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언어 - 나무가 들려주는 세상 이야기
귀도 미나 디 소스피로 지음 / 설렘(SEOLREM)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우선, 이 책의 '좋음'에 관해 이야기하자.

한 마디로 말해, 그 좋음이 끝이 없다.


그래서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좋을 지 모를 지경이다.


첫문장부터 숨이 턱.


저 달이 2만4천7백40번이나 떠오르기 전의 오랜 옛날, 나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던 그때를 모두 기억하고 있다.



이 세상에 유일하다 싶은 첫문장까지는 아니다.

환상소설이나 SF 소설에서 마주칠 수 있음직한 문장일 수도 있다.


우리가 상상하기도 벅찬 그 옛날의 일을 모두 기억하는 어떤 존재.


완전히 새롭지 않을 수는 있으나 이런 문장은 늘 그렇듯, 기대감이 인다.


얼마 동안 가슴 두근거리며 땅속에서 기다리다가 부드러운 대지를 헤집고

흙덩이 속에서 새싹으로 고개를 내밀었을 때, 그 순간 엄마가 내게 건넨

첫 인사의 감격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 화자(話者)는 나무로구나.

화자인 나무는 무려 2천년을 산 '숲의 여왕'격인 주목이다.

사시사철 낙엽도 떨구지 않는 꼿꼿하고 우람한 주목.


주목의 탄생을 둘러싸고 수많은 자연의 '비밀'이 벗겨진다.


나는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썩은 낙엽 틈에서 

싹을 틔워야 할 운명이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은 대자연이 조화로운 솜씨를 발휘하는 데

필요한 재료로서 제각기 한몫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탄생'이라는 신비로운 과정을 거치는 사이에 그렇게 아득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늘은 나를 위로 쑤욱 쓸어당기듯 했고, 내 연약한 줄기는 

있는 힘을 다해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가고 있었다. 

동시에 아래쪽에서도 나를 강하게 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이게 단순한 나무의 탄생 절차라고 보이는가.


여기에 '우리'를 대입해 보자.


우리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썩어간 어떤 존재 틈에서 

싹을 띄워야 할 운명이었다

우리 인간의 탄생, 거기에 관여된 축복과 희생을 말하고 있음이다.


주변의 모든 것들은 대자연이 조화로운 솜씨를 발휘하는 데

필요한 재료로서 제각기 한몫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인간의 탄생, 거기에 관여된 

타인 저마다의 기여와 의의를 말하고 있음이다.


하늘은 나를 위로 쑤욱 쓸어당기듯 했고, 내 연약한 줄기는 

있는 힘을 다해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가고 있었다. 

동시에 아래쪽에서도 나를 강하게 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우리 인간의 탄생, 이후로 이어질 어떤 삶의 

행운과 불행의 중첩을 말하고 있음이다.


서두가 이 정도다.


그 뒤는? 더 말하지 않으련다. 

이 정도에 준하는, 아니 그 이상의 '철학'과 '깨달음'이 즐비하다.

소설에 밑줄을 이렇게 많이 긋게 되면, 좋은 소설이란 뜻이다.

적어도 내게는.


끝까지 읽으면 이런 걸 얻는다.

2천 년 고목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이,

그 고목의 뿌리와 몸통과 잎사귀에 배어든 생의 입자가,

살아있는 세포가 되어 내 몸속으로 유입되는 느낌.


책 갈피에 대고 크게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싶은 느낌.


그 느낌을 주체 못하고 작가를 찾아 연락을 했고,

몇 마디를 나눌 수 있었다.


"Could you explain the importance of choosing to tell the story from a tree's perspective, as opposed to a person's perspective?"

(사람이 아니라 나무를 화자로 선택한 이유는?)


그의 답은 짧았지만 내가 'insight'를 얻기엔 충분했다.

(아쉽게도, 자세한 통신내용은 '통신' 권리문제로 공적 플랫폼에 공개는 어렵다)


우화의 형식을 띠면서 시처럼, 선택한 단어들이 '시어'같다.

시처럼 읽힐 정도다.

번역서가 아니라 한글 원문인 듯 자연스럽다.

번역자에 고마움을 느낀다.


박선옥.

작품을 더 찾아보려 하니 알라딘의 검색 데이터 오류인듯.

'이빈'이란 이름으로 연결돼서 찾을 수가 없다.

다르게 접근해 보고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번역한 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더 이상의 작품은 없다.

