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
설은아 지음 / 수오서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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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유로든 상대가 부재 중인데 통화를 한다,고?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던.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남미대륙 최남단.

세상의 끝.


부재 중 통화에 담긴 목소리는 그곳에서 바람이 되어 공중으로 흩어졌다,고.


2018년에 기획된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전시에서

모아진 부재 중 통화는 10만 통.

들어준 귀는 50 만 개 이상.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그 중 하나로 역할된 셈이다. 


부재중 통화는, 

할 필요 없는데 하는 통화일까,

할 필요가 있는데 상대가 없어서 할 수 없는 통화일까.


이 책에는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하는 부재중 통화가 들어 있다.


읽다가 건너 뛰는 통화들이 생겼다.

긴 통화들.

내용이 시시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짧은 통화가 더 눈에 들어왔다. 


예로부터, 통화는 간단히,니까.


사실, 전화로 할 말은 할 줄이면 될 것이다.

할 말은 한 줄인데 곁말이 많은 게 통화일 것이다.


전화로 할 말은 그렇게, 간단하면 좋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엄마야.

너 간 지 벌서 4년 하고 7개월 정도 되네.

김 서방이 연애를 시작했나 봐.


1년치 카드밗 누가 두번만 내주세요.

힘들어 죽을 거 같아.


나 사실 아무것도 안 하고 잠만 자고 싶어.

엄마 나 되고 싶은 게 없어.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게 더 쉬워졌어요.


나 사실 오빠 직접 보고 결혼했어요.

가끔 돈으로만 보이기도 해.


어머니, 10년 전 제가 가져갔던 돈은 만 원이 아니라 37만원이에요.

형도 같이 했어요.


내 20대를 너한테 쓴 게 너무 아까워.


신이 있다면 도와주세요. 아빠를 살려 주세요.


그때 살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좀 더 훌륭한 의사가 될게요.


이런 통화...

통화라기보다는 외마디.


살고 싶다는 외마디,

살려 달라는 외마디.


오늘도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의 외마디.


설명도, 서사도, 묘사도 개입될 필요 없는,

산 사람이 

더는 살지 않는 이에게 보내는 SOS.


누가누가 더 가여운가.


더는 살지 않는 이

더 살아내야 하는 이


가여운 이들이 모여 피운 불.

이 책을 그래서 봉화같다.


어둠 속에서 타닥타닥,

보아 줄 누군가를 그리며

타닥타닥.


내가,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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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 (무선)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3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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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코의 육체를 생각하며 암울한 공상에 빠져서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나는, 날이 밝기도 전에 잠자리를 빠져나와 운동화를 신고 여름 새벽의 어둠이 깔린 집 밖으로 나섰다.

우이코의 육체를 생각한 것은 그날 밤이 처음이 아니다-18P


나는 어두운 새벽길을 곧장 달렸다. 돌멩이도 나의 발길을 방해하지 못했고, 어둠이 내 앞에 자유자재로 길을 터주었다.


내게는 외부 세계라는 것과 너무도 무관하게 살아왔던 탓으로 일단 외부 세계로 뛰어들면 모든 것이 쉽고 가능해지리라는 환상이 있었다.


숲모기가 내 다리를 물었다.


우이코는 자전거를 타고 오는 모양이었다.

나는 자전거 앞으로 뛰쳐 나갔다.

자전거는 위태롭게 급정거했다.


그 순간 나 자신이 돌로 변하고 만 것을 느꼈다.

외부 세계는 나의 내면과는 무관하게 다시금 내 주위에 확고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 장편소설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삽화'이다.

이 소설의 다음 긴 분량은 이 삽화의 끊임없는 변주에 불과하다.

진실로 그러하다.


그러나 '불과하다'고 해서 폄하될 수 없...

아니, 추앙받아야 마땅한 이유는 그 '천재성'에 있다.


한 마디로, 美쳤다.

