객관화 하는 과정도 한몫을 할테구요. 

바쁜 엄마를 위해 '조금만' 혼자 해보던 단비도 쏟아지는 졸음에 아주 조심스런 요구를 합니다.
 
"엄마, 조금만 안아 주세요."




단비의 엄마도 저처럼 깜짝 놀랐을 테지요. "엄마, 한 번만 안아 주세요." 하는 서영이는 이미 열 번 쯤 안아달라는 말을 참았을 테니까요. 으스러지게 안아주는 걸로 보상하지만 여전히 내 할 일과 아이 옆에 있어주고 싶은 마음과 싸웁니다. 

'아기에게 조금만 기다리게 했답니다'란 맺음말로 엄마에게 맘껏 안긴 단비의 모습이 찡합니다. 언제든 엄마를 독차지 할 순 없을지라도 '안아주고 싶은 마음과 안기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사랑의 거리는 조금 멀어져야 애틋한 법인가 봅니다. 이런 그림책 한 권이야말로 엄마와 아이의 든든한 응원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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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낭콩 -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에드몽드 세샹 지음, 느릅실 옮김, 유권열 그림 / 우물이있는집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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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칸 영화제 단평영화부문 황금종려상의 화려한 이력만큼이나 '영화'같은 그림책 한 권입니다. 아이들 동화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기대치 않았던 격렬한 내면의 흐름이 묵직한 내용을 뒤흔듭니다. 명작이 아니라면, 정확한 메세지를 담은 동화책들이 흘러갈 방향은 첫 장을 펴는 순간 읽혀지게 마련입니다. 아이들에게는 시시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여러번 반복해서 읽어주는 엄마에게 그닥 신나는 일은 아닙니다.
 
노파와 재봉틀, 오후의 산책, 버려진 화분, 강낭콩, 비둘기. 신선하고 산뜻한 재료는 이 책에 없습니다. 노파도 노파의 차림도 화분도 노파의 어둑한 집도 모두 낡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작고 보잘것 없는 식사용 강낭콩 새싹이 포크와 뜨개질 실로 싹을 틔웠을 땐 세상 그 무엇보다 '새것'이었습니다. 노파가 종일 만들어내는 우아한 아가씨들의 눈부신 핸드백 만큼이나요. 






결국 노파의 마음만큼은 그 무엇보다 낡지 않았음을 증명하는게 이 동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겨우 강낭콩 하나 싹틔웠다고 이야기는 끝나지 않습니다. 이 미싱장이 노파가 강낭콩 줄기를 어떻게, 침묵하며 지켜내는지를 보는 일은 저를 숨죽이게 했습니다. 긴박함마저 감도는 이 조용한 행위들은, 새생명으로 인간이 얼마나 들끓을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엄숙한 과정이었습니다. 노파와 새싹은 분명한 대비를 이루지만 명분있는 공통점을 향해 나갑니다. 생명을 어루만지는 손길과 생명은 하나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조용한 책의 문장은 이상하게도 생기가 넘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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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접기 기본편 - 똑똑한 엄마와 함께하는 창의력과 EQ 세상 DIY 시리즈 놀이학습 7
김연수 지음 / 황금부엉이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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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가 되긴 된나 봅니다. 잡지에 끼워진 사은품같은덴 콧방귀만 끼던 제가 종이접기 책에 들러붙은 200매 색종이에 눈이 핑핑 돌아가다니. 책값에 비하면 참으로 초라한 가격이긴 하지만 '종이접기' 책에 곁든 '색종이'는 상당한 물욕을 자극하네요~





이유야 어쨌든 책이 참 알찹니다. 돌쯤 종이접기 책을 하나 들이긴 했는데요, 좀 촌스러웠다고 해야 할까요. 이 책에 비한다면요. 단계로 따지자면 <첫 종이접기>가 가장 초보적인 책이랍니다. 디테일한 면이 많지는 않지만 가장 단순한 접기로 완성되는 추상적 형태가 상상을 불러오기도 하니까요. 

