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북
이산하 지음 / 양철북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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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강물이 여울을 만나 세고 빠른 물살을 만들어내는 열아홉.  짧은 시간의 선택이 인생 전부의 진로를 결정하고 기회와 고비가 교차하는 무자비한 시간. 우리는 모두 그 시간들을 겪어냈다. 그 여울목 시간 속에 각인된 역사의 풍광은 삶이 만나는 골목 골목 마다 가치가 되어 조용히 앞길을 비춘다. 80년대에 여울목을 만나는 청춘의 강물은 거칠고 빨랐다.  제도권 교육이 단절시켰던 역사와 처음으로 대면하던 그 시간 열병처럼 치러야 했던 성인식은 은폐된 진실과 처음 마주한 폭로의 자리였다.  알 바깥의 세상을 두드리는 젊은 혈기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으로 몸살을 앓았다. 활짝 열린 문 밖에서 추악한 세상을 준비되지 않은 맨 몸으로 맞선 격변의 80년대를 지나는 청춘의 누군가는 피흘리며 역사를 만들었고,  또다른 누군가는 그들의 피값으로 치러낸 민주화라는 열차에 무임승차했다.


알을 깨고 나온 주인공 양철북이 작품 바깥으로 나와 쓴 장편시 <한라산>은  작가 이산하 자신이었다. 고행과도 같았고, 순례의 길과도 같았고, 또한 낭만과 문학적 교감의 길이기도 했던 열아홉 여울목을 건너며 단단한 삶의 가치를 다져왔던 주인공 양철북은 책 바깥으로 알을 깨고 나왔을 때 거침없이 양철북을 두드렸다. 길 위에서 잔잔한 파동을 그리며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고, 스님과 양철북은 익살과 유머로 생을 탐구하듯 철학적 화두를 던진다. 권터 그라스의 <양철북>과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철북과 스님의 여행을 상징하는 주요 알레고리다. 여행은 철북에게 알을 깨고 나와 세상을 향해 양철북을 두드리기 위한 과정이다. 여행이 끝난 후, 작품 바깥에서 책이 아닌 진짜 세상으로 거침없이 뛰어들어간 80년대 역사의 그 현장 속에 생생하게 족적을 남긴 격동의 드라마, 진짜 이야기는 후기라는 형태로 독자들의 궁금증을 해소시켜준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철북은 아직 알 속에 있다. 19세라는 강의 여울목을 건너는 철북은 책으로 세상을 배웠다. 걸핏하면 책의 구절을 인용하며 마치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가 아는 세상은 책이라는 알 껍질 속에 갇힌 작고 보호된 세상일 뿐이다. 그리고 그는 그 알 속에 갇힌 아직 열아홉 소년, 양철북 속의 난장이이기도 하다. 소설 속을 나와 알깨기 신고식을 치르면, 작고 보잘 것 없는 힘으로 세상을 향해 힘껏 북을 두드려 세상 유리창을 부수고 모든 부조리들을 직접 상대하게 될 것이었다.  


둘은 걷고 또 걷는다. 별을 이불삼아, 풀꽃들을 베개삼아 섬진강변에서 야영을 하기도 하고, 힘겹게 오른 깊은 숲 속 암자에 사는 다른 스님의 거처에서 신세를 지기도 한다. 때로 수도원에서 만난 수녀님과 스님의 은밀한 과거의 썸을 상상해 보기도 하지만 특별한 사건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는다. 단지 서로의 과거를 만날 뿐이고, 그 과거의 인연이 현재의 새로운 만남을 맺고 떠나고 울며 다시 그것이 과거가 되는 순환을 경험할 뿐이다. 그리고 그 길속에서 나누는 책 이야기도 종교적 질문도 모두 인생이라는 길 위에 던지는 질문이고 이야기이다. 아웅다웅 티격태격 그들이 걷는 그 길 위에 모든 것이 있다. 


시간이 흐른 오늘, 양철북은 작가이기도 하면서 작가가 만든 허구의 인물이기도 하리라. 작가의 기억 속에 아로 새긴 열아홉 여울목의 경험은 그 이후 감내해야 했던 모진 수모의 시간들을 반추하더라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모으고 붙여 역사를 바꾸게 했던,  개인의 성공과 바꾸지 않았던 소중한 삶의 한 조각이었음을, 아름다운 시절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열아홉 여울의 아름다움이 드라마틱하고 생생했던 격동의 역사 한복판으로 양철북을 데려가지 않고, 다만 후기에 그 일을 언급한 이유일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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