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증언하는 사람 - 빅토르 클렘페러 읽기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지음, 김홍기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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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 일단 심상치 않아 봬서 읽기로 했다. [희망이란 결국엔 하나의 감정일 뿐이지만, 그래도 어떤 내기의 형태를 취한다.] 이 문장 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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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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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의 팔십 년간 글을 써 왔다. 처음엔 편지였고, 그 다음엔 시와 연설, 나중엔 이야기와 기사, 그리고 책이었으며 이젠 짧은 글을 쓴다.

(7p)


존 버거는 1926년 생을 얻고 2017년에 죽음을 얻었다.

팔십 년간 글을 썼다면 91세까지 살았으니, 11세부터 글을 썼다고 셈한 것이다.


글을 쓴다는 건 많이 쓰는 것보다 '오래' 쓰는 게 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어른이 돼서, 할 일 다 하고, 

시간이 좀 남기 시작하고, 머리에 생각할 여유가 좀 생기고...


그럴 때 쓰기 시작하면, 마음이 급해진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상을 받은 말든, 잘 쓰든 못 쓰든...

어렸을 때부터, 그냥 써 온 사람이 조금은 글쓰기에 유리하다는 생각이다.


주변에서 보면 그렇다.


글 잘 쓰는 사람 치고, '오래' 쓰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이미 어렸을 때부터 썼다. 쓰기 시작했다.


물론, 나이들어 글 쓸 필요가 없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다만, 어렸을 때부터 써서 나중에 80년 간 글을 써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글쓰기에 관해서만큼은 뭔가 이루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다. 


존 버거가 그렇듯이.


번역은 두 언어들 사이의 양자 관계가 아니라, 삼각관계이기 때문이다. 

삼각형의 세번째 꼭짓점은 원래의 텍스트가 씌어지기 전 그 단어들 뒤에 놓여 있던 것이다.

진정한 번역은 이 말해지기 전의 무언가로 돌아가야 한다.


(8p)


좋은 문장은 결이 많다.

그 많은 결은 동일성과 상이성을 모두 품고 있다.

이 떄의 '상이성'이나 '이질감' 또한 전체로 보면 

'맥이 통한다'라고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장은 좋은 문장이고-존 버거가 썼으니까-

그런 만큼 결이 다층적이다.


여기엔 우리 삶의 많은 것을 대입해도 말이 된다.


소설,을 한 번 넣어보자.


소설은 현실과 언어 사이의 단순한 대응이 아니다

소설을 현실의 모사나 재현으로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을 놓친다


소설은 현실과 언어의 이자 관계가 아니라 삼각관계이기 때문이다( 인용글처럼). 

삼각형의 번째 꼭짓점에는 사건이 일어나기

인물이 말을 하기 , 세계가 아직 이야기로 굳어지기 전의 어떤 상태가 놓여 있다


감정이 아직 감정이라는 이름을 얻기 전의 상태

의미가 의미로 확정되기 전의 불안정한 떨림이 거기 있다.

그래서 소설은 일어난 일을 그대로 옮기지 않는다


소설은 언제나 이미 일어난 뒤로 물러나

그것이 일어나기 이전의 필연을 더듬는다

사건은 결과로 제시되지만

소설이 집요하게 파고드는 사건이 불가피해지기까지의 시간이다.

말해지지 않은 선택들

침묵 속에서 축적된 압력 같은 것들... 


소설의 문장은 현실을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라

현실이 언어가 되기 전의 상태를 다시 통과하려는 시도.


나는 그래서, 진정한 소설은 언제나 시작하지 않는다고 믿는 편이다

소설은 어디서 시작하더라도 언제나 이미 시작되어 있었던 지점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문장은 출발선이 아니라 도착점에 가깝다고 있다.

말해질 없었던 , 말해질 필요조차 인식되지 않았던 것에 

마침내 언어가 닿는 순간

나는 그런 소설이 아닐까 한다


많은 경우, 소설은 이야기를 만드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아니, 소설은 이야기가 되기 이전의 세계를 다시 불러오는 문학이다.

그렇게 소설은 언제나 늦게 도착한다

그러나 바로 늦음 덕분에 소설은 비로소 명확해진다.


소설을 읽고 ",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었다."라고 느끼는 것보다

", 어떤 상태를 통과했다."라고 느낄 ,

읽은 소설이 좋은 소설일 가능성이 높다.


지금, 우리가 베스트셀러 소설, 혹은 인기 소설, 혹은 좋은 소설이라고 하는

과연 소설다움에 정말 근접해 있는지 묻고 싶다.

난해하고 복잡하고 말인지 없다고 해서, 인기 없다고 해서,

좋은 소설이 아니라고 단정할 없는 이유가 바로

아직 언어화되지 못한 어떤 '사건'이나 '감정'이나 '상태가

워낙 복잡하고 난해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그리 생각할 수는 없는 걸까.