이 소설을 처음 대하는 독자는 변주임을 쉽게 눈치채지 못한다.

글자 하나 하나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목을 울려 소리로 발음해 내 귀로 확인하는 과정을

서너번은 거쳐야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단어와 프레이즈와 텍스트를 낱낱이 해체하고 모았다가 다시 해체하고서야 겨우 짚어낼 수 있었다. 그마저 성공적이라고는 장담 못하지만.


'금각사'를 유미주의, 탐미주의란 단어로 가려 '미의 추구'로 읽으려 한다면

절반만 읽는 것이다.


'말더듬이'인 마조구치(나/화자)가 자신을 거부하는 외부 세계로부터 격리되지 않으려는

몸부림. '금각'은 그 몸부림을 방해놓는 존재일 뿐이다.

그 몸부림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금각'이 될 수 있다.


미시마 유키오는 그 정도 할 수 있으려면 '절대 미'여야 한다고,

그래서 '금각'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쓰고 있는 듯하다.

(''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닌 것이다)


초반의 '우이코 스캔들'이 드러나는, 고작 서너 페이지만 떼놔도

걸작단편으로 완성되기에 손색 없을 지경이다. 


걸작단편이기에 이 삽화는 실로 꽉찬 이야기를 잉태했고

그 결과,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지만

스스로 변주가 가능해졌다. 무수한.


그 무수한 변주들이 장편의 분량을 이루었다.


그 어떤 소설에서도 이런 기막힌 변주를 목격한 적 없다.


소설이기에 이룰 수 있는 그 무엇을 '금각사'는 이루었다.

금각사는, 너무나도 소설다운, 그래서 쉬이 볼 수 없기도 한 소설이다.


소설의 변주를 공부하고 싶다면, '금각사'를 눈여겨 볼 것.


이제껏 리뷰 쓰면서 단 한 번도 주지 않은 별 다섯개, 아낌없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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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생물 이야기
양지윤 지음 / 팩토리나인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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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변신‘의 오마쥬는 오마쥬가 될 수 없다. 카뮈의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제였는지 모른다‘를 오마쥬할 수 없듯.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나는 무생물이 되어 있었다‘같은 설치로 할 이야기는 카프카가 다 했다. 이제는 다른 이야기를 다르게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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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말 페이지터너스
보리스 사빈코프 지음, 정보라 옮김 / 빛소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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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부커상 후보작인 ‘저주토끼‘의 정보라 작가가 언어를 옮겼다. 일단 믿음 가고. 과거에서 온 미래의 소설이라. 이 부분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일기로 된 형식도 마음에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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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5-12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 버전으로 사둔 게 있는데
검은 말인지 창백한 말인지 헷
갈리네요.

젤소민아 2022-05-12 11:35   좋아요 1 | URL
아, 역시 레삭매냐님은 읽으셨군요~~

레삭매냐 2022-05-12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읽지는 못하고 일단 사두기만 했답니다 ㅋㅋ
 
나무의 언어 - 나무가 들려주는 세상 이야기
귀도 미나 디 소스피로 지음 / 설렘(SEOLREM)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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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책의 '좋음'에 관해 이야기하자.

한 마디로 말해, 그 좋음이 끝이 없다.


그래서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좋을 지 모를 지경이다.


첫문장부터 숨이 턱.


저 달이 2만4천7백40번이나 떠오르기 전의 오랜 옛날, 나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던 그때를 모두 기억하고 있다.



이 세상에 유일하다 싶은 첫문장까지는 아니다.

환상소설이나 SF 소설에서 마주칠 수 있음직한 문장일 수도 있다.


우리가 상상하기도 벅찬 그 옛날의 일을 모두 기억하는 어떤 존재.


완전히 새롭지 않을 수는 있으나 이런 문장은 늘 그렇듯, 기대감이 인다.


