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도 11월에는
한스 에리히 노삭 지음, 김창활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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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땐 곧잘 믿곤 하였다, 사람과 이야기와 노래를. 그러나 어른이 되면서 믿음은 조금씩 사라졌다. 세계가 표리부동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던 것 같다. 이 세계가 ‘진부한 이미지들로 가득한’ 곳일 뿐이며 가치있는 것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절망적 인식에 도달했던 적도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지금도 유효한 인식일 것이다. 결정적 계기가 생겨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무덤까지 가지고 갈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이 절망적 인식을 안고 죽는다면 가엾은 노릇일까? 생각은 중학교 때 읽었던 ‘성채’의 마지막으로까지 이어진다. J.A.크로닌의 소설 막바지는, 한때 탄광촌에서 무료 의료봉사를 하며 부조리한 사회에 맞서기도 하였으나 상류사회의 부와 명예에 맛을 들여 사랑하는 아내까지 버렸던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다시 아내에게 돌아오고, 이 주인공의 아내가 기쁜 마음으로 남편이 좋아했던 버터를 사오다 트럭에 치여 죽는 것으로 끝난다. 나는 가끔 그녀의 죽음은 행복했을까 생각해 보곤 하였다.


5월의 어느날 밤 마리안네는 상공인협회가 주는 작가상 시상식에서 처음 만난 여인에게 ‘당신과 함께라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라는 한마디 말을 던진 남자를 따라 남편과 아이를 버리고 떠난다. 그녀는 어느 한곳에 고정되지 않고 자유로운 그래서 불안정한 작가 베르톨트와 어릴 적 이루지 못한 사랑의 완성을 꿈꾸고 현실의 공허와 존재의 불안을 감당할 힘을 얻고자 했다. 불쑥 찾아온 사랑의 기회에 용감히 생을 맡길 줄 알았던 마리안네는 그러나 역시 그런 위험한 사랑 역시 남편과의 지난 6 년간의 무료한 삶과 닮아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더욱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지만, 11월이 다가올수록 베르톨트가 마치 처음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찾아오리란 사실을 예감한다. 늦어도 11월에는, 베르톨트의 작품이 완성되고 작은 폭스바겐을 하나 사서, 어디든 자유롭게 떠날 수 있을 것이었다.


사랑의 종말은 죽음과 함께라야 납득이 된다. 그렇지 않은 사랑의 종말을 나는 상상할 수가 없다. 마리안네와 베르톨트는 다시 만나고 그들은 폭스바겐을 타고 떠난다. 그리곤 죽음! 사고였지만, 예정된 종말이었다. 마리안네의 죽음은 행복했을까? 아니 그녀는 행복하게 죽었을까? 나는 다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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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도둑을 쳐다보지 마세요
이사벨 코프만 지음, 박명숙 옮김 / 예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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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블로그가 무엇일까? 최근엔 홈페이지보다 블로그가 대세라는데,그걸 모르면, 요즘 살아남기 힘들다고까지 하던데. 하지만 인터넷에 글 따위나 남기는 그런, 자기과시형 인간이 되고 싶진 않다.....

그러나, 시대를 거스를 수 없는 것인지, 나는 어느새 알라딘 서재에 나의 블로그-지금도 이게 뭔지 정확히 모르겠다. 일기장인지,낙서장인지, 독서감상문을 인터넷에 옮겨 놓은 것인지-를 가지고 가끔이지만 독후감을 쓰고 있다. 누가 이런 글을 읽기나 하겠는가? 무언가 쓰고 싶을 때가 있지만, 쓸 것도 없고, 쓸 재주도 없고, 그냥 읽은 책에 대해 한마디 평이나 해두자는 심산에서 시작하였다. 혹시 쓰다보면, 글실력이 좀 늘지나 않을까하는, 뻔뻔한 기대를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읽은 책을 다 쓰기에는, 내가 너무 게으르다. 생각의 속도를 손이 제대로 따라잡지도 못한다. 몸은 늘 뒤처진다. 길을 걷다가 내가 보기에도 그럴듯한 생각들이 솟구칠 때가 있지만, 그 때를 지나면,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다. 한때는 보이스리코더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삐삐가 지배하던 시절, 우연히 녹음된 내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내가 아는 나의 목소리와 너무 달라, 소스라치게 놀랐다.  참으로 좋은 책인 '음악은 왜 우리를 사로잡는가' 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자신과 타인에게 어떻게 들리는가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읽지 않았다면, 나자신의 목소리를 혐오했을 것이다.

서재에 독후감을 남기면서, 생각한다. 나는 왜 자꾸 이런 짓을 하는가? 읽으면서 즐거우면 그만이지, 왜 기록으로 남겨두려 하는 것일까?

나 역시, 나 여기 있어요 하는 식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어렵게 인정해야 했다. 문장력을 높이고, 아름다운 것에 대해 기억하고 싶고, 좋은 글을 쓴 작가를 칭찬하고 싶고, 뭐 그런 이유들은, 사실 부차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정작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 최고의 목적아니었을까?

