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폭한 독서 - 서평가를 살린 위대한 이야기들
금정연 지음 / 마음산책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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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폭한 독서>... 묘한 책. 서평인 줄 알고 읽었는데 읽다보면 낄낄대고 있음. 잡지식(처럼보이는 핵심지식)이 막 저절로 쌓이고 묘하게 위로가 됨. 서평의 새로운 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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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 - 서울의 삶을 만들어낸 권력, 자본, 제도, 그리고 욕망들
임동근.김종배 지음 / 반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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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반비, 2015)을 한 달음에 읽었다. 박해천의 <아파트 게임>이나 그 전작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함께 읽어볼만하다. 자음과모음에서 나온 <이면의 도시>도 인포그래픽 형태로 정리된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좀더 심도 있게 이 주제를 다루자면, 벤야민의 책들도 참고해야 하고 푸코의 책들도 참고해야겠지만 그러기엔 일단 역량이 안 된다. 독일 철학 전문가이자 벤야민 연구자로 널리 알려진 수잔 벅-모스의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도시사회학적 관점에서 벤야민의 논의를 정리한 그램 질로크의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정도는 한 번 마음 굳게 먹고 도전해볼만하다. 그램 질로크의 책은 노명우가 번역한 책인데, 그가 쓴 <세상물정의 사회학>은 박해천의 <아파트 게임> 등과 함께 비교적 가벼운 마음 가짐으로 읽을 수 있다. 김기찬의 사진집 <골목 안 풍경>도 함께 봄직하다.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은 도시공학, 지리학(지리정치학) 전공자인 임동근 교수의 대담집이다. 2013년에 팟캐스트로 방송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박사논문에 실린 내용을 대중적으로 풀어 정리한 것이라는데, 논문은 아직 단행본으로 출간이 안 되어있다. 출간이 기다려진다. (지도와 표가 더 많이, 알아볼 수 있는 해상도로 실렸으면 좋겠다.)

 

 

 

 

 

 

우리가 정치, 행정이라고 부르는,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전혀 실감을 못하는 영역을 일상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는 게 이 책의 큰 장점. 가령 이 책에서는 물 문제나 똥 문제가 자주 언급된다. 서울이 거대 도시가 되면서(즉 메트로폴리스화 되면서) 중요하게 처리해야 했던 문제들이다. 이 책은 물 확보를 둘러싼 갈등, 전기세를 둘러싼 갈등, 대형 주거 공간인 아파트 관리 문제를 둘러싼 갈등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고민하는 문제들이 어떤 방식으로 정치적, 행정적 결정들과 연관되어 있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왜 선거를 잘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ㅋ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저 선거만 잘해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흥미로웠던 부분은 역시 아파트에 대해 서술한 대목. 지금이야 아파트가 대표적인 주거공간이자 내 집 마련 플랜의 로망이자 최종 목적지로 인식되고 있지만,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파트에 대한 판타지가 상승한 것은 70년대 후반-80년대인데, 이때 정부에서 조장한 중산층 이데올로기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80년대에는 물가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전두환 정부의 각종 규제 때문에 아파트 붐은 없었고, 대신 다세대, 다가구 주택이 많이 지어졌다고 한다. 이 시기는 '하숙의 시대'이기도 해서 서울로 몰려온 지방 인구 중 상당수가 하숙을 하거나 하숙하는 친구 집에서 안면몰수하고 얹혀 살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이런 서술을 읽으면 아 옛날엔 정말 그랬었지... 하고 잠시 추억에 젖을 수 있다...)

 

아파트 얘기로 다시 돌아가면, 처음에 아파트가 건설되었을 때, 그러니까 60년대 초에는 서민들을 위한 주거 공간으로서 지어졌다고 한다. '시민아파트'라는 개념이었는데, 나중에 주택공사가 이런 개념을 잇는다고 많이들 생각하지만 실은 '주공'은 서민보다는 중산층을 위한 아파트를 더 많이 지었다고 한다. 지금의 SH나 LH도 마찬가지라고.

 

'서민'들을 수용하려고 아파트를 지어 제공하려는 발상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시기 아파트는 그냥 골조만 세워놓고 거기 들어가서 살라는 식이었다고 한다. 벽지도 거주민이 직접 발라야 했고, 관리사무소 같은 것도 없어서 생활을 하다 새기는 문제는 모두 직접 해결해야 했다고. 건물만 지어놓고 팔아서 회사와 정부가 각자 이윤 나눠먹고 손 터는 이른바 '먹튀' 방식이었다고 한다. 아파트를 지어놓은 후에 관리까지 해준다는 개념은 삼성이 아파트 사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80년대 후반부터라고 한다. 삼성은 건설 자체보다는 관리, 마케팅, 브랜딩에 초점을 두었고, 나중에는 최초의 브랜드 아파트 '래미안'을 만들어 아파트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 일조했다고.

