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하지 않을수록 더 적게 먹어라 - 하루 500 kcal, 나는 더 건강해졌다!
시바타 도시히코 지음, 윤혜림 옮김, 아보 도오루 감수 / 전나무숲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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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적 이론상으로, 인간이 건강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하루에 필요한 총 칼로리는 기초 대사량과 생활에 필요한 에너지를 합쳐 2000Kcal~2500Kcal 정도 된다. 동물 생태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현미 채식을 지도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하는 저자 시바타 도시히코는 우연한 기회로 대사 증후군의 경계선에 있는 자신의 허리 사이즈를 줄이기 위해 자신만의 저열량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매일 매일 일어나는 몸의 변화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분석했다.

 

기록된 정보는, 매일의 아침 점심 저녁 상세한 식단과 레서피, 하루 총 칼로리 섭취량, 그리고 만보계를 사용한 운동량, 체중과 체지방률을 그래프로 기입할 뿐만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변화, 피곤함을 느끼는 정도, 수면의 질과 양, 심리 상태 등 매우 구체적이고 상세한 몸의 변화도 포함한다. 덧붙여 매달 병원을 방문하여 정기적으로 체력 검사와 건강검진을 실기하였으며, 건강검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다이어트는 다소 무리하고 생소한 방법으로 시작된다. 매 첫달 3일간 하루 500Kcal 정도의 극단적인 저열량으로 시작하고, 이 때 3Kg 정도의 무게를 줄인 후, 나머지 27일간은 1500Kcal 정도의 저열량 다이어트로 바꾸면서 체중의 변화와 허리 사이즈의 변화를 감시하는 것이다.  처음 3일간의 초저열량 다이어트를 마친 후 다음 날 저열량을 시작하면 바로 나타나는 요요현상 덕분에 평소보다 훨씬 더 저열량의 다이어트를 하는 데도 불구하고 체중이 늘어난다. 그러나 한달 남짓한 저열량 다이어트에 몸이 적응을 하면 1~2%의 첫 3일의 급작스런 체중 감소를 총 합쳐 전체적으로 2~3%의 체중 감량에 성공한다. 매달 이런 식으로 약 2kg 씩 감량한 후에는 아예 최소한의 칼로리인 500kcal 정도의 열량 섭취만으로도 건강한 삶을 살아간다. 이런 식의 다이어트가 계속되면 몸에 있는 모든 영양성분이 열량을 내는 데로 빠져나가 뼈와 신체의 기본 구성 기관마저도 영양이 모두 빠져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의사가 만류하였지만, 지속적인 건강 체크 결과, 오히려 몸의 상태가 더 좋아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저자는 의학에서 말하는 양의 칼로리를 섭취하지 않고도 초극단적인 칼로리 섭취만으로도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음을 몸소 실천해 보이고 그것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통해 의사들을 당황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의학 박사들과 인터뷰하면서 그 과학적인 근거들을 제시하였다. 모든 사람에게 이 다이어트 방법이 통하는 것은 아니라고 의사들도 충고하고 있다.

 

