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겔 스트리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2
V.S. 나이폴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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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8년 전이다. 지금은 다른 멀티플랙스 영화관에 밀려 운영비라도 건지고 있는지 걱정이 될 정도로 한산한 뤼미에르 극장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을 상영해서 신문지상에 심심찮은 얘깃거리를 제공해 주었던 적이 있다. 예술 영화도 소위 ‘장사가 될까’는 식의 천박한 관점이 제법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모양인지 영화는 꽤 오랫동안 스크린에 올려졌다. 마지막 날 마지막 상영시간에 맞춰 보러갔던 때가 어느덧 8년 전이다. 사람의 기억은 늘 편의주의적인 속성이 있어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고 하는데 무슨 영문인지 내겐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만 남아있다. 넓은 하늘로 카메라가 이동하고 희망같기도 하고 절망같기도 한 어떤 예감이 화면을 가득 채우던.

그의 영화가 다시 광화문에 있는 영화관을 찾았다. 이번에는 ‘향수’다. 8년 전처럼 언론의 떠들썩한 수선스러움이 앞지르지 않는 걸 보면 그동안 우리의 영화 보기 토양도 많이 달라진 것일까? 특별히 예술영화다 뭐다 변별하는 것이 오히려 편가르기를 부추긴다고 생각해온 나로서는 순전히 예전 기억이 주는 느낌에 의존할 뿐이다. 그의 영화가 좋았던가, 혹은 아니었던가? 어쩌면 졸음을 각오하고.

향수의 사전적 의미는 ‘타향이나 타국에 있는 사람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생각이나 시름’이라고 되어 있다. 83년에 발표한 작품이니 내가 어줍잖게 떠들어댔던 ‘조국을 떠나 죽을때까지 조국을 그리워하다’죽은 감독 자신의 얘기만은 아니다(그는 84년에 이탈리아 망명 선언을 한다). 잃어버린 조국 혹은 고향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렇게 볼 만한 구석이 있지만 어쩐지 이 영화는 상실한 것에 대한 인간 보편의 불안과 회귀욕구 그리고 종국에는 보이지 않는 삶의 희망에 대한 얘기라고 믿고 싶다. 이런 의미라면 모든 인간은 저마다 보편적 ‘향수’를 지니고 산다는 말이 되는가?

「미겔 스트리트」의 저자 나이폴에게 향수는 일종의 애증이라는 감정과 연관되지 않나 싶다. 고향 트리니다드를 등지고 영국에서 자수성가(이 표현이 맞다면)한 이 노회한 작가의 고향에 대한 감정은 짐짓 유머와 능청스러움에 가려져 있다. 총 13명의 인물들에게 각 각 한 장씩을 할애한 그의 책에서 내가 읽은 것은 바보같고 관습적인, 결코 변하지 않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에 대한 지독한 애증이었다.

인도인의 후손이면서 어머니와 함께 사는 ‘나’는 이웃의 결코 어른이라 하기엔 좀 모자라고 못난 어른들 틈에서 삶의 가장 예민한 시절을 보낸다.

미겔 스트리트에 사는 남자들은 어느 누구 하나 변변한 직업이 없다. 목수 포포는 쓸 만한 가구라고는 도무지 만들 생각도 않고 늘 ‘이름 없는 물건’들을 만드느라 분주하고, 이 가난하고 누추한 섬에서조차 인기만점이던 험브리 보가트의 이름을 딴 보가트 역시 무슨 수단으로 돈을 버는지 알 수 없다. 이 거리에서 ‘내’가 가장 되고 싶은 것은 에도스 같은 ‘푸른수레’를 끄는 사람이다. ‘쓰레기 수거차’인 푸른수레를 모는 에도스야말로 가장 그럴듯한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이었다. 천재라는 소리까지 듣지만 번번이 중요한 시험에서 낙방하고 의사가 되겠다던 처음의 꿈은 위생검사관으로 그리고는 다시 푸른 수레를 모는 쓰레기 수거인이 되는 것으로 변질될 수 밖에 없었던 엘리아스의 전락은 사실상 이 미겔 스트리트의 삶의 전형이다.  

그래서일까? 너무 일찍 어른들의 세계를 알아버린 ‘내’가, 47년이 되어서야 겨우 전쟁이 끝난 줄 알게 된 볼로와 같은 사람이 살고 있는 이 역사의 중심에서 한참 벗어난 트리니다드의 미겔 스트리트를 떠난 것은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이쯤되면 이 책이 식민지의 아주 음울한 뒷골목 얘기가 아닌가 의심할 만한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책은 쉽게 읽히고 종종 웃음을 터트릴 정도로 유머러스하다. 아마도 작가의  감정 절제와 오랜 자기 성찰에서 오는 내적 강인함의 덕을 본 것이리라.

