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박성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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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아버지는 남편에 비하면 늘 헐렁했다.

누군가가 생각해서 챙겨주더라도 

헐렁한 옷 사이로 모두 빠져나가버리는 그런 헐렁한 사람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여자는 

아버지가 던져준 헐렁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무렵부터 여자는 어떤 끈이든 단단하게 조이는 버릇이 생겼다.

풀려 있거나 느쓴해진 끈만 보면 꽉 조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여자를 짓누르고 있었던 헐렁한 삶에서 비로소 벗어난 것은 

바로 속싸개로 아기를 친친 동여매었을 때였다. 


-왜 이렇게 옷이 헐렁하다니, 얘야.


아버지가 죽었다는 말이 시시하고 헐렁한 농담 같았다.


아버지의 수의를 꼭 조였을 때, 그제야 여자는 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했다.


여자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헐렁함'과 '조임'이란,

너무 흔해 빠진,

단 두 개의 심상만으로 빚어낸 현실.


움직임 없는 텍스트가 

유독 소설 속에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이런 소설가가 있기 때문이다.


박성원.


내 주위에 숱하게 널린 것들에서  

그의 눈에 뜨인 것들을 조각으로 꿰면,

내가 거한 작은 우주가 손에 만져질 것 같다.


내 눈에도 보이도록.


나는 무엇이 헐렁한가.

나는 무엇을 조여야 내 결핍의 민낯을 조우할 것인가.


아버지의 수의를 꼭 조여야만 하기 전에,

조일 것을 찾아내고자.


땡큐.


 

여자가 간선도로를 빠져나온 시각은 오후 세 시 십구 분이었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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