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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영혼을 사로잡는 작가' 텐도 아라타가 빚어낸 선과 악, 생과 사가 교차하는 묵직한 삶의 드라마,에 조금 속았다는 기분이 든다. 두툼한 분량의 소설을 겁없이 잡을 때는 '읽은 만큼'의 억울함과, 독서를 마치고 싶어하는 책의 독자적인 관성을 순순히 받아들일 준비도 해야한다.
선과 악, 생과 사가 교차하는 삶의 드라마란, 소설 어디에도 널려 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긴 했다. 단지 이 <애도하는 사람>은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한 데서 제140회 나오키 상 심사자들을 만족시켰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정면이 조금은 선연하고 은유적인 옆얼굴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촌스러운 모습이기도 했다. '정면으로 마주 한다는 건' 선과 악, 생과 사를 대놓고 다룬다는 뜻임과 동시에 비겁하게 뭍어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모든 죽음은 고결하다, 죽음 사람은 성정에 관계없이 애도 받아야 마땅하다, 삶과 죽음은 연장선상에 있다'같은 도덕적 교훈들을 반복적으로 답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애도하는 사람>이 정면으로 바라본, 삶에서의 죽음의 맛은 어떤 것일까. 죽은 사람을 위한 애도 여행길에 오른 시즈토가 죽음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은 단 세 가지다.
고인은 '누구에게 사랑받았고, 누구를 사랑했고, 누가 고인에게 감사를 표했을까'하는 것이다. 명복을 비는 일은 주제넘고, 죽음을 슬퍼하는 일은 시즈토에게 버겁고, 억울한 죽음에도 스스로가 심판자가 아니란 이유로 감정을 거세하며, 가히 수행에 가까운 '애도작업'을 벌이는 이 남자. 이 행위로 그가 얻고자 하는 것은 단 하나, 고인을 기억하는 것. 마치 삶의 끝처럼 보이는 '죽음'이 '기억되는 것'으로 영원을 누릴 수 있다는 듯, 맨살로 드러난 주제를 염불처럼 읊어야 하는 것이 이 소설의 족쇄다.
물론 전지적 화자가 '애도하는 시즈토'만을 따라붙지는 않는다. 삶보다는 '죽음'에 더 가까운 세 인물이 <애도하는 사람>의 주제에 밀착되어 소설은 나아간다. 죽음을 취재하는 사람,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 죽임을 저지른 사람, 그리고 나머지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 상당히 기획적인 의도가 엿보이는 구도다. 죽음을 바라보기에 이보다 분명한 다각도는 없을 것이다.
죽음을 취재하는 마키노는 죽음을 읽을거리로 생산하는 상업적 틀에 갖혀있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카스키 준코는 죽음을 애도하는 아들 시즈토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죽임을 저지른 유키요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들은 으례 애도하는 사람에 의해서 조금씩 변했다. 당연히 '삶'의로의 귀착이었다. 시즈토가 살기 위해 죽음을 애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그들도 죽음을 통해, 그리고 고인을 기억하려는 고집스런 행위를 통해, 삶 속에서 언제나 빛나는 '사랑'을 발견한다. 삶에 대한 애착을 발견한다. 분량에 비해 정리 하기에는 상당히 간단한 소설이다. 그래서 나는 좀 억울했다.
단편이어도 좋지 않았을까. 축소지향적 삶을 사는 그들을 닮은 소설이었다면 읽기에도 보기에도 낳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형식적 장편을 선택한 데는 작가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을 것이다. '삶의 드라마'를 보여주기에, 결코 가볍지 않은 '죽음'을 다루는데 긴 형식은 불가분의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작가는 다년간(7)의 작업량을 고행을 하듯 소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적 고민이 끊임없이 글자로 노출되는 피치못할 소설적 기법에는 '시적인' 압축이 거의 선행되지 않았다. 이건 작가와 필자 사이의 가치관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필자는 이미 죽음을 다룬 은유의 소설들을 보아왔다. <
에브리맨>이 그랬고 <
슬로우맨>이 그랬으며 하물며 스콧 니어링의 죽음을 앞둔
유서 한장에서도 그 주제는 입체적인 사색의 시간을 가져다 주었다. <애도하는 사람>의 가장 신선한 점은 '애도'에 대한 깔끔한 정의 뿐이었다.
소설은 작가의 구상을 실현해야 하지만 '작가의 눈'이 드러나는 순간 12시의 신데렐라처럼 초라해진다. 이것은 허구가 '진짜'이기도 한 이유다. <슬로우 맨>은 '작가의 눈'이 전면적으로 이용되는 포스트 모던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소설의 긴장감이 떨어지진 않는다. <에브리맨>의 한 줄 한 줄은 굳이 그 주제를 상기시키지 않아도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압축적이고 묵직한 삶의 발자국과도 같았다. 스콧 니어링이 남긴 유서는 죽음을 대하는 그의 자세는 물론이고 그의 삶이 어땠는가는 기억할 수 있는 정수이기도 했다. <애도하는 사람>은 하이쿠의 정신이, 시적 긴장감이 사라진 자리가 무척이나 그리워지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