그리고 본인의 경험과 의학 지식을 이용하여 이러한 초저열량 다이어트가 이루는 몸의 작용을 설명해 놓았다. 딱히 이 방법의 다이어트를 따라하지 않더라도, 몸을 이해하고, 다이어트에 대한 음식과 그 조리법을 접하는 데 참고할 만한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생각하기에 가장 과학적이고 검증된 다이어트 방법은 칼로리 소비량과 칼로리 섭취량의 차이로 이루는 것이다. 움직이기 싫은데 살을 빼고 싶다면 기초 대사량보다도 적은 칼로리를 섭취하면 당연히 숨쉬고 땀내서 체온조절하고 생각하는 데 필요한 칼로리를 얻기 위하여 몸 어딘가에 축적된 지방을 분해할 것이다. 건강하게 살을 빼고 싶다면 운동과 칼로리 섭취를 제한하는 방법을 통해 이룰 수 있다. 시바타 도시히코는 매일 먹는 식사의 재료를 일일히 칼로리로 환산하고, 자신의 운동량을 칼로리로 환산하여 기록함으로써, 다이어트의 기본이 되는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비록 초극단적인 칼로리 소비가 일반인에게는 위험한 방법이고, 또한 쉽게 따라하기도 어려운 다이어트인 것은 사실이지만,다이어트에 필요한 몸의 관찰 요소, 칼로리 계산 등의 여러가지 고려할 점에 대한 정보를 많이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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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사랑이 필요하다 - 애정 결핍과 자아도취에 빠진 현대인의 심리분석
한스 요아힘 마츠 지음, 류동수 옮김 / 애플북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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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은 진화한 인간이 가진 기본적 속성인 모양이다. 어쩌면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모든 것은 애정결핍에서 비롯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인정받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결핍이 생겨나고, 그 결핍을 감추기 위해 생겨나는 크고 작은 상처들은 한 사람의 인생에 치명적일 수 있지만, 인류 역사에도 위협이 되기도 한다.. 


몸이 아프다. 피곤이 겹치고, 두통과 섬유근육통이 계속해서 신경을 자극한다. 어제 고속버스 차창 밖 풍경을 느끼며 충만했다고 여겨지던 뇌속의 도파민은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노르아드레날린으로 바뀌었다.  일을 멈추고 간이 침대에 몸을 눕힌다. 심호흡을 하고 어제 스님이 쓴 책에서 읽은 메타자아를 떠올리며 받아들인다. 통증과  그로 야기된 불편한 마음을 한 발 물러서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해 본다. 서랍 속의 두통약 펜잘이 간절하다. 먹을까 말까.  다시 심호흡을 해본다. 원인.. 이 책이 생각났다. 아픔의 원인은 어쩌면 내재된 자아 속 어린 시절 인정받으려고 했는데 충족되지 않았던 욕구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의 어디엔가 받지 못한 무언가의 결핍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런지도 모른다. 


어릴때 받아야 할 만큼의 사랑을 충부히 받지 못하면 나르시시즘적자아도취  장애가 생긴다.  그리고 그 본능적으로 느끼는 질적 사랑은 함께 있는 시간의 양이나 물질적 만족, 영혼없는 과장된 애정표현으로 충족시껴줄 수 있는 것이  못된다. 부모 는 자신의 욕망이나 결핍을 아이에게 투사함으로서 자신의 자아도취를 자식에게 되물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한스 요하임이 전하는 내용이다.   


강의 신 케피소스가 요정 레이리오페에게 겁탈하여 탄생한 나르시스는 모성애의 결핍과 환경적 영향으로 이성을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에 빠져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신화다. 이 책은 코후트의 현대 나르시시즘 이론에 기반한 현대인의 장애입은 자아도취 장애를 개인적인 관점 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현상에서 설명한다. 장애입은 자아도취는 어릴 때 받았어야 했을 애정 결핍에 대한 보상 작용으로 이해되는 심리학적 증상으로 과도한 자기애(잘난 자아형)와 부족한 자기애(못난 자아형)의 두가지 대립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것은 애정 결핍과 소외를 방어하고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장애입은 자아가 만들어낸 거짓 자아이다. 손상된 자아는 고통스런 결핍을 상쇄하고 감추기 위해 탁월한 성과를 나타낼 수도 있지만 거칠고 사나울 수도 있고 때로, 수모를 겪은 자아는 권력을 지향할 수도 있다. 충만을 꿈꾸며 늘 불만, 긴장, 불안의 상태에 있는 장애받은 자아가 투쟁적 노력, 끊임없는 비교, 무한 성장 등으로 나타나는 것이 잘난 자기애이다. 반면 어린 시절에 체험한 평가 절하와 인정 결핍은 열등감과 자신감 장애를 가져오기도 한다. 자신감 장애는 외부의 인정에 의존하기 때문에 남에게 최대한 맞추려 든다.  