 







<똑똑한 엄마와 함께하는 창의력과  EQ 세상 종이접기 기본편>은 그 다음 단계쯤 되겠네요, 서영이가 사랑해마지않는 회전목마를 맨 먼저 시도해 보았습니다. 아직 아이가 따라하기엔 무리지만(세돌쯤이면 따라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엄마가 뚝딱 만들어줄 수 있는 장난감이라는 별것아닌 자부심이 솟아납니다. 장난감에 중독된 아이만 아니라면 엄마가 만들어준 것에 대한 애착이 나름 있잖아요~ 아이에게 접어보고 싶은 욕구도 만들어 주고요. 













종이접기가 아이들 손끝발달에나 창의력 훈련에 좋다는 이야기는 육아서에서 심심치 않게 접하는 내용이예요. 꼭 그래서는 아니라도 집안에서 빈둥빈둥 놀다보면 뭔가 아이랑 함께 할 수 있는게 없을까? 늘 고민이죠. 종이접기 아이템, 간편해서 괜찮은 편이예요. 기껏해야 학이나 비행기밖에 떠오르지 않는 미천한 실력을 보완하자면 종이접기책, 아주 쓸모있는 놈이죠. 

역시 종이접기의 매력은 납작한 종이가 입체적 형상이 되어 다시 태어난다는, 아이들에게는 마술같은 일이지 않을까 합니다. 사실, 시연을 하는 제게도 종이접기는 참 신기하기만 합니다. 이 책을 보니 접어 만들 수 있는 영역에 한계란 없네요. 바이올린, 물개, 새장, 무지개 공, 슬리퍼, 바구니… 아이는 제가 접어논 걸 조금 갖고 놀다가, 요새 한참 빠진 가위질을 위한 목표물로 삼곤 하지만 그래도 즐거운 시간입니다.







 종이접기는..미술에서 조형 활동의 영역을 폭넓게 펼쳐나갈 수 있는 놀리고, 단순한 공작놀이의 개념은 아닙니다. 종이를 접어 완성한 결과물로 상상력을 구체화하고, 그것을 상황에 맞게 구성하는 능력을 길어주는 놀이입니다. 또한 자신만의 개성 있고 창의적인 활동으로 재구성하는 능력도 길러주는 훌륭한 활동입니다. 
종이접기를 하면 소근육 발달과 함께 자유로운 감각 활용 능력까지도 기를 수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궁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조형 감각이 생겨납니다. -<똑똑한 엄마와 함께하는 창의력과  EQ 세상 종이접기 기본편> 머리말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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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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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사로잡는 작가' 텐도 아라타가 빚어낸 선과 악, 생과 사가 교차하는 묵직한 삶의 드라마,에 조금 속았다는 기분이 든다. 두툼한 분량의 소설을 겁없이 잡을 때는 '읽은 만큼'의 억울함과, 독서를 마치고 싶어하는 책의 독자적인 관성을 순순히 받아들일 준비도 해야한다. 
 
선과 악, 생과 사가 교차하는 삶의 드라마란, 소설 어디에도 널려 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긴 했다. 단지 이 <애도하는 사람>은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한 데서 제140회 나오키 상 심사자들을 만족시켰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정면이 조금은 선연하고 은유적인 옆얼굴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촌스러운 모습이기도 했다. '정면으로 마주 한다는 건' 선과 악, 생과 사를 대놓고 다룬다는 뜻임과 동시에 비겁하게 뭍어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모든 죽음은 고결하다, 죽음 사람은 성정에 관계없이 애도 받아야 마땅하다, 삶과 죽음은 연장선상에 있다'같은 도덕적 교훈들을 반복적으로 답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애도하는 사람>이 정면으로 바라본, 삶에서의 죽음의 맛은 어떤 것일까. 죽은 사람을 위한 애도 여행길에 오른 시즈토가 죽음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은 단 세 가지다.

