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 펭귄클래식 15
프란츠 카프카 지음,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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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나는 화려한 사교계 생활을 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사람들이 나에게서 기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재능이 엿보이는 작품 한 두 개로 세상에 알려진다. 그뿐이다. 한 인간에게 말할 게 한두 가지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히 놀랄 만한 일이다. 그리고 그들은 경우에 따라 느긋하게 혹은 고통스러워하며 사양길로 접어든 자신의 경력을 관리한다.

 

- 미셸 우엘벡, <어느 섬의 가능성>, 317-8. 

 

 

1914년부터 1915년 사이에 카프카는 <소송>이라는 작품을 썼다. 이 작품의 원제는 절차, 과정, 소송을 뜻하는proceß(=process)다. 이 작품은 요제프 K라는 주인공이 어느날 갑자기 체포되면서 시작된다. 이 작품의 첫 두 문장,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모략한 게 분명했다.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았는데 이날 아침 느닷없이 그가 체포되었기 때문이다"라는 세계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도입부로 꼽힌다.

K가 느닷없이 체포되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일련의 소송 절차에 휘말리게 된다. 이제 중요한 것은 K가 죄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가 '소정의 (소송) 절차', 즉 '정해진 바대로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것이다.

<소송>은 카프카 생전에 출간되지 않았다. 카프카가 죽은 지 1년 후인 1925년에 친구 막스 브로트가 정리, 편집하여 출간했다. <소송>은 미완성이기도 하다. 작품의 시작과 결말은 있는데, 사이 사이 미완성 장(chapter)들이 있다. 막스 브로트는 <소송>의 원고를 정리, 편집하면서 작품 전개상 확실한 부분들만 내용에 따라 순서를 정하여 배열을 했고, '줄거리 전개에 크게 중요치 않은' 미완성 장들은 쳐내버렸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읽는 카프카의 작품 <소송>이다. <소송>의 최초 판본에는 '미완성 장'들이 아예 빠져 있었다. 초판이 나온 이후 막스 브로트는 대략 10년의 간격을 두고 <소송>의 새로운 편집본을 낸다. 두 번째 편집본에는 초판에서 빠졌던 미완성 장들이 포함되고, 세 번째 편집본에는 막스 브로트가 쓴 편집 후기가 붙는다.

이런 걸 보면 막스 브로트는 '소정의 절차'를 밟을 줄 아는 인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카프카가 미완성이라 판단한 글 묶음을 가지고 브로트는 하나의 작품으로, 판매가능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고, 나아가 세계문학의 걸작으로 만들었다. 그는 그러는 데 필요한 '소정의 절차'를 알았고 그것을 차근차근 밟아 나갔다.

그렇다면 정작 카프카의 경우는 어땠을까? 여기서부터는 나의 짐작이 들어가는 서술이니 감안해서 읽기를 바란다. 카프카는 아마도 책을 완성하고 출판을 하기 위해선 소정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사실쯤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생전에 십 수편의 단편을 지면에 발표한 작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쓴 대부분의 글에 대해서는, 그 앞에 놓인 소정의 절차를 밟아나가는 대신, 스스로를 끝없는 심문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는 이해하기 어렵고 옆에서 보기에 답답한 태도로 일관했다. 말하자면 그는 다른 누군가--독자, 출판시장--의 심문 받기를 거부하고(감당할 자신이 없었거나 다른 이의 심문을 받을 필요를 못 느꼈거나, 둘 중 어떤 이유로든), '자기가 자기를 (끝없이) 심문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답답함. 이것이 카프카 문학을 이해하는 핵심 정서일 수 있다. 가령 <소송>을 읽노라면 요제프 K를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들이 답답하게 구는 데 짜증이 난다. 엄숙하고 엄격한 법-절차 앞에서 깐족대는 것이 뻔뻔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법-절차를 단호한 태도로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소송>에서 카프카의 인물들은 되지도 않는 편법을 쓰려하기도 하고, 사소한 말꼬리를 잡기도 하고, 하나마나한 추측과 짐작들을 장황하게 늘어놓기도 한다. 요제프 K는 소송에 휘말렸으므로 그의 앞에는 그가 밟아야 할 일련의 (소송) 절차가 놓여 있다. 그렇다면 절차를 밟으면 될 문제 아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명확한 문제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K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은--<소송>의 모든 인물은 K의 분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두들 말이 많고 그 말들은 나름 논리적이기도 한데, 거기엔 명확한 결론이 없다--자꾸만 중요하지도 않은 것에 집착하거나 다른 길로 빠지거나 하면서 간단명확한 것을 불명확하고 미심쩍은 것으로 만들어 놓는다.

