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세계의 앨리스
이요훈 지음 / 이파르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이책은 인터넷과 모바일이 없으면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고 느끼지 못하는 세대에 관한 책이다. 얼마전에 나온 ‘대한민국 컬처코드’란 책도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같은 주제를 다루는 두책은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두책 모두 인터넷과 모바일이 일상이 된 2000년대 세대의 행동양식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 컬처코드’는 학자가 쓴 책답게 3인칭의 전지적 시점으로 2000년대를 회고한다. 그러나 이책의 시점은 1인칭이며 일관된 의도를 가지고 쓴 것이 아니라 블로그에 썼던 글들을 한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기 때문에 대상을 전체적으로 묶는 시선을 갖고 있지 않으며 자신의 경험을 기준으로 대상을 설명한다. 그러나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책은 일관된 저자의 견해 위에서 쓰여져 있다.

“TV에서만 보던 김주하 앵커는 ‘나 여기 못 있겠어요’하고 문 열고 나갔다가 ‘죄송, 실수였어요’하고 다시 문 열고 들어오기도 한다. 모 그룹 회장님은 자주 농담을 하고, 김연아 선수는 한번 들어오긴 했는데 별로 말은 안 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로봇은 계속 ;이.런.글.이.올.라.왔.습.니.다’하고 떠들고 한쪽에선 목소리 높이며 토론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와중에도 나는 ‘휴대폰이 보이지 않아요, 징징징’하면서 사람들에게 하소연하고 있고… 이것이 트위터다. 누구나 아무 때나 들어가서 노닥거릴 수 있는 4차원 카페. 사실 트위터의 팔로잉은 카페에 들어가 ‘아는 척’하는 것과 똑같다. 카페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 대부분은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다 팔로잉하면서 우리는 ‘아는 척’을 시작한다. 그러다 진짜 친해지기도 하고, 알기는 알아도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사람도 있게 된다. 사실 카페 바깥의 세상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조금 더 좁혀졌다는 것 정도일까.”

인터넷이니 블로그니 트위터니 새로운 것이 나올 때마다 세상이 개벽을 한 것처럼 떠들어대지만 금방 시들해진다. 결국은 그것들은 도구일 뿐이고 그 도구를 쓰는 사람은 여전히 그대로이니 실제 변하는 것은 없다. 물론 그 도구가 새로운 만큼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이란 도구는 2002년 월드컵 응원을 낳았고 대통령까지 낳았으며 촛불집회를 키웠다. 우리는 그것을 ‘네티즌의 힘’이라 부른다. 그러나 “네티즌의 힘을 얘기하면 할수록, 그것의 힘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는 아주 단순한 사실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자신이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정치에 엄청나게 불만을 가지고 있어도 말도 안되는 사기를 당해도 그것을 해결해줄 시스템이 대한민국에는 없다는 지극히 당연하서 이젠 다들 문제로도 여기지 않는 사실을. 이들이 인터넷이란 공간에서 자신의 울분을 토해내고 자신의 생각을 밝히며 여론을 만들어가는 이유는 그런 이야기를 할 다른 시스템이 대한민국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네티즌의 힘이 사회를 이끄는 힘으로 등장한 것은 네트워크가 세계에서 제일 발달한 나라여서가 아니다. 이 사회가 그것을 풀어줄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

2000년대의 변화는 그런 시스템이 수단이 등장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가를 보여주는 것일 뿐 인터넷의 힘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터넷 이전과 이후는 다를 것이 없는가?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저자는 우리는 인터넷과 모바일이 만든 ‘이상한 나라’에 살게된 앨리스 세대라고까지 말한다. 저자는 그 근거를 온라인 게임에서 찾는다.