얼마 동안 가슴 두근거리며 땅속에서 기다리다가 부드러운 대지를 헤집고

흙덩이 속에서 새싹으로 고개를 내밀었을 때, 그 순간 엄마가 내게 건넨

첫 인사의 감격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 화자(話者)는 나무로구나.

화자인 나무는 무려 2천년을 산 '숲의 여왕'격인 주목이다.

사시사철 낙엽도 떨구지 않는 꼿꼿하고 우람한 주목.


주목의 탄생을 둘러싸고 수많은 자연의 '비밀'이 벗겨진다.


나는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썩은 낙엽 틈에서 

싹을 틔워야 할 운명이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은 대자연이 조화로운 솜씨를 발휘하는 데

필요한 재료로서 제각기 한몫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탄생'이라는 신비로운 과정을 거치는 사이에 그렇게 아득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늘은 나를 위로 쑤욱 쓸어당기듯 했고, 내 연약한 줄기는 

있는 힘을 다해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가고 있었다. 

동시에 아래쪽에서도 나를 강하게 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이게 단순한 나무의 탄생 절차라고 보이는가.


여기에 '우리'를 대입해 보자.


우리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썩어간 어떤 존재 틈에서 

싹을 띄워야 할 운명이었다

우리 인간의 탄생, 거기에 관여된 축복과 희생을 말하고 있음이다.


주변의 모든 것들은 대자연이 조화로운 솜씨를 발휘하는 데

필요한 재료로서 제각기 한몫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인간의 탄생, 거기에 관여된 

타인 저마다의 기여와 의의를 말하고 있음이다.


하늘은 나를 위로 쑤욱 쓸어당기듯 했고, 내 연약한 줄기는 

있는 힘을 다해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가고 있었다. 

동시에 아래쪽에서도 나를 강하게 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우리 인간의 탄생, 이후로 이어질 어떤 삶의 

행운과 불행의 중첩을 말하고 있음이다.


서두가 이 정도다.


그 뒤는? 더 말하지 않으련다. 

이 정도에 준하는, 아니 그 이상의 '철학'과 '깨달음'이 즐비하다.

소설에 밑줄을 이렇게 많이 긋게 되면, 좋은 소설이란 뜻이다.

적어도 내게는.


끝까지 읽으면 이런 걸 얻는다.

2천 년 고목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이,

그 고목의 뿌리와 몸통과 잎사귀에 배어든 생의 입자가,

살아있는 세포가 되어 내 몸속으로 유입되는 느낌.


책 갈피에 대고 크게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싶은 느낌.


그 느낌을 주체 못하고 작가를 찾아 연락을 했고,

몇 마디를 나눌 수 있었다.


"Could you explain the importance of choosing to tell the story from a tree's perspective, as opposed to a person's perspective?"

(사람이 아니라 나무를 화자로 선택한 이유는?)


그의 답은 짧았지만 내가 'insight'를 얻기엔 충분했다.

(아쉽게도, 자세한 통신내용은 '통신' 권리문제로 공적 플랫폼에 공개는 어렵다)


우화의 형식을 띠면서 시처럼, 선택한 단어들이 '시어'같다.

시처럼 읽힐 정도다.

번역서가 아니라 한글 원문인 듯 자연스럽다.

번역자에 고마움을 느낀다.


박선옥.

작품을 더 찾아보려 하니 알라딘의 검색 데이터 오류인듯.

'이빈'이란 이름으로 연결돼서 찾을 수가 없다.

다르게 접근해 보고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번역한 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더 이상의 작품은 없다.

이 소설로만 봤을 뿐이고 아직 원문을 보지는 못했지만 '결과번역문'만 보았을 때,

매끄럽고 유려하다. 


이 책은 2010년에 초판 번역이 출간되었고

그 개정판이 2018년도에 나오면서 제목이 아예 바뀌었다.


나무의 언어


지금 나는 '나무의 언어'에 리뷰를 쓰고 있다.

내가 읽은 판본은 '나무회상록'이지만.


