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는 언제나 거기에 있어
존 그린 지음, 노진선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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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친구가 홈지라고 부르는 주인공 소녀가 가진 강박증을 이토록 실감나게 표현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투영된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작가의 말에서, 존 그린은 두 사람의 정신과 의사를 언급하며 그들 덕분에 자신의 삶의 질은 엄청나게 나아졌다고 말했다. 지나친 청결에 사로잡힌 강박증도 그 종류가 여럿 있을텐데, TV (엉터리) 교양 리포트에서 떠드는 '화장실보다 세균이 천배 많이 발견된다는 OOO' 시리즈는 OOO의 대상을 주기적으로 바꾸지만, <내 속에 미생물이 너무도 많아>를 읽고 나면,   오히려 그런 세균과 박테리아 등등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 대해 더 느긋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미생물들은 내 몸의 일부이고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걸, 그리고 나쁜놈과 좋은놈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도 대충은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 강박증 아이 역시 그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다. 


세포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대략 50퍼센트가 세균으로 이뤄졌는데, 이는 나를 이루는 세포의 절반은 전혀 내가 아니라는 뜻이다. 나라는 특정한 생물 군계에는 지상의 인간보다 천 배 많은 미생물이 살고 있으며, 종종 내 안과 표면에서 살고 번식하고 죽는 그들의 존재가 느껴지는 듯했다. 



 더 많이 안다고 해서, 강박증을 일으키는 원인을 객관적으로 볼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의 세포 속에 살고 있는 그 미생물들이 자신을 차지하고 마음대로 조정하고 있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나쁜 미생물에 대한 공포에 매몰되어 있다. 단짝 친구인 데이지의 힘겨운 경제적 사정과 가정사에 거의 아는 게 없다시피할 정도로 자기 자신과 자기자신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것들만 생각한다. 그럼에도 데이지와 홈지는 둘도 없는 단짝이고, 둘은 10만불의 현상금이 달린 백만장자 데이비스 아버지의 행방을 찾기 시작한다. 

화이트 강 건너 저택엔 강둑과 저택이 있고 그곳에 데이비스가 산다. 강건너 저택이 돌담과 강둑과 철조망으로 방비된 덕에 홍수 때마다 강이 홈지네 쪽으로 범람한다.  부가 흘러 넘치는 곳에 재난은 빠져나가지.  데이비스가 어릴 때 아버지를 잃은 홈지는 어릴 때 어머니를 잃은 데이비스를 슬픔 캠프에서 만났었고, 캠프가 끝난 후에도 그들은 몇 번 만났다는 걸 기억하는 데이지가 데이비스를 이용하여 그의 아버지의 행방을 찾자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이들의 사건은 데이비스와 홈지를 연결시켜주는데, 서서히 데이비스를 알아가면서 사랑을 느낀 홈지는 자신의 강박증 때문에 더이상 나가지 못함을 알고 절망한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때로 이게 무슨 과학 대중서에 나올만한 대사들을 읋어 대는 아이들을 보며 이거 미국 고등학생들은 이렇게나 똑똑하단 말야? 는 감탄이 나오다가도, 그렇게 잘 아는 아이가, 손세정제를 먹어 간을 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는 막무가내의 행동까지 할 때에는 그를 그렇게 만드는 힘이 정체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강박증은 병인 거 맞고, 완치되기 힘들지만, 여러 심리 치료로 조금 삶의 질이 나아질 수는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주로 TV에서 하나의 재미있는 캐릭터로 자주 만난다. 예전에 어떤 친척분이 약간 그런 증세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아직까지 화자되고 있는 재미있는 일화 중 하나는 접시에 새우깡이 조각조각난 조각이 많이 있더란다. 이게 뭐냐 했더니 새우깡을 집어먹을 때, 손에 닿은 부분을 안먹고 떼어놓은 거란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외식을 하고 숟가락을 같이 쓰고 그럴까 하며 깔깔거렸는데, 그 분이 캄필로박터균과 클로스트리디움 디피실레와 엡스타인 비 바이러스 같은 병원균의 이름을 일일히 알았을 리는 없지만, '세균' = '병원균' 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에 하는 행동과 그것에 대한 주변의 조소 때문에 얼마나 마음 고생을 했을 지는 짐작할 길이 없다. 책에는 그 강박적 마음이 어떤 식으로 그런 자해적인 행동을 불러오는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아이들의 대사도 통통 튀고. 읽을만 하다. 