 


권력자와 추종자, 부부나 연인 관계 잘난 자아와 못난 자아는 사회 속에서 상호 공생 관계로 만나는 경우가 많다. 한스 요하임은 광기에 사로잡힌 국가사회주의나 부채를 조장하는 극단 소비주의, 심지어 다이어트와 패션 성형등에 몰두하는 사회적 병리현상들을 애정 결핍에서 비롯된 자아 도취의 방어 기제로 설명한다. 특히 나치 정권하의 독일 국민의 대다수가 극도의 자아도취에 빠진 잘난 자아의 지배자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했다는 사실을 병적 극단적 집단적 자아도취로 해석한다.  

 


어릴 때 필요로 되는 부모의 애정은 함께 있는 시간이나 물질적 풍요 혹은 작위적이고 과도한 애정의 표현으로 충족되는 것이 아니다. 애정의 질, 인정하는 눈빛 따뜻한 품 같은 것들이다. 아이에게 가장 필요로 되는 질적 애정은 공감이다. 부모의 자아 도취 장애가 자식에게 전달되어 되물림되는 경우가 많다. 장애를 입은 자아는 공감할 줄 모르며 자기 자신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다. 나 자신도 깊은 곳 어디쯤인가엔 결핍을 느꼈을 심리적 상처가 존재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손상받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나의 행동이 결핍에서 나오는 자기 방어인지 돌이켜 보는 것도 필요하다.

 

 

또한 나를 둘러싼 사회 병리적 현상들을 결핍에서 비롯되는 심리학적 원인들로 해석하고 어떤 집단적 광기에 나도 모르게 휩싸여서 자아도취적 방어에 이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 인간관계 역시 뒤돌아보고 거짓 자아가 규정한 성격이 아닌 공감과 개방성 솔직함을 바탕으로 인간관계를 개선해 나가도록 노력할 것 등의 개인적인 노력이 거대한 집단 자아도취에서 만들어내는 병폐들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한스 요하임의 책과 더불어 근래 독일 작가가 쓴 책을 읽을 몇 권 읽었는데,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과 히틀러의 시대의 학살의 자책과 2차 대전의 패전을 유산으로 가진 독일 지식인의 정신과 사회상을 은근히 엿볼 수 있었다. 홀로코스터라는 전대미문의 학살과 광기의 역사는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의 내재된 결핍과 그로 인한 방어 기제가 그 밑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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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어웨이 - 도피할 수 밖에 없었던 여자의 가장 황홀했던 그날
앨리스 먼로 지음, 황금진 옮김 / 곰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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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이 있다. 누구에게나. 사라지고 싶은 날. 도망가고 싶은 날. 도피하고 싶은 날. 누구나. 대개 탈출의 꿈은 냉혹한 현실적 장벽에 부딪치기도 전에 상상 속에서 장열하게 전사한다. 그러기 전에 매번 떠나는 걸 시도한다면 역마살에 막장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내가 탈출하고 싶었던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런어웨이 자체가 목적이라기 보다는  남겨질 사람에게 나의 부재를 경험시키고픈 욕망이었다. 나 없는 너. 나 때문이 아니라, 나의 부재로 인해 고통받을 너, 그리고 후회, 참회의 눈물, 그런 종류의 드라마적 상상을 하고 있다 보면 어느새 상상의 나래는 색상을 보태고 갈래를 뻗어버리고 애초의 정당성을 잃으면서 흐지브지 꿈으로 끝나고 결국 너에게 나의 부재를 안겨줘 보지 못하고 나의 존재는 아무 변화없이 갈등은 시간 속에 무디어 지면서 시시하게 끝나는게 우리의 일상이다. 런어웨이에서 칼라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의 짜릿한 도피는 그녀의 남편 클라크에게 그녀의 부재를 경험시켰고 그녀가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를 알려주었다.

