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다. 

몇 일째 계속 화다스리는 법이란 제목으로 메일이 온다. 한국건강연대라는 곳에서 보내는 이메일이다. 화를 참지 못하는 성미라는 것을 특히 요즘, 화날일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듯. 마치 지금 나는당신의 상태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꼼짝말고 우리의 프로그램에 참가하십시오, 하는 듯하다. 

 점심때도 그런 말을 하였다. 이번 지방선거 결과에 크게 기대하지 말라고. 허니 지금부터 화다스리는 법으로 스스로를 단련시켜 놓으란다. 그럴 듯하다. 나 역시 감정이 너무 과잉한 상태라. 아마 이번 지방선거 결과에 실망하고 실망하리라. 어느 신문칼럼에서 읽은 듯하다. 오로지 자신의 비판능력만을 믿으라는. 

자신의 비판능력이라......천암함사건도 그렇고 도무지 모든 것이, 이성의 정상적인 활동을 기대하기 어렵다. 가끔 정의는 있는 건가. 진실이란 어디에 있는 건가. 정말 사필귀정이란, 신기루일 뿐인가 하는. 아니 이런 생각은 자주 든다.... 

이런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은,슈뢰딩거의 고양이다.  

슈뢰딩거는 오스트리아 물리학자이며 나는 도무지 이해가 불가능한 슈뢰딩거의 방정식으로도 유명하고, 무엇보다 양자세계가 확률에 따라 움직인다는 새시대의 물리학에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느껴 거부하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주장한 하이젠베르크에 반감을 느끼고 공개적으로 경멸했던 인물이다. 해서 사고실험을 통해 그것이 엉터리라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여기서 나온다. 방사능물질이 흘러나오게 장치해 둔 상자속에 고양이를 함께 둔다. 실험자가 고양이의 생사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고양이는 죽었을 수도 살았을 수도 있다. 관찰자가 문을 열어 확인하는 순간에야만 그 상태가 확정된다는 것이다. 문을 열기 전에는 고양이는 죽었을 수도 살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고양이가 어떻게 반 죽고 , 반 살 수 있단 말인가...하는. 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그렇다. 허나 양자세계는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의미가 행해지는 세계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듯하다. 양자의 존재를 우리는 감각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사실 고양이가 죽었는지 아닌지는 우리가 그것을 감각적으로 확인하든 말든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관찰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 않나.? 

암튼 잘 모르겠다. 파울리의 배타 원리도 실은, 원자가 어떤 상태변화를 겪더라도 그 원자이게 하는 고유의 특성(?)을 잃지 않는 이유가 무언지를 설명하는 이론이라고 한다. 그럴듯하게 들리는데, 실은 잘 모르겠다. 하나의 전위에는 꼭 하나의 전자만 존재할 수 있다는 원리인데....음...좀 어렵다... 

하지만 이런 물리학의 이론들을 읽고 생각해 보고 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사물의 이치를 따져보고 이해하는 재미랄까? 그건 또 묘한 즐거움을 준다. 내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주의 별빛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곳에서 생명의 아주 미세한 근원이 있다는 것, 그런 사실을 읽고 이해하는 것은, 나를 이해하는 것 못지않는 즐거움을 준다.....이런 것을 지적 즐거움이라고 하는 건가... 

지금은 정신이 없어 사둔 책들이 쌓여 간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읽다 집어쳤다. 생각만큼 흥미롭지는 않았다. 다만, 조지 오웰이 왜 그런 생활을 한 것인지, 감정이입을 하고 싶다. 나는 솔직히 그러고 싶지도 않고 또 그러지도 못할 것이다. 파리의 우아한 동경, 그러나 실은 어느 곳이든 밑바닥 삶이 있는 법인데,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이해하는 먼 이국의 도시는, 그런 현실을 사장한채, 보고 싶은 면만 윤색한 도시일 뿐이다.  

허긴 여행이란, 동경이고 동경이란 낭만이 아닐까? 이 곳의 삶이 고달프면 더욱, 저 곳의 삶은 멋지리라는 기대, 아니 멋져야 한다는 바람. 

우리 동네를 돌면서, 새삼 우리 동네가 생각만큼 후지지 않다는 생각을 하였다. 살랑이는 나무들이 맑은 공기가, 어라 여기도 이런 게 있었네 하는 새삼스런, 발견이라고나 할까.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레마르크의 개선문을 읽고 레마르크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의 책이 다시 번역되어 나왔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샀다. 