옛날에 어떤 과학자가 있었어. 과학자는 구름처럼 모인 관중 앞에서 지구의 역사에 대해 강연했지. 지구가 수십억 년 전에 우주 먼지로 이뤄진 구름 속에서 생겨났고, 한동안 아주 뜨거웠다가 또 한동안 서늘해져서 바다가 생겼다고. 바다에서 단세포 동물들이 출현하고, 또 수십억 년이 지나 생물이 늘어나고 복잡해지다가 25만 년 전쯤부터 인간이 진화하고, 우리는 보다 진화된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우주선과 그 모든 것을 만들게 됐다고. 그렇게 지구와 지구에 사는 생명체의 역사에 대해 연설하고 끝으로 관객에게 질문이 있냐고 물었어. 그러자 뒤에 앉은 할머니가 손을 들고 말했지. 
‘잘 들었습니다, 과학자 선생님. 하지만 사실 지구는 거대한 거북이 등에 세워진 평평한 땅이랍니다.’
과학자는 할머니를 골려 주기로 마음먹고 이렇게 물었어. 
‘글쎄요, 만약 그렇다면 거대한 거북이 밑에는 뭐가 있습니까?’
그러자 할머니가 답했지. 
‘더 거대한 거북이가 있죠.’
이제 과학자는 화가 나서 물었어. 
‘그럼 그 거북이 밑에는 뭐가 있나요?’
그러자 할머니가 말했지. 
‘선생님, 이해를 못하시네요. 그 아래로 계속 거북이들이 있는 거예요.’

나는 깔깔 웃었다. 
“그 아래로 계속 거북이들이 있구나.”
“거북이들만 존나 있는 거야, 홈지. 넌 맨 밑에 있는 거북이를 찾으려고 하지만 그런 건 없어.”
“왜냐하면 아래로 계속 거북이들이 있으니까.” 

나는 영적 깨달음에 가까운 무언가를 얻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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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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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도씩 기온이 오르던 여름 휴가때 바닷가에서 읽었다. 읽은지 한참 되어서 내용이 기억이 안날 거 같았는데, 그래도 꽤 많이 굵직굵직한 사건이 떠오른다. 어떤 책은 읽은 지 몇 달만 지나도 뭐였더라 완전 까먹고 뭔가 힌트를 줘야 대략적으로 생각나는 경우도 많은데, 그래도 띄엄띄엄 기억나는 거 보면, 인상적인 소설이다. 그래서 때로 책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는 한참 두어달 후에야 제대로 내릴 수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거칠게 요악한다면 각자 따로따로 상처받은 두 사람의 마음이 만나 만드는 사랑이야기다.  인상적인건 두 사람의 캐릭터다. 웃기지도 재미있지도 그닥 매력적이거나 특별할 것도 하나 없는 사람들. 따지고 보면 상처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에 있으련만, 대개 소설 속 주인공들은 트라우마에 가까운 깊은 상처를 안고 산다. 경애가 안고 살아가는 상실과 상처는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영화 동아리 아이들과 지하 주점에서 파티를 하다가 화재가 났는데, 인구들 모두 죽고 혼자서 살았다. 게다가 직장에서는 파업 기간 동안 노조 위원장(?)에게서 성희롱을 당하고 이를 폭로했다가 회사는 물론 노조에게서도 미움을 받아 외토리이다. 그래도 경애는 꿋꿋하게 혼자서 잘 살아간다.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상수와 경애의 공통점이 있다면 주변 사람들에게서 소외된 건데, 경애의 억울함과 달리 상수는 올곧은 듯 하며 뭔가 눈치가 없기도 한 듯 한 성격적 결함(으로 주변에서 생각하는)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상수는 인터넷에서 유명세를 타는 인물이기도 하다. 남성인 상수는 페이스북에서 연애 코치를 하는 유명한 '언니'다. 어쩌다보니 인연이 닿아,  익명의 페이스북으로 상수는 경애의 과거와 현재 죽은 남자친구와 화재에 대한 사연을 모두 알고 있다. 게다가 상수는 아버지의 배경탓에 낙하산으로 들어왔기에 더욱 더 그를 향한 동료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둘다 회사와 동료 입장에에서 자를 수도 없고 두고 보기도 싫은 계륵 같은 존재다. 그러던 차에 둘을 베트남으로 전근을 보내는데. 거기서도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상수의 성격과 악착같은 경애가 기존에 영업하던 팀과 트러블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런 사건들은 둘을 현실 세계에서 가까와지게 만드는데, 경애는 여전히 상수가 페이스북의 상담 '언니'라는 사실을 모른다.


