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모노클 읻다 시인선 14
사가와 치카 지음, 정수윤 옮김 / 읻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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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뭐지? 미리 보기로 딱 세 편의 시를 읽었는데, 시를 읽은 느낌이 아니라 마시는 것 같은 느낌은 뭐지. 적당히 뜨거운 온도의 차를 마시듯, 배 아래가 뜨끈한 이 느낌은 뭐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고, 그 뜻을 꼭 알고 싶다는 이 느낌은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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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 2023-01-07 0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 멋진 감상이에요!
정수윤 번역가님이 번역하신 다른 시집들도 느낌이 매우 좋던데 궁금해지네요.^^

젤소민아 2023-01-07 07:27   좋아요 0 | URL
아, 이참에 찾아볼게요. 정보 감사합니다~~~자주 들러주세요~~
 
서툴지만 푸른 빛
안수향 지음 / Lik-it(라이킷)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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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 없는 사진으로 움직이는 여행을 말하는 사람들. 여행에세이에 빠질 수 없는 게 사진이라면 이왕이면 사진을 잘 찍은 사람의 여행에세이가 좋다. 이 사람, 사진 참 잘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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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정원 -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김용석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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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사물과 존재를 '다르게' 보려는 시도가 문학이라면 그것들을 '깊이 있게' 보려는 시도가 철학이지 않을까. 그런 시도들이 꼭 결연하게 구분되어야 하는 건 아닐 것이다. 문학하는 사람이 철학을 할 수도 있고 철학하는 사람이 문학을 할 수도 있다. 하나의 이야기를 놓고 그걸 문학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철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 책을 읽으며 그게 사실은 별 차이 없을 수도 있고 동시에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좀 특이한 경험을 했다. 어떤 이야기를 헤집고 다르게 보고 깊이 있게 보려는 시도는 분석, 다시 말해 '비평'에 근접한다. 이 책을 딱히 비평서라 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비평서 아닌 에세이라 할 수도 없다. 


비평서와 에세이 중간 쯤이라고 해 두자. 

비평서와 에세이 중간 쯤의 어떤 책은 이런 느낌을 주는구나, 싶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쐐기벌레를 저자가 응시하는 지점에서 꽤 한참을 머물렀다.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것은 바로 '변화의 문제'이다. 쐐기벌레도 '변신'을 겪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변태(metamorphosis)의 과정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야 할지 모른다. 자신을 쐐기벌레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궁극적으로 나비로서 살아야 할 존재이므로 나비라고 해야 할까? 이렇게 변힌 없이는 생명체로 온전히 살아갈 수도 없는 존재가 단지 몸 크기가 변화해서 고민하는 앨리스를 다르쳐 묻고 있다니! 역설적이지 않은가? (21p)


쐐기벌레는 궁극적으로 나비가 될 존재이나 당장은 결코 예쁘다고 할 수도, 내키는 대로 자유로이 활보할 수 있는 적당한 길이, 갯수의 다리도 갖지 못한 존재에 불과하다. 궁극적으로는 '나비'라는 저의 운명을 아직은 확실히 알지 못하는 채, 쐐기벌레가 몸의 크기가 자꾸 변하는 앨리스에게 "너는 누구냐?"고 묻는 대목.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철학자의 시선이다.


자기가 누군지도 잘 모르면서, 자신의 정체성이 미처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타인에게 "너는 누구냐?"고 자꾸 묻는다. 고로, 우린 이상한 나라에 사는 쐐기벌레다. 앨리스이기 이전에 쐐기벌레다. 앨리스에게로 맞췄던 스포트라이트를 쐐기벌레로 가져와 보니 그 벌레는 앨리스보다 이전에 정체성에 관해 무진장 고민하고 있던 존재였다. 고민하지 않았다면 앨리스라는 타자를 구태여 '질타'하는 수고를 할 필요 없다. 

앨리스가 누구에게든 자신만만하게 큰소리칠 때는 자신의 원래 크기로 돤전히 돌아와 타자를 압도할 때다.(22p)

이제 그곳을 나와 익숙한 현실 세계에서 자기 정체성을 되찾고 그것을 안정되게 유지함으로써 무척 '편안해'졌지만, 어쩌면 또 무료한 일상이 앨리스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22p)


앨리스는 몸의 크기를 바꿔가며 정체성을 찾으려는 모험을 떠났었다. 그리고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별 대단히 엄청나게 달라진 현실(미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래 전에, 또 오랫동안 앨리스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정체성을 찾으려 안달할 게 틀림없다. 나 역시 정체성 고민을 했고 지금도 한다. 예전과 지금 달라진 게 있다면, 예전에는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는 데 집중한 데 비해, 지금은 정체성을 찾을 필요는 있으나 정체성을 찾았다고 해서 무언가가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특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체성을 찾는 위업을 달성했다 해도 돌아온 현실이 앨리스처럼, 언니의 무르팍이라면,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덧붙여 또 한 가지 고민이 늘어났다.


