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사용법 - 소설들(Romans)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 / 책세상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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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낯선 도시에서 3주를 보낼 기회가 있었다. 내가 묵었던 집은 도심에서 자동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었는데, 우리 식으로 말하면 소위 신도시라고 할 만한 곳이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그저 일에서 해방되었다는 기분에 도취되어 할 일없이 집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기만 했다. 비가 온 날이 며칠 있었지만 대개는 날씨가 맑아서 집 근처를 걷거나 때로는 용기 내어 좀 멀리 가보는 모험도 해볼 만했다.

구획이 잘 된 거리에 들어선 네모반듯한 집들이 비슷비슷하기도 하고, 거리 이름도 낯설어서 좀 멀리 갔다가는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한번은 집에서 직선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낮은 울타리로만 구분되는 주택들이 겉은 비슷해 보이지만 실은 제각기 집주인의 기호에 따라 다르게 꾸며져 있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됐다. 정원수만 해도 장미 일색인 집이 있는가 하면, 이름 모를 갖가지 활엽수들이 숲처럼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집이 있었다. 아이들이 있는 집인 듯 나무들 사이에 그네가 매어져 있거나 물이 반쯤 차있는 접이식 수영장이 펼쳐져 있는 곳도 있었다. 하다 못해 울타리 근처에 세워놓은 우편함마저도 제각기 다른 빛깔과 모양을 가지고 있었다.

직선이 끝나고 옆으로 꺾이는 막다른 곳에 이르렀을 때 그 집이 있었다. 엄밀히 말해, 그 집은 조금 전 지나쳐 온 다른 집들보다 더 아름답다거나 기이하다거나 눈길을 끌 만큼 잘 손질된 정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잘 정돈된 이웃집들과 대조적으로 어떤 방만함같기도 하고 무심함 같은 것이 흐르고 있었다. 아마 주인의 손이 오랫동안 가지 않은 듯 갈대 같기도 하고 쑥대 같기도 한 식물들이 가슴 높이까지 자라 있는 정원은 바랜 수채화 같은 인상을 풍겼다. 누군가 살고 있기나 했을까?

집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것이 싫증나면 도심에 있는 책방에서 모르는 활자들을 구경하거나 장미 기르기며 케이크 만들기, 창고 만들기 등 취미생활을 다룬 컬러 화보집을 펼쳐보며 시간을 보냈다. 어떤 날은 내가 아는 독일어 소설이 몇 권이나 있나 세어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이 그 때 나의 인생 사용법이었던 셈이다.

조르주 페렉의 『인생사용법』은 『사물들』에 이어 내가 두 번째로 읽은 그의 책이다. 그러나 이 책으로 나를 이끈 것이 몇 년 전 나온 『사물들』에 대한 기억의 힘만은 아니었다.

어렴풋이 남아있는 기억이란 변형과 왜곡을 벗어날 수 없는 법이다. 인생은 포크나 나이프처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그 자체라는 고정관념에 묶여있는 나로서는 이 제목이 주는 어떤 방자함에 대한 복수심에서 첫 장을 펼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인생은 다른이들과 구별되는 나만의 영역을 남긴다’