이렇게 밋밋하게 스토리를 정리하다보니, 좋은 소설을 망쳐놓은 거 같은데, 실제 소설은 두 사람의 마음이 입체적으로 묘사되어 있고, 주고 받는 대사에서도 잔재미가 있다. 회사, 가정, 썸타는 경애 모두와 잘잘한 트러블을 겪는 상수,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시련은 그에게 가장 큰 낙이자, 또다른 정체성이었던 페이스북 계정인 '언니'가 해킹당하는 것이다. 


익명성을 믿고 동성이라고 철석같이 믿으며 자신의 모든 걸 내보인 사람이 같이 일하는 동료라는 걸 알았을 때의 배신감은 어떨까. 용서하고 자시고의 문제라기 보다는, 현실에서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마음, 경애의 마음을 고스란히 내보였다는 데서 오는 혼란일 것 같다. 그래서. 그 이후, 안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배반감에 몸을 떨며 없었던 시간처럼 마음을 거두어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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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 마땅한 사람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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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사이코패스 킬러 (릴리)가 완전 범죄를 저지르는데, 피해자보다 가해자에게 더 감정이입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살인이라는 대형 범죄의 입장에서 볼 때 살인자가 가해자이고 살해된 자가 피해자지만, 저 깊은 속 꿈틀대는 살인 충동을 활성화시켜 살인을 행하게 자초한 것은 애초 살해된 자인 경우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살해된 자가 대단한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다.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는 어린 소녀에게 다가가 음탕한 시선을 보내고, 밤에 혼자 자는 아이에게 와서 숨어 들어와 욕망을 분출하는 인간이 그 다음에는 어떤 행동을 할지는 뻔한 일이다. 살인은 계획적으로 치밀하게 이루어지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똑똑하고 이성적인 아이는 대학에 가고, 과거를 잊고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지만, 양다리 걸치는 남자 친구의 이중적 모습을 발견하게 되니, 이런 사람도 죽여 마땅한 사람에 된다. 자신의 마음에 이토록 큰 상처를 준사람이 일말의 양심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걸 보니, 두고두고 여러 사람의 마음을 부숴놓을 사람이다. 그러니 죽여 마땅하다.  이번에도 아슬아슬 하지만, 완벽 범죄에 성공한다. 이것은 릴리의 과거의 이야기이다. 


현재 시점으로 돌아와 릴리와 테드의 이야기가 교차해서 펼쳐진다. 백만장자 테드는 와이프 미란다의 매력에 빠져 결혼해서, 저택을 공사중인데, 와이프는 공사를 맡은 건축업자와 바람이 났고, 배반감에 괴로워하던 테드가 릴리와 공항에서 우연히 만난다. 전력도 화려한 전문 킬러가 먹이감을 만난 것처럼, 릴리는 그를 돕기로 하고, 살해계획을 세운다. 범죄를 하던 뭘 하던 세번째가 고비다. 테드의 경우 백만장자이고, 재산을 노리고 그와 결혼한 미란다가 먼저 선수쳐서 테드를 해치려고 계략을 세워둔 걸 알지 못했던 것이다. 


