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들어가는 독서의 맥을 살려라. 강하고 빠른 가슴 압박과 열린 기도로 들어오는 타인의 호흡. 쫓기는 자의 숨결이라도 좋다. 그게 날 더 숨가쁘게 할 지도 모른다. 가느다란 숨 한 올이 터질 때까지 내 머리를 젖히고 입을 덮어 축축하고 비릿한 날숨을 쑤셔 넣어라. 밤새 숨죽인 배추마냥 질기고 뚝뚝한 문자에 기필코 속도감을 실어줄 만한 구원수는 스릴러! 너 뿐이다.

만날 쓰는 것도 어렵지만 읽는게 어려울 땐 방도가 없습니다. 안 읽으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읽고 싶은 날, 장마도 흐지부지한 요새가 그렇습니다. 어쩌다 제프리 디버의 <잠자는 인형>을 들고 문자의 엔터테인먼트를 경험합니다. 책오락은 삼가는 지루한 아줌마가 제대로 걸렸죠. 미국식 스릴러도 스릴러였지만, 김영사의 자회사 비채가 선보인 <모중석 스릴러 클럽>에 얄팍한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지은이도 옮긴이도 아닌 '모중석'과의 짤막한 인터뷰가 <잠자는 인형>의 마지막 세 쪽을 여흥으로 남겼을 때 검색어를 입력했습니다. '한사람이 기획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시리즈물을, 그것도 스릴러 장르의 책만 모아 출간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동아일보가 썼습니다. 10년동안 준비한 자료를 들고 도서출판 비채의 문을 두드렸다던(모중석 스릴러 클럽) 그의 행보가 가명을 한층 음침하게 만들더군요. 모던 스릴러 전문가라. 시간 죽이기로 작정한 독서에 즐거운 허영 한꺼풀.
곧장 '모중석 스릴러 클럽'의 다른 작품을 보아도 좋았겠지만 비채의 다른 장르기획인, <블랙 앤 화이트>시리즈(일본 추리 소설)의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를 숨 한번 고르지 않고 달아 읽었습니다. 마치 범인이라도 쫓듯 <살인광시곡1>까지 읽었을 땐 3일이 후딱 사라지고 없더군요. 그러고보니 미국, 일본, 한국의 장르문학을 맛본 샘입니다. 더불어 꽤나 유쾌했던 자연주의자 탐정소설<시튼 탐정 동물기>까지, 숨가쁜 독서 호흡을 들려드릴까 합니다.
잠자는 인형/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비채
미국식 스릴러물의 전형. 장르문학의 '원소스멀티유즈'로 영화가 떴다 하면 원작을 찾아봐야 될 정도니, 읽으면서 영상의 컷을 구상하는 것도 무리 없는 연결. 이미 작가의 작품 <본 콜렉터>가 영화화 되었고, 이 작품 역시 영화로의 재탄생을 기다리고 있다.
거짓말을 할 때 사람이 느끼는 스트레스는 그들을 네 가지 감정 상태 중 하나로 떠밀어버린다. 분노하거나, 의기소침하거나, 부정하거나, 적당한 타협을 통해 곤란한 상황을 빠져나가려 하거나. 워터스가 방금 내뱉은 '맹세코'와 '정말'이라는 단어는 흥분된 몸짓과 더불어 기선으로부터 많이 벗어난 것이었다. 댄스는 교도관이 거짓말의 부정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걸 확인했다. ..상대가 분노 단계에 접어들었다면 그가 기진맥진해질 때까지 계속 자극하는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부정 단계라면 사실을 무기 삼아 끈질기게 공격해야 한다.
