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도미난스 - 지배하는 인간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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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에렉투스가 사라져가던 쓸쓸한 풍경을 생각해본다.  최초로 아프리카를 떠나 대륙으로 퍼져갔던 그들은 호모사피엔스가 출연한 이후 열등한 개체로서 추상적 사유와 언어와 도구들이 만들어내는 힘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한 채 유전자만을 전달해주고 멸망했다. 새로운 유전자로 명민함을 얻은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우주를 정복하고, 더는 정복할 것도 뭐도 없다면 이제 무엇을 바랄까. 생존경쟁에서 유리한 조건이 무언가를 차지하고 뺏고 가지려는 정복 욕망이라면, 자연을 정복하고 우주까지 이해한 우리가 눈길을 돌릴 곳은 이제 인간이다. 다른 사람의 몫을 쉽게 차지할 수 있는 능력. 그게 무엇이건 그것을 가진 자가 더 많이 가질 것이고 생존에 유리해지고 더 많이 번식할 것이다. 그 능력을 갖지 못해 빼앗기고 정복된 비능력자들은 호모 에렉투스이 사라져가던 날들처럼 조금씩 수가 줄고 멸종의 날을 기다리게 될 지도 모른다.  작가는 새로운 유전자를 가진 초능력자들이 호모 사피엔스들을 대체하게 되는 시간을 상상했다.  


초능력의 힘으로 다른 사람을 조정할 수 있다면 어디까지 가능할까. 오른쪽 손으로 왼쪽 눈을 파내. 네 아이의 목을 졸라. 자신의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도 명령만으로 그런 끔찍한 방법의 폭력과 살인이 가능한 것은 그 보이지 않는 힘이 타인의 의지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능력까지 부여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한쪽 눈을 파내고 어린 자식을 죽이는 끔찍한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흰원숭이들이라 불리우는 초능력자들의 한계 없는 막강한 파워를 잘 보여준다. 몸이 알아서 죽을 방법을 찾아내고,  침착해지는 방법을 찾아낸다. 숨쉬지 마. 명령을 들은 소년들은 숨을 참고, 죽어간다. 


명령은 자기 자신을 제어하는 데도 유용하다. 의지만으로는 절대로 되지 않는, 충동사라는 초능력을 이용한 자살은 끝없는 욕망의 충족이 얼마나 덧없고 허망한 것일지를 짐작하게 한다. 칼을 들고 덤비던 사람도 말 한마디에 무릎 꿇릴 수 있는 신적 능력은 오히려 삶을 권태와 무기력으로 몰아가고, 삶의 의지를 갑작스럽게 박탈한다. 죽어. 이 한마디면 쉽게 자신의 몸을 죽음으로 바꿀 수 있다. 이 얼마나 새털처럼 가볍고 쉬운 죽음인가. 가지고 가지고 또 가져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함.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 권태는 인간이 꿈을 품고 하나씩 이루며 살아가는 것의 즐거움을 빼앗기는 종류의 것을 말할까. 이해할 것 같기도 하다. 끝없는 절망과 끝없는 충족은 결국 죽음의 충동으로 만날 수 있다는 발상이  충족되지 않는 나약한 자아를 위로한다.


초능력이 인류에게 해가 될 것임을 알고 개인을 구속하고 정보와 조직을 독점하고자 하는 백원단, 악의 세력을 초능력의 힘으로 뿌리 뽑고 가난과 폭력으로부터 제3 세계를 지켜내고자 하는 저우환우와 그 둘의 계승자들은 모두 공동선이라는 목적을 가졌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은 다르다. 반면 철저한 개인주의자 천슈란은 백원단도 저우환우도 못마땅하다. 그녀에게 백원단의 활동은 정의의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고 자신의 파워를 약화시키는 악으로 읽히는 것이다. 행동주의자인 방바재단 측에게도 백원단의 활동은 위협이다. 악인으로 등장하는 천슈린이지만 개인의 파워를 제한하기 위해 정보를 독점하는 일에 반대하는 입장은 묘한 설득력을 갖는다. 

숨쉬지 말라는 명령에 스스로 숨쉬지 않아 발생한  죽음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공공의 선을 위해 개인의 파워를 무력화하고자 했던 백원단의 철학은 가치있는 것일까. 파워를 이용해 마약조직들을 무력화시킨 것이 더 옳을까, 그런 선의의 초능력 사용마저도 장기적 관점에서는 인류의 위협으로 보고 약화시키려 했던 백원단이 옳을까. 참으로 많은 질문들을 던진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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