여기에 리뷰를 쓰는 이유가 있다.


'나무의 언어'를 출간한 설렘출판사와 송여율 번역자에게 꼭 묻고 싶은 게 있다.

개인적으로 접촉도 할 생각이다.


나는 '눈과 마음' 출판사에서 2010년도에 출간된 '나무회상록'을 

대단히 인상깊게 읽은 독자로서

'나무의 언어'로 다시 읽히려 개정판으로 나왔다는 사실에 

기쁘기 한량없다.


그런데....내 힘으로는 풀지 못한 수수께끼를 발견했다.


위에도 썼지만 '나무 회상록'은 원문비교는 아직 못해봤으나

결과번역문이 대단히 좋다. 


그래서 다른 번역자(송여울)로 개정판이 나왔다는 것을 알고 

주저없이 장바구니에 책을 담았다. 

이 좋은 책을 또다른 번역본으로 읽을 수 있다니!!


그래서 말이다.


알라딘의 '미리보기' 기능으로 개정판의 번역을 부랴부랴 찾아 읽었다.

출판사 이름(설렘), 그 자체를 느끼면서 말이다.


그런데....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가????


번역자는 박선옥(나무회상록), 송여울(나무의 언어)로 분명 이름이 다른데

왜 번역이 글자 한 자 안 틀리고 같은....가?



(나무 회상록/박선옥 역/눈과마음 출판사/2010)



그 뒤 몇 장도 마찬가지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다.


좋은 소설은 다른 번역본으로 읽어볼 필요가 있다.

번역이란 번역자 개개인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전하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사람이 달라지니까. 

그 사람이 원문을 이해하는 데도 그만의 '그다움'이 개입되는 것이니까.

그 다른 이야기를 다르게 따라가는 동안

독자는 원저자의 이야기에 오히려 가장 가깝게 다가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정판이 반가웠는데...그만, 개정판이 초판과 똑같다.

번역자가 같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번역자가 같은 경우라도 10여 년 전 번역서라면,

오역이나 조금 미진했던 부분을 개역하는 경우도 많다.


10년이라면 번역자의 '실력'과 '혜안'의 수준과 폭도 달라질만하기 때문이다.


박선옥

송여울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인가.


몇 페이지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같을 수는 없다.

아니, 번역자가 다르다면 한 문장도 같을 수가 없다.

토씨라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저 한 쪽만 같은 게 아니라 미리보기에 제공된 20여 페이지가 동일함을

확인하고 더 이상의 비교는 접었다.


다른 번역자의 번역인데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같은 번역일 경우의 가능성을 생각해 보자.


1. 박선옥/송여울이 둘 중 하나는 가명 혹은 필명으로 같은 사람이다.

2. 이전 번역자인 '박선옥'의 허락을 받아 번역을 그대로 썼다--->그러나 이 경우는 이전 번역자 이름을 그대로 내야 한다.

3. 이전 번역자의 번역을 그대로 쓰되 이름을 바꿔도 된다는 동의마저 얻었다--->그러나 이런 동의를 해 준다고? 동의를 해 주었다고 해도 이름을 바꾸는 건 안 된다. 그건 원번역자가 아니라 독자에게 얻어야 할 동의이기 때문이다. 사실과 다르기 때문이다.


갸우뚱하던 고개가 갈수록 무거워져 몸이 넘어갈 지경이다.


이전 번역본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은 번역본인데

출판사, 책 제목, 번역자 이름은 다른 이 책.


누가, 좀 이 궁금증을 해소해 주면 좋으련만.


내게 개정판 소식을 알려준 

뀌도 미나 디 쏘스피로 작가는 알고 있으려나.


*별 다섯개를 아낌없이 주어야 할 책에 일단 별 1개다.

출판사 눈에는 별 다섯개보다 별 하나가 더 눈에 뜨일 수 있고

그러면 내게(나아가 독자들에게) 답을 줄 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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