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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엇이 되려 하는가 - 진화의 욕망이 만들어가는 64가지 인류의 미래
카터 핍스 지음, 이진영 옮김 / 김영사 / 2016년 3월
평점 :
품절
과학은 그 자체가 모르는 것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증거가 있어야 성립되는 것이기에 자체적인 틈을 항상 지닌다. 모르는 것을 하나 알게 되었을때 그 작은 앎은 다른 앎의 단서가 되어 앎의 도약을 가져다 준다. 그러니 과학은 완벽할 수 없다. 반면 신의 논리는 증거가 필요없다. 이렇게 꿰어 맞춰도 저렇게 꿰어 맞춰도 말하는 사람 맘대로 그 무엇이라도 진실이라 주장할 수 있다. 반대로 과학은 탐구하는 것 자체가 불완전한 앎을 바탕으로 하므로 과학 내에서의 자체적 공격과 함께 발전이 이루어진다. 토마스 쿤의 말하는 과학혁명과 패러다임의 구조라는 것이 쉽게 말해 그러한 것들이지 싶다. 헛점들이 점점 많아지고 많은 헛점들을 설명하는 새로운 이론의 발견으로 이어지는 것들 말이다. 자연현상의 아름다운 질서를 정확한 근원적 원리 추구라는 믿음에서 행하는 과학으로서는 참으로 모순되는 현상이지 말이다. 그래도 과학은 과학이다. 증거가 있는 과학은 증거가 없는 것들의 틈새로 계속 의혹을 받지만 애초 처음부터 증거로 측정하지 않고 않고 마음의 힘, 즉 믿음으로 따지는 종교는 아무 지적 호기심 없이도 받아들이기가 훨씬 용이하니 말이다.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은 그냥 비현실적인 것 믿음의 산 위에 올려놓고 절을 하면 된다. 그렇게 되면 종교라는 것이 모르면 모를 수록 더욱 신비한 것이 되고 더 많은 추종자들을 많이 갖게 된다. 우리가 이렇게 많이 모르는데 그 모든 것이 창조주의 뜻이 아니라면 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조금 아는 것은 위험하다. 더 위험한 것은 믿는 것을 아는 걸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방안에 고양이가 없는데 고양이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고양이는 마음속에서 생겨났고 그 마음이 어떤 물질적인 것, 즉 달빛에 비친 커튼 자락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와 그림자를 고양이로 착각하여 그 물리적인 현상들을 고양이로 인식할 때 고양이는 마음속에서 생겨난다. 이 때 방안에서 없는 고양이가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 고양이는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분명 없지만 그는 고양이 소리를 들었고 움직이는 것을 물질적으로 보았다고 믿고 있으므로 그의 세계 속에서 분명 고양이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고양이는 방안에 있다는 것이 진리가 되는 것이다.
믿는 것을 아는 걸로 착각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자신이 아는 것(즉 자신이 믿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착각한 것을 세상의 진리인 양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믿음을 통해 그것을 보라고 말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때때로 혹은 자주 마음의 위안이 되고, 그 위안에 스스로를 먹잇감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고양이가 방에 함께 있으면 쥐가 사라질 것 아닌가. 고양이는 결코 강아지처럼 내게 다가와 꼬리를 치거나 짖지 않을테지만 그 고양이를 위해 무언가 먹을 곳을 준비해두는 행위가 사회에 만연되었을 때, 인간은 본질을 벗어난 그 무엇이 된다.
과학의 틈새를 공격하기는 쉽다. 과학은 때때로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복잡한 것이기에 불통의 결과로 알아낸 틈과 헛점이 언제나 풍부한 먹잇감이 되기 때문이다. 사상가 혹은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이 비주류이든 주류이든 과학의 틈새를 비집고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모르는 것을 인정할만큼 용기 있어서가 아니라 모르는 것을 통해 얻어낸 통찰(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더 모르는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을만큼 무식할 수 있어서일 수도 있다.
철학책이나 사상적 저술들을 읽으면 자주 분개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뭔가를 주장하기는 하는 것 같은데 그게 확실하지 않을 때 그렇다. 이게 이과를 나온 사람의 한계라고 말한다면 어쩔 수 없다 내가 이과를 간 이유는 먹고 살기에 더 유리한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 하나 뿐. 외우는 걸 공부로 알고 있던 시대에 태어났으므로 암기력이 신통치 않은 나는 숫자들에게도 결코 능하지 않은 점을 그닥 문제삼지 않기로 했던 점까지 고려된 것도 아니다. 뭐 어려우면 지가 얼마나 어렵겠어. 어떤 한계가 생기면 이해의 한계가 도무지 따라갈 수 없을 때 차선으로 암기라도 해야 되는 세계가 이과에도 있음을 깨닫고 난 후에도 나는 문과에 대한 자격지심과 자만심 사이의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뭔가 고매한 것 뭔가 내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들을 그들이 배울지도 모른다능 생각. 그것들을 나는 영원히 모르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그것들은 별로 쓸모없는 것들이라는 생각들이 마구 섞인 어떤 것이었다.