 

사소한 거짓말이 발목을 잡고 날로 거칠어지는 남편에 대해 회의가 들던 어느 날, 칼라는 뜻밖의 기회를 접한다. 떠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인 돈과 거처 문제가 바로 해결되는 순간의 그 황홀한 자유. 세상에서 가장 짜릿한 쾌감의 편지 한 줄. 나 떠나. 갑작스런 도피가 진행되던 그 하루동안 맛본 그녀 최고의 젊은 날. 그녀가 현실을 깨달았을 때, 런어웨이가 한가한 상상에서 흘러나온 환상이 아니라 내가 혼자서 부딪치고 살아내야 하는 척박한 현실이 되었다는 급작스런 깨달음과 함께 오는 두려움은 도피 이후의 삶과 집으로 돌아가는 삶 두 개의 현실 사이에서 고민할 가치도 없는 것이 있었다. 결국 그녀에게 잠시의 떠남은 발 딛고 서 있는 현실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시켜 주는 하나의 성장 과정이었다.

 

클라크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클라크는 칼라의 인생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망간 길을 마치고 삶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클라크의 자리는 무엇이 차지하게 될까? 클라크 외에 그 무엇이, 그 누가 생동감 넘치는 도전이 될 수 있을까. 

어느 낯선 휴게소에서 칼라를 데려온  클라크는 칼라를 나무라는 대신 칼라를 부추긴 실비아를 협박하러 찾아가지만, 그가 복수한 대상은 칼라가 마음을 준, 갑자기 집을 나가버려 칼라가 그렇게나 오래 찾아 헤매던 염소 플로러였다. 갈등이 최고로 고조된 순간 두 사람 사이를 유령처럼 나타나서 해결해준 플로러를 클라크는 집으로 데려가지 않았다. 나중에 묘사되는 작은 뼈들이 플로러의 죽음를 암시하지만 플로러의 부재를 묻는 마굿간 고객에게 클라크가 무심히 던지는, 없어졌다며 로키산맥으로 튄 모양이라는 대답이 그의 행방을 클라크의 심리에서밖에 찾을 수 없는 암시의 전부이다.

 

클라크는 칼라가 자신을 데려가달라고 전화했을 때 기꺼이 그녀를 데려왔지만, 안개속에서 칼라가 아끼던 플로러가 나타났을 때 최소한 집으로 데려가지 않았다.  그는 칼라의 탈출 한나절 동안 칼라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러나 칼라는 평소 소중하게 생각해 왔던 플로러의 부재를 힘겨워 했지만, 귀환한 플로러를 버린 클라크에 대해 어떤 원망도 없다.  클라크는 칼라의 탈출을 플로러의 탈출과 어떻게 연결하고 있었으며 플로러를 어떻게 한 걸까. 왜 집으로 데려오지 않았을까. 이 소설의 제목 런어웨이가 뜻하는 것은 혹시 칼라의 런어웨이가 아니라 플로라의 런어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플로러는 집을 나가 헤매다가 귀환을 바랐으나 영원히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걸까. 로키산맥으로 가서 자유를 찾았든, 혹은 길에서 죽었든 이 책의 제목이 시사하는 런어웨이에 이른 것은 플로러이다.  우리에게 현실로부터의 탈출이란, 탈출 이후의 단계란, 칼라의 그것처럼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아닌 플로러의 그것처럼 다시 집을 찾아 복귀해도 버림받고, 갈 곳 없는, 행방을 알 수 없는, 영원히 미지의 것이라는 걸까. 플로라의 귀환과 클라크의 내침. 혹 클라크는 칼라의 런어웨이를 플로라 대신 단죄한 것일까.  클라크가 플로러를 어떻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된 칼라의 이해할 수 없는 무심함 역시 내겐 숙제 같은 의문이다. 이 이상한 행동에 대해 어디에서 어떠 단초를 찾아낼 수 있을까

 