언제 읽을 지 모르지만, 그 책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쁘다. 마고였나? 개선문의 그 여자는 마두 였던가(조앵 마두였나보다, 남자는 라비크였던 것 같다)....어찌 되었을까...줄거리가 생각나지 않네...이런....다시 읽어 보아야 겠다..아니다 그 책을 언니네 집에 두고 온 기억이 난다. 오페라의 유령도 함께 두고 왔지..그 5월의 어느날, 오스트리아는 눈부시고 환했지. 

언니네 아들은 어렸고, 귀여웠지, 사랑스러웠지.그렇게 귀엽고 사랑스런 꼬마를 본 적이 없었지. 

그 꼬마는 이제 다 자라, 어른이 다되었지. 그 때 좀더 사랑해 주었어야 하는데. 

왜이리 후회가 되는지. 사랑할때 옴팡 사랑해 주어야 하는데, 더욱 아끼고 귀여워 해 주었어야 하는데, 

비엔나의 조용한 점심때, 전차와 트람바이, 바나나, 카페들. 다시 언니와 그 카페에 가고 싶다.언니와 마주앉아 거품이 풍성한 달콤한 라떼커피를 마시고 싶다. 

언니...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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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20-05-25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으로부터 10년전 나는 지금보다는 긴글을 쓸 여유가 있었구나...
 
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조지 오웰 르포르타주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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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늘 사소했다. 병원에서 정기검진 안내서가 왔고 순종적인 나는 순순히 검진을 하였다. 그런데 결과가 이상했나보다. 의사는 재검을 하자고 했다. 

그때부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암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영혼을 조금씩 파먹었다. 재검결과 조직검사를 하였고 바이러스 검사까지 했다. 

10일 정도 뒤에 결과를 보러 오란다. 그 기다리는 10일 동안 나의 불안은 최대치를 경신하였다. 처음엔 우리 부모와 형제들은 그럭저럭 건강한 세포들과 함께 살고 있는데, 왜 나만, 나만 이런걸까 하는 말도 안되는 분노도 치솟았던 것 같다.  

열흘 뒤 결과는, 대학병원에 가서 이상조직들을 제거하는 간단한 수술을 받으라고 권고했다. 그 뒤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암이구나...아 암이라니...수술이라니...그러고 보니 가슴께도 당기는 듯했다. 대학병원은 늘 돗데기 시장처럼 북적거린다. 예약을 하고 한참을 기다리면서,인간 종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저 많은 불편한 사람들, 환자들. 

의사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수술은 무슨, 그냥 지켜보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우리는 이상한 세포를 지켜보기로 하였다. 불안은 더이상 내 머리속을 떠다니지 않는다. 이제 불안보다 더 밀도감 있는 공포가 그리고 더 나아가 약간의 체념이 비집고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또는 혼잣말로 기도했다. 암만 아니라면 열심히 살게요. 지금까지처럼 자살을 동경하거나 하지 않겠다고. 그날 2010년의 소원을 다시 썼다, 이전 것을 쫙쫙 찢어버리고. 

그 힘없고 맥없던 나날들 사이사이 나는 위건부두로 가는 길을 읽었다. 위건부두가 어딘지도 모른채.  

한 자의식 강하고 진실한 사회주의자가,노동자의 적나라한 생활을 담담하게 기록한 글이었다.사실 르뽀르따쥐는 처음이다. 이런 류의 책을 그닥 쉽게 손에 잡지 않았다. 그러고보면, 나는 몽상가인 모양이다. 도무지 너무 현실적이거나 사실적인 것들은, 불편하게 생각되니 말이다.  

이 책이 내게 소중하다면, 그건 도저히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작가의 진심때문일 것이다.그는 노동하는 인간의 소중함을 알고 그들이 그 노동에 합당한 대가를 받기를 원한다. 그는 자신의 기반이 무엇인지 자각한 인간이며, 위선을 떨며 자신의 존재 이상을 넘겨다보는 척하지 않는다. 

로렌스에 대해 언급한 구절도 눈에 띈다. 로렌스는 광부아버지와 교사어머니의 아들이다. 그는 출신으로 보자면 노동자계급인 셈이지만, 문필가로서 계급이동을 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위건부두는 노동자들의 소박한 휴식에의 은유다. 우리 모두는 노동한 후에 합당한 여가와 누림이 따라야 하는데, 세상은 그런가?   자신의 건강을 챙길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과연 세상은 그런가? 병원복도를 가득 메운 사람들도, 실은 그나마 나은 사람들이다. 돈이 없으면, 의료보험에 들 수 없고, 의료보험이 없으니 아파도 병원은 턱도 없다. 예방? 웃기는 소리다. 예방은 커녕 지금 든 병에도 돈 없어 꾹 참아야 하고,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병을 더욱 키우며 살아야 한다. 그들이 못난 탓인가? 그들이 가난하고 게을러서인가?  