테드의 죽음으로 미란다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미란다와 릴리 두 킬러의 두뇌 싸움이 시작된다. 릴리는 이지적이고 매력적인 뭔가 초월한 듯한 느낌을 풍기는 신비한 분위기의 타고난 사이코패스 킬러이고, 미란다는 오로지 돈을 쫓는 미녀다. 둘다 사람 죽이는 재주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필요한 살해에 이용하는 도구는 멍청한 남자다. 건축 업자는 테드를 죽이면 백만장자의 돈이 다 자기 돈이 되는 줄 알고 미란다가 해외에 나갔을 때 자처해서 그를 죽이지만, 알고 보니 낙동강 오리알 처지에 살인을 혼자 뒤집어 쓰게 생겼는데 이제 릴리까지 나타나 두 여성이 서로를 죽이기를 원한다. 


과거 이야기를 교차적으로 하는 것 말고는 사건은 순차적으로 일어나고, 독자에게 그 어떤 속임수도 쓰지 않고, 형사들은 뒤늦게, 독자가 다 아는 걸 모르고 범인을 찾겠다고 덤빈다.  대단한 반전이라던가, 숨겨뒀던 비밀이 튀어나오는 것도 아닌데, 잘 읽히고 시원하게 끝난다. 약간의 오픈 결말적인 분위기가 있지만, 그렇다고 뭐 살인자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인하며 잘 살았습니다.하고 끝낼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어디선가 영화화된다는 말을 본 것 같은데, 그거야 영화가 나와 봐야 알 테지만, 딱 영화로 만들기 좋은 플롯이다. 대본 작업 하면서 구조를 뜯어고칠 거 없이 거의 그대로 영화화해도 충분히 그림이 나올 거 같다. 익숙한 클리쉐가 많아서, 책 읽을 때 느끼는 살인이라는 작업을 쿨 하게 해 내는 매력적인 빨간 머리 소녀와, 으스스한 분위기를 영화에서 충분히 잘 살릴 수 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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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유래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톨킨의 반지의 제왕,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그리고 르귄의 어스시 마법사는 세계 3대 판타지라는 말이 떠돈다. 그만큼 많이 읽혔다는 소리인지, 판타지 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소리인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런데 이 '3대' 시리즈라고 하는 세 작품들 중 《반지의 여왕과 나니아 연대기에 비해 어스시의 마법사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영화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어스시 마법사가 영화화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영화는,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만든다고 해서 르귄이 승낙을 했는데,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닌 그의 아들 미야자키 고로가 이 시리즈의 세번째 작품 머나먼 바닷가를 원작으로 해서 게드전기를 만들었는데, 평단과 흥행 모두 "망했어요"였다. 일본을 제외하고는 100만달러를 유일하게 넘긴 나라가 한국과 프랑스인데, 한국의 경우 23만 정도였다고 하니 세계적으로는 대략 얼만큼 망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내가 이 영화를 르귄 원작의 영화로 치지 않은 이유는 영화가 망해서가 아니다. 르귄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이 영화는 내 영화가 아니라고 했을만큼 원작을 크게 훼손시켰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2 부작 드라마로도 만들었다고 해서 찾아보니 유튜브에 돌아다녀도 누가 저작권 시비를 걸 만한 가치도 없을 만큼 사실 여기 언급할 언급할 가치도 없어 보이는 성인물(?)의 일종 같다. 