실비아는 칼라의 건강하고 생동감 넘치는 몸을 사랑한다. 실비아가 뭘 어쩌려고 그녀를 도와준 것은 아니다. 그녀가 지나치며 이마에 살짝 입맞춤한 것에 설레고 기쁘지만, 자신이 그리스에서 사다준 값비싼 선물에도 시큰둥한 모습에서 실망하고, 그녀가 울자 그녀를 돕는다. 앨리스 먼로는 이런 동성애적 코드를 불편하지 않게 묘사한다. 그저 그녀를 보면 설렐뿐이다. 뭔가를 주고 싶고, 보고 싶고, 그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실비아가 딱히 동성애자인 것도 아닌 것 같다.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 대해서도 종종 비슷한 감정을 받는 모양이지만. 실제 우리가 알고있는 동성애자들처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강한 욕망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언젠가 어디선가 인간은 누구나 양성애적 경향이 잠재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육체를 탐하지 않는 설레임과 애틋한 감정을 사랑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누군가를 설레일 만큼 좋아하는데 그 대상이 동성인 경우가 종종 있다면, 그 사람도 광의의 양성애자라고 할 수 있는걸까. 실비아는 자신의 집에 일을 해주러 오는 건강미 넘치고 활달한 칼라에게 느낀 감정이 상대에게도 받아들여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작은 단편이지만, 읽는 내내 마치 스릴러같은 긴장감이 팽팽하게 흐른다.  그러나 대가의 작품이 그 진가를 발휘하는 시점은 읽고 나서 시간이 조금 흐른 후부터 시작되는 여운이 이리저리 생각의 얹어리를 배회할 때부터이다. 칼라를 옥죄어오던 칼라의 거짓말은 한나절동안의 떠남으로 흐지브지 되었다. 칼라의 거짓말에 현혹되어 실비아를 협박해서 돈을 받아내려던 클라크의 계획은 이 짧은 소설에 긴장감을 불어 넣었던 가장 큰 이슈였지만 마치 없었던 일처럼 이슈 자체가 사라져버렸다. 이러한 소설 속 애매함과 불확실함은 혹시 노벨상 작가의 오만은 아닐까?

 

*노벨상을 받은 작가의 작품집에 대해 뭐라 총평하는 것도 우스워 일단 표지의 작품집 제목과 일치하는 첫번째 작품인 런어웨이에 대한 감상만 적는다.  이미 그녀의 문학에 대한 아주 유명 평론가들과 매체의 서평 핵심 문장들은 표지와 띠지 곳곳, 전자책방 홈피 구석구석, 그리고 이 책의 판매 페이지에 수두룩하게 널려 있다.  가령 놀랍도록 아름답다던가, 일상에서 발견되는 진실이라던가. 이미 읽기 전에 그런것들을 접한 후에 소설을 읽었기 때문에, 겹치지 않게 그녀의 소설에 대해서 한마디 보태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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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여왕 ㅣ 안데르센 걸작그림책 1
한스 크리스찬 안데르센 지음, 키릴 첼루슈킨 그림, 김서정 옮김 / 웅진주니어 / 2005년 1월
평점 :
일시품절


 

 

디즈니의 얼음 왕국은 안델센 원작의 눈의 여왕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눈의 여왕에서 모티브만 가져왔을 뿐 스토리는 거의 모든 부분에서 다르다. 나는 과거 유치원을 제대로 안다녔던 모양인지 이제서야 처음으로 윈작을 봤을 뿐만 아니라 아이를 키우면서도 눈의 여왕 자체 스토리를 접해보지 못했다. 원작의 제목으로 등장하는 눈의 여왕은 북극 근처의 스피츠베르겐 섬에 살며 게르다가  카이를 찾아 간 곳은 눈의여왕이 여름을 지내기 위해 가 있던 핀란드의 라플란트라는 곳이었다. 눈의 여왕은 차갑고 흰 눈으로 된 코트와 모자를 쓰고 있으며 카이를 납치하고 자신의 코트안에 들어오게 하고 두번의 입맞춤으로 카이를 춥지 않고 기억을 잊도록 하는 마술을 부리고, 그가 자유로워지려면 얼음 조각으로 영원 이라는 말을 맞춰야 한다는 과제를 내주는 것 외에는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이 캐랙터와 차갑고 흰 눈의 나라라는 환상적아 배경은 나니아 연대기를 비롯한 많은 작품의 모티브가 된다.

