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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합본 메피스토(Mephisto) 13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 / 책세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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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농담에 익숙하지 않다. 천성적으로 농담을 잘 못한다고나 할까. 농담이 등장할 때가 대체로 처해진 난처한 상황에서 빠져나오려거나 국면을 어떻게든 전환해 보고 싶을 때라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이런 천성은 사는데 별 도움이 안된다. 게다가 사람이 늘 진지하기만 하면 재미가 없는 법이다. 그렇지 않아도 재미없는 세상에 농담이라도 던져서 웃게 만드는 능력은, 그래서 마술과도 같다. 이 점에서 더글라스 애덤스는 마술사다. 그러나 달걀을 한번 쓰윽 문질러서 콧김을 두어 번 불어넣고 하얀 손수건으로 덮은 뒤 하나 둘 셋하고 세기만 하면 곧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정도의 마술과는 비교도 안된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들- 전 우주를 상대로 하는 정도라면 그 스케일이 어떨지는 상상에 맡긴다. 시간과 공간을 마음대로 넘나들면서 삶과 우주, 모든 것에 대한 질문의 해답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이토록 유쾌하고 통쾌하고 익살스럽고 떠들썩하게 풀어내는 작가를 나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물리학과 천체과학에 대한 깊은 이해력, 무엇보다 하늘만큼이나 넓고 깊은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그런 책이라고만 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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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하는 식물 - 세상을 보는 식물의 시선
마이클 폴란 지음, 이경식 옮김 / 황소자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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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권한다는 건 어느 정도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것이 상대방의 인생에 영향을 끼칠 만큼 중요한 사안이 아니라 사소한 한끼 식사의 메뉴라 할지라도.


  최근에 사무실을 방문한 김성희씨가 요즘은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들이민 책제목에 고개를 갸웃한다. 그 동안 내가 그에게 심어준 인상이 이 책을 집어들기엔 의외라고 생각하게 했나 보다. 성격만큼이나 내 독서취향도 좀체 가늠하기 어렵다고 말하지 않은 게 다행이지만 그러고 보니 나 역시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아주 우연찮게 얻게 되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책은 책방에서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이야 인터넷서점에서 책을 주문하고 ‘OO씨, 책 왔습니다’하는 택배 아저씨의 씩씩한 목소리를 듣는 재미에 익숙해졌지만, 책방에 즐비한 수많은 책의 바다에서 우연찮게 맞닥뜨린 섬 하나가 주는 기쁨을 어디다 비길 수 있을까?


일정한 목적 없이 자주 기웃거리다 보면 항상은 아니지만 늘 수확이 있게 마련이다. 내가 살던 신림동에는 어느 대형서점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나는 그렇게 생각한다)작지만 보물 가득한 책방이 하나 있어 나의 정처없는 발길을 자주 잡아끌고 했다. 퇴근이 빠른 날이나 주말이면 할일없는 백수처럼 이 책 저 책을 기웃거린다. 어떤 것은 서문이 마음에 들어서, 어떤 것은 표지가 인상적이어서, 또 어떤 것은 믿을 만한 출판사라서, 더러는 순전히 감으로 집어든다. 이유야 어떻든 그렇게 해서 마주친 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카렐 차페크의 ‘단지 아주 조금 이상한 사람들 ’과 피터 회의 ‘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이다.

그러나 변변한 책방 하나 없는 동네로 이사를 하고 나서는 더 이상 이런 우연한 만남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마음에 맞는 책만 골라주는 ‘키다리 아저씨’가 따로 있지 않을 바에야 필요에 따라 인터넷 서점을 뒤질 수밖에 없다. 신문의 책소개란도 한 몫을 해야 한다. 「식물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는 옆의 동료 덕에 읽게 되었고 그 책이 하도 인상적이어서 키워드 검색으로 ‘식물’쳐서 나온 책이 바로 이 「욕망의 식물학」이다.