이 소설로만 봤을 뿐이고 아직 원문을 보지는 못했지만 '결과번역문'만 보았을 때,

매끄럽고 유려하다. 


이 책은 2010년에 초판 번역이 출간되었고

그 개정판이 2018년도에 나오면서 제목이 아예 바뀌었다.


나무의 언어


지금 나는 '나무의 언어'에 리뷰를 쓰고 있다.

내가 읽은 판본은 '나무회상록'이지만.


여기에 리뷰를 쓰는 이유가 있다.


'나무의 언어'를 출간한 설렘출판사와 송여율 번역자에게 꼭 묻고 싶은 게 있다.

개인적으로 접촉도 할 생각이다.


나는 '눈과 마음' 출판사에서 2010년도에 출간된 '나무회상록'을 

대단히 인상깊게 읽은 독자로서

'나무의 언어'로 다시 읽히려 개정판으로 나왔다는 사실에 

기쁘기 한량없다.


그런데....내 힘으로는 풀지 못한 수수께끼를 발견했다.


위에도 썼지만 '나무 회상록'은 원문비교는 아직 못해봤으나

결과번역문이 대단히 좋다. 


그래서 다른 번역자(송여울)로 개정판이 나왔다는 것을 알고 

주저없이 장바구니에 책을 담았다. 

이 좋은 책을 또다른 번역본으로 읽을 수 있다니!!


그래서 말이다.


알라딘의 '미리보기' 기능으로 개정판의 번역을 부랴부랴 찾아 읽었다.

출판사 이름(설렘), 그 자체를 느끼면서 말이다.


그런데....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가????


번역자는 박선옥(나무회상록), 송여울(나무의 언어)로 분명 이름이 다른데

왜 번역이 글자 한 자 안 틀리고 같은....가?



(나무 회상록/박선옥 역/눈과마음 출판사/2010)



그 뒤 몇 장도 마찬가지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다.


좋은 소설은 다른 번역본으로 읽어볼 필요가 있다.

번역이란 번역자 개개인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전하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사람이 달라지니까. 

그 사람이 원문을 이해하는 데도 그만의 '그다움'이 개입되는 것이니까.

그 다른 이야기를 다르게 따라가는 동안

독자는 원저자의 이야기에 오히려 가장 가깝게 다가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정판이 반가웠는데...그만, 개정판이 초판과 똑같다.

번역자가 같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번역자가 같은 경우라도 10여 년 전 번역서라면,

오역이나 조금 미진했던 부분을 개역하는 경우도 많다.


10년이라면 번역자의 '실력'과 '혜안'의 수준과 폭도 달라질만하기 때문이다.


박선옥

송여울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인가.


몇 페이지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같을 수는 없다.

아니, 번역자가 다르다면 한 문장도 같을 수가 없다.

토씨라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저 한 쪽만 같은 게 아니라 미리보기에 제공된 20여 페이지가 동일함을

확인하고 더 이상의 비교는 접었다.


다른 번역자의 번역인데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같은 번역일 경우의 가능성을 생각해 보자.


1. 박선옥/송여울이 둘 중 하나는 가명 혹은 필명으로 같은 사람이다.

2. 이전 번역자인 '박선옥'의 허락을 받아 번역을 그대로 썼다--->그러나 이 경우는 이전 번역자 이름을 그대로 내야 한다.

3. 이전 번역자의 번역을 그대로 쓰되 이름을 바꿔도 된다는 동의마저 얻었다--->그러나 이런 동의를 해 준다고? 동의를 해 주었다고 해도 이름을 바꾸는 건 안 된다. 그건 원번역자가 아니라 독자에게 얻어야 할 동의이기 때문이다. 사실과 다르기 때문이다.


갸우뚱하던 고개가 갈수록 무거워져 몸이 넘어갈 지경이다.


이전 번역본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은 번역본인데

출판사, 책 제목, 번역자 이름은 다른 이 책.


누가, 좀 이 궁금증을 해소해 주면 좋으련만.


내게 개정판 소식을 알려준 

뀌도 미나 디 쏘스피로 작가는 알고 있으려나.


*별 다섯개를 아낌없이 주어야 할 책에 일단 별 1개다.

출판사 눈에는 별 다섯개보다 별 하나가 더 눈에 뜨일 수 있고

그러면 내게(나아가 독자들에게) 답을 줄 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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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ffrey Hartman : Criticism as Answerable Style (Hardcover)
G. Douglas Atkins / Routledge / 199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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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ffrey Hartman은 21세기의 걸출한 비평가 중 한 명이다.