“신전에 신이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신전을 통해 신이 나타난다.” 하이데거의 말이다. “그리스 로마의 많은 신들은 이제 사라지고 하나의 유일신이 들어선다. 그 유일신의 명령에는 형상을 세우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 교회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한다. 그것은 신상이 배제된 대신 건축 그 자체의 틀 속에 신의 신성함을 경험하는 세계였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그 세계가 구축되기 위한 첫번째 시도였다. 그것은 소박한 양식이었고 그것은 엄격하고 딱딱한, 죽은 자를 기리는 납골당 같은 분위기의 건축들이었다. 편안함과 안락함을 찾아볼 수 없는 그저 ‘말씀이 육신이 되는 신비’의 인상을 준다는 목적만을 가지고 있었다. 고딕양식은 황폐하고 잔혹했던 환경의 한가운데서 만들어진 양식이었다. 신이 사는 하늘에 닿으려는 뾰족한 건물 안의 기둥과 기둥의 사이에는 수천 조각으로 나누어진 스테인드 글라스가 배치되었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매혹적이고 아름답게 변한 빛들의 잔치 속에서 사람들은 신의 황홀경, 천국의 세계를 맛보았다.”

언제나 예술은 광장의 예술이었고 언제나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꿈을 꾸게 한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예술을 광장에서 몰아냈고 광장에서 개인의 밀실로 쫓겨난 예술은 목적이 사라졌다. 단지 개인을 위한 오락거리이며 장식일 뿐 그 이상이 아니게 된 예술은 자본주의에 저항했다.

“낭만주의는 시민적 자본주의 세계, 즉 ‘환상을 상실한’ 세계에 대한, 그리고 사업과 이윤에 대한 열정적인 저항이었다. 그러나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구호는 결국 예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패배의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패배한 예술은 아무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을 그리며 시스템화된 미술 유통 사장의 구조 속으로 깊숙이 침잠했다. 그렇다고 사진과 영화가 새로운 세계를 열어보이지도 못했다. 그것은 사람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지만 결국” 밀실에서 시간 때우기를 위한 수단으로 생존할 뿐이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과 함께 예술은 변화의 시기를 맞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제 예술이 만드는 ‘환상’은 “만들어지거나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생성된다. 아무리 완벽한 가상이라고 해도 거기에는 전달하고 하는 어떤 원본이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예술은 이 원본의 전달자임을 항상 자임했다. 예술은 항상 수용자와 원본 사이의 매개자로 존재해왔다. 작품에 대한 질문은 작품이 나타내고자 하는 원본에 대한 질문이 된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이미지는 원본이 없다. 그 자체가 원본이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원본이 없는 예술을 저자는 게임이라 말한다. “영화나 사진은 수용자에게 그저 보여질 뿐이다. 그러나 게임의 공간은 수용자에게 직접 제시된다. 우리는 눈 앞에 있는 공간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가상으로 존재하는 실상이다. 애초에 원본을 가지고 잇지 않으니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필요가 없고 중용한 것은 낯선 그 공간에 적응하기 위해 공간의 규칙을 배우는 것이다. 디지털 게임의 세계는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이제 수용자의 마음은 작품 바깥에 놓인 것이 아니라 작품 안에 있게 된다.”

감상되는 것에서 수용자가 직접 작품 속에 뛰어들어 체험하는 것으로의 전환, 저자는 그것을 예술로 받아들일 수 잇다면 게임도 예술이 될 수 잇다고 말한다. 그리고 저자가 우리가 앨리스 세대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개임의 공간과 같은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 말하려는 것같다.

게임의 경험, 그 자체가 실상인 공간의 경험, 그것이 우리가 사는 이상한 나라의 실재가 아닐까? 라고 저자는 말하려는 것같다. 댓글을 달고 채팅을 하고 모두 상대방이 가정되는 행위이다. 그러나 그 상대방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실재의 인간이 아니라고 해서 문제가 될까? 물론 오프에서 만날 수 있고 인맥이 될 수 있으며 애인이 되기도 하는 관계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니터의 관계는 존재론적으로 오프와는 별개로 받아들여지고 거기에 그치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그 모니터에만 존재하는 상대방의 존재론적 지위는 무엇인가? 게임의 경험과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저자가 말하려는 이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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