 

하지만 그건 훗날의 일이고, 초창기의 서민 아파트에서는 그냥 지어져 있는대로 살아야 했기 때문에 여러가지 생활 문제가 발생했는데, '장독'을 둘러싼 문제나 '물 공급'을 둘러싼 문제가 큰 문제였다고 한다. 이때는 장을 사다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어서 '장독'을 둘 공간이 집집마다 꼭 있어야 했는데, 아파트에는 단독주택처럼 마당도 없고, 대문 위에 만들어진 장독 전용 공간도 없어서 문제가 많았다고. 또 하나는 당시 서민들은 아이들을 길에서 길렀는데, '길'이 '아파트 복도'로 바뀐 셈이 되면서, 아이들이 추락사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아파트 이후로 등장한 주거 공간인 다세대, 다가구 주택(a.k.a 빌라), 90년대 등장한 오피스텔에 대한 설명도 흥미롭다. 다세대, 다가구 주택에서는 '누진전기세'를 둘러싼 주민들의 갈등이 자주 발생했다고 한다. 서울 인구의 50% 이상이 다세대, 다가구 주택에서 살고 있는데, (아파트 연구는 많지만) 이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고. 오피스텔은 생산직과 사무직이 분리되고 본사 개념이 생겨나기 시작한 80년대 후반부터 생겨났는데, 공급 과잉이 되어서 사무실을 주거용으로 급하게 용도 변경한 경우라고 한다. 사생활 노출을 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자유로이 활용할 수 있어서 유흥업 종사자, (밤샘 작업 많이 하는) 공대생들이 많이 살았다고. 그리고 이때 오피스텔의 매입 주체는 주로 사채없자나 폭력조직이었다고 한다.

 

임대료 이야기도 흥미롭다. 신자유주의 질서 속에서 임금이 하락하고 고용이 불안정해지면서 내 집 마련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임대료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아지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집 값이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해 바우처(=직접 지원)의 형태로 정부의 임대료 지원이 있을 거란 이야기. 이건 프랑스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행되고 있는 제도라고. 그 조만간이 5년 후가 될지 10년 후가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여하튼 세계적 흐름은 그렇다고 한다. 이와 동시에 대기업이 (이미 공급 과잉이 된 아파트 시장을 버리고) 임대업에 뛰어들 것이라는 얘기도 있었는데, 재벌 3세들은 이미 임대업에 활발히 진출해 있는 듯하고(그래서 기존 상인들과 큰 갈등을 빚고 있다), 또 지하철 등에서 볼 수 있는 '직방' 같은 앱을 보더라도, 후자는 슬슬 실현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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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여러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있는데, 워낙 많아서 다 할 수는 없고, 내가 이런 류의 책에 관심을 갖는 이유를 생각해봤다. 나는 주거 공간에 관심이 많은데, 그건 내가 사는 공간, 주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 성격이어서 그러지 않나 싶다. 단순하게 말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맛있는 것을 해서 나눠먹을 수 있는 쾌적한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나아가 삭막한 동네가 아니라 (애매한 표현이지만) 살기 좋은 동네에서 살고 싶다는 것이다. 얼핏 보기엔 집에 혼자 처박혀서도 잘 놀 것 같은 캐릭터지만, 나에게는 어울림의 공간이 필요하다. 뭐 다들 마찬가지겠지만 말이다... 나한테는 그런 욕망이 좀더 강하게 있는 것 같다. 그런 공간을 지금 갖고 있지 못하고, 앞으로 갖게 될 가능성도 거의 없지만 하여튼 그런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또 하나는 내가 고층 아파트를 싫어한다는 것. 주거 형태로서도 싫고,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게 늘어선 풍경도 싫다. 땅에서 멀어지고, 하늘을 시야에서 가리기 때문이다. 되게 낭만적인 표현처럼 되어 버렸는데, 그런 게 아니라 실생활에서 땅과 하늘이 배제되기 때문에 생기는 물리적인 불편과 심리적 스트레스가 분명히 있다.

 

70년대 중반에 시민들을 대상으로 선호 주거 유형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당시에도 아파트를 선호한다고 대답한 비율은 5%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아파트를 밀어붙인 이유는 주택 문제를 일거에 해소한다는 명분을 쉽게 갖다 붙일 수 있었고, 급속하게 대규모 단지 조성이 가능해서였다고. 즉 눈에 보이는 성과를 빠른 시간 안에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정부와 회사가 깔끔하게 먹튀를 할 수 있는 게 아파트였다고.

 

인식도 안 좋고, 잘 안 팔리지도 않는 아파트를 시민들에게 팔아먹기 위한 방법으로 청약 통장, 분양 제도를 설명한 것도 흥미롭다. 선분양제도는 한국에만 있는 것인데, 이것의 작동방식을 보면 참 이상하지만 동시에 매우 섬세한 방식이라고 한다. (책에 잘 설명되어 있다.) 또한 한국은 인구밀도가 높기 때문에 아파트가 적합한 주거 형태라는 생각들을 하는데, 이게 별 근거 없는 이야기라는 것도 흥미로웠다.