문득 왜 우리 모두 부르조아가 되면 안되는 거지? 그건 시장의 논리때문인가? 시장은 모두가 부르조아가 될 수 없기 때문일테지. 

누군가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누군가가 너무 많이 가져가기 때문일테지...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표방하는 대의는 현실에서 외면받기 일쑤다. 왜인가? 대의가 선하기 때문에 그것을 좆는 사람세포들이 선할 것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때때로 그들은 대중들과 고립적이다. 관습에 젖어 있고 관성이 지배하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다. 해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그의 분리가 일어나고 결과적으로 이데올로기는 외면당한다. 

조지 오웰은 이 글을 쓴 후 작품세계의 전환을 맞이한다고 한다. 내게 그는 다른 어떤 것보다,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일치를 꾀했던 사람, 끊임없이 성찰하고자 했고 자의식 강한 사람, 무엇보다 인간세계에 대해 따뜻한 마음을 지녔던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그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읽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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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왈츠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박
대니얼 J. 레비틴 지음, 장호연 옮김 / 마티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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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음악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더 많은 사랑, 더 많은 자유, 더 많은 민주주의....가 그러하듯. 그러나 어느날 음악이 소음이 되어 버린 세계에 살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다. 

도처에 넘쳐나는 음악, 길거리 어딜 가나 들리는 음악, 버스를 타도 원하지 않는 장르의 음악이 귀를 찌르고 있다. 심지어 지하철에서조차 옆사람의 이어폰에서 새어나오는 원하지 않는 음악을 들어야만 한다. 

지금은 음악의 포화상태다. 가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요의 상태에 있고 싶다. 무엇이든 과잉하면, 물리게 마련인듯. 그러나 매번 다시 음악 앞에 서 있는 나를 보게 된다. 음악은, 이렇듯 물리다가도 다시 찾게 되고, 나의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함께 있을 몇 안되는 존재 중 하나다.

나는 대개 슬플 때 음악을 듣는다. 슬픈 음악, 비장미가 느껴지는 그러나 청승스럽지 않은 음악이 좋다. 이때 음악이란 무엇일까? 정서의 폭발을 대리해 주는 무엇일까? 치유의 어떤 힘일까? 

대니얼 레비틴의 호모 무지쿠스를 먼저 읽었다.  

호모무지쿠스가 음악이 인류의 진화에서 담당했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한 책이라면 이 책은 음악은 우리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 음악이 우리 뇌에 어떻게 수용되는가에 대한 책이다. 

음악이 청각의 치즈케이크가 아니라 진화적 선택압에 의해 진화한 산물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진화에 부수적으로 얻었다는 스티브 핑거의 주장과 반대로 음악은 우리 종의 생존에 필요했기 때문에 진화했다는 말이다. 어쩌면 언어보다 더 먼저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는 가설을 조심스럽게 내 놓기도 한다.  

현재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조건들, 섹스가 좋은 것은 섹스 자체가 좋다기보다는 우리 조상들 중  섹스가 즐거운 누군가 유전자 복제에 성공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상한 음식에 구토를 느끼는 것 역시 상한 음식 자체가 역한 게 아니라 그것을 역하게 느끼는 조상 유전자가 복제에 성공했고 우리가 그들의 자손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한정된 자원과 수백 수만종의 종들의 경쟁에 살아남기 위해 유리하지 않은 것들은 선택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인지과학의 관심사가 그러하듯 대니얼 레비틴은 뇌의 어느 부위가 음악에 관계하는가라는 문제보다는 우리 뇌가 어떤식으로 음악을 인지하느냐에 더 관심이 있다.  그에 따르면 뇌의 특정부위만이 음악이나 언어와 같은 특정 영역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뇌는 서로 상호작용하며 대상과 교류한다. 물론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에 따라 우뇌와 좌뇌가 특히 더 관련되는 작용도 있다. 그렇기는 하나 도식적으로 우뇌는 감성적인 활동, 좌뇌는 이성적인 활동과 관련한다고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음악 역시 뇌의 특정한 부위만 관련하는게 아니라 소뇌에서부터 전두엽, 브로카영역 등 다양한 부위들이 상호 작용한다는게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이라고 한다.  