유능한 여성 수사관 캐트린 댄스의 지적 활약이 돋보이는 이 스릴러는 동작학을 바탕으로 한 심문 전략을 전면에 내세운다. 지능적인 범인의 특질상 범인에 대한 심리분석이 다음 동선을 예측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양들의 침묵>을 필두로 한 미국 스릴러에서 공들여 다뤄지는 '수사관 머리 위에 올라선 범인'의 유형을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똑똑한 범인들은 범죄라는 사슬마냥, 얽매인 자신의 규칙에 포박되기 마련이다. 철저한 규칙은 변수에 아둔하기도 해서 결정적인 공격의 대상이 되고, 결국 거듭되는 반전의 빌미를 제공한다. 반전을 감상할 때, 반전에 필요한 복선을 얼마나 세심히 깔았느냐가 스릴러의 신뢰도를 높인다. <잠자는 인형>의 경우 대체로 네 가지의 반전이 은폐된 진실의 전구를 켠다. 서사를 완벽히 리와인드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가장 중요한 모티브라고 할 수 있는 '잠자는 인형', 즉 숨겨진 피해자 부분에선 수시로 팽팽한 암시를 줬던 것 같다.
범죄 해석으로 뒤꽁무니를 쫓을 수밖에 없는 수사관이란 위치의 벌점은 범인의 프로필을 완성하며 만회된다. 범인 검거보다 심리적 압승이 더 짜릿하게 느껴진다. 범인을 잡느냐 놓치느냐는 지루한 정의의 문제일 뿐, '범인을 이해했다'는 통제적 안정감을 더욱 갈급하게 된다. 오히려 그가 더욱 심란한 난제를 던져 수사관을 골탕먹이길 바라는 건 스릴러에서 실현될 수 있는 환상이다. 이제는 익숙해진 프로파일링 수사법과 인적 물적 자원을 활용한 기존의 수사법이 적절히 혼용되면서 두뇌적, 동적 추격 모두를 지루함 없이 만끽할 수 있다.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비채
얼핏 추리물과는 어울리지 않는 편안한 서술, 명탐정의 기대를 어기는 연이은 실수, '조각상에서의 동공처리'라는 미학적 모티브, 어느 하나 인상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더불어 치밀한 복선에 대한 괜찮은 재능 보다는 실제하는 가능성들이 어떻게 '사건'으로 변질되는 지를 지켜보는, 완벽하게 '과정'을 즐길 수 있는 본격미스터리다.
'본격'이라는 단어가 궁금해 찾아봤지만 역시 작가이자 이 책의 탐정인 노리즈키 린타로의 설명이 가장 유력했다. 후미에 실린 인터뷰에서 에도가와 란포의 탐정소설의 정의를 언급한다. "본격은 '수수께끼'와 '논리적 해결'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수수께끼가 서서히 풀려가는 경로의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거죠."
'실은 이랬다'는 재미만으로도 실은 탐정 소설의 역할에 만족하긴 하지만, 독자와 탐정과의 공평한 싸움이 가능하다면 어떨까. 동일한 사실관계의 조건에서 탐정을 제치고 사건 해결의 열쇠를 선점할 수 있다면? 그는 간혹 틀렸으나 나는 맞았다면? 쾌감은 배가 될 것이다. '과정'을 즐길 수 있었다는 인상평은 처음 꺼냈던 이 책의 매력에 근거를 둔다.
의도를 거의 감지할 수 없었던 초반부 일상의 묘사는 사건이 발생되기 이전부터 독자가 참여할만한 여지를 주는 샘이다. 일종의 '사건일지'를 읽어가는 긴장감보다는 실제 '사건'을 맞닥뜨리는 거욷함이 즐겁다. 게다가 여러 가설을 재고하면서도 실패로 이어지는 수사상황에 '풀고 싶다'는 욕구가 유연하게 찾아온다. 또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1부에서 5부로 이어지는 동안의 각 장의 서문을 장식하는 루돌프 비트코어의 <조각의 제작 과정과 원리>의 구절들이 제시하는 탐구의 가능성이다.
조각에서의 동공 표현의 의미는 복선만큼이나 강력한 무기임을 점차 실감하게 된다. 여태 추리 소설의 숨겨진 가능성에 많은 기대를 걸고 강력한 게 '나타나길' 기다려 왔다면, 드러난 증거들을 선별해서 사건의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발견하기' 작업이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의 본격의 미덕이 아닌가 한다.