책의 내용이 과학적인 내용이 아니라면 제목을 과학서 느낌을 주면 안된다는 생각을 우선 한다. 진화론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과학책일 필요는 없다. 과학과 비과학이냐를 따지는 것 자체가 치졸하고 무식한 행위라는 것쯤은 안다. 그래도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진화라면 생물학적 진화를 우선 생각하게 된다.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문화와 사상과 의식과 영혼의 진화를 말한다. 언젠가부터 나는 인간이 변화하는 과정을 진보라는 어휘로 쓰지 않겠다고 나름 혼자서 결심한 터였다. 진보라는 말, 발전이라는 말, 이런 어휘 속에는 과거보다 나은 현재 현재보다 나은 미래를 그리게 되는데 과연 인류가 인류의 영혼이 발전하거나 진보하거나 심지어 진화하고 있다는 의미를 숨기고 있는 이 말들은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폭력과 억압과 온갖 보이지 않는 구조적 부조리와 불공평함들을 발전의 한 과정으로 인식하게 한다. 한 세기도 지나기 전에 겪은 숱한 홀로코스트 학살과 캄보디아 학살과 여전히 지구인의 1/6이 굶어 죽어나가는 동안, 꼼짝 없이 갇혀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채 꾸역꾸역 배불리 자신을 살찌우는 운명의 소들이 공존하는 세상을 1천년전 2천년전 혹은 문자 이전의 더 더 더 오래전 인류와 비교해서 진화라고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여기까지는 나의 생각이다. 저자는 진화를 문화적인 것, 영혼적인 것, 종교적인 것, 철학적인 것, 그리고 과학적인 것들과 함께 접목한다. 이 두꺼운 저서의 모든 페이지를 통해 책의 저자가 가장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은 '진화는 사실이다'라는 점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에는 진화론과 창조론 사이의 어쩌면 이미 논쟁의 가치조차 없는 해묵은 논쟁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진보와 보수, 자유와 억압, 최대의 부와 최하층민이 자유라는 이름으로 공존하는 미국 사회에서 창조론이 아직도 굳건히 버티고 있는 이유는 미국 설립이 청교도의 기독교 정신을 반영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유명 고등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지 않고 대신 창조론을 가르치는 곳이 있을 정도라면, 아직도 논쟁은 가라앉을 기미가 없는 모양이다. 가치가 없는 것에 자꾸 대꾸를 하면 이슈화가 되는데 아마도 이미 유명해진 리처드 도킨스가 자신의 개인적 신념인 무신론을 통해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자꾸 건드리면서 점점 더 확대되었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진화는 진보한다기보다는 두서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 진행된다. " ... 마이클 머피가 한 말이다. p114
이 말에 동의한다. 그리고 무작위성과 복잡성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이다. 저자는 다르게 생각한다. 괴퇴의 "진보는 그냥 일직선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진보와 후퇴가 거듭되는 나선형의 리듬을 따라간다"를 인용하며 역사상 심각한 후퇴나 걸림돌은 진화의 새로운 발전을 위한 배경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처럼 몇억년 동안, 후퇴가 발전의 전조가 된다는 경향이 들어맞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길게 보면 이런 후퇴가 발전으로 이어지는 경향이 우세했고, 그래서 인간은 지적이고 사색적이며 자의식이 강하고, 도덕적으로 깨어있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지적이고, 사색적이고 자의식이 강하고 도덕적으로 깨어있는(솔직히 인간이 도덕적으로 전보다 더 깨어있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삶을 발전으로 본다는 점이다. 이 점이 내 생각과 다르다. 그리고 책은 전체적으로 같은 맥락으로 쓰여졌다. 많은 철학자, 과학자, 영성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여 저자의 생각, 즉 인간이 어디론가 한 곳을 향해 가고 있다는 그 생각을 발전시킨다.
켄 윌버, 찰스 샌더스 퍼스 등 저평가되어온 철학자들의 사상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대우주 중심의 사고와 진화적 도덕성은 그들의 생각을 대변한다. 진화적 우주에서,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도덕성도 진화한다는 것이다. 르네상스에 참여한 고작 1천여명에 이르는 혁명적 선택으로 인해 미래의 초석이 된 계몽주의가 생겨났고, 그것이 다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어질 수 있었기에 미래의 구조가 되는 1천명에 의해 거대한 미래의 씨앗이 심어지게 될 것이라는 게 윌버의 생각이다.
저자의 생각은 더 나아간다. 종교적 신념이 왜 진화하는가 라고 묻는다는 것은 이미 종교적 신념이 진화한다고 믿는 사실에 근거한다. 종교적 신넘이 진화한다는 것은 세계관이 변화함에 따라 영적 종교적 경험을 해석하는 방법이 변화하는 것을 뜻하는 듯하다. 그는 종교 vs 과학, 신앙 vs 이성, 믿음 vs 미신, 논리 vs 이성, 초자연주의 vs 자연주의 식의 이분법을 경계한다. 진화와 영성이라는 '두 단어는 신의 유전자 또는 믿음의 본능을 찾으려 하는 종교적 충동의 진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속에서 만나게 되었다'며 새로운 진화적 영성을 정의내릴 때는 과거의 초월적인 상태나 신비로움과 같은 편견을 깨고 의식, 문화, 우주 속에서 궁극적으로 더 높은 목표를 향해 앞으로 움직인다는 것인데, 이러한 새로운 신성은 과거의 보수성에 갇히지 않은 신이며, 미래적이고 세상을 포용하는 신이라고 하는데, 맞게 이해했는지도, 또 그래서 무엇을 주장하려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인간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해답은 미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