 

내가 이런류의 책에 관심을 갖는 마지막 이유. 내겐 내가 지금 어떤 환경, 어떤 흐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건지를 거시적, 총체적 시점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것 같다. 매일 매일의 일상에서 부지불식간에 발현되는 자신의 욕망과 로망, (또 그것이 충족되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불만과 절망감, 이런 것들과 일상적으로 마주하고 감당하는 건 무척 버거운 일이다. '어차피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며 못 본 체 외면 또는 체념하고 넘어가거나 절제의 미를 발휘하여 지긋이 억누르는 수가 있겠으나 그것도 한계가 있다. 이런 책을 읽을 때, 나는 나 자신의 욕망, 로망, 불만, 절망감 같은 것들이 어떤 환경, 어떤 흐름 속에서 생겨난 것인지를 거시적 시점에서 한번 조망해보게 되는 셈인데, 그 조망 행위 자체가 어떤 위안이 되는 것 같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물론 없다. 크게 보면 잘난 척이고 자기 만족일 뿐이다. (모든 지식 추구 행위에는 그런 면이 있다.) 그렇더라도 사실을 외면하고 사실 앞에서 체념하는 것과는 다른 태도로 나를, 그리고 나를 둘러싼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면이 있다. 그 역시 물론 일시적으로만 그런 것이지만, 그래도 그런 시각과 태도를 가져보는 것과 그래보지 못한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런 게 바로 (돈 한 푼 안 생기지만) 책을 읽는 이유일 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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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작품을 읽을 때 의식주 생활의 측면에서 의외의 재미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런 면에서도 도움이 되는 책이었다. 앞으로 한국 소설을 읽을 때 주인공의 주거 공간과 사는 동네를(그리고 그것이 인물의 성격이나 행동, 인간 관계, 행동 결정에 미치는 영향 같은 것들을) 눈여겨 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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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인셉션 (2disc)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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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조셉 고든 래빗, 마리온 꼬띠아르, 와타나베 켄, 킬리언 머피

 

 

영화는 '익스트랙션-추출'의 개념에서 출발한다. 이는 어떤 이의 꿈으로 침투하여 생각-아이디어(기업 기밀 같은)를 탈취하는/추출하는 개념이다.

 

익스트랙션-추출에 반대되는 개념이 '인셉션-기입(주입)' 개념이다. 이것은 어떤 이의 꿈으로 침투하여 어떤 생각-아이디어를 기입(주입)하는 것이다. 추출에 비할 때 기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데, 주인공 돔 코브는 인셉션을 시도해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

 

돔 코브는 사이토가 이끄는 대기업의 유일한 경쟁 기업인 피셔-모로우 에너지 회사의 후계자 피셔 2세에게 어떤 생각을 인셉트-기입/주입하는 일을 맡게 된다. 그가 피셔 2세에게 각인시켜야 하는 생각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기업을 해체하라는 것이다. 사이토는 코브 일당에게 일을 의뢰하면서 다음과 같은 '명분'을 덧붙인다. 즉 만약 피셔 2세가 회사를 해체하지 않는다면 피셔-모로우 에너지 회사는 조만간 전지구적 차원에서 에너지 산업을 독점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사이토의 이러한 언급은 곧바로 국가의 경계를 넘어 전지구적 규모의 독점과 착취를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 집단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만약 피셔-모로우라는 독점 기업이 해체된다면, 그 자리에 대신 사이토의 기업이 들어서 에너지 산업을 독점하게 될 것임이 자명하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자세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어쨌든 돔 코브 일당은 피셔 2세에게 이 생각(회사를 해체해야 한다는 생각)을 직접 주입하기보다는 아버지-아들 간의 관계에 착안하여, "난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르지 않겠다"(1단계), "스스로의 힘으로 뭔가를 이루어보겠다"(2단계), "아버지는 내가 자기처럼 되지 않길 원한다."(3단계)는 생각을 차례로 주입시키려 한다. 

 

이 계획을 이끄는 돔 코브 자신은 "아내와 함께 늙어가기"라는 생각을 소중히 지니고 있다. 그의 아내는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죽었으나 돔은 자신의 기억 내밀한 곳에 아내를 가둬둔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기억 속에 축조된 공간에서 "아내와 함께 늙어가기"라는 생각을 이루려 하는 것이다. 이는 돔이 지닌 이상적 가족에 대한 관념인데, 동시에 전통적이고 낭만화된 미국의 가족 관념이기도 하다. 

