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제국 이야기 - 유라시아 대륙 양단에 강력한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 흉노를 찾아서
장진퀘이 지음, 남은숙 옮김 / 아이필드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반지의 제왕’을 기억할 것이다. 그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암흑 군대가 내뿜는 장엄하면서 압도적인 암울한 기세이다. 그러면 그 모델은 무엇이었을까? 톨킨은 그 원형을 로마제국을 무너트린 훈족의 침략에서 얻었다.

“로마제국을 무너트린 힘은 바로 중앙아시아에서 온 갈리아와 이탈리아를 침략한 아시아의 야만족들이다. 로마를 무너트린 것은 로마제국에 입성한 게르만족이엇지만 그들 역시 피난민 신세에 불과햇다. 고트족이 로마군단보다 더 두려워한 존재는 따로 있었다ㅓ. 바로 중앙아시아에서 말을 타고 바람처럼 나타난 난폭한 전사들이다. 그들은 매우 위협적인 존재로 곧 로마군대의 방어를 뚫고 로마 각 전역에 퍼져나갓다.”

“흉노족(훈족)이 처음 유럽에 나타났을 때 두터운 갑옷으로 무장한 채 자신들이 최고라 자신하던 로마 군사들은 하나같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은 말을 제 몸 다루듯하는 륭노와 같은 민족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흉노를 보며 신화에 나오는 켄타우루스보다 더 신기해햇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신기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가공할 전쟁기술로 게르만족과 로마군을 무너트렸다.

그들의 주무기는 말 위에서 쏘는 활이었는데 그들의 활은 조선시대에도 사용햇던 복합궁으로 사거리가 200미터에 달했다.

“당시 로마 군사들의 무기를 살펴보면 그들이 왜 흉노군을 두려워했는지 그 이유가 쉽게 이해될 것이다. 로마군이 사용하던 원거리 무기는 투창인데 치명적인 약점은 사정거리에 한계가 잇다는 것이다. 로마군의 화살 역시 최대사거리가 30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로마군이 적들의 정체를 파악도 하기 전에 흉노의 화살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고 로마군의 갑옷을 종이 뚫듯 뚫어버렸다.”

당시 기병은 보병 20명과 맞먹는 전력이엇다. 후에 몽골군이 그랬듯이 복합궁을 사용한 타격력에 더해진 기병을 활용한 전격전에 게르만족은 물론 로마군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면 왜 그들은 유럽에 간 것일까? 그 이유는 쫓겨났기 때문이다.

유럽에선 훈족이라 불린 그들을 중국에선 흉노라 불렀다. 그들은 몽골고원의 첫번째 주인이었고 그 이웃인 중국인들은 역사 이전부터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진시황은 그들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세웠다. 연나라, 조나라, 진나라가 이전에 쌓았던 방벽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한 것이니 흉노의 위협은 진시황 때도 상당히 오래된 것이었다.

흉노는 몽골고원의 주인으로서 제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유목민이 하나의 정치체를 이루어 통일되었을 땐 칭기스칸이 그랬듯이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진의 뒤를 이은 한나라 역시 흉노제국 때문에 고생을 했고 저자세로 조공이란 뇌물을 바치고 신하를 자칭하며 자존심을 구겨야 햇다.

흉노에 대해 이를 갈 수 밖에 없었던 한나라는 조용히 칼을 갈았고 한무제에 이르러 힘이 갖춰졌을 때 흉노와 전쟁을 벌인다. 한무제와의 전쟁은 그리 대단한 타격은 아니었다.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대패하는 경우도 잇었지만 대개는 그리 큰 패배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한무제는 물론 그 후의 황제들도 흉노와의 전쟁을 계속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일어나는 피해는 눈덩이가 되어 감당하기 힘들게 되었다. 소모전에 지친 흉노제국의 권위는 무너져 갔고 유목민들의 고질병인 분열증이 일어나게 된다. 결국 흉노제국은 내분으로 더욱 약화되고 분열되어 마침내 한나라에 속국이 된다.