책이 나온 것은 올 1월로 되어 있는데 나는 8월에 이 책을 읽었다. 한겨레에 자주 칼럼을 쓰는 최재천 교수가 감수와 추천의 글을 썼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는 이 책에 대해 내가 이외 달리 무슨 말을 보탤 수 있을까?


「사과」와 「튤립」, 「마리화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자」의 소제목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우리가 흔히 하는 식의 세상읽기가 실은 얼마나 일방적이고 인간 중심적 사고인지를 깨닫게 해 준다.  이 지구 위에서 인간은 다만 하나의 구성원소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가 보지 못하거나 대수롭잖게 생각하는 것들도 이 지구 위 삶에서 충분한 자기 존재목적을 가진다는 식의 구태의연한 결론에 앞서 우선 제목부터가 욕망의 식물학이라니 이 얼마나 뻔뻔스러울 정도로 대담한가? 식물이 ‘감히’ 욕망을 한다는 말인지 욕망을 가진 인간이 개입한 식물발달사라는 말인지 책을 펴기도 전에 이미 호기심이 동하지 않는가? 결과는 직접 확인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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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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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때문이었다. ‘움베르토D'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토요일 밤이었고 모두 떠나고 없었으며 낮 어느 땐가 마셔둔 약간의 카페인 기운이 더해졌던 탓이었을 것이며 그래서 잠은 더욱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잠의 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TV를 켰을 것이다.

‘움베르토D'는 비토리오 데시카가 1952년에 만들었다. 자신의 아버지께 헌정한 작품이지만 이탈리아를 너무 비관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환대받지 못했다고 한다. 스토리는 단순하며 슬프다. 연금 생활자인 움베르토D가 밀린 집세와 생활을 위해 구걸을 하는 지경에 이르지만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아 자신의 유일한 벗이자 가족인 애완견 플릭을 맡아줄 사람을 찾고 자살하려 한다. 기차에 뛰어들어 죽으려다 실패한 움베르토D는 공원에 몰래 두고 온 플릭을 다시 찾아내고 함께 어딘가로 떠난다.

움베르토D를 연기한 배우도 ’자전거 도둑‘에서처럼 길거리에서 캐스팅했다고 하는데 그 공허한 눈빛 연기는 일품이다. 일품이다 못해 뼈에 사무친다. 그 밤이 지나도록, 일주일이 지나고 한달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 눈이 말하는 것은 잊을 수가 없다. 거역할 수가 없다.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진주귀고리 소녀’ 가 던지는 눈빛은 매혹적이다. 말을 걸 듯 말 듯 눈에서 쉽게 시선을 옮길 수 없도록 한다. 이 소녀의 눈빛에 대해서는 해석이 구구하다. 무언가를 묻고 있는 듯하면서도 아닌 것 같고 장난기가 조금 비치는 듯하면서도 순진한 구석이 있다. 멀리서 보았을 때와 가까이서 보았을 때의 느낌도 사뭇 다르다. 아무튼 그림을 보았을 때 제일 먼저 두 눈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리고 나서 살짝 벌어진 입술이 눈길을 끌고 소녀가 하고 있는 장신구가 진주라는 사실은 약간의 시간적 간격이 있고 나서야 깨달을 수도 있다. 트레이시 슈발리에처럼 자꾸 자꾸 그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얼굴에 내려앉은 빛이며 머리에 두른 푸르고 노란 천이며 소녀가 입은 황금색의 저고리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배경이 몹시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진주귀고리 소녀’를 그린 작가는 17세기 네덜란드의 델프트라는 도시에서 살았던 요하네스 베르메르다. 그는 평생 서른 다섯 점의 그림과 열한 명의 아이를 남겼다. 빛의 화가 램브란트가 활동하던 이 시기의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곳이었다. 영국의 크롬웰에게 제해권을 빼앗기기 전까지만 해도 세계해상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막강한 카톨릭 교회의 권위도 신교도의 집합소인 이곳에선 힘을 쓰지 못했다. 사회를 주도하는 층은 무역으로 돈을 번 상인들이었다. 아마도 소설 속 반 라위번 같은 인물이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베르메르의 그림 속에 종종 등장하는 이 부유한 상인이 그림을 주문하고 사는 소위 후원자 노릇을 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다. 저자는 소설이 ‘진주귀고리 소녀’의 갖가지 추측을 불러일으키는 모호한 표정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책장을 넘기면서 만나게 되는 베르메르의 다른 작품들을 감상하는 재미도 놓칠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이다. 출판사가 영어판 원문에는 없는 베르메르의 다른 작품들도 실어 놓았던 덕이다.