일단 반지의 제왕이나 어스시의 마법사 수준으로 대형 실사 영화화가 되지 않은 이유는 주인공의 피부색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  자기들 스스로가 하얗다고 생각했던 백인들이(내 눈에는 백인들 피부가 하얘 보인적이 별로 없다. 실제로 아이들이 아닌 경우에는 죄 태워서 구리빛을 갖고 싶어하는 인간들이 구리빛 대신 벌겋거나 뭐 여러 지저분한 색을 만들고는 하얗다고 하는 거 같다). 지금은 영화도 그렇고, 드라마도 그렇고 많이 달라졌지만, 오랫동안 헐리우드 영화판을 주도하는 곳에서 백인이 주인공이 아니면 전세계의 관객이 작품을 외면할 것이라 생각해서인지, 백인이 아닌 인물이 주인공이 되는 걸 아주아주 꺼려했을 것이다. 주인공의 피부색이 '순수 백인 혈통'이 아닌 경우 대개 저자와의 협의로 영화가 흥행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인공의 인종을 바꾸는 경우가 많은데, 어스시의 독자들과 르귄 저작권이 이를 허락할 리가 없다. 여기서 주인공의 색은 '붉은'색으로 나온다. 


그런데, 사실 나는 르귄의 열렬한 팬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피부색을 붉은 색으로 묘사한 부분이 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건 백인의 눈으로 볼 때 원주민들의 피부색을 지칭하던 색이었던 거 같고, 그런 색의 묘사 자체 역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이 소설은 수십년 전에 쓰여졌고, 그 때의 사고 방식과 지금은 다를 수 있으니까, 그것을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 어쨌든 백인으로서 르귄의 소설 속 우위를 점하는 캐릭터는 백인이 아닌 경우가 많다. 어릴 때부터 인류학을 전공하고 아메리카 인디안들의 인권에 헌신했던 학식있는 부모님들에게서 영향을 받았고, 자라면서 함께 보아온 아메리칸 원주민과의 교감 그런 것들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르귄은 페미니즘 작가로도 알려져 있는데, 사실 이 소설은 르귄의 초기 소설 10년, 페미니즘에 영향을 받기 전에 쓴 소설이라, 판타지임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여성 배제(?)적인 관습을 그대로 수용했다. 패미니즘을 주도하는 SF 소설가들에게 당연히 따가운 시선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면을 다분히 많이 갖춘 소설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주인공을 키워준 여자 마법사에 대한 설정이 그렇다. 후에 마법사로 성장하는 주인공 게드의 능력을 처음으로 발견하고 키워준 마법사 이모는 그저 작은 마을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필요한 자잘한 마술만을 펼치는 소시민적 마술사로만 그려질뿐 별 비중이 없다. 작품 전체에서 다른 여성의 비중도 거의 없다. 오죽하면 명예남성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향후 르귄은 철저한 자기의 작품 비판을 수용하고 진정한 페미니즘을 실현하기 위한 새로운 작품 세계에 돌입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소설의 내용과 분위기는 대략 이렇다. 거대한 대양 위에 점점이 박힌 군도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용이 나타나고 배와 바람만이 섬 사이의 이동을 가능하게 한다. 마법사들이 각 섬 혹은 각 마을마다 배치되어 마을의 대소사와 질병 등을 관리한다. 마법을 통해 마을을 위기에서 구한 게드는 그 마법의 에너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게 되었다가 위대한 스승을 만나지만, 그저 조용하고 고요한 삶을 사는 스승을 뒤로 하고 더욱 강력한 마법을 갈구하며 마법학교로 가고 거기서 뛰어난 능력으로 마법의 힘을 과시하지만 강력한 힘을 지닌 그림자의 존재와 맞닥뜨리게 된다. 


