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된,
케이 템페스트 지음, 연진 옮김 / 교호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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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플 몇 장 보다가 원서로 읽고 싶어졌다. 번역문이 좋다. 좋은 번역은 작품을 빛나게 한다. 근데 빛나기 이전의 어둠 속 작품을 만나고 싶을 때가 있다.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결핍을 감수해야 하겠지만 그 결핍이 텍스트의 진짜, 아니, 원래 얼굴을 보여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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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사계
손정수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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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최애 테마. 클래식 명작 소설의 영향. 콕 집어 말할 수 없지만, 아니, 그래서 더 찬란한 아우라. 시대 배경, 인물 특성 모두 지금과는 다르지만, 그 이질감 따윈 일말의 방해가 되지 않는. 좋은 소설에서 이질감이란 방해가 아니라, 작품이 지닌 보편성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치일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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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집을 하루 한편 읽고 있다.

오늘은 읽었다.

소설을 읽고 급기야 눈물 짓고 말았다.

소설 속의 아이에 자신을 겹쳐보지 않을 이가 몇이나 되리.

우린 모두, <>에서 이런 아이가 된다.

농담으로 가득 찬 집에서 어른들의 진담을 기다리는 아이.

아이의 집에는 아이가 응당 받아야 돌봄이 없다

부모는 무심하다. 어머니는 병약하면서 병약을 부인까지 한다

아버지는 력하다

아이의 오른팔이 소매에서 나오지 않았는데도

아버지는 단추를 채우고 

아이를 반쯤 열린 안으로 들어온 얼룩얼룩한 손을 향해 밀고 갔다.

(214p)

아이에게 닿는 손길은 언제나 결핍되거나 부재한다

아이에겐 그래서 집에서의 모든 말은 농담이 된다

자신의 집에서는 모든 농담이었다.

229p

집안의 어른들이 하는 말은 무게를 잃고, 약속이 되지 못한다

농담은 언제나 가볍다. 지켜지지 않으니까. 그래서 허무하니까. 허무해서 가볍다.

아이는 보모인 코닌 부인에게서 농담하지 않을 같은 어른의 기미를 본다.


집 안의 어른들에게서 배운 농담을 했을 때였다.

'해리'란 자신의 진짜 이름을 두고 '베벌리'라고 말했을 때.

"이런 우연이! 아까 내가 말했지? 그게 설교자 선생님 이름이라고!"

아이는 보모의 반응이 신기해  요상한 이름을 말한다.

어째, 농담 같지 않다, 어른은.


코닌 부인은 아이를 강가로 데려간다.

강가에서는 설교자가 세례를 베푼다.

아이는 코닌 부인에게 했던 식으로 자기 이름을 베벌리라고 우렁차게 말한다

설교자는 웃지 않았다. 역시. 농담하지 않을 같은 어른이다.

설교자는 웃지 않았다. 그의 앙상한 얼굴은 굳어 있었고 

가느다란 회색 눈에는 색깔 없는 하늘이 비쳤다. 자동차 범퍼의 노인이 요란하게 웃었고, 베벌은 설교자의 옷깃 뒤쪽을 잡았다. 아이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져 있었다. 이것은 농담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229p

아이는 놀란다

처음으로 자기 말이 농담이 되지 않았다

드디어 자신의 언어가 약속처럼 느껴진 순간

설교자가 내린 세례는 아이에게 약속이 되었다


너는 이제 영원히 달라질 거야. 너는 명단에 들었어.


이에, 아이는 결심한다.

농담으로만 가득한 집을 선택하지 않기로.

좋아, 나는 집에 돌아가고 속으로 거야.

(229p)

약속으로 가득 강으로 가기로.

아이에게 약속된 명단은 아이에겐 이제껏 없던 세상,

구원이요, 희망이 되었다.


아이는 세례의 기억을 가슴에 품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은 여전히 무심하고 허무한 농담으로 가득 찼다

코닌 부인의 집에서 가져온 책은, 어른들에겐 희귀본이라 가치 있을 뿐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묻는다

오늘 무슨 거짓말을 했니

순간, 아이는 강에서의 신성한 세례의 약속마저 농담으로 오염됨을 느낀다.

언어와 의미 간의 끊임없는 미끄러짐-.

데리다의 '차연(差延)'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슬프고 아린 차연...



 







  













집안의 어른들에게서 지속적으로 미끄러짐을 경험한 아이는

급기야 결심한 대로, 강으로 향하기로 한다.

농담 아닌 진지한 약속을 찾기 위한 아이의 순례가 시작된다.


그러나 강은 처음에 그를 거부한다. 물살이 너무 급하다.

아이는 절망해서 속울음을 운다.

이것도 농담이구나. 이것도 농담이야!