 

돔은 자신이 아내를 죽였다는 '오해' 때문에 아이들이 있는 미국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상태다. 꿈 속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그에게 아이들의 행복한 한 때가 보이는데, 이러한 광경 및 이 광경에 뒤이어 나타나는 아내가 그 자신 및 그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동료들을 방해한다. 즉 아내는 그의 투사체로서 꿈-세계에 나타나 임무를 꼬이게 만든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돔의 투사체인 아내-아이들이 암시하는 바, "홈 스위트 홈" 아이디어가 돔에게 (또한 대다수의 미국인에게) 이미 오래전에 주입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를 바꿔 말하면 미국의 가족 이데올로기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홈 스위트 홈"의 이미지는 아이들의 행복한 한 때로 표현된다. 이것은 아버지 돔의 꿈 속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때 그는 아이들의 뒷모습 밖에 볼 수 없으며, 그가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도 아이들은 반응이 없다. 또한 "홈 스위트 홈" 아이디어는 "아내와 함께 늙어가는 것"이라는 아이디어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것과 (림보에서) "회한에 빠져 외로이 늙어가는 것"의 차이는 사실상 없어보이기도 한다. (한편 극장 관객석에 앉아 스크린을 응시하는 미국인 관객들이 보기에는 돔 코브라는 인물 자체가 일종의 투사체처럼 보일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홈 스위트 홈"의 아이디어와 연동되고 공명하는 아이디어로서 돔 일당이 피셔 2세에게 주입시켜야 하는 아이디어인 "대기업을 해체시켜야 한다"라는 것을 들 수 있다. 오늘날, 국가의 역량과 범위를 초월한 초거대기업(또는 금융기업)은 내수시장을 파괴하고 지역 경제를 파탄에 몰아넣으며, 고용을 불안정하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가정'을 해체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비난받고 있음을 염두에 둘 때 그러하다.

 

요컨대 우리는 영화에서 세계화-대기업 vs. 가족주의(& 그것을 보강, 장려하는 국가) 구도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요사이 국가의 역할이 새삼 재고되고 있으며, 국가의 '제' 역할에 대한 요청이 제고되고 있는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진다(대체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들).

 

즉 영화는 가족 이데올로기가 심각하게 와해되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보다 강력한 위협에 노출되어갈 오늘날 미국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면 와해된 가족 이데올로기를 회복하는 것은 가능한가? 또는 가족의 와해가 오늘날 필연적이라면 그에 대해 우리 각자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와 가족주의의 오랜 동반관계를 염두에 둔다면 이는 진부한 질문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인셉션>은 이 질문에 꽤 끈질기게 매달리고 있으며, 이 문제를 어느 정도는 색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한다.

 

 

 

 

 

 

 

이와 관련하여 돔의 방식은 눈여겨볼 필요 있을 것 같다. 돔의 방식을 따른다면, (실제적인 복원은 아닐지라도) 가족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온전히 기능하고 있는 하나의 상상적, 가상적 공간을 구축하는 것은 가능하다. 

 

자신의 내밀한 기억 속에 아내를 가둬 두는 돔의 모습은 현실의 인간 관계는 단절되었지만 게임 속에서는 하나의 커뮤니티를 이루고 있고, 그 커뮤니티 안에서 나름대로 안정적이고 확고한 정체성과 역할을 부여받은 게임 중독자나 (중독까지는 아니라해도) 싸이월드 트위터 블로그 등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는(동시에 거기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의 모습과도 겹쳐진다. 다른 한편 이는 "홈 스위트 홈"과 관련된 일종의 노스탤지어적 이미지를 마음 속에 언제나 하나 쯤은 간직하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일련의 '향수영화' 등 복고 대중 문화상품의 유행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덧붙여 노후 대비 보험 광고가 보여주곤 하는 전형적인 목가적 이상향의 이미지들 역시 그러하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다음의 사실, 즉 코브 일당이 피셔 2세에게 주입시키려는 생각들("스스로의 힘으로 뭔가를 이루어보겠다"(2단계), "아버지는 내가 자기처럼 되지 않길 원한다."(3단계))이 다름 아닌 가족 이데올로기가 상대적으로 공고히 자리잡고 있던 시절(그래서 마음놓고 그 억압적 측면을 비난할 수 있었던 시절) 미국인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던 개인주의, 자율주의적 가치관임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결국 <인셉션> 역시 일종의 향수영화로 볼 수 있다. 다만 많은 미국인 영화 관객들이 오랜 시간 극장에서 주입받아온 "홈 스위트 홈"의 아이디어(가족 이데올로기)를 무의식에서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차이, 외화시켰다(밖으로 드러냈다)는 차이는 있고, 그런 면에서 지적이고 도전적인 영화라는 평을 받을만하다.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이 영화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와해와 그에 가해지는 각종 위협으로 인한 위기감, 불안감에 충만해 있는 만큼, "내 생각을 누군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조작할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되는 불안감과 두려움 역시 도드라진다. 영화에서 피셔 2세에게 주입하려는(조작하는) 생각이 "스스로의 힘으로 뭔가를 이루어라. 너 자신의 길을 가라"는 것임을 감안하면 이것은 묘한 충돌, 갈등을 발생시킨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폐쇄 무한(closed loop) 미로와 같은 모순과 역설을 발생시킨다.