거의 10년에 걸쳐 쓰여진 이 책은 『소설들』이란 부제가 붙어 있고 1976년 6월 23일 오후 8시 무렵, 시몽클뤼베리에 거리 11번지 지하 2층과 지상 8층 짜리 건물에 들어있는 99칸의 방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시간과 공간이 고정되어 있기는 하나 실제로 여기서 다루어지는 이야기는 이런 시간과 공간의 편협함을 훌쩍 뛰어넘는다. 가령, 이야기의 중심인물 중 하나인 바틀부스는 지금 막 439번 째 퍼즐을 맞추다가 숨을 거둔다. 그러나 바틀부스가 여기 시몽클뤼베리에의 아파트에서 숨을 거두는 이 순간까지는, 그의 종조부 제임스 셔우드가 1870년에 호흡기 환자를 위한 젤리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에 힘입어 유니쿰(Unicum-세상의 유일한 진귀품을 찾는 일) 추적에 몰두하다 희대의 사기꾼들에게 가짜 성배를 사는 사실들이 선행해야만 한다. 또 제 83장은 지금은 화가 위팅의 아틀리에로 꾸며진 다락방 12호에 1949년까지 오노레 부부가 살았는데, 그 부부가 일해 주었던 대법관 당글라르 부부의 도둑질이 어떻게 들통 나 감옥에 가게 됐는지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식이다. 1층에 있는 마르시아 부인의 골동품 가게도 전 주인인 마구 제조인 알베르 마시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마시는 신기록을 세운 자전거 경주자였으나 운이 안 따라 포기하고, 자신 때문에 사고를 당해 얼굴이 흉칙하게 변한 마르게를 자기 누이동생과 결혼하게 만든 인물이다. 러시아 출신의 여자 성악가, 낙태한 무용수, 처가에 얹혀 사는 젊은 부부 이야기에서 퍼즐 제작자 윙클레의 아내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마치 현재의 시간과 공간은 하나의 점에 불과하지만 이전의 무수한 점들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눈여겨볼 만 한 것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우리의 방 한구석에 무심하게 놓여 있는 사물들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곤 한다는 것이다. 마치 ‘생명 없는 사물들을 움직여 그 속에 각인된 우리 삶을 되살리는 것을 목표’로 하듯, 우리 삶의 말없는 증인들일 수밖에 없는 식당, 부엌, 욕실 등에 놓여있는 사소한 사물들에 대한 섬세하고 빈틈없는 묘사가 사람 이야기에 앞선다.

‘같은 건물 주민들은 서로 몇 센티미터 거리를 두고 살고 있으며 단지 벽 하나가 그들을 갈라놓는다. 수도를 틀거나 변기에 물을 내리거나 불을 켜거나 식탁을 차리는 동일한 동작을 동시에 행하며 층에서 층으로 건물에서 건물로 그리고 거리에서 거리로 반복되는 수십 가지 생활 습관들을 동시에 수행한다.’ 그러나 이 공통 사용법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구별되는 독특한 어떤 영역을 남겨두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65억 인구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인생을 ‘사용하고’ 있을 것이며 시몽크뤼벨리에 거리 11번지의 아파트 99칸 방들이 보여주는 장면들 역시 그 일부분일 따름이다. 책을 덮으면서 나는 어쩐 일인지 3주간의 휴식 동안 걸었던 그 낯선 길들과 반듯한 집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직선 거리가 끝나는 곳에 버려진 듯 서 있던 그 집을 생각했다. 그 집들에는 어쩌면 바틀부스가, 윙클레가, 그리고 모렐레가 살고 있었을 것이다. 옆으로 나를 스치듯 지나간 그 책방의 손님들 중에는 시노크가, 알타몽이, 모로가 있었을 것이다. 조르주 페렉은 천재적 방식으로 우리 인생의 사용법 몇 가지를 보여주었다. 수많은 인용과 목록, 유쾌하고도 절망적인 이야기와 수준 높은 위트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지적 체험이다. 이 굉장한 책을 읽는 데 내 인생 일부를 사용할 수 있게 해준 출판사에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현재의 시간과 공간은

하나의 점에 불과하지만

이전의 무수한 점들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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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합본 메피스토(Mephisto) 13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 / 책세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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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농담에 익숙하지 않다. 천성적으로 농담을 잘 못한다고나 할까. 농담이 등장할 때가 대체로 처해진 난처한 상황에서 빠져나오려거나 국면을 어떻게든 전환해 보고 싶을 때라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이런 천성은 사는데 별 도움이 안된다. 게다가 사람이 늘 진지하기만 하면 재미가 없는 법이다. 그렇지 않아도 재미없는 세상에 농담이라도 던져서 웃게 만드는 능력은, 그래서 마술과도 같다. 이 점에서 더글라스 애덤스는 마술사다. 그러나 달걀을 한번 쓰윽 문질러서 콧김을 두어 번 불어넣고 하얀 손수건으로 덮은 뒤 하나 둘 셋하고 세기만 하면 곧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정도의 마술과는 비교도 안된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들- 전 우주를 상대로 하는 정도라면 그 스케일이 어떨지는 상상에 맡긴다. 시간과 공간을 마음대로 넘나들면서 삶과 우주, 모든 것에 대한 질문의 해답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이토록 유쾌하고 통쾌하고 익살스럽고 떠들썩하게 풀어내는 작가를 나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물리학과 천체과학에 대한 깊은 이해력, 무엇보다 하늘만큼이나 넓고 깊은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그런 책이라고만 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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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하는 식물 - 세상을 보는 식물의 시선
마이클 폴란 지음, 이경식 옮김 / 황소자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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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권한다는 건 어느 정도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것이 상대방의 인생에 영향을 끼칠 만큼 중요한 사안이 아니라 사소한 한끼 식사의 메뉴라 할지라도.