이 그림 속의 소녀는 누구일까? 화가의 딸인가, 전문적인 모델인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빛을 향해 살짝 돌아선 듯한 이곳은 어디인가?

사실 그림만 보아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트레이시 슈발리에와 같은 작가적 상상력이 뒤따르지 않았다면 이런 궁금증에서 끝났을 수도 있다. 이것이 작가와 독자를 구별짓는 경계선인 셈이다. 더 나아가느냐 여기서 멈추느냐. 그러므로 평범한 사람들은 왜 예민한 그리트가 화가 베르메르의 집에 하녀살이를 갈 수 밖에 없었는지, 그리트의 어떤 감각이 베르메르의 신뢰를 얻게 되었는지, 베르메르가 어떻게 그 그림을 작업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1600년대 델프트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에 대해서까지 작가의 상상력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진주귀고리의 소녀’는 그 상상이 쏟아내는 이야기가 참으로 그럴 듯해 보인다.

길드의 조합원이었던 아버지가 사고로 눈을 다치자 딸인 나 그리트는 화가의 집에 하녀로 들어간다. 언젠가 본 적 있는 ‘델프트 풍경’을 그린 바로 그 화가의 화실을 청소해 주는 일을 하면서 조금씩 그의 신뢰를 얻고 나중에는 물감 섞는 일까지 거들게 된다. 화가의 작품에 자신의 견해까지 밝힐 만큼 감각이 있던 나를 화가는 그림의 모델로 청하고 나와 그의 이별의 도화선이 될 바로 그 문제의 ‘진주귀고리 소녀’가 탄생한다. 끝까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 화가는 내가 그림속에서 걸고 있는 진주귀고리를 나에게 돌려주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내게 돌아온 이 진주귀고리를 나는 어떻게 할까?