 

 

 

 

 

즉 "나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스스로의 결심이 누군가에 의해 주입된 것이자 조작된 것이라면? 실제로 영화에서는 돔 코브 일당은 피셔 2세에게 이 아이디어를 '주입'시키는 데 성공하는데, 이러한 '가치관의 주입'이라는 설정이 영화에서 강조되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 미국사회에서 가족 이데올로기와 함께 개인주의, 자율주의적 가치관들 역시 심각하게 와해되었음을 드러내는 하나의 징후로 볼 수 있다. 물론 이건 꼭 미국사회만의 것으로 한정할 수는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오늘날 특징적인 사회적 현상은 소위 '멘토'로 지칭되는 글로벌 리더, 소셜 리더들(이들은 실제로 젊은이들의 아버지 세대다!)이 문화자본과 결탁하여 만든, '자기계발서'를 비롯한 뉴에이지 문화 상품들이 널리 팔리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가치관을 바꾸라' '삶을 통째로 바꾸라'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아라'는 식의 가르침이 실제로 젊은 층들을 대상으로 '주입'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인셉션>의 설정은 이러한 현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오늘날 청춘들이 품고 있는 꿈--개인주의와 자율주의의 이상--이 요새 유행하는 각종 '자기계발' 관련 상품들과 프로그램들에 의해 '주입'된 것에 지나지 않음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요컨대 코브 일당이 피셔 2세에게 주입하려는 생각은 오늘날 젊은이들이 여러 자기계발 상품들을 통해 자발적으로(!) 주입받고 있는 생각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 더. 나로서는 영화의 맨 첫 장면 돔이 림보에 빠져 회한에 차 늙어가는 사이토와 만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곧바로 드는 의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왜 림보 공간에 빠져 회한에 차 외롭게 늙어가면 안 되는가? 영화에서 왜 그것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인 것처럼 묘사되는가? 오늘날 사회는 늙음의 문제, 즉 자연스레 늙어가는 것조차 '기업'과 엮인 일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각종 보험회사, 상조회사 등) 즉 신자유주의적 논리가 극에 달한, 일상의 전면에 파고든 오늘날의 사화란 '돈' 없이는 자연스레 늙어가는 것조차 하나의 사치이자 행복인 사회라 할 수 있다. 반대로 돈이 있다면 자신의 프라이버시 영역을 고수하면서(다르게 표현하면 '외롭게') 늙어가는 것이 가능하다. 나로서는 림보라는 공간이 매우 아늑하게 느껴졌고, (아무 걱정 없이 그저 늙어가기만 하면 되는) 사이토가 부러웠다. 나는 이 첫 장면--그리고 이 장면은 (이후 밝혀지게 되는) 림보에서 돔과 그의 아내가 그들만의 왕국을 건설하고 "함께 늙어갔던" 장면과 공명하기도 하는데--이 이 시대가 주조해낸 대중들의 기묘한 희망 내지 열망을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이 시대의 대중들은 외부 세계와 차단된, 생계 걱정이나 파산 걱정 없이, 모험도 도전도 하지 않고, 그리하여 생존을 위협하는 어떠한 위험들에도 노출되지 않고 '안전하게 늙어갈 수 있는' 림보 공간을 열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로또나 연금 복권에 당첨된다면 그것이 가능해진다. 요컨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차라리 아무 생각도 없이 나만의 아늑한 공간을 구축하고 그 안에서 그저 존재하는 것(‘동물화된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바로 그것이 폐쇄 무한 미로에서 탈출하는 유일한--유일한 건 아닐지라도 여러 선택지 중 '가장 매력적인'--방법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바로 그 점을 ‘림보’의 개념 및 이미지가 드러낸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까놓고 말해 이 시대에 '림보'란 일종의 유토피아적 공간,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날 대중들이 품고 있는 특정한 형태의 유토피아적 열망이 투사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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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기쁨 1 - 음악의 요소들 음악의 기쁨 1
롤랑 마뉘엘 지음, 이세진 옮김 / 북노마드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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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음악의 기쁨>이란 책을 조금씩 틈나는 대로 읽고 있다. 1권을 거의 다 읽은 이 시점에서, 내가 느끼고 파악한 몇 가지 점을 정리해두면 좋을 것 같아 적어놓는다.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리스너의 입장에서의 정리라는 점을 감안해서 읽어주시기를.)

 

<음악의 기쁨>을 죽 읽다가 발견한 사실은 음악의 핵심 요소가 다음의 세 가지라는 것이다.