같은 시기에 트라우마와 문학, 그리고 문학의 해체주의에 관해 그만큼 천착한 

비평가도 드물다고, 명성은 자자한데 


어째서 한국판 번역본은 전무한 것인지.


The central dialectic of psychological trauma is “the conflict between the will to deny horrible events and the will to proclaim them aloud” to take up Judith Herman’s phrasing.


출처  https://journals.openedition.org/etudesirlandaises


심리적 트라우마의 중심 변증법은 "끔찍한 사건을 부정하려는 의지와 그것을 소리내어 선언하려는 의지의 충돌"이다.


문학에서 다루는 트라우마에 관한 그의 논지다.

이 한 문장만으로도 이미 매력적이지 않나.


끔찍한 사건을 부정하려는 의지와

그것을 소리내어 선언하려는 의지의 충돌...

그는 과연 이것을 어떻게 문학에서 풀이하고 있을 것인가 말이다.


모든 문학은, '고통'이다.

고통없는 시가, 고통 없는 소설이 있던가.


고통을 부정하는 것과

고통을 선언하는 것.


그 양극의 행위가 문학에서 어떻게 동반되어 

카타르시스로 승화되는지, 그를 통해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잘 팔리지는 않을 지 모른다.

대중적인 책은 분명 아니니까.

그러나 문학하는 사람이라면 읽을 필요가 있는 책이다.


요즘처럼 잘 팔리지 않는 책은 안 만드는 세상이라 그런가,하고

암만 이해해 보려 해도 납득이 안 된다.

어째서 번역이 안 되고 있는 것일까.


'트라우마와 문학'을 알기 위해 지금으로서는

아도르노 [고통학의 해석학]과

왕은철의 책 정도에 기대 볼 뿐이다.  


아도르노


트라우마와 문학, 그 침묵의 소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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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의 감각 - 삶의 감각을 깨우는 글쓰기 수업
앤 라모트 지음, 최재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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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might as well fall flat on your face as lean over too far backwards"(14p)


원서/Anchor Books


"실패하지 않으려고 너무 안간힘 쓰느니, 차라리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까지 실패해 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11쪽)



이 말을 한 사람은 원서에는 'Thurber'라고 되어 있고 번역서에는 '카툰 작가 제임스 터버'라고 되어 있다. 


제임스 그로버 터버 ( James Grover Thurber , 1894년 12월 8일 – 1961년 11월 2일)는 미국의 만화가 , 작가, 유머 작가 , 저널리스트, 극작가, 그리고 유명한 재치 있는 사람 이었습니다. 그는 주로 New Yorker 에 출판되었고 그의 수많은 책에 수집된 그의 만화 와 단편 소설 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위키피디아)


제임스 터버는 이런 말도 했다.


"나는 여자들이 싫은데, 여자들은 항상 물건이 어디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굉장히 재미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실패하지 않으려고 너무 안간힘 쓰느니, 차라리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까지 실패해 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11쪽)

이 번역은 친절이 과하다는 느낌이다.

독자를 겨냥한 친절히 과해서 터버에게는 결례한 셈일지도 모른다.

그가 보이지 않으므로.


원문을 그대로 옮기는 게 저자에게는 더 낫다.


무리해서 뒤로 버티기보다는 차라리 앞으로 얼굴을 처박는 편이 낫다.


이 정도만 해도, 독자는 이게 "실패하지 않으려고 너무 안간힘 쓰느니, 차라리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까지 실패해 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뜻임을 안다. 저자가 이미 그 앞 문장에 '실수'를 언급해 두었기 때문에 더더욱.


더구나 이 문장엔 비밀이 숨어 있다.


fall flat on your face=


이 표현은 이런 뜻의 이디엄 맞다.

그런데 제임스 터버는 이걸 이디엄으로 사용한 게 아니다.
이 이디엄의 표면적인 뜻을 그대로 가져 와 역으로 이용한 것이다.

다시 말해, 속뜻이 아니라 드러난 뜻으로.
'실패'를 2차적인 모티브로 사용한 게 아니라 
차라리 '얼굴을 처박는(fall flat on your face)' 1차적인
의미를 활용한 것이다.

그러니 이 번역은 친절하면 안 된다.

친절하지 않은 것이 제임스 터버의 의도를 살린 것이다.

그리고 그걸 인용한 앤 라모트(이 책 저자)의 의도를 살리는 것이다.