작년에 이 ‘진주귀고리 소녀’를 원작으로 한 영화가 만들어졌다. 극장에서 만난 영화는 좀 더 압축적이었다. 베르메르와 소녀의 아슬아슬한 심리적 관계에 좀 더 초점을 맞춘 듯하다. 책에서 보았던 섬세한 감정선을 그대로 살릴 수는 없었겠지만 그리트 역의 스칼렛 요한슨의 연기는 그런대로 볼 만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실제 그림 속의 소녀가 훨씬 더 많은 표정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물을 머금은 듯한 소녀의 눈은 분명 무언가 말하고 있다. 번역자의 표현대로 그것이 무슨 말인가를 건네기 위해 살짝 돌아선 것인지, 화가에게 보내는 안타까운 시선인지, 슬픔에 찬 것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말 그래도 그것은 감상자인 우리들의 숫자만큼이나 무수한 형태의 언어들을 건네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 무수한 형태의 언어 중 하나가 바로 이 ‘진주귀고리 소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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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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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식의 글에는 우수가 느껴진다, 늘 어김없이. ‘나의 서양미술 순례(2002.창비)’와 ‘청춘의 사신(2002.창비)’이 그랬고 ‘소년의 눈물(2004.돌베개)’이 그랬다. 속으로 삭인 듯한 감정의 깊이와 섬세한 감수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의 글줄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들 역시 늘상 그를 따라다니는 그 ‘우수’의 감정에 함께 도달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가 도달한 그것이 그의 것과 동질의 그것이었을까? 그 또한 함께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늘상 우리가 아니라 우리 곁의 소수이다. 그의 눈은 늘 겉도는 자들, 경계선에 선 자들 그리고 추방당한 자들로 향해 있다. “아무래도 내가 있는 곳은 최후의 변경이며 나는 최후의 하늘을 보고 있는가 봅니다.”라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을 항상 기억한다는 재일조선인 서경식, 그가 디아스포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 이후 ‘외부의 힘에 의해 대부분 폭력적 힘에 의해 자기가 속해 있던 공동체로부터 이산을 강요당한 사람들 및 그 후손’들을 지칭함으로써 사전적 의미를 훌쩍 뛰어넘는 디아스포라들은 전세계에 600만명이나 흩어져 있다고 한다. 서경식 그 자신을 포함해 이들 ‘쫓겨난 자들’에 대한 성찰과 사색을 통해 도달하는 곳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하는 자기인식의 지점이 아니겠는가. 또한 그 묵직한 성찰과 사색의 기록을 함께함으로써, 우리가 지금 어느 곳에 어떤 모양을 하고 누구와 함께 서 있는가 하는 자기 성찰의 순간에 이른다면, 이 책을 읽은 이로서는 또 최고의 선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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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사유의 기호 - 승효상이 만난 20세기 불멸의 건축들
승효상 지음 / 돌베개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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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스크바 지하철역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하철역이다. 1935년 최초의 열차들이 모스크바 지하를 달렸을 때까지만 해도 오늘날 지하철이 가장 중요한 대중 교통 수단 중의 하나가 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매일 9,287개의 열차로 900만 명의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계산상으로만 보면 도시 주민 누구나 하루 한 번은 지하철을 타는 셈이다. ‘인간은 죽어서만 지하에 속하는 법’이라는 러시아 정교회의 반대 논리는 기술과 인간 상상력의 결합이 가져다 준 무한한 가능성에 이제 자리를 내 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삶이란 집이나 건물 등을 짓고 부수고 다시 짓는 것의 역사다. 장소와 시대에 따라 짓는 재료도 다르고 그곳에 깃들여 사는 사람들의 생각도 조금씩 다르다. 마당과 뒷간이 있던 옛집과 대규모 콘크리트 아파트 단지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모양과 생각은 다를 것이다. 그러나 집은 여전히 고단한 육체를 누이고 따뜻한 위안을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그것이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든 짚으로 만들어졌든.

2002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승효상을 처음 만났다. 그해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승효상 건축전>이 열리고 있었다. 나로서는 건축전은 그때가 처음인지라 당연히 무언가 굉장한 인식적 경험을 기대했던 것 같다. 헌데 막상 견학온 학생들로 가득 찬 전시실을 어렵사리 돌고나니 손에는 몇 권의 책과, 건축이란 모형만으론 도저히 원래의 가치나 감정을 전달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흔히 문외한들이 갖곤 하는 자기 합리화식의 이해 정도만을 들고 나오는 것으로 족해야 했다. 그리고 그날의 그 책들은 영문도 모른 채 책꽂이에 오래도록 꽂혀 있어야만 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승효상의 이름을 다시 만난 것은 순전히 광고 덕이었다. 여름 내내 한겨레신문 하단에서 끈질기게 내 눈길을 기다리고 있었던 셈인데 이 역시 도저히 정리가 안되는 책들 사이에 끼여 마냥 변덕스러운 주인의 마음이 선택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야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단지 ‘건축이 우리 삶을 바꾼다고 믿는다’는 저자의 신념이 그럴 듯해 보였다는 그 이유 때문에 용케 이런 운명을 면하게 되었다.

