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도시디자인 탐사 (컬러판) - 광역시의 정체성을 찾아서
김민수 지음 / 그린비 / 200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외모로는 구분할 수 없는 로봇을 확인하기 위해 튜링 테스트를 하는 장면에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사이보그와 인간의 차이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 영화의 감독은 본질적으로 의식이 있다면 로봇이든 인간이든 생명으로서 동등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같다. 그러나 로봇은 근본적으로 정체성에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 영화의 로봇들은 사진을 소중하게 간직한다. 과거 어린 시절을 찍은 사진이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그 모습 그대로인 로봇들이 가진 사진은 조작된 것이다. 당연히 그들의 기억은 조작된 것이다. 그러나 그 가짜 기억은 소중하다. 왜냐하면 그 기억만이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팩트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려면 기억은 필수이다. 그러나 한국의 도시는 기억이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서울의 역사가 600년이라지만 내가 보기에 서울의 역사는 60년도 안된 것같다. 서울의 아파트 문화를 연구한 프랑스 학자가 한 말이다. 서울의 역사는 분명 조선 건국과 함께 한다. 그리고 고려 때도 전략거점이었고 백제의 도읍지이기도 했으니 600년보다 더 올라간다. 그러나 누구에게 서울의 역사가 600년이 넘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 이 리뷰를 쓰고 있고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살아 온 이 집의 역사는 일제시대로 올라간다. 사대문 바로 밖에 일본인 거류지가 만들어졌고 그 거류지에 일본인 판사가 살던 집이 이 집이었다.

이책에서 다루어지는 부산, 대구, 대전, 광주, 울산, 인천도 마찬가지이지만 서울 역시 일본인 거류지를 중심으로 인프라가 구축되면서 근대도시가 형성되었고 해방 후 일본인들이 떠나면서 고급 단독주택가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지금 우리 집도 일제시대 지어진 집을 헐고 빌라를 지었지만 이 동네 거의 모든 단독주택이 헐리고 빌라로 바뀌었다. 어릴 때부터 살아 추억이 있는 장소들은 모습이 거의 다 바뀌었다. 모습이 바뀌지 않은 것이라고는 도로와 전봇대 정도일까? 과거의 추억이 묻어있는 장소는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그때 그랬었지 하는 추억을 떠올릴만한 물질적 근거는 남은 것이 없다. 추억은 기억에만 남아있다. 그러나 사라진 물질적 흔적 위에 지금의 모습을 지날 때면 그 추억도 희미하게 사라지는 것을 경험한다. 나는 기억을 잃어버리고 있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도시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5대 광역시의 역사를 거슬러 가는 작업을 하는 것이 이책의 저자이다.

저자는 5대 광역시의 현재 모습을 그리는 것으로부터 도시 탐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저자가 발로 더듬는 도시의 모습(디자인)은 뭔가 엉뚱하다. 저자가 찾게 되는 것은 기억이 표백되어 특색이 사라진 거리들이다.

도시에서 기억이 사라지게 만든 것을 저자는 ‘타자의 시선’이라 말한다. 경제적 효율과 기능성만 생각하고 급조된 계획들에는 그 공간의 역사를 생각해 그 역사를 담아내는 성의가 없었고 그 공간을 걸어다니고 그 공간에서 생활해야할 사람들의 일상을 배려할 여유가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계획들은 그 공간에서 살아온 사람의 시선으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그 공간에서 살아야 할 사람의 시선으로 짜이지 않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공간과는 무관한 타자의 시선으로 만들어져왔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런 타자의 시선이 일제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서울은 물론 이책이 다루는 5대 광역시 모두 조선시대에 주요 행정중심지였다. 그 도시들의 역사는 조선시대 이상으로 올라간다. 그러나 그 도시들에 근대도시를 건설한 일본인들은 그런 도시의 시간적 문맥을 무시하고 그 공간을 갈아엎어 자신들의 논리 타자의 논리를 강요했다는 것이다.

이책에서 다루는 5대 광역시의 근대도시로의 역사는 그 도시들의 도심은 모두 일본인 거류지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식민지 경영과 식민지 수탈을 위한 타자의 논리로 공간을 재편한 것이다.

문제는 타자에 의해 기억상실증에 걸린 도시의 병이 해방 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어차피 과거의 기억은 일제가 밀어버렸다. 일제가 만들어놓은 구조물은 ‘나쁜 놈’의 흔적이니 굳이 보존하고 기억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개발시대의 막대한 필요에 쫓겨 역사니 공동체의 터전으로서 도시의 기능이니 하는 한가한 논의를 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아무 특색도 없는 거리와 아파트 절벽들이다.

어느 정도 살만하게 되니 블래이드 러너의 로봇들이 조작된 사진으로 가짜 정체성을 기억하듯이 벼락부자가 된 한국의 도시들은 ‘문화’가 필요해졌다. 그러나 저자는 도시 정체성 찾기, 문화 찾기는 한숨이 나오는 수준이라 말한다.

저자는 근본적으로 접근법이 달라져야 한다고 본다. 도시라는 공간이 갖는 역사성이란 문맥과 일상이 만들어지는 공동체의 문맥이 고려되는, 타자의 시선에서 벗어난 자신의 시선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상이 이책의 내용을 요약해본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책은 5대 광역시의 현재와 역사를 다루는 책이다. 그리고 도시의 시간을 다루는 저자의 노력은 괄목할만하다. 이책에는 방대한 컬러사진들이 실려있고 고지도와 옛 사진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도시의 현재를 점검하기 위해 저자가 자신의 발로 현장을 확인한 땀이 느껴지며 도시마다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해 문헌을 뒤지고 사람들을 인터뷰한 노력들이 담겨져 있다. 그 결과 책의 양도 방대하다.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큰 판형에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메워져 있다. 이책은 재미있다고 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책은 방대한 사실들을 담아내려는 노력만으로도 읽어볼만한 책이다.


평점 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