한나라와 속국의 관계가 되면서 둘의 관계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된다. 그러나 전한이 망하고 신나라가 들어섰을 때 신나라는 얌전히 있는 흉노를 완전히 꺾어버릴 생각을 하게 되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흉노로선 살기 위해 싸울 수 밖에 없었다.

새로 시작된 적대관계에서 흉노는 패하게 되고 속국이 될 때 그랫던 것처럼 내분이 일어나 한 무리는 한나라에 붙어 남흉노가 되고 북흉노와 대리전을 벌인다. 고립된 북흉노는 점점 몽골고원에서 쫓겨나 서쪽으로 근거지를 옮기게 된다.

이후 남흉노는 5호16국 시대의 동란에 참여해 나라를 세우지만 그 동란에 참여했던 다른 호족들과 마찬가지로 민족 자체가 중국에 동화되어 사라진다.

서쪽으로 간 북흉노는 400년간 서쪽으로 서쪽으로 근거지를 옮기다 우크라이나에 도달한다.

“20년 동안 매일같이 로마인의 선혈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알프스 산맥으로 흘러들어갔다. 훈족은 알란족을 알란족은 고트족을 고트족은 다시 타이팔리족과 사르마트인을 공격했고 일리리아에서 쫓겨나온 고트족은 또 다시 우리 로마를 공격햇다. 이 전쟁의 끝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엇다.” 당시 로마의 역사가 암브로시우스의 기록이다.

훈족의 위세는 대단했다. 아틸라의 대에 훈족은 흑해에서 라인강까지의 영토를 차지하고 로마제국을 압박하며 조공을 챙기는 유럽 최강의 제국을 만들었다. 그러나 훈족의 제국은 아틸라가 죽고 바로 무너진다. 저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성숙한 관료체제가 형성된 로마제국과 비교하면 훈족의 정치체제는 지나치게 단선적이엇다. 심지어 그들의 선조들보다도 못햇다. 좌현왕이 선우의 공인된 후계자가 되는 최소한의 제도조차 아틸라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시행한 것은 전형적인 영웅 정치로 만약 피라미드 맨 위의 지도층이 무너질 경우 전 제국이 한순간에 와해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물 형태의 통치체제만이 정권의 장기적 안정을 보장할 수 있지만 아틸라는 이러한 시스템을 유지하지 않았고 잠재 후계자들 중에도 정권의 핵심계층에 속한 자들이 얼마 없었다. 아틸라가 죽은 후 훈제국이 급속히 붕괴한 것도 이 때문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가 스스로 자초한 결과엿다.”

“말 위에서 세계를 정복할 수는 잇지만 말 위에서 세계를 다스릴 수는 없다.” 칭기스칸 때 나온 말이다. “말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채찍을 휘두르며 방목하는 것과 칼을 휘드르며 사람을 죽이는 것 고작 이 두 가지 뿐이다. 정복 후에는 어땠을까? 비록 크나큰 영토가 수중에 들어왔건만 언어도 종교도 다르고 각기 다른 생활방식을 지닌 민족들이 섞여 있는 고아활한 영토를 무슨 수로 다스린단 말인가? 각 민족에게 골고루 이익을 배분하여 균형 잡힌 세력을 유지하는 일은 영웅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였다. 이럴 때 고ㅝㄴ력 유지와 원활한 통치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각 민족 사이에 경제적 유대관계와 정신적 유대감을 만드는 것이다. 초원 제국은 군사정복으로 형성된 하나의 결과물로 초원지대를 생활의 근거지로 삼고 잇었지만 지형이 복잡하여 경제 여건과 발전 속도는 제각기 달랐고 따라서 통일된 국내시장을 형성하기가 불가능햇다. 통일된 시장이 없다보니 자연히 경제적인 유대관계가 만들어지기 어려웠다. 그래서 광활한 초원을 다스리는 영웅은 두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하나는 간섭이나 참견 없이 조공만 열심히 관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아예 농경지를 유목지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합리적인 통치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초원제국의 영토가 넓어질수록 분열과 붕괴의 속도는 그만큼 빨라졋다.”

말 위에서 어떻게 내려올 것인가가 언제나 유목민족의 제국이 해결해야 할 문제엿다. 훈족의 제국은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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