  최근에 사무실을 방문한 김성희씨가 요즘은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들이민 책제목에 고개를 갸웃한다. 그 동안 내가 그에게 심어준 인상이 이 책을 집어들기엔 의외라고 생각하게 했나 보다. 성격만큼이나 내 독서취향도 좀체 가늠하기 어렵다고 말하지 않은 게 다행이지만 그러고 보니 나 역시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아주 우연찮게 얻게 되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책은 책방에서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이야 인터넷서점에서 책을 주문하고 ‘OO씨, 책 왔습니다’하는 택배 아저씨의 씩씩한 목소리를 듣는 재미에 익숙해졌지만, 책방에 즐비한 수많은 책의 바다에서 우연찮게 맞닥뜨린 섬 하나가 주는 기쁨을 어디다 비길 수 있을까?


일정한 목적 없이 자주 기웃거리다 보면 항상은 아니지만 늘 수확이 있게 마련이다. 내가 살던 신림동에는 어느 대형서점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나는 그렇게 생각한다)작지만 보물 가득한 책방이 하나 있어 나의 정처없는 발길을 자주 잡아끌고 했다. 퇴근이 빠른 날이나 주말이면 할일없는 백수처럼 이 책 저 책을 기웃거린다. 어떤 것은 서문이 마음에 들어서, 어떤 것은 표지가 인상적이어서, 또 어떤 것은 믿을 만한 출판사라서, 더러는 순전히 감으로 집어든다. 이유야 어떻든 그렇게 해서 마주친 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카렐 차페크의 ‘단지 아주 조금 이상한 사람들 ’과 피터 회의 ‘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이다.

그러나 변변한 책방 하나 없는 동네로 이사를 하고 나서는 더 이상 이런 우연한 만남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마음에 맞는 책만 골라주는 ‘키다리 아저씨’가 따로 있지 않을 바에야 필요에 따라 인터넷 서점을 뒤질 수밖에 없다. 신문의 책소개란도 한 몫을 해야 한다. 「식물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는 옆의 동료 덕에 읽게 되었고 그 책이 하도 인상적이어서 키워드 검색으로 ‘식물’쳐서 나온 책이 바로 이 「욕망의 식물학」이다.


책이 나온 것은 올 1월로 되어 있는데 나는 8월에 이 책을 읽었다. 한겨레에 자주 칼럼을 쓰는 최재천 교수가 감수와 추천의 글을 썼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는 이 책에 대해 내가 이외 달리 무슨 말을 보탤 수 있을까?


「사과」와 「튤립」, 「마리화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자」의 소제목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우리가 흔히 하는 식의 세상읽기가 실은 얼마나 일방적이고 인간 중심적 사고인지를 깨닫게 해 준다.  이 지구 위에서 인간은 다만 하나의 구성원소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가 보지 못하거나 대수롭잖게 생각하는 것들도 이 지구 위 삶에서 충분한 자기 존재목적을 가진다는 식의 구태의연한 결론에 앞서 우선 제목부터가 욕망의 식물학이라니 이 얼마나 뻔뻔스러울 정도로 대담한가? 식물이 ‘감히’ 욕망을 한다는 말인지 욕망을 가진 인간이 개입한 식물발달사라는 말인지 책을 펴기도 전에 이미 호기심이 동하지 않는가? 결과는 직접 확인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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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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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때문이었다. ‘움베르토D'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토요일 밤이었고 모두 떠나고 없었으며 낮 어느 땐가 마셔둔 약간의 카페인 기운이 더해졌던 탓이었을 것이며 그래서 잠은 더욱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잠의 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TV를 켰을 것이다.