고인은 '누구에게 사랑받았고, 누구를 사랑했고, 누가 고인에게 감사를 표했을까'하는 것이다. 명복을 비는 일은 주제넘고, 죽음을 슬퍼하는 일은 시즈토에게 버겁고, 억울한 죽음에도 스스로가 심판자가 아니란 이유로 감정을 거세하며, 가히 수행에 가까운 '애도작업'을 벌이는 이 남자. 이 행위로 그가 얻고자 하는 것은 단 하나, 고인을 기억하는 것. 마치 삶의 끝처럼 보이는 '죽음'이 '기억되는 것'으로 영원을 누릴 수 있다는 듯, 맨살로 드러난 주제를 염불처럼 읊어야 하는 것이 이 소설의 족쇄다. 

물론 전지적 화자가 '애도하는 시즈토'만을 따라붙지는 않는다. 삶보다는 '죽음'에 더 가까운 세 인물이 <애도하는 사람>의 주제에 밀착되어 소설은 나아간다. 죽음을 취재하는 사람,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 죽임을 저지른 사람, 그리고 나머지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 상당히 기획적인 의도가 엿보이는 구도다. 죽음을 바라보기에 이보다 분명한 다각도는 없을 것이다. 


죽음을 취재하는 마키노는 죽음을 읽을거리로 생산하는 상업적 틀에 갖혀있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카스키 준코는 죽음을 애도하는 아들 시즈토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죽임을 저지른 유키요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들은 으례 애도하는 사람에 의해서 조금씩 변했다. 당연히 '삶'의로의 귀착이었다. 시즈토가 살기 위해 죽음을 애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그들도 죽음을 통해, 그리고 고인을 기억하려는 고집스런 행위를 통해, 삶 속에서 언제나 빛나는 '사랑'을 발견한다. 삶에 대한 애착을 발견한다. 분량에 비해 정리 하기에는 상당히 간단한 소설이다. 그래서 나는 좀 억울했다. 

단편이어도 좋지 않았을까. 축소지향적 삶을 사는 그들을 닮은 소설이었다면 읽기에도 보기에도 낳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형식적 장편을 선택한 데는 작가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을 것이다. '삶의 드라마'를 보여주기에, 결코 가볍지 않은 '죽음'을 다루는데 긴 형식은 불가분의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작가는 다년간(7)의 작업량을 고행을 하듯 소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적 고민이 끊임없이 글자로 노출되는 피치못할 소설적 기법에는 '시적인' 압축이 거의 선행되지 않았다. 이건 작가와 필자 사이의 가치관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필자는 이미 죽음을 다룬 은유의 소설들을 보아왔다. <에브리맨>이 그랬고 <슬로우맨>이 그랬으며 하물며 스콧 니어링의 죽음을 앞둔 유서 한장에서도 그 주제는 입체적인 사색의 시간을 가져다 주었다. <애도하는 사람>의 가장 신선한 점은 '애도'에 대한 깔끔한 정의 뿐이었다. 

소설은 작가의 구상을 실현해야 하지만 '작가의 눈'이 드러나는 순간 12시의 신데렐라처럼 초라해진다. 이것은 허구가 '진짜'이기도 한 이유다. <슬로우 맨>은 '작가의 눈'이 전면적으로 이용되는 포스트 모던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소설의 긴장감이 떨어지진 않는다. <에브리맨>의 한 줄 한 줄은 굳이 그 주제를 상기시키지 않아도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압축적이고 묵직한 삶의 발자국과도 같았다. 스콧 니어링이 남긴 유서는 죽음을 대하는 그의 자세는 물론이고 그의 삶이 어땠는가는 기억할 수 있는 정수이기도 했다. <애도하는 사람>은 하이쿠의 정신이, 시적 긴장감이 사라진 자리가 무척이나 그리워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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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즌 파이어 세트 - 전2권
팀 보울러 지음, 서민아 옮김 / 다산책방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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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형체는 다름 아닌 엄마였다.
"더스티."
엄마가 말했다.