(237p)

세상에 진담은 없는 걸까, 약속은 없는 걸까

모든 것이 또다시 오도(誤導) 걸까


그때 아이의 눈에 빨강, 하양 몽둥이를 흔들며 자신에게 달려오는

거인 돼지 같은 게 보인.


죽음의 전령


그것은 사실, 주유소 노인이었다

아이를 붙잡아 구하려 아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약속의 손길.


그러나 이미 너무 많은 농담에 지친 아이 눈에 그것은 공포의 형상으로 닥친다.

오도된 시선 속에서는, 구원의 손길조차 자신을 방해하는 농담의 세력처럼 보였던 것이다.

아이의 마지막 선택은 강으로 다시 뛰어드는 것이었다


그때 강은 달라졌다. 이번에는 부드러운 손길로 아이를 붙잡았다

강은 아이에게 돌봄의 손이 되었고, 약속의 실체가 되었다

아이의 두려움은 사라졌다

잠시 아이는 놀라움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몸이 빠른 속도로 움직였고 자신이 어딘가로 간다는 알았기에

분노와 공포를 버렸다.

237p

아이는 처음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오도' 아닌 '인도' 받는다.

바로, 죽음이라는 종말 앞에서.

(이런 종말은 까뮈의 '이방인'과 닮았다)


오코너의 미학은 바로 아이러니에 있다


아이를 살리고 싶었던 손길은 실패했고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강은 은총의 손길이 되었다

오도는 구원의 손길마저 오해하게 만들고

은총은 가장 몰락적인 형태로 도착한다


이토록이나 불편한 우리 생의 아이러니라니.


오코너의 문학이 주는 불편함-,

그를 추앙하게 되는 가장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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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집을 하루에 한 편 읽고 있다.

숙제하듯 하고 있다. 좀 무겁게, 좀 의무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끼는 것도, 배우는 것도 많다.

어떻게 모든 단편마다 배울 수 있는 무언가의 종류가 다른지.


단편소설의 '천재'란 별칭이 괜히 붙을 리가 없지.


오늘치 숙제는 <당신이 지키는 것은 어쩌면 당신의 생명>


이 소설의 키워드는 단연, '흥정'이다. 

평화로운 시골 농가에 나타난 한 남자.

노부인은 그를 상대로 생을 건 '흥정'에 나선다.


흥정의 '품목'은 노부인의 딸, 


흥정의 모습은 평범하고 일상적이다. 다분히 흔하다.

노부인은 그에게 딸을 시집 보내고 그는 자동차를 얻는다.

세상 여느 흥정답게 양쪽은 서로 얻는 것이 분명하게 있다.


흥정은 우리 삶의 흔한 경제 활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영혼의 타락이 개입될 소지가 다분하다. 

흥정에는 체질적으로 '이득'이란 게 개입되기 때문이다. 

이득은 신중해야 한다. 사악할 수 있어서다.


무릇, 무언가를 얻는다는 것은 무언가를 내놓는 행위가 전제되거나 개입되어야 

공평하다. 그게 우주의 진리여야 한다. 부디 그러길 나같은 소시민은 바라마지 않는다.

그 믿음마저 없다면 오늘의 이 고단함이 너무 남루하지 않은가.


이 소설에서 세상 흔해 빠진 '흥정'이 대단히 잔인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버림'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흥정의 주체인 노부인과 그(사위)는 어떤 존재를 버린다.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주체적으로 흥정에 참여하지 않는 존재, 딸이다.


딸이 흥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언어'다.

딸에게는 언어가 없다. 말을 하지 못한다.

남자는 미래의 아내에게 흥정과 하등 상관 없는 '새'라는 단어를 가르친다.


장밋빛 얼굴의 뚱뚱한 처녀 루시넬은 어디나 그를 따라다니며

"스에에 스에에"하고 박수를 쳤다. 노부인은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은근히 흡족해했다. 사윗감을 탐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204p


노부인과 남자의 흥정은 '언어'로 이루어진다. 

두 사람은 말할수록 타락한다.

노부인의 딸은 말하지 못함으로 순수한 영혼을 간직한다.


이때껏 이 아이랑 이틀도 떨어져 본 적이 없는데.


(210p)


노부인의 이 대사를 반복해서 읽었다.

많은 상황과 사정과 감정이 겹친 대사.


한번도 떨어져 본 적 없는 딸을 떠내 보내는 어미의 서운함.


그 한편에 도사린 다른 마음.

한번도 떨어지지 못했던 장기적인 돌봄으로부터 해방감.


시프틀릿 씨가 차를 움직였고, 부인은 손을 떼었다.


