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어웨이 - 도피할 수 밖에 없었던 여자의 가장 황홀했던 그날
앨리스 먼로 지음, 황금진 옮김 / 곰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그런 날이 있다. 누구에게나. 사라지고 싶은 날. 도망가고 싶은 날. 도피하고 싶은 날. 누구나. 대개 탈출의 꿈은 냉혹한 현실적 장벽에 부딪치기도 전에 상상 속에서 장열하게 전사한다. 그러기 전에 매번 떠나는 걸 시도한다면 역마살에 막장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내가 탈출하고 싶었던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런어웨이 자체가 목적이라기 보다는  남겨질 사람에게 나의 부재를 경험시키고픈 욕망이었다. 나 없는 너. 나 때문이 아니라, 나의 부재로 인해 고통받을 너, 그리고 후회, 참회의 눈물, 그런 종류의 드라마적 상상을 하고 있다 보면 어느새 상상의 나래는 색상을 보태고 갈래를 뻗어버리고 애초의 정당성을 잃으면서 흐지브지 꿈으로 끝나고 결국 너에게 나의 부재를 안겨줘 보지 못하고 나의 존재는 아무 변화없이 갈등은 시간 속에 무디어 지면서 시시하게 끝나는게 우리의 일상이다. 런어웨이에서 칼라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의 짜릿한 도피는 그녀의 남편 클라크에게 그녀의 부재를 경험시켰고 그녀가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를 알려주었다.

 

사소한 거짓말이 발목을 잡고 날로 거칠어지는 남편에 대해 회의가 들던 어느 날, 칼라는 뜻밖의 기회를 접한다. 떠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인 돈과 거처 문제가 바로 해결되는 순간의 그 황홀한 자유. 세상에서 가장 짜릿한 쾌감의 편지 한 줄. 나 떠나. 갑작스런 도피가 진행되던 그 하루동안 맛본 그녀 최고의 젊은 날. 그녀가 현실을 깨달았을 때, 런어웨이가 한가한 상상에서 흘러나온 환상이 아니라 내가 혼자서 부딪치고 살아내야 하는 척박한 현실이 되었다는 급작스런 깨달음과 함께 오는 두려움은 도피 이후의 삶과 집으로 돌아가는 삶 두 개의 현실 사이에서 고민할 가치도 없는 것이 있었다. 결국 그녀에게 잠시의 떠남은 발 딛고 서 있는 현실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시켜 주는 하나의 성장 과정이었다.

 

클라크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클라크는 칼라의 인생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망간 길을 마치고 삶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클라크의 자리는 무엇이 차지하게 될까? 클라크 외에 그 무엇이, 그 누가 생동감 넘치는 도전이 될 수 있을까. 

어느 낯선 휴게소에서 칼라를 데려온  클라크는 칼라를 나무라는 대신 칼라를 부추긴 실비아를 협박하러 찾아가지만, 그가 복수한 대상은 칼라가 마음을 준, 갑자기 집을 나가버려 칼라가 그렇게나 오래 찾아 헤매던 염소 플로러였다. 갈등이 최고로 고조된 순간 두 사람 사이를 유령처럼 나타나서 해결해준 플로러를 클라크는 집으로 데려가지 않았다. 나중에 묘사되는 작은 뼈들이 플로러의 죽음를 암시하지만 플로러의 부재를 묻는 마굿간 고객에게 클라크가 무심히 던지는, 없어졌다며 로키산맥으로 튄 모양이라는 대답이 그의 행방을 클라크의 심리에서밖에 찾을 수 없는 암시의 전부이다.