해리포터의 마법학교 이전에 이미 마법학교가 주요 서사의 배경으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마법사의 돌도 나오고, 볼더모트의 이름 대신 you know who라는 불리던 상황이, 이 소설에서 사물의 진정한 이름에 그 힘이 들어있다는 진명 사상의 모티브와 연결된다.  이 정도면 르귄 측에서 롤링을 저작권 침해로 고소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르귄 역시 마법적 요소들을 수없이 많은 신화와 이전 작품들에서 차용했다고 하고, 해리 포터 팬들의 규모와 영향력을 봤을 때 이런 소리 했다가는 돌맞기 쉽상이라 함부로 표절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가 조심스럽고, 무엇보다도 작품의 결이 매우 다르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아야겠다.


이 소설을 영화화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전체적인 주제와 완벽한 합일을 이루는 결말을 스펙터클한 엔딩과 선악의 선명한 구분을 필요로하는 영화적 관점으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영화화를 하려면 선과 악이 명확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다. 르귄 작품의 위대함은 바로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마법의 능력을 알게 된 주인공은 자신을 따라다니는 악의 그림자와 대면하고, 이후로 그 그림자에게 쫓겨다닌다. 쫓기거나 무언가를 쫓고, 길위의 무언가를 향하는 여정 속에서 여러가지 모험을 하는 이야기들은 초기 르귄 작품의 한결같은 특징이다. 쫓기고 또 쫓기는 게드는 위대한 스승의 조언으로 그림자와 대면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런데 쫘잔... 그가 그림자를 대면하기로 마음먹고 그림자를 쫓기 시작하자 그토록 자신을 위협하던 그림자는 이제 도망을 간다. 


결국 이 소설은 그림자의 존재를 확인하는 길고 긴 여정이다.  십대들을 위해 처음 쓰였다고 하는데, 선과 악의 이분법에 익숙한 어른들에게 더욱 감동스러운 엔딩을 주는 책이다. 그림자는 무엇일까를 알게 되는 순간, 르귄이 인도하는 세계, 관습을 깨고, 편견을 깨고, 짧은 진실 같은 것이 스치쳐 지나가는 순간을 대면하게 되는 게 그것이다.  그림자의 실체는 이 책 전체를 통해 주인공이 찾는 과정이고 주제다. 


그림자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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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드런 액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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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의 소설을 몇 개 읽었는데, 영화화되었기에 가장 유명한 소설인 <속죄>는 못읽었지만, <넛셀>과 <솔라>로 작가의 저력을 인정하고 있던 바, 이 소설은 먼저 읽은 두 개의 소설보다 더 특별하고 감동적이었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여러 화려한 추천사도 이 책을 읽을 때 일었던 가슴 서늘한 감동과 회환, 그리고 지적인 여정을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당연히 리뷰로도 불가능할 것 같다.  (왜 노벨상 후보에 오르지 않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가정문제 전문 법관으로 성공한 주인공은 자기 실현은 물론 사회적 성공도 이루었지만, 중년의 어느 날 남편이 이상한 소리를 해댄다. 이혼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결혼생활은 유지하고 싶은데 뜨거운 사랑을 하고 싶단다. 이제는 오누이가 된 와이프의 허락 하에. 이런 엉뚱하고 기발한 말이 농담이어도 쫓겨날 판국인데, 그는 피오나 판사는 물론 독자까지 설득을 하려 든다. 


중년, 혹은 노년이라고 할 수 있는 시기에 가정이라고 해봐야 둘 밖에 없는 고적한 공간에 찾아온 위기. 그것보다 더 매혹적인 것은 피오나 판사가 다루고 있는 법적 판결이다. 가정법의 테두리에서 생겨나는 법적 판결은 양육과 이혼 같은 사사로운 사건을 다룰 것 같지만, 상급 법원에서 다루는 일은 사회 전체의 윤리와 지적 통찰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촛불정국의 막을 내렸던 당시, 이정미 헌법 재판관의 발표에 눈물 젖었던 건 건 촛불로 하나 된 온국민의 마음을 명확하게 적확하고 확실한 언어로 재단할 수 있는 아름다운 기본법 헌법이 대지처럼 인권의 근본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회가 썩었어도, 기본법은 우리 편이었다는 믿음, 그리하여 우리가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 그것의 마지막 확인. 주인공이 하는 일은 바로 이런 기본법에 어긋나지 않는지 하는 검토하고 판단하는 일이다. 