물론, 그렇다고 무작정 난해한 소설은 역시 반기지 않는다.

다만, 소설을 덮고 어딘가를 통과한 느낌인데, 몸이 고단하고 피곤하긴 해도,

달콤한 잠에 빠져들 있을 같다고 막연히 느끼는 순간...

그게 소설 읽기의 마력같다


일부러 오지만 찾아 다니는 여행가가 있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다.

사람들이 찾지 않을 만한 곳에 있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긴 의미가 무수하고...


닿지 않았기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수는 없는 아닌가.  


읽었는데 이리 길게 거리가 있다.

언제 이렇게 썼는지, 나도 모를 일이다.

그것만 해도 버거는 역시 대단하다.


쓰는 사람은, 생각할 거리, 거리를 아낌없이 제공하는 법이다.

80 사람답다.


진짜로 이제 겨우  페이지 읽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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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6-01-27 09: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존 버거 좋아하는 작가예요.
이 책은 제게 없네요.
전자책으로 찾아봐야겠어요.
,,,,
정말 몇문장만 읽어봤는데, 너무 좋네요!

젤소민아 2026-01-27 12:41   좋아요 1 | URL
네, 저, 이제 10쪽 읽었는데 거의 모든 문장에 밑줄을...그래서 밑줄긋기 포기! 이런 책을 다 밑줄긋고 아예 한 권 더 사는 게 낫다는요~. ㅎㅎ 같이 읽어요 그레이스님~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 을유세계문학전집 51
로렌스 스턴 지음, 김정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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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가르쳐주신 스승님이 꼭 읽으라는데, 엄두가 안 난다. 단테의 ‘신곡‘과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포함해, 죽기 전엔 읽어야 하는데 읽을 생각만 하면 겁부터 나는. 아,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도 있구나...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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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비 2026-01-26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젤소민아님 저 이 책 오래 전에 읽었는데 아주 웃기고 재밌었던 기억이에요. 용기를 내어 시도해보심이 어떨까요…저도 단테 프루스트는 같은 심정으로 아직 못 읽어봤습니당…

젤소민아 2026-01-26 23:12   좋아요 0 | URL
ㅎㅎ 초록비님 말씀에 용기내서!! 당장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Falstaff 2026-01-27 0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록 19세기도 아니고 17세기에 나온 오래된 책이지만, 지금 읽어도 포스트 모던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크게 기대하지는 마시고 쫄지도 마시고 그냥 읽어버리세요. ㅎㅎ

젤소민아 2026-01-27 05:57   좋아요 0 | URL
쫄지 않을게요~~ㅎㅎ ‘파멜라‘도 읽어야는데...리스트가 기네요~~감사합니다!
 
형태의 문화사 - 사물의 생김새로 읽는 인간과 문명 이야기
서경욱 지음 / 한길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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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사람에겐 특히 필독서. 세상을 낯설게 보기 위해서는 일단, 왜 그렇게 생겨먹어야 하는지부터 알아야 하니까. 나는 글쓰는 사람이지만 아직 세상 사물이 왜 그렇게 생겨먹어야 하는지 잘 모르기에 이런 책이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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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정원 - 2025 제19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이주란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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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란의 <겨울정원>을 읽다가 가장 먼저 감지한 건 

이 소설엔 제스처가 별로 없다는 것-.

인물은 의미심장한 몸짓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소설의 시작은 '반복되는 일상'이다.
이건 특히 소설의 서두에서 잘 안 쓰는 건데...

봄과 여름 내 만개했던 것들이 모두 진 십일월부터,

하루 중 가장 볕이 따뜻한 오후 한 시간 동안 난 꼬박 텅 빈 정원을 바라본다.

14p)


지금이 언제인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십일월부터 화자는 한 시간 동안 텅 빈 정원을 바라본다. 아무 것도 없는 정원을.

이렇게 되면 소설을 끌고 가기 힘들어진다.


너무 가라앉았다. 거기서 '동요'를 일으켜야 하기 때문이다.
동요없는 소설을, 특히 요즘 독자들은 읽으려 들지 않는다.
물론, 소설은 읽히기 위한 게 목적은 아니지만.


이 소설은 '제스처'보다는 상태/상황 설명이 위주다.

작은 행동을 개별적으로 나열하기보다는 그 행동들을 뭉뚱그려 진술한다.

가라앉은 분위기엔...어울린다.

분위기는 가라앉았는데, 사소한 움직임이 뚜렷하면 텍스처가 깨진다.

이 소설에서 삶은 그래서 '장면'으로 존재하기보다

점으로 찍히는 편이다.


어제의 점, 오늘의 점, 내일의 점이 이 소설에서는 서로 크게 다르지가 않다.

독자는 다르길 기대할텐데...읽으면서 걱정이다.

'겨울정원'의 서사는 도통 진행되지 않는다. 대신 반복된다. 