나의 정체성은 내 안에서 찾아야 하는가, 타자와의 관계에서 찾아야 하는가.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을 다시 펼쳐 들어야 할 것 같다. 

내 정체성을 찾는 것은 나이지만 그 정체성을 완성하는 것은 타자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쐐기벌레가 앨리스에게 한 질문은 사실, 그 노력의 발로인 지도 모른다.


너는 누구냐.


내 정체성을 좀 완성해 다오, 라고.


내 정체성 찾기 혹은 확립은 나 혼자만 할 게 아니라 타자의 연루와 영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을 들게 해 준 소설을 잇달아 떠올리며.



정체성 | 민음사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7075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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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밥바라기별 - 황석영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2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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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모두가 신사의 직업을 우리들 앞에 미끼로 내세우지만 빵 굽는 사람이나 요리사가 되는 길은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독 짓는 이는, 목수는, 정원사는, 또는 아무 일도 택하지 않는 것은. 피아노 배우기에서 여러 단계의 기계적인 손동작을 강조하는 교본들 대신에 예를 들면 처음부터 직접 '등대지기'라든가 슈베르트의 '연가곡' 같은 노래를 연습하면 안 되는 것인지. 굳어져 버린 코 큰 외국이느이 석고상을 그리기보다는 학급 친구나 아우의 얼굴 또는 늙으신 고향의 할머니를 그리면 안 되는 것인지. 이것들은 제도 안의 최소한의 변화인데도 허용되지 않습니다.(84p)


어린 시절, 학교에서는 가정환경조사서라는 걸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즉석에서 기입하게 하거나 집으로 가져가 적어오게 했다. 그 종이는 무언가를 알아보기 위한 게 아니라 알아내기 위한 목적을 지녔다. 거짓말도 능숙하게 해내지 못할 나이인지라 어떤 아이들은 '부모 학력'난에 '무학' 또는 '국졸'이라고 적고 있다는 티를 있는대로 냈다. 아이답지 않게 비장해지거나 아이답지 않게 너무 슬퍼지거나. 


그것도 모자라 교사는 '손을 들라'고 시켰다.

집에 자가용 있는 사람, 컬러 TV 있는 사람, 비디오 있는 사람.

집이 자가소유인지 세들어사는 지도 밝혀야했던 학교는,

누군가에겐 지옥이 되고도 남았다.


그게 다 지난 일이라고.

과거일 뿐이라고.


그러기엔 너무 생생했던 그 장면들.

그러기엔 너무 생생한 아이들의 얼굴들.

그리고 그 속에 끼어있었을 나의 얼굴(들).


나도 이 소설의 인물, 유준처럼 학교에 이런 편지를 쓰고 싶다. 

이것이 저의 자퇴 이유입니다.  

(85p)


여전히 나는 가정환경조사서를 당당하게 들이미는 학교를 다니고 있는지도 모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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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멘타 하인학교 (무선) - 야콥 폰 군텐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
로베르트 발저 지음, 홍길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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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발저는 스위스의 국민작가라고.

작가들의 작가라고.

그의 작품은 프란츠 카프카, 로베르트 무질, 헤르만 헤세, 발터 벤야민에게서 찬사를 받았다고. 


이미 이런 거장들에게서 찬사를 받았다 하니 '난해함'을 각오했지만

모더니즘도 아니고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정규교육을 받는 적도 거의 없고 30여 년 세월을 정신병과 싸웠고

정신병원이 아예 집이었다고.


아, 이런 사람이 쓴 소설이라.

각오할 게 많았다.


심호흡하고 책을 폈다.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


쎄다.


그래도 뭔가 건지려고 소설을 펴는 건데, '없다'에서 심장 한 번 쾅, 맞는다.


더 쎈 걸 각오해야 하나.


우리 모두는 훗날 아주 미미한 존재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재로 살아갈 거라는 뜻이다

흠.

배우는 것도 없고, 미미한 존재가 되기로 작정한 소설 같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더 쎈 걸 각오하기 위해 '위키피디아'를 컨닝한다.