 

1) 목소리, 2) 춤, 3) 악기.

(교과서에서 배운 멜로디, 리듬, 화성과 얼추 들어맞는다)

 

일단 이 세 핵심 요소를 시간축을 따라 나란히 세워보면 대강의 음악사를 그려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중세의 그레고리안 성가는 오직 '목소리'로만 이루어져 있다. '춤'과 '악기'는 배제되었다. 예를 들어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르며 춤을 춘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혹시 몰래 리듬 타나?)

 

르네상스 시기를 거쳐 16-17세기에는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발레와 각종 춤곡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춤곡의 명칭은 알르망드, 쿠랑트, 사라방드, 지그, 미뉴에트, 부레 등으로 다양한데, 이러한 다양한 명칭은 박자나 빠르기, 유래한 국가에 따른 것.) 그리고 또 오페라/오라토리오가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목소리'가 메인 요소다. 주지할 점은 춤곡에서는 음악이 '반주'의 역할을 맡는다는 것. 어디까지나 '춤-몸의 움직임' 또는 아리아를 부르는 '목소리'가 메인 요소이고, 음악은 '반주'로서 춤이나 목소리를 지원하고, 그 효과를 부각하거나 극대화하는 역할을 맡는다.

 

'목소리'와 '춤'이 메인이었던 시기를 거친 후에 비로소 '악기'의 시대가 찾아온다. 바흐부터 베토벤까지의 시기(그러니까 바로크에서 고전주의로 이어지는 18-19세기)는 소나타, 모음곡(조곡), 협주곡, 교향곡, 퀸텟, 콰르텟 등 여러 형태의 '기악곡'이 발전을 거듭하는 시기다. 이 시기에는 연주자가 '악기'를 다루는 능력, 마에스트로로서 작곡가-지휘자가 각 악기의 장점을 극대화시키고, 서로 조화시키는 능력이 중요해진다. 이 시기는 압도적인 실력을 자랑하는 비르투오소 연주자가 등장한 시기이자, 스트라디바리와 같은 악기 장인이 등장하여 (바이올린 등) 악기 자체의 가능성을 극대화한 시기이며, 새롭게 등장한 악기인 피아노가 (한계가 많았던) 하프시코드의 자리를 대체한 시기이기도 하다.

 

목소리, 춤, 악기라는 음악의 세 요소를 시간축을 따라 세워보았는데, 다음번에는 그 시간축 위에 또 하나의 평행선을 그려보고, 거기에 음악의 세 요소를 대입해볼 수 있겠다. 이 축에 '성과 속'(신과 인간)이름을 붙이면 적절할 듯 싶다. 

 

중세의 그레고리안 성가는 '목소리'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이때 목소리로만 이루어진 이 음악의 목적은 '신을 찬미하는 것'이다. 즉 이때의 음악은 인위적 조작이나 기교가 없는 것, 순수하고 금욕적인 것, 곧 (신=인간 동형설의 관점에서) '성스러운 것'이다.

 

그레고리안 성가에 비하면, 발레나 춤곡은 세속적 즐거움을 위한 것들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춤을 출 때의 쾌감, 신나게 몸을 흔들거나 이성 파트너를 팔에 안고(또는 손을 잡고) 유혹적인 눈빛과 숨결을 주고 받을 때의 야릇한 쾌감에서 신성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또한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임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새롭게, 그리고 뭐랄까 한층 세련된 방식으로 인식하게 된다. 춤을 통한 자아의 발견이랄까.

 

그럼 기악곡은 어떨까. 모차르트 시기까지 기악곡은 대부분 왕족, 귀족들의 여흥을 위한 것, 기분전환용, 편히 즐길 수 있는 것, BGM에 가까운 감상용이었다고 한다. 물론 내적 형식의 측면에서는 복잡, 섬세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겠지만, '궁정사회'에서 기악곡은 여전히 왕족과 귀족들의 여흥에 봉사하기 위한 것, 그리고 왕족 및 귀족들의 요구에 따라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베토벤에 이르면 음악 자체와 음악을 둘러싼 상황 모두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베토벤은 다른 누군가의 여흥을 위해, 혹은 (신이든 왕족이든) 다른 누군가의 영광을 드러내고 찬양하기 위해 음악을 만들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그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넘치는 감정과 사상을 토로하기 위해 음악을 만들었다. 음악을 통해 우리들 청자에게 전해지는 베토벤의 감정과 사상은 일면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느껴진다(우리는 그의 음악을 들으며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개인사를, 말하자면 그의 퍼스낼리티를, 혹은 퍼스낼리티와 관련이 있다고 알려진 유명한 일화들을 떠올린다. 즉 그의 귀먹음을, 봉두난발과 형형한 눈빛을 떠올리고, '불멸의 여인'과의 관계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의 음악에 담긴 감정과 사상은 개인적인 만큼 보편적이기도 하며, 그냥 그 자체로 충분히 숭고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들-청자는 문득 "아 내가 지금 숭고하고 신성한 어떤 것을 듣고 있구나"하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떻게 보면 베토벤은 스스로 신이 되는 불경을 저지른 셈이다.