법적 성인인 시점을 몇개월 앞둔 아이가 종교적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고 있다. 부모 역시 종교적 이유로 아이의 결정을 지지한다. 의사들은 이런 무식한 부모들 때문에 살릴 수 있는 아이의 생명을 이대로 놓을 수 없어서, 환자의 동의 없이 수혈을 허락받는 재판을 신청한다. 남아 있는 시간은 얼마 없다. 아이는 이미 숨쉬기 힘든 상태지만, 똑똑하고 자기 의사가 자신의 신념에 기반하고 있음을 표현할 줄 알고, 그 신념에 대한 논리적 종교적 지식을 충분히 갖추었다. 안타까운 시간들. 이토록 장래가 창창한 아이가 단지 종교적 커뮤니티가 주장하는 낡은 성경구절의 있는 문자 그대로의 해석에 의존해 생을 마감해야 한다는 것은 이제는 인간이 최고 가치로 여기는 생명의 존중함을 무시하는 처사다. 


이 소송에서 극복해야 할 요소는 차고 넘쳤다. 가치의 충돌에서 오는 상호간의 불통, 명시된 법적 자기 신체 결정권을 다시 법적 판단에 근거하여 무효화 하는 전략, 하지만 이 현명한 법관은 실로 오랜만에, 그러니까 영국 역사 소송 박물관에 전시될만한 행동을 한다. 아이를 방문한 것이다. 한 시간 남짓 아이와 솔직 담백한 대화를 나누고 나와, 드디어 결정문을 낭독한다. 그 판결문 만으로도 이 책은 소유할 가치가 있다. 


한 생명이 굽이치는 인생 행로를 걸을 때마다 만나는 터닝 포인트들이 모두 목숨을 위협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오랫동안 소외되어 왔던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따스하게 품은 (종교적) 커뮤니티의 철학이라면 그 커뮤니티 외적인 삶은 마치 우리에게 죽음 건너의 세계처럼 어둡고 불확실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가 그토록 확신하는 '순교자적 죽음'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게 무슨 의미일까.  판사는 고민한다. 가족에게 종교는 신산한 삶에 희망을 준 유일한 빛이자 안식이었으므로, 종교를 비난할 수 없다. 그리고 아이는 이미 17세 성인에 더 가까운 나이이므로 법적으로나, 관습적으로나 성인의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정신적으로 성숙된 성인으로서 자신의 생각을 결정할 수 있는 아이이므로..


한편 가정에서는, 남편을 붙들고 싶은 마음이 바닥에서부터 차고 올라오지만, 이성을 잃지 않는 판사는, 남편이 짐을 싸서 나가는 걸 지켜보고 열쇠를 바꾼다. 걱정했던 외로움보다 어떤 해방감 같은것도 느낀다. 하지만 목숨을 구한 아이의 변화된 모습은 피오나 판사를 새로운 국면에 위치시킨다. 아이가 판사를 스토킹하며, 그 집에서 살고 싶다고 헀을 때, 나는 피오나가 그 세상에 처음 나온 듯 종교 밖의 세상을, 아이를, 새장을 나온 새처럼 품어서 아들처럼 돌보고 살면 좋을 거라는 희망을 가졌다. 어떤 독자들이라도 그런 생각을 했을 거다. 작가도 그런 의도에서 피오나의 아이없는 삶을 하나의 실패로 규정짓지 않았던가. 


중년의 나이에 어린 아이에게서 스쳤던 순간적 욕망과 작은 행동은, 남편이 자신에게 요구했던 '뜨거운 연애'와 근본적인 면에서 어떻게 다를까. 중편적인 분량이지만 압축된 분량이 품고 있는 어마어마한 생각. 너무나도 충격적인 결말. 비통한 이야기. 하지만 우리는 이 판사에게 돌 던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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