지나가는 도둑은 쳐다보면 아니 된다. 그는 나의 이런 마음조차도 다 훔쳐갈 것이다. 내가 읽은 책과, 내가 게을러서 미처 기록해 두지 않은 생각들을, 그는 순식간에 낚아 채 갈 것이다. 내 인생의 어느 한 순간이 고스란히 사라지더라도, 나는 그 사실조차도 모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왜 이 도둑은, 이런 짓을 하는 것일까? 다른 사람의 기억을 훔쳐서 무얼 하려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책을 읽을 잠재적 독자를 위해 언급하지 않겠다.

새롭고 반짝이는 소재이긴 한데, 줄거리가 기대만큼 영글지는 못한 느낌이다. 한겨레21에서 광고를 보고 호기심이 가서 읽어보기로 한 책이었다.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왠일인지 토마스 만이 생각났다. 이럴수가! 예술가로서의 삶에 대해 평생 고민했던, 그가 생각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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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 자연선택의 신비를 밝히다 주니어 클래식 1
윤소영 풀어씀 / 사계절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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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사람들이 고전이라고 일컫고 있는 것을  정작 읽어 본 이는 적다는 지적은, 사실이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적절한 때가 오면, 고전에 손을 뻗치게 되는 경우가 있는 법이다. 그게 고전의 매력이고 고전의 힘이 아닐까?

지난 2004년인가 미국을 다녀온 아는 이가, 그 유명한 '종의 기원'을 선물했다. 기쁜 마음으로 첫 페이지를 읽다가, 좌절감에 빠졌던 기억이 선명하다. 내용이 어려운지 아닌지는 가늠해보지도 못하고, 그것은 고스란히 책장으로 직행하였다. 하지만, 다윈에 대해 일말의 언급이라도 있는 책을 읽을라치면, 내 눈은 늘 그 책이 꽂혀 있는 책장으로 향했다. 영락없이 빚진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하지만 당분간은 그 책을 읽어 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무덤까지, 그 마음만 안고 가야 할 지도 모르겠다.그도 그럴 것이 그 책은 영어로 된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이었기 때문이다. 가끔 생각이 나면, 또 진화에 대한 책을 읽을 때면, 종의 기원 번역본을 검색하곤 할 밖에.

헌데 최근의 모 방송국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도서평론가로 알려진 분이 한국에 번역된 종의기원이 엉터리가 많다는 이야기를 했다. 덧붙여 올해는 다윈이 탄생한지 200년이 되는 해라 아마도 다윈에 대해, 또 다윈이 쓴 책에 대해 많은 글들이 쏟아질 것이며, 따라서 연말쯤 되면 번역서도 다양해 질 것이고 질좋은 책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무척 반가운 소식이다. 그렇다고 연말까지 기다리자니 좀이 쑤신다. 해서 집어든 책이, 윤소영이 풀어쓴 다윈의 종의기원이었다. 물론 그 방송국 프로그램에서 안내받은 책이다. 책은 문자그대로 윤소영이란 작가가 자신이 이해한 종의 기원을 소개한 것이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다고 되어 있지만, 나같은 어른 문외한이 읽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무엇보다, 다윈의 진화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구체화해 나갔는지를 곁들여, 종의기원의 핵심 이론들을 쉽게 풀어냈다.  당대 사회적 현실을 고려할 때 다윈은 곧바로 자신의 진화론적 시각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5년간의 비글호 항해를 통해 관찰하고, 기록하고 종합한 노력의 결실은, 인간 역시 진화의 산물이라는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기는 했지만 충분히 유추할 수 있게 해 준다.

당시 사회적 인식의 수준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다윈의 사상은 가히 혁명적이었을 것이다. 신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진 "만물의 영장은 인간"이라는 확고한 믿음에 진화론보다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 것이 또 있었을까! 바닷가 아주 작은 물질에서부터 시작해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진화해 온 존재가 오늘날의 우리라는 사실이 말이다.

최근 굴드의 책이나 핑거의 책을 읽으면서도, 진화에 대해 생각해 볼 지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진화란 선과 악의 구분으로 평가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이며, 오늘날 우리가 분류하는 기준에 의한 고등동물이라는 표현조차 오만한 인간의 시각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라는 것. 굴드에 따르면, 진화란 국지적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핑커에 의하면,오늘날 우리의 모습이란, 유전과 공유환경 및 우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뿐, 저 높은 곳의 누군가의 계획에 의해 창조된 만물의 영장은 아니다.