 

위대한 단독자, 위대한 솔로 베토벤. 영원한 마에스트로.
아아 베토벤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사심 폭발)

 

이렇게 정리를 하고 나니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클래식을 듣는다는 건, 그 중에서도 베토벤을 애호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베토벤은 특히 나와 같은 '중2병 환자'들에게 어필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대관절 음악은 누구를, 혹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우리는 음악을 어떤 태도로 들어야 하는가? 음악은 신성한 것인가? 아니면, 음악은 감각적 즐거움을 주기 위한 것인가? 신나는 음악, 듣기 편한 음악이면 그걸로 충분한 것인가? 아니면 음악은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경지를 열어보여줌으로써 우리를 좀 더 나은 존재가 되도록 이끌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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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펭귄클래식 15
프란츠 카프카 지음,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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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나는 화려한 사교계 생활을 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사람들이 나에게서 기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재능이 엿보이는 작품 한 두 개로 세상에 알려진다. 그뿐이다. 한 인간에게 말할 게 한두 가지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히 놀랄 만한 일이다. 그리고 그들은 경우에 따라 느긋하게 혹은 고통스러워하며 사양길로 접어든 자신의 경력을 관리한다.

 

- 미셸 우엘벡, <어느 섬의 가능성>, 317-8. 

 

 

1914년부터 1915년 사이에 카프카는 <소송>이라는 작품을 썼다. 이 작품의 원제는 절차, 과정, 소송을 뜻하는proceß(=process)다. 이 작품은 요제프 K라는 주인공이 어느날 갑자기 체포되면서 시작된다. 이 작품의 첫 두 문장,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모략한 게 분명했다.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았는데 이날 아침 느닷없이 그가 체포되었기 때문이다"라는 세계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도입부로 꼽힌다.

K가 느닷없이 체포되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일련의 소송 절차에 휘말리게 된다. 이제 중요한 것은 K가 죄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가 '소정의 (소송) 절차', 즉 '정해진 바대로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것이다.

<소송>은 카프카 생전에 출간되지 않았다. 카프카가 죽은 지 1년 후인 1925년에 친구 막스 브로트가 정리, 편집하여 출간했다. <소송>은 미완성이기도 하다. 작품의 시작과 결말은 있는데, 사이 사이 미완성 장(chapter)들이 있다. 막스 브로트는 <소송>의 원고를 정리, 편집하면서 작품 전개상 확실한 부분들만 내용에 따라 순서를 정하여 배열을 했고, '줄거리 전개에 크게 중요치 않은' 미완성 장들은 쳐내버렸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읽는 카프카의 작품 <소송>이다. <소송>의 최초 판본에는 '미완성 장'들이 아예 빠져 있었다. 초판이 나온 이후 막스 브로트는 대략 10년의 간격을 두고 <소송>의 새로운 편집본을 낸다. 두 번째 편집본에는 초판에서 빠졌던 미완성 장들이 포함되고, 세 번째 편집본에는 막스 브로트가 쓴 편집 후기가 붙는다.

이런 걸 보면 막스 브로트는 '소정의 절차'를 밟을 줄 아는 인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카프카가 미완성이라 판단한 글 묶음을 가지고 브로트는 하나의 작품으로, 판매가능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고, 나아가 세계문학의 걸작으로 만들었다. 그는 그러는 데 필요한 '소정의 절차'를 알았고 그것을 차근차근 밟아 나갔다.

그렇다면 정작 카프카의 경우는 어땠을까? 여기서부터는 나의 짐작이 들어가는 서술이니 감안해서 읽기를 바란다. 카프카는 아마도 책을 완성하고 출판을 하기 위해선 소정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사실쯤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생전에 십 수편의 단편을 지면에 발표한 작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쓴 대부분의 글에 대해서는, 그 앞에 놓인 소정의 절차를 밟아나가는 대신, 스스로를 끝없는 심문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는 이해하기 어렵고 옆에서 보기에 답답한 태도로 일관했다. 말하자면 그는 다른 누군가--독자, 출판시장--의 심문 받기를 거부하고(감당할 자신이 없었거나 다른 이의 심문을 받을 필요를 못 느꼈거나, 둘 중 어떤 이유로든), '자기가 자기를 (끝없이) 심문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답답함. 이것이 카프카 문학을 이해하는 핵심 정서일 수 있다. 가령 <소송>을 읽노라면 요제프 K를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들이 답답하게 구는 데 짜증이 난다. 엄숙하고 엄격한 법-절차 앞에서 깐족대는 것이 뻔뻔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법-절차를 단호한 태도로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소송>에서 카프카의 인물들은 되지도 않는 편법을 쓰려하기도 하고, 사소한 말꼬리를 잡기도 하고, 하나마나한 추측과 짐작들을 장황하게 늘어놓기도 한다. 요제프 K는 소송에 휘말렸으므로 그의 앞에는 그가 밟아야 할 일련의 (소송) 절차가 놓여 있다. 그렇다면 절차를 밟으면 될 문제 아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명확한 문제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K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은--<소송>의 모든 인물은 K의 분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두들 말이 많고 그 말들은 나름 논리적이기도 한데, 거기엔 명확한 결론이 없다--자꾸만 중요하지도 않은 것에 집착하거나 다른 길로 빠지거나 하면서 간단명확한 것을 불명확하고 미심쩍은 것으로 만들어 놓는다.