그런데 이 반복은 짐짓 독특하다.

무기력이나 서사적 실패의 결과로 읽히지 않는다.

아하, 오히려 그것이 작가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형식일까.


말하자면, 이 소설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게 하려 

소설가가 아주 많은 일을 한 소설 같다.

배제하기-.


금주 언니가 과메기가 있다면 화자(혜숙)을 집으로 초대하는 장면만 해도 그렇다.

과메기는 이 가라앉은 소설에서 동요를 일으킬 만한 ‘특별함’의 기표다. 

계절적이고, 누군가와 함께 나눠야 하며, 일상을 벗어나는 식탁을 암시한다. 


그러나 혜숙은 그 초대마저 오늘,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다른 날로 미룬다. 

그 결과 혜숙의 ‘오늘’에는 역시 별 사건이 추가되지 않는다. 

과메기는 가능성으로만 남고, 실현되지 않는다. 


치밀한 배제가 다시 일어난다.


'겨울정원'은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지점들을 이렇게 의도적으로 유예한다.

이 유예가 반복될수록 독자는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건 사건이 아니라, 

사건이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란 것을.


난 단순하게 산다. 오피스텔에 가서 청소하고 집에 와서 씻고 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유튜브를 보다가 잠을 잔다.

(15p)


(아...진짜 소설을 얼마나 힘들게 써나가려고 이러시나...)


'겨울정원'에서 이룬 또 하나의 놀라운 일은 현재에 대한 집착이다.

정말 많은 소설이 오늘을 설명하려 과거를 호출하길 즐긴다.

'겨울정원'은 과거를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단 한 번 등장하는 과거—오인환과 함께 용궁사에 갔던 기억—마저도 회상의 확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 기억은 설명되지 않고, 의미화되지 않으며, 현재를 변형시키지도 않는다. 


이주란은 '겨울정원'에서 소설 속 과거의 기능을 새롭게 발견했다.

과거는 지금과 그저 조금 다를 뿐이라는-.


혜숙에게 오인환은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데 

그 부재 역시 극적인 상실로 처리되지 않는다.

또 다시 철저한 배제-.


과거를 최소화한 자리에 남는 것은 당연히 현재다.

현재의 미세한 흔들림이다. 


그 미세한 흔들림의 종류는 이러하다.


겨울 정원에 까치가 날아든다.

초등학교 동창회 단톡방에 보낼 연말 인사말을 ‘교양 있게’ 쓰고 싶어 한다.


이런 식이다.

이 소설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 우연히 걸려드는 작은 변화를 

붙잡는 방식을 즐겨 쓴다.


이 소설에서 가장 큰 떨림은

딸 미래에게 찾아온 설렘이다.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혜숙의 감정이다. 


지금 미래에게 생겨난 저 마음이, 

언젠가는 내게도 다시 찾아올 날이 있을까 생각하면 

이미 겪은 일도 지금 겪고 있는 일도 아닌데 조금 슬프다.


44p


혜숙은 그 설렘이 자신의 미래에도 올 수 있을지 생각해 보고, 그러다 조금 슬퍼진다. 이 슬픔은 설명되지 않는다. 원인도, 결론도 없다. 다만 그날의 일상에 아주 작은 금이 간다. 이 균열은 소설의 클라이맥스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다시 반복되는 일상 속으로 흡수된다. 


하지만 독자는 느낀다.

이 소설에서 허용된 최대치의 사건이 바로 이것이라는 사실을.


'겨울정원'의 미학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삶’을 묘사하는 데 있지 않다. 

그건 너무 지루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굉장히 분주하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도록 소설 속 모든 것을 장악한 

소설가의 성실한 자제력 떄문이다.


소설가는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미리 알고 있다.

그런데 그 가능성을 하나씩 차단한다. 

감정이 커질 수 있는 지점에서는 문장을 낮추고, 

서사가 확장될 수 있는 순간에는 시간을 멈춘다. 


그 결과 독자는 누군가의 지루한 삶이 아니라, 

완벽하게 통제된 평온 같은 걸 마주하게 된다.


이 소설은 묻는다. 


우리 삶이 반드시 극적으로 변화해야만 의미가 있는가. 

감정이 꼭 폭발해야만 진짜인가. 


그리고 소설은 그 질문에 스스로 답한다. 

그렇지 않다고. 


어떤 삶은 반복되기 때문에 성립하고, 

어떤 감정은 이름 붙이지 않기 때문에 유지된다고.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남는 것은 감동이라고 할 수 없다.

감동 '꺼리'는 없는데, 이상하게 감동적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소설의 형식이 되는 경험. 


'겨울정원'은 그 어려운 일을 해낸 소설이다.


소설가에게 묻고 싶다.

대체, 어떻게 참았느냐고.


엄마는 단순한 게 아니라 성실한 거였어.


3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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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25 20: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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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26 21: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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