물론 이것이 소송의 본질이다. 소송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 중요해지며, 단순한 의도가 곡해되며, 명확한 것이 의심쩍은 것이 되기 일쑤다. 의심을 하기 시작하면 모든 게 의심스럽다. 심문을 받은 피의자들은 말한다. 오랫동안 심문을 받다 보면 나중에는 자기 자신조차 믿지 못하게 된다고. (난 아무런 죄가 없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실은 큰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닐까?) 법정에서는 모두가 서로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본다. 사소한 꼬투리만 잡아도 의심이 끝도 없이 부풀어오른다. <소송>의 등장인물 모두가 비슷비슷해보이는 것처럼, 법정에 선 사람들도 모두 서로 비슷해진다. 법앞에 선 사람들은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자기 자신조차도 믿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웬만하면 소송에는 휘말리지 않는 것이 낫다.
하지만 카프카는 ‘소정의’ 소송 절차는 이 핑계 저 핑계로 거부하면서도, 자기가 자신을 심문하는--자기가 심문자인 동시에 피의자인--정말이지 끝이 없는 소송 절차 속에 스스로를 밀어 넣었던 것이다.

무엇이 카프카로 하여금 '소송의 세계--자기 심문의 무한 루프'를 벗어나 도약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무익하고 무용하며, 동시에 끝도 없는 소송 절차 속에 밀어 넣도록 했느냐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그 이유를 나름나름대로 짐작하는) 많은 연구들이 이뤄진바 있다. 그 수많은 연구들을 따로 살펴보지 않더라도, 애써 쓴 작품을 출간 시도조차 하지 않다니 굉장히 답답하고 바보 같은 짓이라 할만하다. 카프카는 <소송>을 1914-1915년 사이에 썼는데, <소송>이 출간된 것은 그가 죽고 1년 후인 1925년이다. 10년 동안 원고를 묵혀두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카프카가 출판되지 않은 자신의 원고를 모두 불태워 없애고(여기에는 <아메리카>, <성> 등 카프카의 장편이 모두 포함된다), 이미 출판된 것은 재판 발행을 중지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쓴 글들이 밟아야 하는 '소정의 절차' 앞에서 카프카가 취한 태도는 이러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일이지만(카프카의 태도가 관철되었더라면 내가 그의 글을 읽을 수조차 없었을 것이므로), 글쓰기라는 활동 앞에서, 글쓰기라는 활동 앞에 놓인 '소정의 절차', 즉 '상품자본주의 사회에서 글쓰기가 처한 필연적 운명' 앞에서 카프카가 취한 이러한 태도야말로 카프카 문학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최대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사실 그것은 단호한 거부와는 거리가 먼,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회피하는, 뭔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결정 내리기를 계속해서 미루는, 망설이고 주저하는 소심한 비겁자의 태도에 가깝다. 글을 쓴다. 하지만 끝내지는 않는다(또는 못한다). 당연히 출판을 못 한다. 작품(<소송>)을 끝내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작품(<아메리카>)에 착수한다. 이것 역시 끝내지 않는다(못한다). 그런 채로 10년의 세월이 흐른다. 죽음이 다가옴을 감지한다. 카프카는 자신과 자신이 쓴 글들이 밟아야 할 절차에 대해 생각한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결정도 하지 못한다. 만약 그가 원고를 없애기로 단호하게 결정을 내렸다면 본인 스스로 태워 없앴을 것이다. 하지만 카프카는 친구에게 부탁을 한다. 부탁을 받은 친구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 생전에 <소송>을 읽어본 적이 있었고 내심 '끝내주는 작품'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는 카프카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자네의 <소송>을 내 손으로 마무리 짓겠네." 그 말대로 되었다. 카프카는 미완성이라고 여겼지만 막스 브로트가 보기에 그것은 이미 완성된 작품이었고, 단지 소정의 절차를 밟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막스 브로트에겐 비교적 손쉬운 절차였지만, 카프카로선 밟기를 끝까지 망설이고 주저할수밖에 없었던 소정의 절차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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