물론 이것이 소송의 본질이다. 소송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 중요해지며, 단순한 의도가 곡해되며, 명확한 것이 의심쩍은 것이 되기 일쑤다. 의심을 하기 시작하면 모든 게 의심스럽다. 심문을 받은 피의자들은 말한다. 오랫동안 심문을 받다 보면 나중에는 자기 자신조차 믿지 못하게 된다고. (난 아무런 죄가 없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실은 큰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닐까?) 법정에서는 모두가 서로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본다. 사소한 꼬투리만 잡아도 의심이 끝도 없이 부풀어오른다. <소송>의 등장인물 모두가 비슷비슷해보이는 것처럼, 법정에 선 사람들도 모두 서로 비슷해진다. 법앞에 선 사람들은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자기 자신조차도 믿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웬만하면 소송에는 휘말리지 않는 것이 낫다.
하지만 카프카는 ‘소정의’ 소송 절차는 이 핑계 저 핑계로 거부하면서도, 자기가 자신을 심문하는--자기가 심문자인 동시에 피의자인--정말이지 끝이 없는 소송 절차 속에 스스로를 밀어 넣었던 것이다.

무엇이 카프카로 하여금 '소송의 세계--자기 심문의 무한 루프'를 벗어나 도약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무익하고 무용하며, 동시에 끝도 없는 소송 절차 속에 밀어 넣도록 했느냐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그 이유를 나름나름대로 짐작하는) 많은 연구들이 이뤄진바 있다. 그 수많은 연구들을 따로 살펴보지 않더라도, 애써 쓴 작품을 출간 시도조차 하지 않다니 굉장히 답답하고 바보 같은 짓이라 할만하다. 카프카는 <소송>을 1914-1915년 사이에 썼는데, <소송>이 출간된 것은 그가 죽고 1년 후인 1925년이다. 10년 동안 원고를 묵혀두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카프카가 출판되지 않은 자신의 원고를 모두 불태워 없애고(여기에는 <아메리카>, <성> 등 카프카의 장편이 모두 포함된다), 이미 출판된 것은 재판 발행을 중지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쓴 글들이 밟아야 하는 '소정의 절차' 앞에서 카프카가 취한 태도는 이러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일이지만(카프카의 태도가 관철되었더라면 내가 그의 글을 읽을 수조차 없었을 것이므로), 글쓰기라는 활동 앞에서, 글쓰기라는 활동 앞에 놓인 '소정의 절차', 즉 '상품자본주의 사회에서 글쓰기가 처한 필연적 운명' 앞에서 카프카가 취한 이러한 태도야말로 카프카 문학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최대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사실 그것은 단호한 거부와는 거리가 먼,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회피하는, 뭔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결정 내리기를 계속해서 미루는, 망설이고 주저하는 소심한 비겁자의 태도에 가깝다. 글을 쓴다. 하지만 끝내지는 않는다(또는 못한다). 당연히 출판을 못 한다. 작품(<소송>)을 끝내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작품(<아메리카>)에 착수한다. 이것 역시 끝내지 않는다(못한다). 그런 채로 10년의 세월이 흐른다. 죽음이 다가옴을 감지한다. 카프카는 자신과 자신이 쓴 글들이 밟아야 할 절차에 대해 생각한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결정도 하지 못한다. 만약 그가 원고를 없애기로 단호하게 결정을 내렸다면 본인 스스로 태워 없앴을 것이다. 하지만 카프카는 친구에게 부탁을 한다. 부탁을 받은 친구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 생전에 <소송>을 읽어본 적이 있었고 내심 '끝내주는 작품'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는 카프카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자네의 <소송>을 내 손으로 마무리 짓겠네." 그 말대로 되었다. 카프카는 미완성이라고 여겼지만 막스 브로트가 보기에 그것은 이미 완성된 작품이었고, 단지 소정의 절차를 밟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막스 브로트에겐 비교적 손쉬운 절차였지만, 카프카로선 밟기를 끝까지 망설이고 주저할수밖에 없었던 소정의 절차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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