현재는 스위스를 대표하는 작가로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생전에 발저는 문학사에 보기 드물 정도로 스스로를 "작게“ 만들었던 작가이다.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학력마저 보잘 것 없었던 그는 점원과 서기 등의 직업을 전전했으며, 실제로 슐레지엔 지방의 성에서 하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고 집도 고정적인 거주지 없었고, 단 한점의 가구도, 심지어는 자신이 쓴 책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글을 쓰는 종이조차도 재활용품이었다. 그는 물질뿐만 아니라 인간들과도 멀었다.

-위키피디아


스스로를 작게 만들었단다.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대개 우리는 남이 우리를 작게 만들려 한다고 투덜대지 않는가.

작게 되지 않으려 기를 쓰는 게 우리 아닌가.


근데, 스스로 작게 되고자 '벤야멘타 하인학교'까지 세우고

우리에게 거길 한 번 입학해 보라는 건데.


한 두장 넘기다가 그만 둔 소설들도 많다, 솔직히 말해서.

그래야 더 좋은 다른 책이며 소설들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굉장히 재미는 없을 것 같다는 느낌.

난해한 건 뭐, 각오했으니 그렇다치고.

재미없는 건 괴로운 일이다.

더구나 소설이?


아까 한 각오가 쎄기 쎘나 보다.

책장이 그래도 넘어가 주는 걸 보면.


거의 필사, 아니, 필타 수준으로 보이는 문장을 찍어 본다.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

-우리 모두는 훗날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재로 살아갈 거라는 뜻이다.

-우리가 받는 수업은 우리에게 인내와 복종을 각인시키는 데 가장 큰 의의를 둔다.

-우리를 이끌고 가르쳐야 할 교사 나리들께서 잠에 빠져 계시다.

-우리는 매번 같은 것을 반복한다. 하지만 이 모든 하찮은 것들, 우스꽝스러운 것들 뒤에 비밀이 감춰져 있을지도 모른다.

-벤야멘타 하인학교 중에서-

눈이 가물거리는 듯 하는 이유는 뭔가.


잠이 쏟아지려는 건가...하다가 얼핏 정신이 든다.

이 이야기는 소설을 특별히 생각해서 쓰기까지 하고 있는 내게,

'소설'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 뭔가.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소설에서 뭘 배우나. 소설은, 사는 것 아니던가. 그 속에서. 살아 보는 것.


우리 모두는 훗날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재로 살아갈 거라는 뜻이다.=소설 속 인물은 소설에 예속되어 있다. 우리가 세상에 예속된 것처럼.


우리가 받는 수업은 우리에게 인내와 복종을 각인시키는 데 가장 큰 의의를 둔다=인내없이 소설을 쓸 수 없다. 소설의 인물과 또 무엇에 복종하지 않고 소설을 쓸 수 있나


우리를 이끌고 가르쳐야 할 교사 나리들께서 잠에 빠져 계시다=소설을 가르쳐야 할 교사 나리들께서 잠에 빠져 계시...ㄴ지 오래다. 소설 쓰기에 관해 나는 뭘 배우고 있는가. 그리고 소설 쓰기를 배운다는 게 가능은 한 건가.


우리는 매번 같은 것을 반복한다하지만 이 모든 하찮은 것들우스꽝스러운 것들 뒤에 비밀이 감춰져 있을지도 모른다=이게 바로 소설이다. 새로운 소설이 나온다 해도 전에 했던 그 이야기들 천지다. 했던 이야기 또 하고 또 하는 게 소설이다. 도대체 이 짓을 왜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찬고 우스꽝스럽다. 그런데 그 뒤에 비밀이 감춰져 있을지 모른다.


이곳에서의 체류 자체가 내겐 때때로 정말 불가사의한 꿈처럼 여겨진다=소설을 읽으며 소설을 쓰며 나는 소설에 체류한다. 그게 내겐 때때로 정말 불가사의한 꿈처렴 여겨진다. 암, 그렇고 말고.


잘 알지도 못하고 아무 연관도 없는 사람을 섬기는 것, 그것은 매력적인 일이다=여기서 '사람'을 '소설 속 인물'로 바꿔보라. 긴 말 필요없다.


그리고는 결국 깨닫는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혹은 거의 모든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소설은 환타지건 SF건 모더니즘이건 포스트 모더니즘이건 포스토-포스트 모더니즘이건, 독자로 하여금 어떻게든 자신과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게 하고 싶어한다. 그걸 가능케 해주는 소설이 좋은 소설이다.