둘 다, 우리네 같이 평범~~~한 표현에서 머물지 않는,

언어의 귀재기 때문이다.


독자는, 굳이 원서를 찾아보지 않고도 그 정도, 누릴 권리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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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saw a home movie once of a birthday party I went to in the first grade, with all these cute little boys and girls playing together like puppies, and all of a sudden I scuttled across the screen like Prufrock's crab.(원서 15p/Anchor Books)

1학년 때 한 친구의 생일 파티를 촬영한 홈 비디오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은 기억이 난다. 하나같이 귀여운 꼬마들이 어울려 강아지처럼 놀고 있는데, 갑자기 내가 나타나더니 화면을 우스꽝스럽게 허둥지둥 가로질러 가는 게 아닌가! 나는 연쇄살인범이 되거나, 고양이만 스무 마리씩 기르는 괴상한 인간이 될 것이 분명했다.(번역서 13쪽)


번역서를 읽다가 갸우뚱하게 되는 지점이 있다.

앞뒤가 말이 이어지지 않을 때.


이럴 때 가능성은 두 가지다.


번역자가 번역어를 제대로 찾지 못했고(숱한 고심을 한 줄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1. 번역자는 독자가 그걸 눈치 못 채고 넘어가길 바란다.

2. 번역자 스스로도 아쉬운 걸 알지만 스스로 넘어가 버린다.


생각해 보자.


귀여운 1학년 아이들이 생일 파티에서 놀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나'(역시 1학년)가 화면에 찍혔는데 우스꽝스럽게 허둥지둥 화면을 

가르지르고 있다...(원인)


나는 연쇄살인범이 되거나 고양이만 스무 마리 기르는 괴상한 인간이 된다...?(결과)


이 두 문장의 연결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은 것일까?

왜 화면을 우스꽝스럽게 허둥지둥 자로지르는 아이는 연쇄살인범, 혹은 고양이 매니아가 되는 것일까?


잃은 걸 찾아보자.


아하, 'Prufrock's crab'.

프루프록의 게.


이게 번역문에는 완전히 빠져있다.


'프루프록의 게'는 T.S 엘리엇의 시에 나온다.

《제이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라는 시다.


중간 쯤 나온다.


I should have been a pair of ragged claws

Scuttling across the floors of silent seas.

(고요한 바다 저 밑바닥을 재게 걷는 한 쌍의 초라한 집게발이었어야 하리)

/종이연필 역

이 시는 대단히 침울하다.

시의 화자가 바로 '프루프록'이란 중년 남자이며

시의 전반에 걸쳐 이 남자는 불합리한 이 세상에서 뭘 어째 보지 못하는

권태롭고 불행한 남자로 표현된다.

거론된 부분에서 프루프록은 자신을 저 심해 바닥의 한 마리 '게'에 투영한다.

('ragged claw'가 게의 발인지, 가재의 발인지에 관해서는 논쟁이 많지만

'게'가 우세한 쪽. 그래서 저가가 딱 꼬집에 'Prufrock's crab'이라 쓴 것)


앤 라모트(저자)가 '프루프록'을 데려왔으면 번역서에도 '프루프록'이 나왔어야 한다.

역주를 복잡하고 길게 달아야 할 것 같아 흡수시키고자 했다면 '권태롭고 불행한' 남자로 대변될 만한 또 다른 사람이나 캐릭터가 동반되어야나왔어야 했다.

그래야, 독자는 '우스꽝스럽게 허둥대다'의 서브 텍스트를 읽어낼 수 있다.


1학년 귀여운 꼬마가 생일 파티에서 허둥대는 모습에서

도대체 어떻게 연쇄살인범이며 고양이 매니아를 떠올릴 수 있단 말인지?


꼬마는 다름 아닌, '프루프록의 게'처럼 걸었기 때문에

연쇄살인범 혹은 고양이 매니아가 거론된 것이다.


그리고 '프루프록의 게'를 제거하기로 했다면, 

'scuttle'의 뜻을 정확히 포착해도 그나마 오독을 줄일 수 있다.


'scuttle'의 기본 이미지는 'move quickly'이다.

빨리 움직이는 것-.

번역자가 선택한 '허둥지둥 움직이는 것'도 물론, 빨리 움직이는 것에 포함된다.

아래 영영사전(longman) 예문을 보자. 