‘움베르토D'는 비토리오 데시카가 1952년에 만들었다. 자신의 아버지께 헌정한 작품이지만 이탈리아를 너무 비관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환대받지 못했다고 한다. 스토리는 단순하며 슬프다. 연금 생활자인 움베르토D가 밀린 집세와 생활을 위해 구걸을 하는 지경에 이르지만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아 자신의 유일한 벗이자 가족인 애완견 플릭을 맡아줄 사람을 찾고 자살하려 한다. 기차에 뛰어들어 죽으려다 실패한 움베르토D는 공원에 몰래 두고 온 플릭을 다시 찾아내고 함께 어딘가로 떠난다.

움베르토D를 연기한 배우도 ’자전거 도둑‘에서처럼 길거리에서 캐스팅했다고 하는데 그 공허한 눈빛 연기는 일품이다. 일품이다 못해 뼈에 사무친다. 그 밤이 지나도록, 일주일이 지나고 한달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 눈이 말하는 것은 잊을 수가 없다. 거역할 수가 없다.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진주귀고리 소녀’ 가 던지는 눈빛은 매혹적이다. 말을 걸 듯 말 듯 눈에서 쉽게 시선을 옮길 수 없도록 한다. 이 소녀의 눈빛에 대해서는 해석이 구구하다. 무언가를 묻고 있는 듯하면서도 아닌 것 같고 장난기가 조금 비치는 듯하면서도 순진한 구석이 있다. 멀리서 보았을 때와 가까이서 보았을 때의 느낌도 사뭇 다르다. 아무튼 그림을 보았을 때 제일 먼저 두 눈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리고 나서 살짝 벌어진 입술이 눈길을 끌고 소녀가 하고 있는 장신구가 진주라는 사실은 약간의 시간적 간격이 있고 나서야 깨달을 수도 있다. 트레이시 슈발리에처럼 자꾸 자꾸 그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얼굴에 내려앉은 빛이며 머리에 두른 푸르고 노란 천이며 소녀가 입은 황금색의 저고리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배경이 몹시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진주귀고리 소녀’를 그린 작가는 17세기 네덜란드의 델프트라는 도시에서 살았던 요하네스 베르메르다. 그는 평생 서른 다섯 점의 그림과 열한 명의 아이를 남겼다. 빛의 화가 램브란트가 활동하던 이 시기의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곳이었다. 영국의 크롬웰에게 제해권을 빼앗기기 전까지만 해도 세계해상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막강한 카톨릭 교회의 권위도 신교도의 집합소인 이곳에선 힘을 쓰지 못했다. 사회를 주도하는 층은 무역으로 돈을 번 상인들이었다. 아마도 소설 속 반 라위번 같은 인물이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베르메르의 그림 속에 종종 등장하는 이 부유한 상인이 그림을 주문하고 사는 소위 후원자 노릇을 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다. 저자는 소설이 ‘진주귀고리 소녀’의 갖가지 추측을 불러일으키는 모호한 표정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책장을 넘기면서 만나게 되는 베르메르의 다른 작품들을 감상하는 재미도 놓칠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이다. 출판사가 영어판 원문에는 없는 베르메르의 다른 작품들도 실어 놓았던 덕이다.

이 그림 속의 소녀는 누구일까? 화가의 딸인가, 전문적인 모델인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빛을 향해 살짝 돌아선 듯한 이곳은 어디인가?