 

클라크는 칼라가 자신을 데려가달라고 전화했을 때 기꺼이 그녀를 데려왔지만, 안개속에서 칼라가 아끼던 플로러가 나타났을 때 최소한 집으로 데려가지 않았다.  그는 칼라의 탈출 한나절 동안 칼라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러나 칼라는 평소 소중하게 생각해 왔던 플로러의 부재를 힘겨워 했지만, 귀환한 플로러를 버린 클라크에 대해 어떤 원망도 없다.  클라크는 칼라의 탈출을 플로러의 탈출과 어떻게 연결하고 있었으며 플로러를 어떻게 한 걸까. 왜 집으로 데려오지 않았을까. 이 소설의 제목 런어웨이가 뜻하는 것은 혹시 칼라의 런어웨이가 아니라 플로라의 런어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플로러는 집을 나가 헤매다가 귀환을 바랐으나 영원히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걸까. 로키산맥으로 가서 자유를 찾았든, 혹은 길에서 죽었든 이 책의 제목이 시사하는 런어웨이에 이른 것은 플로러이다.  우리에게 현실로부터의 탈출이란, 탈출 이후의 단계란, 칼라의 그것처럼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아닌 플로러의 그것처럼 다시 집을 찾아 복귀해도 버림받고, 갈 곳 없는, 행방을 알 수 없는, 영원히 미지의 것이라는 걸까. 플로라의 귀환과 클라크의 내침. 혹 클라크는 칼라의 런어웨이를 플로라 대신 단죄한 것일까.  클라크가 플로러를 어떻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된 칼라의 이해할 수 없는 무심함 역시 내겐 숙제 같은 의문이다. 이 이상한 행동에 대해 어디에서 어떠 단초를 찾아낼 수 있을까

 

실비아는 칼라의 건강하고 생동감 넘치는 몸을 사랑한다. 실비아가 뭘 어쩌려고 그녀를 도와준 것은 아니다. 그녀가 지나치며 이마에 살짝 입맞춤한 것에 설레고 기쁘지만, 자신이 그리스에서 사다준 값비싼 선물에도 시큰둥한 모습에서 실망하고, 그녀가 울자 그녀를 돕는다. 앨리스 먼로는 이런 동성애적 코드를 불편하지 않게 묘사한다. 그저 그녀를 보면 설렐뿐이다. 뭔가를 주고 싶고, 보고 싶고, 그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실비아가 딱히 동성애자인 것도 아닌 것 같다.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 대해서도 종종 비슷한 감정을 받는 모양이지만. 실제 우리가 알고있는 동성애자들처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강한 욕망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언젠가 어디선가 인간은 누구나 양성애적 경향이 잠재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육체를 탐하지 않는 설레임과 애틋한 감정을 사랑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누군가를 설레일 만큼 좋아하는데 그 대상이 동성인 경우가 종종 있다면, 그 사람도 광의의 양성애자라고 할 수 있는걸까. 실비아는 자신의 집에 일을 해주러 오는 건강미 넘치고 활달한 칼라에게 느낀 감정이 상대에게도 받아들여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작은 단편이지만, 읽는 내내 마치 스릴러같은 긴장감이 팽팽하게 흐른다.  그러나 대가의 작품이 그 진가를 발휘하는 시점은 읽고 나서 시간이 조금 흐른 후부터 시작되는 여운이 이리저리 생각의 얹어리를 배회할 때부터이다. 칼라를 옥죄어오던 칼라의 거짓말은 한나절동안의 떠남으로 흐지브지 되었다. 칼라의 거짓말에 현혹되어 실비아를 협박해서 돈을 받아내려던 클라크의 계획은 이 짧은 소설에 긴장감을 불어 넣었던 가장 큰 이슈였지만 마치 없었던 일처럼 이슈 자체가 사라져버렸다. 이러한 소설 속 애매함과 불확실함은 혹시 노벨상 작가의 오만은 아닐까?

 

*노벨상을 받은 작가의 작품집에 대해 뭐라 총평하는 것도 우스워 일단 표지의 작품집 제목과 일치하는 첫번째 작품인 런어웨이에 대한 감상만 적는다.  이미 그녀의 문학에 대한 아주 유명 평론가들과 매체의 서평 핵심 문장들은 표지와 띠지 곳곳, 전자책방 홈피 구석구석, 그리고 이 책의 판매 페이지에 수두룩하게 널려 있다.  가령 놀랍도록 아름답다던가, 일상에서 발견되는 진실이라던가. 이미 읽기 전에 그런것들을 접한 후에 소설을 읽었기 때문에, 겹치지 않게 그녀의 소설에 대해서 한마디 보태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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