생각과 기발한 착상들이 나 같은 놈에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그니까...생각과 기발한 착상 암만 많아봐라. '나 같은 놈'에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난 이 한탄을 오늘도 네 번은 했다 이말이다)


크라우스는 벤야멘타 학원에 존재하는 모든 규정들의 대변자다=소설의 모든 규정들. 그걸 대변하는 크라우스 같은 존재들이 있긴 있다.


나는 다투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다퉈야 소설을 쓸 수 있다. 사람과도 세상과도, 무엇보다 자신과도.


나는 생생하게 느낀다. 내가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의 어리석음과 건드리면 즉각 반응을 보이는 점이 나에게는 가장 고귀한 자연의 경이보다 더 사랑스럽고 더 소중하다=글치 글치. 나는 소설을 쓰면서 자연보다 '사람'에 더 매달린다. 나는 자연보다 사람을 다룬 소설을 쓰니까. 그게 소설이니까.


(크라우스) 먹을 것이 있으면 먹어야만 한다는 규정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버터를 바르고 소시지를 얹은 이런 빵을 길 가다 주울 수 있을 것 같아? 식욕을 가져. 너는 지금 오만함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식욕이 없는 거야=그래, 크라우스. 난 '식욕'이 없어서 소설을 못쓴다네. 의욕만 있다네. 식욕이 없다네. 그 놈의 식욕. 왜 안 생기냐 말일세!!


내게는 모든 것이,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고, 그 때문에 적대적으로만 느껴졌던 것이다.=비극적이게도, 소설의 모든 것이 내게는 낯설다, 우씨.


모든 것은 방식에 달려 있다. 방식, 그래. 그것이다=이게 소설의 요체다. 내가, 그건 안다 이 말이지.


크라우스는 그의 재능을 알아볼 줄 모르는 주인을 너무 일찍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나의 재능을 알아 볼 줄 모르는 주인(들)을...난 이미 만난 것 같다.


무언가를 애타게 찾았지만 아름답고 참된 것이라고는 좀처럼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이곳에서는 모두가 무언가를 찾고 있다=나는 무언가를 애타게 찾았다. 아름답고 참된 것이라고는 좀처럼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소설 속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다.


시골 출신의 이 녀석(한스)은 너무나도 건강하고 너무나도 소박하게 보고, 듣고, 느낀다한스는 깊이 좀 꿰뚫어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소설은 꿰뚫어 봄을 요구하는 게 아닐 지도. 한스처럼 소박하게 보고 듣고 느껴야 가능한 것일지도. 아, 나는 너무 꿰뚫어 보려 하는 탈이다.


사람들은 그를 아주 편안하게 대한다. 그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힘겨운 감정들을 일깨우는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좋은 소설은 이래야 한다. 


그를 얼핏 처음 보는 순간부터 본질적인 것으로 다가온다=어려워서 잘 모르겠다. 이게 어떤 느낌인지. 얼핏 처음 보는 순간부터 본질적으로 다가왔다. 혹시 이 소설이. 주는 이런 느낌?

어린 시절부터 이미 자연은 천국처럼 먼 존재로 느껴졌다=그러니 난 자연보다 사람이라니깐.


벤야멘타 씨는 사회생활을 전혀 하지 않는 것 같다=사회생활은 좀 하고 살아야 한다. 소설을 쓰려면. 벤야멘타 씨는 소설가 아니니까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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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소설을 읽고 쓰는 것에 견주어 읽어도 얻을 게 많다.

초반 부분에서만 이 정도다.


물론, 로베르트 발저는 '소설'에 견주어 이 소설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에 견주어도 말이 된다면

사람이나 

세상이나

삶에 견주어도 말이 된다는 거다.


소설이 바로 그것들을 다루니까 말이다. 


독자의 어떤 무엇을 갖다 대더라도 말 되는 이야기는 거장만 가능하다.

그리 넓은 스펙트럼의 보편성을 아무나 획득하고 펼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텍스트 하나하나 씹어가며 읽을 생각이다.


'산책의 글쓰기'를 주창하고 실천했으며

그런 그답게, 눈밭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던 

그 순간의 발저를 

이 방구석에서 깊이 머리 숙여 애도하며.


1956년 12월25일 아침 산책 중 심장마비로 쓰러져 눈밭 위에서 생을 마감한 로베르트 발저의 마지막 모습. 인근에서 놀던 아이들이 그의 시신을 발견했고 경찰이 사진을 찍었다. 왼쪽 아래는 생전의 로베르트 발저. 한겨레출판 제공


사진출처

https://m.khan.co.kr/culture/book/article/201703172058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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