넘쳐나는 음악에 신물이 날 법도 하지만 어느 순간 또 라디오 앞에서 오디오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누워 있거나 천정을 보는 행위는 자주 음악과 함께 진행된다. 내 어느 순간에 뉴런이 발화하여 음악에 감응할지는 사실 엄마의 뱃속에서, 열 한두살의 나이에 이미 결정되어 있을 수도 있겠다. 기억은 매개가 얼마나 특징적이냐에 따라 활성화 정도가 다르다고 한다. 인간의 뇌에 기억들이 모두 저장되지만 매개물의 특성에 따라 고스란히 되살아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니, 놀랍기까지 하다.

그러고 보니 음악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렵다.  오래 전에 읽은 <음악은 왜 우리를 사로잡는가?>도 뜻밖의 기쁨을 주었던 책이다. 이 책 역시 음악의 기원과 인간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멋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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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전쟁 - '자유' 개념을 두고 벌어지는 진보와 보수의 대격돌
조지 레이코프 지음, 나익주 옮김 / 프레시안북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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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었다.인지과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책을 막 끝낼 참이었는데. 연거푸 같은 인물에 대해 세번의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또 꿈을 꾼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심지어 나는 그의 이름을 공중에서 큰소리로 세 번이나 불러댔다. 어딘가 숨어있던 그는 나의 부름에 답하였다. 이런 일이 한번도 없었다며, 꿈속의 나는 이것이 꿈임을 자각한다.
도대체 꿈은 내 인생의 몇분의 몇인가? 꿈이 무의식의 영역이라면, 삶의 또다른 이면으로서 그것이 현실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종으로서 인간의 삶에 어떤 잇점이 있는가? 

이런 저런 생각으로 어지럽던 머리를 막 끝낸 조지레이코프의 자유전쟁에 집중하기로 한다.


자유는 본능적으로 우리 신체와 관련이 있다고 했다. 우리가 자유롭지 못한 또는 자유로운 상태를 언어로 표현할 때 그것은 우리 신체의 어떤 상태로 은유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속박으로부터 벗어난다"라든가 "사슬에서 풀려난다"라든가...그러고 보면, 자유는 너무도 당연한 인간 존재의 상태여야 하므로 좌와 우가 부인할 수 없는 '단순한' 자유가 있다는 말은 자연스럽게 들린다. 그러나 자유에는 빈공백이 있으므로 그것을 어떤 개념으로 채우느냐는 상당히 다른 문제라고 하였다. 여기서부터 우리의 자유전쟁은 시작된다는 것이다. 

레이코프에 따르면 진보주의자의 우는, 보수주의자들이 자유를 말할 자격이 없다고, 자유는 당연히 진보적이라고 사고하는 데 있다고 읽힌다. 미국의 건국에서부터 자유의 개념은 진보적이며 따라서 보수주의자들이 자유를 논하기에는 비열하고 부도덕하기 때문에 "감히"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설령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안먹힐 것이라는 거다.

사실 이 말 역시 수긍할 만하다. 진보주의자에게 있어 자유는 진보주의자들만이 전유물로 여길 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라 대응의 가치를 아예 느끼지 못했고 또 실제로 그래왔다. 헌데 여기에 또 다른 우가 있다. 지난 30년간 보수주의자들은 너무도 교묘하게 자유의 개념을 뒤바꾸어 왔기 때문이다. 당연하고 선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수를 쓰지 않아도 자유의 개념은 "그대로" 진보적 가치로 진보주의 진영에 오롯이 머물것이란 너무도 안일한 사고는 자유전쟁에서 진보주의자들의 패배로 귀결하였다. 

도덕성이 인간이성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감정과 관려있다는 지적은, 그래서 솔깃하다. 사람들은 삶의 여러 면에서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진보적 가치를 드러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보수적 가치에 따른다. 가정에서는 가부장적 위계질서에 익숙하면서 일터나 사회적 관계에서는 진보적 가치에 경도되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다. 아니면 환경문제에서는 진보적이지만 재산권이나 노동문제에서는 보수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마음속에 이미 어떤 가치에 대한 개념을 내재화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어떤 지점에서는 진보적 가치에 또 다른 어떤 지점에서는 보수적 가치가 내 마음 속에 틀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행동은 결국 이와 같은 개념틀에 근거하여 이루어진다는 것. 자유를 선취할 아무런 자격이 없는 보수주의자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다.