 

이야기의 시작은 악마가 만든, 모든 것을 못생기고 찌그러지고 일그러지게 보이도록 하는 거울을 신들이 있는 곳으로 가져가다가 떨어뜨려 산산조각이 나고, 그 조각이 카이의 심장과 눈에 박히면서부터 전개된다. 카이와 게르다는 서로 옆집에 살며 오누이처럼 지내는 사이이다. 둘은 정원의 장미꽃 아래에서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곤 하면서 자란다. 그러나 악마의 거울이 박힌 카이는 썰매를 타고 나타난 눈의 여왕의 썰매에 자신의 썰매를 묶고 놀다가 납치되어 떠나버리고, 카이를 좋아하던 게르다는 카이를 찾아 나선다. 처음 만난 외로운 노파는 게르다를 곁에 두고 싶어 게르다의 기억을 없애고 정원에 핀 장미를 땅 속으로 감춘다. 노파의 모자에 있던 장미를 보는 순간 정원에 장미가 없음을 이상하게 여긴 게르다는 정원으로 나가 장미꽃을 찾다가 울음을 터트리고, 흘러내린 눈물은 땅속으로 스며들어 장미를 다시 밖으로 피어나게 한다. 배경처럼 카이와 늘 함께 했던 장미꽃밭을 본 순간 모든 기억을 회복한 게르다는 다시 카이를 찾아 나서고, 까마귀에게 카이가 어떤 성에서 공주와 함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지만 공주와 살고 있는 남자 아이는 카이가 아니다. 게르다의 이야기에 감명을 받은  공주는 게르다가 카이를 찾을 수 있도록 그녀에게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진 화려한 마차와 시녀들 따뜻한 부츠,  털장갑 등을 선사하지만 산적떼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산적 딸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목숨을 건진다. 그리고 산적의 딸 역시 게르다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가 카이를 찾을 수 있도록 자신의 순록을 제공하고 성을 빠져나가도록 돕는다. 우여곡절 끝에 카이를 만난 게르다가 눈물을 흘리자 그 눈물은 카이의 가슴에 스며들어 심장 속에 박혀있던 거울 조각을 빼내고, 기억을 찾은 카이의 눈물은 눈 속에 박힌 또다른 거울 조각을 빼내으로 카이는 예전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얼음조각은 영원 을 맞추어 성에서 풀려나게 된다. 마을로 돌아온 카이와 게르다는 기쁜 마음으로 할머니가 성경을 읽고 있는 방문을 열고, 이 모든 모험을 끝낸 그들은 이제 어른이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원작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역시나 아이들을 위한 동화라, 사건의 디테일은 빠지고 어른의 마음으로는 이해불가한 요소들과 엽기적인 면들을 볼 수 있다.  가령 엄마에게 업혀있던 산적의 딸은 엄마의 귀를 물어뜯고 해괴하지만, 그녀가 게르다에게 도망갈 계획을 주도하는 행동은 어른같다. 또한 당시 인육을 먹는 문화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듯한 문장 하나가 눈에 띈다. 산적들이 공주가 마련해준 게르다의 화려한 마차를 습격하고 시녀와 마부들을 모두 죽인 후  게르다의 엄마가 게르다를 보며 포동포동하게 맛있게 생겼다며 칼을 들이대는 장면이다. 우리는 조선시대 선조 때 임란으로 피폐해진 백성이 인육을 먹는다고 보고받는 실록의 기록을 읽고 끔찍해하지만, 그들은 엄연히 사람이고 백성 중 하나였던 산적이 인육을 먹는 듯한 장면이 어린이의 동화책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표현되어 전해져 오는 점을 있을 무심히 지나간다. 눈과 심장에 마법의 거울이 박힌 카이는 대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생생한 캐릭터가 없다. 게르다가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알 길이 없다.  악마의 거울이 박히기 전의 카이와 게르다가 서로 오누이 처럼 사이가 좋았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단서가 없고, 오직 그 이후 이야기 뿐이다.  카이 뿐 아니라, 신비한 눈의 여왕도 마찬가지이다. 카이를 왜 데려갔는지, 무엇을 할 작정이었는지 오리무중이다.  그동안 게르다가 카이를 찾기 위해 겪은 모험 속에 모두 꿈인듯 희미하나, 그 모험이 끝나고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을 때, 그 둘은 성인이 되어 있었다.