승효상은 건축가다. 건축하면 63빌딩이나 예술의 전당 혹은 외국의 파밀리에성당이나 퐁피두센터 등의 굉장한 것만을 떠올리기 십상인 일반인에게 건축가의 이름이란 시인의 이름과는 분명 다른 무엇이다. 뭐 건축은 현실과 가장 가까이 있는 예술이지만 안타깝게도 일반 대중은 여전히 관심을 갖지 못한다는 페터 베렌스(독일의 건축가, 베렌스 하우스, 회히스트 염색 공장 본부 건물, 바이센호프 주택단지의 주택 등 다수)의 한탄을 떠올리지 않아도 좋다. 지난 세기 지어진 대표적 건축물로 언론이 선정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유홍준의 집 ‘수졸당’과 ‘대학로의 문화공간’을 지었고 ‘파주출판도시’의 지휘를 맡았던 이가 승효상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아름다운 집을 보고 이 집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라고 생각하지 이 집을 누가 지었을까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건축가인 그가 일반인들을 위해 몇 년 동안 써온 글들을 모아 엮어 낸 것이 바로 이 책이다. 그는 집은 세우는 게 아니라 짓는 것이라고 믿는다. 짓는다는 것은 삶의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그 속에 사는 사람의 삶을 조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인이 만든 건축이란 용어는 우리 삶을 지배하고 변화시키는 건축의 본래적 의미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영어의 ‘architecture'의 ’arch'는 크다는, ‘tect'는 학문 혹은 기술이라는 라틴어에 어원을 두고 있으니 직역하여 ’큰 기술‘이라는 뜻으로 오히려 건축의 중요성을 더 잘 드러낸다고 믿는다.

아름다운 집에 대한 승효상의 생각 역시 단호하다. 동선이 길어 좀 걸어야 되고 대문도 나가서 열어줘야 하고 빗자루로 쓸고 걸레를 훔치며 가족의 살내음을 맡을 수 있는 그런 집이다. 쉽게 말해 다소 불편한 집이다. 승효상은 이런 집에서라야 궁리하게 되고 생각하게 되고 사유하게 되고, 사유를 통해 삶을 관조할 수 있다고 믿는다. 화려한 재료를 써 장식이 많고 화려한 집에서는 거주인은 왜소하게 되기 십상이고 삶의 모습은 그 속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옛 집이야말로 아름다운 집이 되기 위한 요소들이 그득했다. 그래서 승효상은 ‘달동네’를 자주 기웃거렸다. 그곳에서 우리 옛 흔적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는 집이 소유와 축재의 수단도 아니고 오로지 사용할 뿐이며 사는 사람들의 꿈을 담는 공간일 뿐이다.  

이 책은 승효상이 외국 여행을 통해 만난 건축물에 대한 사색의 고백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더러는 몰라서 더러는 이름은 들었지만 그저 그러려니 하는 무심함으로 지나친 건물들이 건축가 승효상을 통해 새롭게 등장한다. 비엔나 미카엘 광장에서 커피를 마시며 올려다 보았던 건물이 당대 비엔나시민들에게 그토록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바로 그 로스 하우스였다니. 승효상은 종래의 건축 개념을 뒤집은 파리의 퐁피두 센터도 건축물 자체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정신에 주목한다. 땅의 서쪽편의 반을 경사진 광장으로 비워 고밀도의 도시 한가운데 도시의‘ 비움’을 만들어 낸 것이야말로 이 건물을 건축사의 빛나는 성취로 거듭나게 한 정신이라는 것이다. 르 코르뷔지에의 빌라 사보아에서는 서양 문화사의 핵심을 이루는 ‘나’ 중심의 사고를 확인한다. 우리의 주거관이나 세계관과는 확실히 다른 전형적 서구 주택의 완성을 여기서 보았다.

건축사에서 로마인들이 발명한 콘크리트의 사용은 인간 삶을 풍요롭게 한 가장 큰 사건으로 꼽힌다. 재료의 사용이 장소에 구애되지 않으며 크기나 모양도 무한정이다. 오늘날 콘크리트는 건축의 필수 재료로서 콘크리트가 사용되지 않은 건축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수사학적으로 콘크리트는 도시의 황량함, 단절의 대명사다. 삶을 조직하고 담아내는 것이 건축이라면 이는 오늘날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그 어떤 정신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년 365일이 공사중인 서울에서 건축은 그 속에 사는 사람을 생각하기를 멈춘 지 오래인 것 같다. 그래서일까? ‘승효상, 이 사람 꽤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을 책을 읽는 내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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