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사 1 - 일본이 말하는 일본 제국사, 1926~1945 전전편戰前篇
한도 가즈토시 지음, 박현미 옮김 / 루비박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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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대체역사 소설은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이라 할 수 있다.

대체역사 장르는 항상 'What if'란 가정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가령 남북전쟁에서 남군이 이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치독일이 이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같은 식이다.

'비명을 찾아서'의 what if는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중상만 입고 살아남은 이후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복거일은 1980년대 서울을 그리고 잇다.

그가 그리는 서울은 소설의 부제 '경성, 쇼와 62년'이 말하듯 일본의 식민지 상태이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벌이지 않았고 덕분에 그때까지도 조선과 만주를 영토로 갖고 있다. 그리고 경성 즉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일본어를 쓰고(조선어가 있었다는 것도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한다) 일본식 이름을 쓰며 명절에는 남산의 신사를 참배한다.

이 모든 것이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 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이 어떻게 그런 큰 차이를 낳을 수 있었을까?

이책의 저자가 그리는 전전 일본의 역사를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시대 일본을 대표하는 정치가였다. 그의 죽음은 단순히 정치가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메이지 세대의 죽음이었다.  

'울지 않으면 죽여 버려라, 소쩍새' (오다 노부나가)
'울지 않으면 울게 만들어라, 소쩍새' (도요토미 히데요시)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려라, 소쩍새' (도쿠가와 이에야스)

다들 아는 말일 것이다. 메이지 세대 정치가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가까웠다. 될 때까지 기다리는 신중함이 그들의 특징이었다. 그들의 정치는 유도에 가까웟다. 그들의 정치는 억지로 무엇을 하려들지 않았다. 그들은 그때 그때 대세를 지켜보다 일이 대세의 흐름을 타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국내와 국외의 흐름에 민감햇고 때를 기다리다 때가 왔을 때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 원하는 바를 이루어 냈다.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은 그런 정치가들의 퇴장을 알리는 사건이었고 일본 정치 엘리트들의 세대교체를 불러왔다. 그리고 그들은 이전 세대가 물려준 유산을 모조리 날려버렸다.

"메이지 유신 이래 러일전쟁까지 40년이 걸려 만들어진 일본은 러일전쟁 후 40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대구법과 같은 결과가 만들어졌다. 쇼와사는 너무나 허무한 역사처럼 보인다. 러일전쟁 직전의, 아니 청일전쟁 전의 일본으로 돌아갔으니 50년간의 길고 긴 고통은 무위로 돌아갔다. 쇼와사란 그처럼 무위가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1926년부터 1945년까지를 다루는 1권의 결론이다. 이책은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다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메이지 세대를 이은 쇼와 세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니라 오다 노부나가였다는 것이다. 될 때까지 기다리는 스타일이 아니라 되게 하는 스타일이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쇼와 세대는 오다 노부나가의 의지만 닮았을 뿐 그의 천재성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일본제국의 몰락은 만주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만주는 '일본의 생명선'이라  불렸고 그렇게 불린 이유를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선을 일본이 차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조선은 '일본을 겨누는 비수'였기 때문이다. 지도를 보면 쉽게 이해가 가는 말이다. 조선을 차지한 후 이번엔 만주가 문제였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고 조선을 지키려면 만주는 반드시 차지해야 하는 최대한의 방위선이었다.

둘째는 영국과 미국에 자원을 의존하던 일본은 의존에서 벗어나 다른 열강과 동등한 힘을 갖기 위해 자원공급지로서 만주가 필요했다.

이후 모든 문제는 만주를 차지하고 지키려는 데서 시작된 것이다. 만주를 지키기 위해 중국과 싸운 것이 꼬였고 중일전쟁은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미국과 영국과의 갈등을 일으켰고 영미와의 갈등은 태평양전쟁으로 커졌다.

1945년 일본제국이 멸망할 때까지의 쇼와사는 작은 전쟁이 감당할 수 없는 전쟁으로 자체증식하는 과정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전전은 물론 전후 일본인들의 심정을 보통 '피해자 의식'이라 한다. 우리는 그렇게 하려 하지 않았는데 환경이 우리를 그렇게 몰아갔다.

전후 도쿄 전범재판에 대해 일본인들은 속으로 냉소적이었다. 우리는 침략자가 되려고 된 것이 아니다. 환경이 그렇게 몰아갔고 그렇게 우리를 몰아간 것은 바로 재판관 자리에 앉아있는 당신들이다.

전후 일본의 리더들이 전전의 잘못에 대해 사과하지 않으려 하는 심리의 내면에는 그러한 피해자 의식이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다일까? 저자는 그렇게 묻는다. 만주가 목적이었으면 그후의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의 확전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만주사변에서 태평양전쟁까지 확대되는 쇼와 연간의 사건들을 추적하면서 내리는 결론은 어디까지나 문제는 일본의 엘리트들의 잘못이었다는 것이다. 저자가 내리는 죄명은 '오만한 무지'이다.

나치의 등장을 집단 정신병리현상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의 군국주의 역시 그와 맞먹는 정신병리현상으로 보는 해석이 많다. 그러나 저자는 그렇게 거창한 설명이 필요없다고 말한다. 문제는 단지 무능과 무지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저자의 결론을 요약해보자.

전쟁이 끝난 뒤 일본인 사망자의 합계는 260만명이라고 했는데 최근의 조사에선 310만명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만큼의 사망자가 20년 쇼와사의 결론이다.

그 결론이 가르쳐주는 교훈은 첫째 국민적 열광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시대의 기운에 제멋대로 휘둘려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열광 그 자체가 권위를 가지기 시작하여 사람들을 이끌어 가고 휩쓸어 버렸다.

대미 전쟁으로 갈 것을 알면서도 별 생각 없이 삼국동맹을 맺었다. 양식 있는 해군 군인은 대부분 반대했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에 찬성으로 바뀐 것은 정말로 시대의 기운이었다. 쇼와 천황은 '독백록'에서 "내가 마지막까지 '노'라고 말했다면 아마 유폐되거나 죽음을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둘째 이성적인 방법론을 전혀 검토하려 하지 않았다. 먼저 희망사항을 만들고 이어 능숙한 작문으로 장대한 공중누각을 쌓는 것이 일본인의 특기인 것같다. 모든 일이 희망하는 대로 움직일 거라 생각한다.

소련이 만주를 공격해 올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지금 공격하면 곤란하다', '아니 공격해 오지 않는다', '괜찮다. 소련은 마지막까지 중립을 지켜줄 것이다'라는 식으로 합리화해버린다.

물론 '곤란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자신감은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황군은 러일전쟁 이래 불패했다. 져본 적이 없었기에 정신력만 가지면 어떤 막강한 화력에도 대등하게 대항할 수 잇다고 믿었다.

그리고 불패신화에 어긋나는 정보는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었다. 결국 오만한 무지라는 것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알고 있으면서도 무시하고 고집을 피우는 것이다.

셋째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주관적 사고에 의한 독선에 계속 빠져 있었다. 넓은 의미에서 시간적, 공간적인 대국관이 전혀 없었다.

쇼와사 전체를 한마디로 말하면 일본의 지도자들이 아무런 근거 없는 자기 과신에 빠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데도 "괜찮다, 이길 수 있다." "괜찮다, 미국은 합의를 해줄 것이다'라는 말들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 결론이 어긋났을 때의 태도는 끝을 알 수 없는 무책임함이었다.

근거 없는 자기 과신, 교만스러울 정도의 무지함, 끝을 알 수 없는 무책임. 저자의 쇼와사에 대한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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