사실 그림만 보아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트레이시 슈발리에와 같은 작가적 상상력이 뒤따르지 않았다면 이런 궁금증에서 끝났을 수도 있다. 이것이 작가와 독자를 구별짓는 경계선인 셈이다. 더 나아가느냐 여기서 멈추느냐. 그러므로 평범한 사람들은 왜 예민한 그리트가 화가 베르메르의 집에 하녀살이를 갈 수 밖에 없었는지, 그리트의 어떤 감각이 베르메르의 신뢰를 얻게 되었는지, 베르메르가 어떻게 그 그림을 작업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1600년대 델프트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에 대해서까지 작가의 상상력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진주귀고리의 소녀’는 그 상상이 쏟아내는 이야기가 참으로 그럴 듯해 보인다.

길드의 조합원이었던 아버지가 사고로 눈을 다치자 딸인 나 그리트는 화가의 집에 하녀로 들어간다. 언젠가 본 적 있는 ‘델프트 풍경’을 그린 바로 그 화가의 화실을 청소해 주는 일을 하면서 조금씩 그의 신뢰를 얻고 나중에는 물감 섞는 일까지 거들게 된다. 화가의 작품에 자신의 견해까지 밝힐 만큼 감각이 있던 나를 화가는 그림의 모델로 청하고 나와 그의 이별의 도화선이 될 바로 그 문제의 ‘진주귀고리 소녀’가 탄생한다. 끝까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 화가는 내가 그림속에서 걸고 있는 진주귀고리를 나에게 돌려주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내게 돌아온 이 진주귀고리를 나는 어떻게 할까?

작년에 이 ‘진주귀고리 소녀’를 원작으로 한 영화가 만들어졌다. 극장에서 만난 영화는 좀 더 압축적이었다. 베르메르와 소녀의 아슬아슬한 심리적 관계에 좀 더 초점을 맞춘 듯하다. 책에서 보았던 섬세한 감정선을 그대로 살릴 수는 없었겠지만 그리트 역의 스칼렛 요한슨의 연기는 그런대로 볼 만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실제 그림 속의 소녀가 훨씬 더 많은 표정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물을 머금은 듯한 소녀의 눈은 분명 무언가 말하고 있다. 번역자의 표현대로 그것이 무슨 말인가를 건네기 위해 살짝 돌아선 것인지, 화가에게 보내는 안타까운 시선인지, 슬픔에 찬 것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말 그래도 그것은 감상자인 우리들의 숫자만큼이나 무수한 형태의 언어들을 건네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 무수한 형태의 언어 중 하나가 바로 이 ‘진주귀고리 소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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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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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식의 글에는 우수가 느껴진다, 늘 어김없이. ‘나의 서양미술 순례(2002.창비)’와 ‘청춘의 사신(2002.창비)’이 그랬고 ‘소년의 눈물(2004.돌베개)’이 그랬다. 속으로 삭인 듯한 감정의 깊이와 섬세한 감수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의 글줄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들 역시 늘상 그를 따라다니는 그 ‘우수’의 감정에 함께 도달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가 도달한 그것이 그의 것과 동질의 그것이었을까? 그 또한 함께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늘상 우리가 아니라 우리 곁의 소수이다. 그의 눈은 늘 겉도는 자들, 경계선에 선 자들 그리고 추방당한 자들로 향해 있다. “아무래도 내가 있는 곳은 최후의 변경이며 나는 최후의 하늘을 보고 있는가 봅니다.”라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을 항상 기억한다는 재일조선인 서경식, 그가 디아스포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 이후 ‘외부의 힘에 의해 대부분 폭력적 힘에 의해 자기가 속해 있던 공동체로부터 이산을 강요당한 사람들 및 그 후손’들을 지칭함으로써 사전적 의미를 훌쩍 뛰어넘는 디아스포라들은 전세계에 600만명이나 흩어져 있다고 한다. 서경식 그 자신을 포함해 이들 ‘쫓겨난 자들’에 대한 성찰과 사색을 통해 도달하는 곳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하는 자기인식의 지점이 아니겠는가. 또한 그 묵직한 성찰과 사색의 기록을 함께함으로써, 우리가 지금 어느 곳에 어떤 모양을 하고 누구와 함께 서 있는가 하는 자기 성찰의 순간에 이른다면, 이 책을 읽은 이로서는 또 최고의 선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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