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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다들 명작이라고 하니까 일단 별 네개 주고 시작한다.
다들 명작이라고 하는데 나만 아니라고 할 만용을 부리기는 쉽지 않다.
고교 시절에 읽었던 버전은 청소년 축약본이라, 다른 소설을 읽는 것 같았다.
대학교 시절 읽었던 버전은 주제넘게 원서본이라, 역시 다른 소설을 읽는 것 같았다.
그러니, 나는 이제사 '위대한 개츠비'를 처음 읽는 것과 진배없다.
청소년 시절과 대학 시절은 줏대 있는 척 까불어도
사실, 굉장히 귀가 얇았던 때인지라
제목부터 '위대한'이 덜커덕, 붙어버렸으니 개츠비는 '당연히' 위대했다.
앞뒤 재고 할 새 없이, 개츠비는 그냥 '위대했다'.
어디서 개츠비가 뭐가 위대해? 했다가는 몰매까지는 아니어도
무식하거나 무지하거나 책을 대충 읽었거나 독해력이 바닥이거나 등등의 이유로
눈흘김을 받았을 테다.
이제사 처음 읽는 '위대한 개츠비'는 장기판에서 '차' 떼고 '포' 떼듯,
'위대한'을 떼고 임하기로 했다.
그래서 너무 여유자적해진 탓일까?
정말이지, 개츠비는 위대한 구석이라곤 눈곱만큼도.........없는데, 어쩌나 그려.
첫사랑 못 잊는 건 그렇다 치자.
돈이 좋아 이미 부자 남자의 아내가 된 여자를 오매불망...
그 여자 집이 마주보이는 곳에 저택을 사서 또 오매불망...
데이지에게서 개츠비가 간절히 원한 것 두 가지.
-남편에게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라고 말하기.
-그러고 나서 둘이서 손잡고 떠나기
데이지는 그 절반은 해 준다.
남편인 톰 앞에서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사랑한 때는 있었어요. 사랑 안 한 건 아니에요."
뭔 말인지...
사랑 안 한다고 딱 잡아떼려니 톰은 돈이 너무 많고,
사랑한다고 확 붙으려니 톰은 또 정부가 너무 많고...
천만다행으로, 어느 지점부터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개츠비가 '위대한' 것까지는 모르겠으나
이 소설에 나오는 왼갖 인물들과는 뚜렷이 다른 점 하나,를 발견했다.
"우리 이제 오후에 뭐하지?" 데이지가 소리쳤다.
"그리고 내일은, 그리고 또 삼십 년 동안은?"
-147p
그러고 보니, 소설 속에 나오는 그 모든 인물들은 하나같이
"나, 이제 오후에 뭐하지?"고 노래를 부르고 다닐 족속들이다.
(할 일이 있어도 그 일을 하거나 말거나 그만인 '별 일 아닌',
혹은 '범죄에 준하는' 일을 한다/아, 물론 개츠비도 그런 일을 하긴 했다)
톰 뷰캐넌=오후에 여자를 만나거나 폴로 게임을 하거나 음주
닉 카라웨이=그간 개츠비를 관찰하느라 결근을 너무 많이 해서 회사에 좀 들러야.
조던 베이커=골프 치거나 파티 가거나 약혼자와 데이트
울프심=주가 조작 연구를 하거나 저렴한 에틸 알콜 성분 판매처 캐내기(장례식 갈 시간 따윈 전무)
조지 윌슨=차를 고치면서 아내를 감시해야 하는데, 그나마 완전히 지쳐서 하고 싶지 않은 상태.
그런데 이 모든 인물들과 달리,
개츠비는 어떤 날이든 "나, 이제 오후에 뭐하지?"란 말이나
하고 앉았을 시간이 없다.
오후 뿐 아니라 내일, 또 향후 30개년 인생 계획이 꽉 차 있다.
(그런 계획표가 소설에도 등장한다).
http://maximilliannugroho.blogspot.com/2012/03/comparison-between-jay-gatsby-and.html
개츠비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그게 이룰 수 없는 첫사랑의 미련이든,
그 여자를 넘어선 또 다른 'holy grail'이건 간에.
대개가 목표 없이, 영혼의 부서짐도 마다않고
먹고 마시고 사고 떠들고 향유하기에 바쁘던 그 시절에.
Roaring Twenties가 아닌가 말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목표를 놓고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 없다.
결코 그럴 수 없다.
'범죄'에 준하지만 않는 목표라면 말이다.
개츠비의 그 뚜렷한 목표가 무엇인지, 정확히 서술되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이 '데이지와 손잡고 떠나는 것' 정도는 아님을 눈치챌 것 같긴 하다.
두 번 정도는 더 읽어볼 생각이다.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믿었다. 해가 갈수록 우리에게서 멀어지기만 하는 황홀한 미래를, 이제 그것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뭐가 문제겠는가. 내일 우리는 더 빨리 달리고 더 멀리 팔을 뻗을 것이다...그러면 마침내 어느 찬란한 아침...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새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223p)
끝까지 데이지에게서 전화가 올 것이라고 믿었던 개츠비의 믿음은 배신당했다.
그러나 그는 배신당함을 인지하기 전에 죽었으니 배신 당한 게 아니다.
개츠비는 뚜렷한 목표를 안고 그걸 믿는 채 죽었다.
뚜렷한 목표도 없고 믿음 따윈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아하, 혹시 이래서 개츠비가 위대한....?
어쨌든 단 한 사람, 믿음을 지킨 사람이며
목표도 믿음도 없던 닉이란 친구에게 그걸 남겨주었기에.
유일하게 장례식에 왔고,
개츠비가 떠난 뒤에도
이 긴 이야기를 우리에게 읊어준 게 그 증거, 아니겠나
리뷰는 이래서 쓸만하다. 리뷰쓰다가 득도한 느낌.
맞거나 어쨌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