슈퍼맨과 같은 초인적 탐정의 마력에 약간 진력이 났다면, 완벽한 범행에 걸맞는 해체력보다 (인터뷰어가 말했던)'복선을 관통하는 키워드-오해', 즉 인간사의 불편한 감정들을 수사하는 탐정을 만나고 싶다면 상당히 재미있을 소설이다.
시튼 탐정 동물기/야나기 코지 지음, 박현미 옮김/루비박스
아마도 이 책은 '본격'이란 수식어는 달지 못했을 것이다. 사건의 해결사도 탐정이 아니거니와 독자는 모든 추리과정을 전적으로 전해들을 수 밖에 없는 수동적인 입장에 처한다. 독서 당시에는 미처 알아채지 못한 사실이었지만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를 통해 비교해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이 책의 재미가 덜하진 않다. <시튼 탐정 동물기>엔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동물 탐정들이 능력을 과시하고 있으니까. 누구보다 야생동물들을 사랑하고 깊이 이해하는 어니스트 시튼은 실제 인물이기도 하며, 각각의 사건들은 모두 그의 저작에서 발굴한 사소한 단서들을 확대한 재기 넘치는 상상물이다.
숲 속의 자연주의적 삶에 매료된 시튼의 야생 경험담과 담백한 철학들이, 유쾌하게 해소될 크고 작은 사건들과 어우러져 손바닥 크기의 책만큼이나 아기자기한 매력을 준다. 동물들이 사건 해결의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탐정소설들을 간혹 보긴 했지만 동물에 대한 세심한 관찰력만으로 완성되는 추리는 무척 독특하다.
야생동물의 흔적으로 몸체를 상상하고 생태를 가늠하는 추리력이 탐정의 직감, 논리력과 얼마나 유사한지 <시튼 탐정 동물기>의 저자는 간파하고 있었으리라.
살인 광시곡 1/김주연 지음/아름다운사람들
2편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1편밖엔 못봤단 얘기다. 신선하지만은 않은 거친 문장들과 정형화된 캐릭터들이 장막이 되긴 했지만 저자가 전달하려는 메시지 만큼은 강렬하달밖에. 병적이고 음울한, 현실에선 좀처럼 만날 수 없는 극단적인 인물들이 대거 등장해서 예술가와 지식인들의 이면을 뒤집어 깐다.
그 뒤집어진 주머니에서 털리는 먼지 중의 하나가 아동 토막 살인이다. 빤지르르한 엘리트 계층의 용의자가 의아하게도 자신을 껴안아줄 줄 엄마를 찾는 듯, 법의학자를 불러세운 1편의 마지막 장은 기초적인 궁금증을 불러세운다. 그는 범인일까 아닐까.
1편의 시작과 끝은 '살인사건'에 대한 경과 보고이지만 나머지 두 인물들은 일단 그와는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2편에서는 그와의 연결점을 확연히 제시할 것이라고 짐작된다.
천재와 거장 사이에서, 연주자와 작곡가 사이에서, 영감과 현실 사이에서 외롭고 괴로운 '서연'이란 인물이 <살인광시곡>의 배경음악이다. 새끼 손가락의 두 마디를 잃은 비애의 피아니스트 영애는 이 책의 작곡가 구실을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용의자로 지목되 불안한 감정들을 수시로 드러내야만 하는 안유상은 <살인광시곡>의 연주자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말하자면 음악의 광기에 얽힌 살인악보다. 예술에 덧붙여진 수많은 수식어 중에 '아름답다'를 빼놓았을 때, 창작과 열정에 수반되는 고통과 희생 모멸감, 광적인 희열 등의 검은 그림자를 나열한다. 찬란해야만 할 재능의 힘이 역으로 치명적인 독(毒)처럼 재능의 몸통을 괴롭힌다.
음악적 구성이 될 지는 예의 지켜봐야겠지만 창작욕의 극단과 인간성의 극단이 만나 연주될 가파른 클라이막스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