지도를 찾아보니 트리니다드는 카리브해에 면해 있는 눈에 띄지도 않는 아주 작은 국가다. 역사적으로 영국의 식민지였던데다 나이폴은 이 식민지에 이주한 인도인 후손이었다. 식민지인으로서 본국에 가서 성공하기까지 삶의 신고가 어떠했을지 어렵사리 짐작할 수 있을 법한데 이 작가가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저마다 가슴속에 내재한 ‘향수’가 이 작가에게만은 삶의 희망과는 동떨어진 고착되고 변하지 않는 무언가 어두운 정서와 긴밀하게 연관된 때문이라고 감히 말 할 수 있으려나.







참고 : 스웨덴 아카데미는 2001년 10월 11일 V. S. 나이폴을 2001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면서, "엄정하고 면밀한 시각에 통찰력 있는 내러티브를 결합해 작품으로 빚어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억압된 역사가 현존함을 외면할 수 없게 한다"는 점을 선정 사유로 들었다. 또 나이폴에 대해서는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목소리로, 언제나 자기 안에서만 진정으로 평안함을 느끼면서, '문학의 배로 세계를 두루 항해하는 자'(literary circumnavigator)이며, 그가 탁월한 이야기꾼일 수 있는 까닭은 다른 사람들이 잊어버린 '정복당한 사람들의 역사'를 그는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평했다




서구 식민주의와 문화제국주의를 철저히 비판하는 일각에서는 서구의 문화․문학의 전통을 지향하며 서구의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해바라기성 작가라고 그를 폄하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1978)의 저자인 저명한 문화평론가 에드워드 사이드는 나이폴이 자신의 본향인 제3세계를 절망 일변도의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부정적 이미지를 조장한다며 그를 '정신적 자살을 행하는 지적 파탄자'라고 혹평했다.




나이폴은 1932년, 당시 영국 통치하에 있던 트리니다드 섬의 포트오브스페인 부근 차과나스에서 태어났다. 역시 영국의 식민지이던 인도 북부에서 계약노동자 신분으로 이주해온 힌두 인도인 집안의 후예로 그의 할아버지는 사탕수수 농장 일꾼이었고, 아버지는 저널리스트 겸 작가였다. 나이폴은 1950년 영국 옥스퍼드대학교로 유학하여, 1953년 영문학 문학사 학위를 받은 뒤 영국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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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나무 민음의 시 135
박찬일 지음 / 민음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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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이다. 요즘 들어 부쩍 여자냐 남자냐가 중요해졌다. 아니 중요해졌다기보다 오히려 민감해졌다는 말이 맞을 게다. 페도르 알모도바르 감독의 ‘그녀에게’란 영화에 대해 주변의 몇몇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는 비판을 각오하고 감히 말하자면, 여자들은 대개 ‘불쾌했다’는 쪽이었고 남자들은 ‘괜찮았다’ 는 반응이었다. 여자들은 아무리 지고지순한 사랑 때문이었다고 하더라도 식물인간이 된 여성을 강간한다는 설정은 그리 보기 편한 내용은 아니라는 얘기였다. 나 역시 여자 감독이었다면 좀 다르게 표현하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6월 14일 수요일 박찬일 시집 ‘모자나무’를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유는, 모 일간지의 기사 때문이었다. 시집에 대해 ‘오랜만에 만난 남성적인 시다, 화려한 수사나 요사스런 표현 따위는 없다’고 기자는 거침없이 평가한다. 이 정도면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시대에 남성적이라고 말하여지는 시는 과연 어떤 시인가. ‘화려한 수사나 요사스런 표현 따위’가 남성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변별 기준인가. 죽음과 삶 또는 고통에 대한 성찰의 유무인가. 시집을 놓았을 때,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더욱 난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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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인형 대산세계문학총서 15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안영옥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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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 있어서 천재성이란 무엇인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놀라게 할 만큼 뛰어난 작품을 창작하는 능력일까? 아니면 노쇠한 죽음의 순간까지 펜을 놓지 않고 수많은 작품을 쏟아내는 왕성한 창작욕을 말하는 것일까? 사실 천재성이란 나이와는 무관한 것이며 요컨대 작품의 완전성에 의존하는 개념일 것이다. 그렇다면 뛰어난 작품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오랜 시간의 외풍을 견디고 온갖 범람하는 비평의 파도를 넘어서 사람들에게 널리 애독되는 것들을 말하는가? 문학에 있어서 천재성이라는 말과 시대를 초월한 영원성이란 말만큼 매혹적인 말은 없는 듯하다.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 보편의 가치를 탐구하는 작품은 사람보다 훨씬 오래 살아 남는다. 불멸한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불멸의 반열에 오르기를 무의식적으로도 지향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영생을 누리는 사람들이다. 호머가 그렇고 단테가 그렇고 그리고 세잌스피어와 도스토옙스키가 그렇다. 그들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얼굴 윤곽은 그림속에서 혹은 사진속에서 흐릿해졌지만, 그들이 낳은 작품들은 여전히 우리들 삶속을 유유히 유영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아돌포 비오이 까사레스는 우리에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보다 덜 알려진 작가임에는 틀림이 없다. 번역된 작품도 거의 없다. 단행본으로는 이 「러시아인형」이 최초가 아닌가 싶다. 사실 우리 번역 문학의 지형에서 영어권과 프랑스어권 이외의 작품을 만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친다는 것이 위험하다면 그동안 자주 접하지 못한 쪽으로 몸을 조금 움직여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터이다. 게다가 그것이 정신의 즐거움을 동반한 느긋한 환상여행이라면 더더욱.