 

안델센은 무한한 상상력으로 환상적인 이야기의 뼈대만 만들었을 뿐, 각각의 캐랙터에 생명력을 불어놓지 않았다. 어린아이용 동화는 정서적인 디테일이 필요하지 않다. 아이들은 스토리에서 고유의 느낌들을 스스로 찾는다. 만일 5~6세의 아이들에게 눈의 여왕은 어떤 사람이야? 게르다는 어떤 사람이야? 좋아 싫어? 이렇게 묻는다면, 그 아이들이 이야기속에서 창조해낸 캐랙터는 동심 속에서 무한한 생명력을 갖는 생생한 캐랙터가 될까. 나는 참 궁금하다. 느낌을 전지적 시점에서 전달해줘야 알아먹는 성인들의 세계와 스토리만 가지고도 무한한 세계를 창조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를 어린이들의 잠재력. 그것들의 커다란 시간이라는, 성인이 된다는 것의 갭을 안델센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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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예찬 - 번역가의 삶과 매혹이 담긴 강의노트
이디스 그로스먼 지음, 공진호 옮김 / 현암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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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읽으며 그동안 이런 저런 번역에 대해 제기했던 불만을 반성하게 끔 하는 책이다. 우리는 그동안 번역의 가치를 많이 평가절하해 왔다. 알파벳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비영미권 언어를 번역한 책들에 대해서도  매끄럽고 유려하게 번역되었다느니, 거칠게 번역되었다느니 하는 판에 박힌 표현으로 번역자의 노고를 폄하하여왔다. 이 책의 저자 이디스 그로스먼은 전문 번역가이며, 번역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 그리고 확고한 철학을 가졌다. 그리고 이 책을 빌어 번역 작업을 예찬한다.  이디스 그로스 먼에게 번역은 창작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번역으로 인해 다른 여러 나라와의 풍부한 문화들이 서로 조우하는  확장된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200페이지 남짓으로 짧고, 그 중 반 정도는 시 번역 작업의 실례를 들고 있기 때문에 실제 저자의 통찰력을 읽을 수 있는 내용은 100페이지 남짓하다. 그가 단호하게 주장하는 사항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는  자국문화의 틀에 갇힌 채 타 언어의 영미 번역을 기피하는 영미의 출판, 평론계에 대한 비판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영미권 번역서를 많이 접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영미국의 출판업계가 영어 이외의 타언어에 대한 문화적 무시, 기피 현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별로 알 길이 없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출간 되는 번역서의 50%는 영어원서 번역본이고 영어로 번역되는 것은 6% 뿐이라고 한다. 놀라운 사실이다.  아무리 국제적 표준 언어로서  영어가 전세계적으로 자리 잡고 있고, 미국의 군사 경제력이 세계최강이라고 하더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라도 영어는 다른 모든 언어와 융합하고 교류해야 풍성한 언어적 발전이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번역 및 번역가에 대한 평론가들의 관심 역시 출판사들 못지 않게 소극적이라고 한다. 이러한 영미 문화의 배타성은 비단 번역기피 현상으로 그치지 않는다. 미국민의 대다수가 지도에서 아시아의 굵직한 나라들을 찾지 못하고, 80 퍼센트가 여권을 아예 갖고 있지 않으며 태평양과 우방으로 둘러싸인 편협함의 섬에서, 자국의 거대 소비를 충족시켜주는 각국의 역사 문화와 사회에 무지한 채 오해와 해소되지 않은 갈등, 그리고 전쟁이 자라기 비옥한 땅을 가꾸고 있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미국이라고 해서 출판 시장이 그리 대단히 큰 거 같지는 않다. 필립 로스는 미국에서 책을 사는 사람을 4000 명으로 추정했다고 한다. 책을 한권 내서 그 사람들과 도서관에 팔고 나면 기본적으로 그게 다라는 것이다.