• let out a terrified scream and scuttled down the stairs.• He spotted a cockroach as it scuttled out from under a bin bag.
'scuttle'에는 이런 이미지도 있다.물론 엘리엇의 시에 쓰인 이미지는 다를 수 있다.
그렇다면 내친 김에 엘리엇의 원시에 쓰인 'scuttle'을 생각해 보자.

현실의 비합리성, 부조리함을 '연인'에게 편지를 쓰듯 토로하는

침울한 프루프록은 결국, 이런 무의미함 때문에 갈등이나 고뇌를 겪을 필요 없는

저 심해의 'ragged claw'가 차라리 되었으면, 한다. 


이 시의 '게'의 'scuttle'은 어떤 이미지일까?


물론, 번역서에서 선택된 '우스꽝스럽게 허둥지둥'일 지도 모른다.

단테의 신곡 중 '지옥'을 인용할 정도로 둔중하고 침울한 시이지만

그 무게감을 이기지 못하고 차라리 '우스꽝스럽게 허둥지둥' 돌아다니는

'게'가 되고 싶다고 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게'는 어쨌든, '프루프록의 게'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귀여운 1학년 꼬마의 우스꽝스러운 게 걸음'이 '연쇄살인범'이나 '고양이만 스무 마리 키우는 사람'의 이미지로 연장이 가능해질 수 없는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저자가 '프루프록의 게걸음'을 '연쇄살인범'이나 '고양이 스무 마리만 기르는 사람'으로 연결시킨 근거는 엘리엇의 시에 쓰인 이 구절 때문이다.


-There will be time to murder and create,

-The yellow fog that rubs its back upon the window-panes,
The yellow smoke that rubs its muzzle on the window-panes,
Licked its tongue into the corners of the evening,(fog-->cat의 상징화)

이제는 '게 걸음'과 '연쇄살인범, '고양이 스무마리...'의 의문이 풀림과 동시에
한 결 깊은 독서가 가능해진다. 프루프록만 살려 줬어도. 아니, 프루프록이 살려졌어야만가능해진다. 

*단테의 신곡 중 지옥 편 기도문
*햄릿의 상징: 'For you yourself, sir, should be as old as I am--if, like a crab, you could go backward.' 

1학년 꼬마 생일 파티 정경 속에서 저자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대단히 사소한 문장이나 이렇게나 둔중한 것들을 천연덕스럽게 함의해서
한 마디로 '빵 터지게' 하는 부분이기에.

앤 라모트의 글은 일상적으로 편하게 쓴 것 같지만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어야 한다. 
쉽게 쓰였다고 해서 쉽게 읽히지 않는 글들이 있는데 그녀의 글이 그렇다.

이 번역은 쉽게 쓰인 글, 거기서 그만 멈추었다. 
적어도 이 부분은.

앤 라모트의 열성팬이기도 하고, 그녀의 책을 애정하므로
앞으로도 좀더 신중하게 비교하며 읽어보려 한다. 
원서도 독자가 있고
번역서도 독자가 있고
이 서재글에도 독자가 있을 테니

그 모든 독자를 위해.
번역은 무엇보다, 정확해야 한다.
유려함은 '읽는' 층위에서도 쟁취될 수 있다.
번역 층위에서 막힌 정확성의 진로는 독서 층위에서도 이루어지는
실로 많은, 아니, 어쩌면 저작보다 더 풍성한 '창조활동'을 막는다.

*《제이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는 이 시집에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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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빌리티와 푸코 모빌리티인문학 총서 38
카타리나 만더샤이트.팀 슈바넨.데이비드 타이필드 엮음, 김나현 옮김 / 앨피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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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기계가 공존한다. 기계가 주인이 되려한다. 이 정도면. 지금, 모빌리티는 단순히 ‘기계‘의 그것에만 멈추려 하지 않는다. 기계가 인간보다 더 능숙하게 해 내는 것처럼 보이는 모빌리티를 인간에게로 확장해야만 하는 시대에 인간은 3년째 모빌리티를 잃고 있다. 그래서 지금, 읽어야 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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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빌리티 텍스트학 - 대안적 텍스트 연구 방법의 모색 모빌리티인문학 총서 27
이진형 외 지음 / 앨피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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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와 소설의 공통점 (중의 하나)는? 모빌리티. 움직인다는 것(이동성)이 소설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구현되어 어떤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움직이는 것의 종착지는 ‘미래‘다. 소설은 미래를 이야기하는 문학이다. 움직이는 문학이다. 소설 텍스트이 모빌리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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