혹시 보르헤스의 소설들을 읽고 그 생경한 경험에 다소 당황했지만 묘한 매력을 느낀 독자들일수록 이 비오이 까사레스의 러시아인형을 권하고 싶다. 내가 보기에 까사레스의 단편집은 그런대로 보르헤스와 독자간의 간극을 매워줄 만하다. 물론 그렇다고 보르헤스보다 까사레스가 못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열 네 살의 나이차이를 뛰어넘는 평생의 문학적 동반자였다. 다만 보르헤스가 좀더 일찍 우리에게 소개되었다면 까사레스는 중남미 문학을 전공한 이들 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거나 보르헤스의 소설들 속 등장인물로 우리를 먼저 찾아왔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 이 아홉편의 단편들은 제각각 다른 내용과 주제를 담고 있다. 표제작인 ‘러시아 인형’은 주인공 ‘나’가 건강상의 이유로 프랑스의 유명한 온천지 에-르-뱅으로 오는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는 묵게된 호텔에서 단짝이었던 고등학교 친구를 만난다. 한밑천 잡기 위해 구대륙으로 온 친구는 제법 돈꽤나 있어 보였는데 어떻게 자신이 성공하게 되었는지 ‘나’에게 자초지종을 들려준다. 부잣집 딸과 결혼하기 위해 자청한 바닷속 여행에서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녹색 괴물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고 원하던 갑부집 딸이 아닌 호텔 여주인과 결혼했다는 어찌보면 흔한 이야기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에 어떻게 작가의 상상력이 덧칠해져 멋진 환상의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뒤이은 ‘로취에서의 만남’이나 ‘우리들의 여행’ 은 황당하면서도 재미있고 ‘물아래서’에 이르면 아름다운 서정의 여운 속에 은근하게 배어나는 작가의 유머와 재치를 느낄 수 있다. 마지막 ‘세편의 작은 환상작품’은 짧지만 간단치 않은 것들이다. 까사레스는 그로테스크하고 경악스럽기까지한 이들 이야기를 비현실적이고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적인 배경과 인물을 통해 아주 현실감 있게 풀어낸다. 물리, 수학, 생태학 등에 바탕을 둔 그의 환상세계가 ‘보편적 인간 감정의 정서로서 환상요소를 이해할 수 있다’ 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오래두고 독자의 사랑을 받기에 모자람이 없고 그 뛰어난 상상력이 독자를 압도하는 비오이 까사레스의 작품이 천재적이며 동시에 불멸할 것이라는 사실은 이 단편모음집「러시아 인형」 한 권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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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소록
강희안 지음, 이병훈 옮김 / 을유문화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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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어새는 기록에 의하면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흔히 볼 수 있는 새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동아시아 일부지역에만 600마리 정도 살아 남았다니 심각한 멸종위기에 처한 조류가 아닐 수 없다.

저어새는 온몸이 흰색이고 다리와 부리 그리고 부리의 밑등으로부터 눈에 이르는 드러난 피부부분이 검은색을 띠고 있다. 특히 부리가 주걱모양이고 눈아래에 노란색의 반점이 있는 것이 아주 순한 인상을 준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희고 부드러운 댕기깃이 위로 솟구쳐 흡사 갈대가 흔들리는 듯하다. 비슷하게 생긴 백로나 다른 맹금류가 먹이를 사냥하는 모습은 어딘지 잔혹한 데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갯벌에서 주걱모양의 부리를 이리저리 저으며 요행히 먹이가 ‘걸려들기’만 바랄뿐 인 듯한 저어새의 먹이 채취 모습은 바보같고, 그래서 가슴이 뭉클하다.

이 순하고 아름다운 동물이 불러일으키는 알 수 없는 뭉클함은, 이미 60억을 넘어 지구상 최고수준의 개체군을 자랑하는 우리 인간이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 가지는 단순한 연민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잠시 함께 빌어 살 뿐인 이 지구에서 다른 동식물들 역시 그들 나름의 천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적당한 무심함과 우리자신에게와 똑같은 존중을 기울여야 마땅하나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일까?