프로즌 파이어/팀 보울러/다산책방/2010.1

 

읽기도 전에 책을 빌려주었다. 반나절도 안되어 다 읽었다고 가져온 아이. 
"어떤 소설이야?"
물었다. 주로 무협지를 즐기긴 하지만 동화작가의 꿈을 가진 상당한 다독가 스타일의 아이다. 
제목만 보고 판타지쯤으로 여긴 책이었고, 그저 독서가 즐거웠는지를 알고싶을 따름이었다. 
"네, 판타지는 아니구요, 성장 소설이예요. ... 재밌어요."
내 의도를 눈치챘는지 마지막 말은 한참있다 덧붙인다. 성장 소설이라, 조금 구미가 생긴다. 
"어떤 내용인데?"
"좀 무서워요."
좀 무서운 성장소설이라. 두 권 합쳐 600쪽 가량의 책을 두어 시간 만에 읽어치웠다면, 속도감이 있다는 말인데?
그보단 아이의 '재미'가 궁금했고, 아이의 '무서움'을 발견하고 싶었다. 누군가가 읽은 책을 읽을 때는 의도하지 않게, 전 독서자의 시선을 따라붙는다. 이를테면 어디가 재밌었을까.
소개팅을 나간 친구가 '예뻤다'는 평가를 내린 주인공의 어디가 내친구 마음에 들었는지 알고 싶은 이중의 시선.
 
탄력있는 전개였다. 이미 폼 좀 잡는 소설에 길들여진 내게 수려한 문장이나 철학적인 내용을 발현시켜주진 못했지만, 열셋 남짓아이가 소설적 즐거움을 느끼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애초의 평가대로 무서웠고 재밌었다. 풀리지 않는 정체의 소년과 슬픔을 간직한 씩씩한 소녀의 두려움이 전해져 긴장감이 흘렀다. '죽은 사람의 마지막 말'이라는 상징적인 의식도 자리잡은 수월한 성장소설이었다. 그러나 내가 멈추어 서서 바라본 구절은 바로 저 위의 문장이었다.

사랑해마지 않는 오빠를 잃고 별안간 엄마의 가출을 경험한 꼬마 더스티. 어느 날 눈 앞에 나타난 엄마의 모습.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있는, 부모가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 내가 빌려준 책을 읽은 아이. 아이는 이 구절에서 엄마를 불러냈을까. 한층 망가진 모습으로, 낡아빠진 자동차 시트에 담배불을 눌러끄는, 머리색이 바뀐, 낯선 엄마에게 차갑게 구는 더스티 안에 아이는 잠시 들어갔을까.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봤을까. 그 때부터 소설이 아닌, 마치 일기장을 읽는 듯한 은밀함이 얼핏설핏 들기 시작했다. 

아이가 소설이 흐르는 방향대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퍼하는 감정을 치유받을 수 있었을까. 치유의 비밀 중 한 가지를 터득할 수 있었을까. 슬픔으로 생긴 오기를 드러내고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까. 물음은 끊이지 않았다. 아마도 아이에게 대답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리라. 내가 아이의 상처를 더듬기에 우리는 가끔 책을 빌려주고 단평을 듣는 막연한 사이일 뿐이었다. 

어쩌면 그저 소설로, 재미있게, 읽기만 했을지도 모를 노릇이지만 순수와는 일찌감치 담쌓은 어른의 음흉한 눈은 도무지 직선으로 책을 바라보지 못했다. 소년의 말대로 수수께끼는 아이에게 있고, 아이 스스로 자신의 상처와 마주할 때 해답이 있겠지만 또 '왜 혼자 힘으로 해야 하냐고' 더스티처럼 투정을 부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나마 마음이 조금 놓이는게 있다면 '공감'으로 아이가 치유의 열쇠를 쥐었을지 모르겠다는 기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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