 

두번째는, 번역 작업 자체가 갖는 문화 전달과 창작으로서의 가치를 일깨운다. 우선 하나의 문화가 다른 문화와 관계함으로써 서로 영향을 주고 새롭고 풍성한 표현 수단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번역은 문학을 통해 다른 사회, 다른 시대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탐구하는 능력을 키워줍니다. 낯선 것을 익숙한 것으로 바꾸어 그것을 음미할 수 있게 해줍니다. 잠시나마 우리 자신의 삶, 우리 자신의 편견과 착각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살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한하고 형언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세계의 우리 의식의 폭과 깊이를 더해 줍입니다

 

문학 뿐 아니라 언어 자체도 다른 언어와 서로 관계를 맺을 때 풍성 해 집니다. 한 언어에 주입되는 새로운 표현 수단이 가져오는 좋은 결과는 어휘의 확장, 연상 잠재력, 구성상의 실험입니다.

 

세번째로, 번역가로서의 직업적 자부심을 가진 저자는 미국에서 번역가들이 익숙한 풍경의 일부인듯 종종 무시되어 오고 출판업계 및 평론가들은 번역의 가치를 깎아 내리고 번역가들 역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러한 경향이 출판업계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비영미권 원서의 저조한 영어 번역과 기피현상으로 나타난다.

 

네번째로, 비번역가로서 가장 공감을 얻은 주장으로, 영혼없는 일대일 단어 변환식의 직역에 대한 통탄과 비판, 그리고 프로페셔널 번역가로서 좋은 번역에 대한 그의 철학을 이야기한다.  그는 단어란 개별적으로 분리될 경우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단어는 문백 전체에 필요한 부분이 될 때, 의미를 띤다고 말한다. 단어라는 것이 구절에서 개별적으로 떼어 놓으면 구절이 주는 의미를 충실하게 전달할 수 없으며 따라서 번역가는 의미를 재현하기 위해 유추를 사용하여 문맥을 번역하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그가 인용한 존 드라이든의 서신 번역본은 이러한 저자의 생각을 잘 대변해 준다.

 

원작의 힘이나 정신을 살려 번역하고자 하면 원작자의 말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번역가는 총력을 기울여 원작자의 특징과 맛을, 주제의 본질을 해당 예술이나 주제에 관한 용어를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그런 다음 그렇게 이해한 것을 원작을 쓰듯 적절하고 생생하게 표현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단어에 단어를 하나씩 대응시켜 옮기면 원작의 정신이 그 지루한 수혈 과정에서 모두 상실된다.

저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훌륭한 글의 합은 그것을 이루는 부분 혹은 개별적인 낱말의 합보다 크다. 그리고 번역문은 원작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게 분명하다는 저자의 의견에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가끔 좋은 번역서를 읽으면 우리가 가진 한국적인 고유 정서를 통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외국의 문화와 정서를 매우 현실감있게 경험하기 때문이다.


영어가 아닌 타언어로 된 문학이 노벨상을 받으려면 우선 영어로 잘 번역되어야 한다. 이 단순한 팩트는 단순히 자만심과 편협함으로 영미 국가 내 문화적 경향이 타언어를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이 실로 인류의 발전에 커다란 장애와 위협으로 작용하게 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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