조선 세종 때의 강희안은 식물은 ‘지각도 없고 운동도 하지 않지만 배양하는 이치와 거두어 들이는 법을 알고’ 천성을 어기지 않으면 그 참모습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였다. 1400 년경에 씌어진 ‘양화소록’은 그 당시 사람들이 완상해 온 꽃과 나무를 심고 옮기는 법, 습도와 온도를 맞추는 법 등 식물을 가꾸고 거두어들이는 법을 알 수 있는 요즘식으로 말하면 원예교본 같은 것이다. 수십 종에 달하는 꽃과 나무에 대한 옛사람들의 기록을 옮겨놓은 것도 다채롭고 읽을 만하지만, 무엇보다 강희안이라는 갓쓴 선비가 지각도 없고 운동도 하지 않는(마이클 폴란-욕망의 식물학 저자-이 들으면 항의할 만한 대목이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오늘날만큼 식물생태학이니 유전학이니 하는 학문이 발전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도 용서하리라 )식물을 마치 벗을 대하듯 그 천성을 살피며 인간의 품격을 가다듬을 만한 장점을 찾아내려는 겸손함에 이 책의 미덕이 있다. 물론 일본 철쭉의 그 ‘곱고 찬란한 붉은 비단’ 같은 자태를 감상할 수 있는 복을 누리게 된 것을 세종의 덕화(德化)가 동해 먼데까지 미친 공으로 돌린 것에서는 가히 충신다운 면모도 엿볼 수 있겠다.

책 말미에서는 꽃을 빨리 피게 하는 법, 꽃을 분에 심는 법, 꽃을 취하는 법, 꽃을 기르는 법 등 양화(養花)에 대한 실제적 내용뿐 아니라 화분 놓는 법에 대해서까지 섬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저자의 자상한 품성도 보인다. 특히 오징어 뼈로 꽃나무를 찌르면 바로 죽는다거나 효자(孝子)나 잉부(孕婦)가 꽃나무를 손으로 꺾으면 몇 년이 지나도록 꽃이 피지 않는다는 설명은 재미있기까지 한다. 시험삼아 한 번 해 볼까 하는 장난끼가 동한다.

부록인 "화암수록"은 강희안 자신이 직접 꽃과 나무의 품재에 대해서 9가지 등급으로 나누고 품평을 논한 것이다. 소나무니 대나무니 작약이니 동백, 장미, 백일홍 등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보아왔던 꽃과 나무에 대한 그 당시 사람들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겠다.

아쉬운 것은 이제는 이 책에 소개된 꽃 중 몇몇은 이제 여념집 뜨락에서 완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핀 치자나 사계화, 석창포 등을 만나기가 도심에서는 쉽지 않다.

멸종 위기로까지 내몰린 저어새나 이미 보기 어렵게 되어버린 꽃과 나무들은 자연을 천성대로 두지 않고 인간 기호의 변덕스러움에 맞춘다거나 오로지 인간만이 이땅의 주인인양 행세하는 오만함의 소치인 것 같아 자못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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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을 읽는다
박희병 지음 / 돌베개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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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일을 하는 A씨는 작정하고 지리산으로 갔다. 한동안 활자로된 그 어떤 것도 스스로에게 금지할 요량으로. 그런데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마치 금단현상처럼 무언가 허전하다 싶더니 이틀 째 되면서는 어디 눈에 띄는 라면봉지라도 없나하고 두리번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우연히 등산객이 두고간 신문쪼가리를 발견하고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결국 며칠 만에 다시 산을 내려오고 말았다.

금지된 것은 늘 매혹적이다. 왜 하필 기말고사 전날에 유독 재밌는 만화책이 눈에 띄는지, 어찌하여 미성년자 관람불가 딱지가 붙은 영화는 변장을 해서라도 보아야 직성이 풀리느냐 말이다. 산더미 같이 쌓여있는 일거리를 제쳐 두고 나는'연암을 만난다'. 국문학 교수인 박희병이 연암의 산문을 스무여 편 뽑아 우리글로 옮겨 놓았다. 그 스무여 편 되는 글들 모두가 아름답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다. 굳이 순서를 정하라고 한다면, ' 소완정이 쓴 「여름밤 벗을 방문하고 와」에 답한 글'을 제일로 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박희병 교수가 여러 해 동안 읽고 연구하고 다듬어 놓은 본문에 이어 주해와 평설까지 함께 실은 수고로움 덕에 책의 두께는 세배로 늘어났지만, '이몽직의 요절에 애도하는 글'과 같이 연암의 마음 깊은 곳에 감추인 슬픔의 어떤 지점까지 이를 수 있게 된 것은 가외의 소득이라고만 한다면 지나치게 인색한 표현일 것이다. 나는 그 글에서 어쩌면 내 마음의 한자락을 보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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