(210p)



딸을 돌보는 일에서 "손 뗀" 노부인은 발걸음도 가볍게 소설에서 퇴장한다.

소설에서 사라졌으나 사실, 노부인은 소설 속으로 더 깊이 걸어 들어간다.


소설은 이래야 한다.


소설에서 퇴장했는데, 소설이 끝날 때까지 그 아우라가 걷히지 않아야 한다.

퇴장 후에도 그 인물은, 그 뒤로 이어지는 문장을 따라 내내 걸어가야 한다.


독자는 눈으로는 노부인을 보내지만, 머리로는 노부인을 포박한다.


타락한 영혼의 소유자일 것이란 의심을 충분히 할 수 있으면서도

급기야 자기 구제를 선택한 이기적인 어미로.


한편, 남자는 흥정에서 자동차를 얻는다.

말 못하고 정신이 온전치 못한 아내는 그로서는 원치 않는 덤이다.


돌봄에 지친 노부인이 딸을 버리듯 시집 보낸 것처럼,

남자는 인근 소도시의 식당에서 아내를 버린다.


하느님의 천사 같네요.  (211p)


루시넬을 하느님의 천사로 보는 식당 청년과 달리,

남자는 아내를 부담스러운 '히치하이커'로 치부한다. 


남자는 아내를 버리고 차를 몰아가다가 "동승객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오코너의 미학은 바로 이토록 '잔인한' 아이러니에 있다.


그에게 흥정으로 얻은 아내는 동승객이 될 수 없고, 

길 가다 마주친 낯선 사람은 동승객이 될 수 있다.


설상가상, 남자가 흥정에서 얻고자 한 것이 아내가 아니었다는 게 드러난다.


그때, 눈에 띈 도로 표지만.


The Life You Save May Be Your Own

(당신이 구한 생명은 당신 자신의 것일 지 모른다)


이 표지판은 남자에게 무엇을 경고하고 있나?

남자가 노부인과의 흥정에서 '구한' 것은 무엇인가?


자동차는 얻었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더 큰 걸 잃었다.


자신의 영혼-.

그가 그렇게도 간절히 찾아 헤매던 '정직한 '영혼.


그의 손에 쥔 자동차는 몸을 이동해 줄 뿐, 영혼을 어디로도 데려다 주지 못한다.

자신이 한 말과 정반대로.


육체는 집과 같습니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아요. 하지만 정신(영혼)은 자동차와 같습니다. 언제나 움직입니다. 언제나...


(208p)


그는 아내를 버리고, 다른 타인을 동승객으로 꿈꾸며, 도로를 달리지만, 

길의 끝에서 그가 만나는 것은 자유이긴 커녕, 폭우의 심판이다.


자기 구제를 위한 이기적 흥정이야말로, 

인간을 구원에서 가장 멀어지게 하는 조치임을 오코너는 보여준다.


표지판은 단순히 교통 안전을 경고한 것이 아니라, 

타락한 영혼에게 마지막으로 건네는 계시였다.


앞서 퇴장했던 노부인은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으나

여기서 그 우울한 그림자의 꼬리가 밟힌다.


오랜 돌봄에서 해방되어 자기 구제를 실현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제부터는 유일한 혈육이자 동거인이었던 딸을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내몬 죄책감을 감당해야 하는. 


고로, 두 사람은 흥정에서 양쪽 다 참패했다.


그렇다면 흥정에서 배제된 딸은?

 

비록 여전히 말을 하지 못해도, 그냥 그런 채, 

자신을 '하느님의 천사'로 보아준 식당 청년에게서

새로운 돌봄을 받으며 

그 삶의 동승객이 되어 소설 뒤에서 내내 걸어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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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5-08-24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젤소민아님이 좋으시다니 저도 곧 읽어보겠습니다. 사놓고 안읽고 있었습니다 ㅋ

젤소민아 2025-08-24 13:25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반가워요~. 오코너를 왜 단편소설의 천재라고 하는지 알겠어요. 제가 감히 천재를 알아볼 수준은 아니나...길지도 않은 모든 단편에서 어떻게 이렇게 배울 점이 많을까요. 정말 놀라운 소설가여요. 꼭 읽어 보세요~.

그레이스 2025-08-24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좋다는 소문이!
저도 사놨죠
아직 못읽었지만 ㅎㅎ

젤소민아 2025-08-25 12:21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같이 읽어요~~그레이스님 후기도 몹시 궁금합니다!
 
존재의 물결과 타자의 문학 - '우리가 모르는 세계'의 정치와 문학
나병철 지음 / 소명출판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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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주 존경하는 이름 같은 두 분의 학자가 있다. 병자, 철자. 병철. 한병철. 나병철. 이름이 곧 개념이요, 이론인. 기표와 기의가 합일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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