책은 책을 부른다.  이 책은 또 어떤 책을 부르고 있는 것일까?  이탈로 칼비노의 우주만화란 소설책!  전혀 엉뚱한 방향인 것 같지만, 첫 장을 읽으면서, 감탄하였다. 감탄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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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양장) - 간략한 역사
데이비드 하비 지음, 최병두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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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저리 거닐다 보면, 어느새 어딘가 익숙한 곳에 닿아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뇌의 작용의 결과인지 아니면, 몸의 기억인지는 모르겠다. 뭐 이둘이 결과적으로 같은 말일 수도 있지만.......이미 20대를 저만치 지나온 나로서는 어린 친구들이 읽는 책에 별로 무게를 두지 않는 편이다. 그 시절 나는, 너무 어렸고, 10년이 흐른 어느날 문득 돌아보니 삶이 과장되게 희망으로 빛나 보였던 때였다. 이제 나도 나이 먹은 사람티를 내기 시작한 것일까. 그러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어쩌면 이런 감정은 그 시절에 대한 부정일수도, 회한일수도 또는 돌이킬 수 없는 시절에 대한 질투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떻든 이 시절에 읽는 책마저도 미성숙하고 덜찬, 해서 별로 신뢰하지 않은 나다. 그런데 하비라는 좌파 지리학자의 이름을,내가 컴플렉스라고 여겨온 경제분야(그러고 보니 내가 컴플렉스하지 않은 분야가 어디 있을까?)의 책을, 하필이면 스물 대여섯밖에 안된 어린 친구가 읽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3분의 1 읽었어요. 처음엔 재밌는데 뒤에 갈수록 좀 그러네요...그 친구의 말이다. 요것 봐라, 이런 이야기를 할 정도란 말이지..흠...지리학자로군,,,신자유주의 역사...통섭인가? 책 앞날개의 작가의 이력에서 나는 그가 지리학자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리학자가 세계 경제의 역사에 대해, 썼다는 사실도 마음을 끌었다. 물론 가장 큰 유인력은, 솔직하게 시인하자면, 신자유주의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라는 주제였고, 그리고 좀더 솔직하자면, 그 용어에 대한 나의 컴플렉스였다.

나는 신자유주의를 모른다. 물론 자유주의에 대해서도 모른다. 지금 그것이 세계를 관통하는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라고 하더라도, 그속에서 좌충우돌하며 현실을 살아가는 미미한 한 개인에게, 그것이 그리 크게 문제로 와 닿진 않는 법. 나도 이 법 아닌 법에 따라 사는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신자유주의?흥 신자유주의이든가 말든가...헉..헉..대며 살기 바쁜 것이다. 하지만, 하필 내가 일하는 곳에서는 이 용어를 매일 한번씩은 듣거나 보거나 해야 하는 곳이다. 물론 얼렁뚱땅 주워들은 감량으로 그게 무언지를 대충은 아는데, 대충 아는 것으로 살기에는, 찜찜하고 찜찜하다 보니, 내 욕심많은 지적 영역에서는 모르는 것과 같다고 입력이 되어 있으며, 그러다 보니, 이것은 콤플렉스임에 틀림없게 되어 버렸다.

그 어린 녀석이 나의 컴플렉스를 건드렸던 것이다. 내가 거의 무시하는 것과 다름없는, 스물 대여섯의 풋내기가 내가 모르는 분야를 떡하니 펴놓고 읽고 있으니...

이 책은 그런 연유로 읽게 되었다. 불순한 동기에서 시작되었으나, 끝은 아름답다. 나의 자평이긴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지배하는 세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으며 도대체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나아가 그것은 옳은가? 옳다는 기준은, 자의적인 것이 되어선 아니 되고 적어도 인류의 보편적인 삶을 향상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면, 이 신자유주의적 흐름은 옳은가? 그리고 그것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지속된다면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아니라면? 대안은 있는가? 이 책은 이런 의문을 가진 사람들에게 유익하다. 시시한 것에 몰두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거대한 역사적 문제에 둔감하기만 한 것은 아니니까, 나와 같은 사람들도 읽은 자격은 있다. 제목이 주는 약간의 전문가적 냄새만 뺀다면 그리 어려운 책도 아니다.

섬뜩한 진실을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지만, 그 속에서 지은이가 의도하는 바를 잡아내는 것도 썩 어렵지 않다. 신자유주의는 계급권력의 회복이며, 결국 우리는 세계사의 발전과정에서 힘겹게 얻어낸 “언론과 표현의 자유, 교육과 경제적 보장의 자유, 조합을 결성할 권리”를 금융자본이 이윤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와 맞바꿨다는 그의 평가는 얼마나 적확한가? 그가 파악한 세계는 "결과적으로 빈국들이 부국들을 보조하는 이 세계는 얼마나 이상한 곳인가"라고 한 스티글리츠의 말로 요약된다.

“자유의 개념들 중에서 어떤 것이 적절한지를 따져보는 심각한 논쟁이 없다”는 지은이의 문제의식 역시 “자유”라는 이상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면죄부를 주거나  신뢰를 보내는 오늘날의 우리들 태도가 얼마나 맹목적이며 편향된 것인지 돌아보도록 한다.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이미 익숙한 곳에 와 있다. 책이다. 책은, 늘 따뜻하고 친절하다. 친절한, 동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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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서판 - 인간은 본성을 타고나는가 사이언스 클래식 2
스티븐 핀커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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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존재에 대해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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