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열린책들 세계문학 227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남몰래 다른 일과 연관시키면서 아버지의 꾸중을 참아 냈다. 

그와 동시에 야릇하게 새로운 감정, 갈고리로 콕콕 쑤시는 듯한

사악하고 날카로운 감정이 내 안에서 번득였다.


28p


더는 아버지가 무섭지 않아진 때를 기억한다. 더는 어머니가 어렵지 않아진 때를 기억한다. 때는 대학교 2학년이었다. 밤이면 늦게 들어오는 아버지를 더는 기다리지 않게 되고, 밤이면 늦게 들어오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머니를 곁에서 지키지도 않게 된 때와 겹친다. 더는 어머니가 가엾지 않았다. 왜냐하면 싱클레어가 느꼈던 바로 그 감정. 야릇하게 새로운 감정. 갈고리로 콕콕 쑤시는 듯한 사악하고 날카로운 감정이 내 안에서 번득인 때문이다.


내가 아버지보다 우월하다고 느껴졌다!

28p


그때의 감정에 이름표를 붙이지 못했다. 나는 헤세가 아니니까. 이제야 그 감정의 이름표를 찾는다. 학창시절 읽었던 '데미안'은 이런 게 아니었다. 감히, 아버지보다 어떻게 우월하다고...이런 생각도 못할만치 집에서 나는 포복할 듯 몸을 낮추고 살았으니까. 대학교에 들어가고 한 일년 쯤 지나 내가 아버지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았다. 밤이면 늦게 들어오는 아버지가 나보다 우월할 턱이 없었다. 그걸 왜 그렇게 늦게 알았는지 분할 뿐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다시 아버지 앞에서 몸을 낮추게 되었다. 아버지는 남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더는 두 다리를 움직여 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버지보다 한참은 내가 우월하다고 느낄 이 즈음, 나는 아버지보다 전혀 우월하지 않다는 걸 또 알았다. 


아버지는 그저, 아버지의 방식대로 자신의 삶을 살고 또 즐겼던 것임을 안다. 자신의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았던 것임을 안다. 비록 어머니를 밤이면 기다리게 했지만 아버지를 기다리던 어머니도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했던...그게 어머니의 최선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벽시계와 탁자, 성경과 거울, 책꽂이와 벽에 걸린 그림들이 내게 작별을 고하는 듯했다. 나의 세계, 나의 즐겁고 행복한 삶이 어떻게 과거가 되고 어떻게 내게서 떨어져 나가는지 얼어붙는 심정으로 지켜봐야 했다.


싱클레어는 완벽한 도덕을 추구하고 또 지킬 줄 아는 완벽한 아버지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면서 죄의식을 느끼는 대신 아버지보다 자신을 우월하게 생각하는 방식을 택했다. 새로운 감정에 겁을 집어먹고 아버지 발에 입 맞추며 용서를 구하고 싶었지만 본질적인 일에 대 용서를 구할 수 없음을 깨닫고 다른 방식을 택한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갈 방식을.


떨어져 나가기.

행복하고 안정적인 과거의 삶이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기.


그리고 싱클레어는 침대에 누워 더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싱클레어는 더이상 가족과 노래하지 않고 아버지의 축복의 기도문에 감동하지 않는다. 싱클레어는 그 아버지가 삶을 사는 최선의 방식을 택하지 않기로 하고 '떨어져 나간다'. 떨어져나간 싱클레어의 자아는 세상으로 나가 자신을 꼭 닮은 '클론'을 찾는다. 막스 데미안. 그리고 데미안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어머니를 닮은 에바 부인. 


하지만 이따금 열쇠를 찾아서 나 자신 안으로 침잠하면, 운명의 형상들이 어두운 거울 속에서 잠들어 있는 곳으로 완전히 침잠하면, 검은 거울 위로 몸을 굽히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나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나의 친구이면서 인도자인 그와 똑같은 모습이. 

226p)


내 방식대로 집에서 떨어져나와 세상 속으로 파고든 나는 데미안과 에바 부인을 만나지 못했다. 세상 사람 모두에게 나는 타자였고 내게 그들은 완벽한 타인이었다. 날이 갈수록 그걸 더 깨닫고 확인하는 중이다. 다만, 다르다면, 더는 서럽지 않다는 사실이랄까. 타자여서 오히려 안도할 때가 더 많다는 사실이랄까.


그시절 내 아버지의 나이 무렵에 와 선 지금, 나는 여전히 운나쁘게도, 데미안도 에바 부인도 만나지 못했다. 소설이 좋은 이유가 이것이다. 좋은 소설을 시간의 주기가 바뀔 때쯤 다시 읽어도 좋은 이유가 이것이다. 어둠의 거울 위로 몸을 굽히면, 싱클레어보다 운이 좋지 못한 내게도 보이는 얼굴이 생겼다. 그게 누구인지 중요치는 않다. 중요한 건, 그게 누구든 알에서 깨어나려 파이는 날갯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데미안'을 펼칠 때마다. 


데미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