레이코프는 인지과학자이므로 주장은 단순한 주장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그는 누구보다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수년간 연구해 온 과학자이다. 현상에 대한 해석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일방적 주장이나 개인적 경험만으로는 어림없다. 가설이 엄밀한 실험과 논증을 거쳐 이론이 되는 것이라면 레이코프의 과학자적 입지와 태도는 자유개념 전쟁에서 우리를 설득하는데 더욱 효과적이다.  

나는 본래적 의미의 자유-레이코프식으로 말하면 단순한 자유를 원한다. 그것의  빈 공간은 진보적 가치로 채우고 싶다. 그것은 인류라는 종이 그토록 많은 종들 사이에서도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사회를 이루고 사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였고, 그래서 사회를 이루는 것이 우리 종족의 생존에 어울리는 것이라면,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배제하고 일부만 살아남는다는 것은, 우연한 세포에서 시작해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이 되기까지 너무도 많은 것들에 빚진 사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한정된 우주의 자원을 골고루 나눠갖는 것은, 우연히 기회를 얻어 오늘날 이토록 많은 개체수로 지구 곳곳을 파고든 우리 종족들 때문에 사라지고 줄어든 다른 종들에 대한 기본적 예의라고 생각한다.  

돈이 없다면 자유가 없다. 당연히 가지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거의 많은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가난한 사람이 절제력이 부족해 가난한 것인가?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도로를 건설하고 유지하고, 인터넷기반을 만들고 수자원을 관리하고 전기시설을 유지한다. 그런데 부자들은 이런 시설들을 가난한 자들보다 더 많이 이용할 수밖에 없다. 기회 역시 가난한 자의 기회는 부자의 기회보다 덜 자유롭다. 

진보주의자들이 도덕적 우월성이나 자유의 본래적 개념에 머물러 있기만 하다가는 큰 코 다칠 판이다. 아니 이미 큰 코 다치고 있다. 개념에서 지면, 전쟁에서 지는 것이다. 가끔 우리 종의 진화의 끝을 생각해 본다. 이 책은 섬뜩한 책이다. 물론 종의 진화와 절멸이 자연의 한 과정이자 우주의 질서 중의 하나라고 인정한다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먼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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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진달래 2010-10-22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확하게 책을 이해하고 우리가 명심해야 할 시사점을 잘 소개해 주셨습니다. 옮긴이로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퍼갑니다.

테레사 2010-11-11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예^^;
 

벌써 지난 해가 되어 버린 2009년, 흔히 연말이면 출판사나 신문사 등에서 올해의 책들을 선정하는 것을 보았다. 혹시 내가 읽은 책이 포함되어 있나 하고 가끔 살펴보곤 하였는데 내가 신뢰하는 신문사의 선정목록에 내가 읽은 책들이 들어 있을라치면 왠지 뿌듯함과 동시에 그러면 그렇지 하는 약간은 뻐기는 기분이 들곤 하였다.  

그런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나도 나만의 리스트를 만들어 볼까하는 생각을 하였다. 내가 뭘 읽었는지 기억이 안 날 때도 있고 적어도 내가 이런 책을 읽었구나 정도는 메모해 두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소수의 음악 

기괴한라디오 

순수의 시대 

마지막3분 

역사 위대한 떨림 

오늘을 잡아라 

불완전성쿠르트괴델의 증명과 역설 

미토콘드리아 

무한의 신비 

마더나이트 

책읽어주는 남자 

부분과 전체 

위대한물리학자들4권 

레볼류셔너리 로드 

리만가설 

거미여인의 키스 

설국 

마티스 

거대한전환 

주기율표 

더크젠틀리의 성스런탐정소 

고뇌의 원근법 

오리진 

달콤쌉싸름한초콜릿 

굿바이 다윈 

그저좋은사람 

진화하는 진화론 

세상의 끝 여자친구 

위대한유산 

두도시 이야기 

에드위 드루드의 비밀(순서는 읽은 순서) 

작년에 찰스 디킨즈를 새로 발견한 것은 참 즐겁고도 뜻밖의 행운이었다. 위대한 유산 덕분에 연이어 그의 소설들을 몇권 더 읽어보기도 하였다. 데이비드허버트 로렌스의 역사책도 즐겁게 읽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미토콘드리아와 최근 영화까지 보게된 레볼루셔너리 로드. 뭐 위에 열거한 책들 모두 다 버릴 수 없이 아끼고 싶은 책들이긴 하지만, 시간의 근접성을 고려할 때 영화를 본 것이 기억을 더욱 강하게 만든 듯하다. 하지만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은 기대 이하였다. 영화가 훨씬 더 생동감있고 즐거웠다는 느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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