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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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적으로 흐르는 시간은 불연속적인 조각의 기억으로 개인에게 남겨진다. 흐르던 시간 중에서 어떤 순간의 조각이 선택되고 남겨졌느냐에 따라 개인의 역사는 달라진다. 얇은 조각의 단서만으로 변형되고 윤색된 기억들은 그 개별적 인간의 역사가 된다.  남겨진 조각은 전체 맥락을 이해할만큼 충분히 많지 않으며,  순서 없이 섟이고 때로 부정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은 과거로 가는, 과거를 보는 유일한 수단이다.


삶 자체가 누군가의 기억이라면 어떨까. 달이 뜨지 않는 그믐날 밤 우주의 어딘가에서 날아온 미세한 '우주 알'이라는 입자가 남자에게 묻는다. 들어가도 도 돼?  응. 우주알을 받아들인 대가로 선물처럼 주어진 능력은 시간 사이를 맘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힘이다.  책장을 펼치듯 삶의 어느 지점으로도 순간이동할 수 있다면 나는 과거의 어떤 한 때로라도 돌아가고 싶을까? 바꿀 수도 없다면 무엇이 과거로 돌아가게 만들 수 있을까. 추억이라면 기억이 더 아룸답지 않은가. 후회할 과거는 바꿀 수도 없고 다가올 미래도 별에 새겨진 운명같이 피할 수 없는데.가까이 다가올 끔찍한 죽음을 안다면, 바꿀 수 없는 숙명을 어찌하면 좋을까.


용서했지만, 용서하지 않았고, 용서하지 않았지만 또 용서했던 모순 갈피갈피들이 세찬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스러질듯 부서질듯 위태롭게 죽은자의 어미의 삶을 지탱하게 하지만, 그것은 이미 죄값을 치른 남자에게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듯한 형벌었을 것이다. 끝내 자신의 죽음을 덤덤히 수용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본능적 모성애의 굴레만이 남아있을 뿐.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죽음이 덤덤할 수 있었던 이유가 속죄였을까 체념이었을까. 그 어떤 미물이라 하더라도 생명은 소중한 것이기에 벌을 받아야 했던 남자를 지켜보지만. 자식을 죽인 살인자에 대한 집착으로 남은 생을 살아가게 하는 유일하게 에너지를 얻어가는 어미를 이해하면서도 그 집착이 혐오스러웠다. 


살인자를 사랑하는 여자가 기억하는 기억의 조각은 진실과 떨어져있다. 가해자에게 가해의 역사는 없다.  피해만 남아있는 여자는 피해자다. 애초의 살인이 교내 따돌림과 폭력에서 기인했지만, 살인자를 사랑하는 여자가 실은 그런 학교 폭력의 가해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같은 충격이었다. 여자는 부정하지만 친구는 이를 재확인시켜준다. 맞어. 너 그랬어. 내가 누군가에게 인생을 바꿀만큼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은 퇴색된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그것은 나의 역사가 아닌 피해자만의 역사가 된다.  죽은자의 어미도 일진이었던 아들 형수를 사랑스러운 아이로만 기억한다. 


그러나 남자가 보는 과거의 시간은 기억이 아니다. 일부만 남겨진 윤색된 이미지가 아니다.  제본이 잘려 낱장 낱장 흩어진 책의 페이지처럼 선명하게 인쇄된 삶의 자락이다.  자신을 괴롭히던 일진을 죽여 죄값을 치르고 나니 이제 일진의 엄마가 그를 쫓는다. 그 앞에 놓려진 미래는 더 슬프다.  사랑을 향한 바람은 죽음과 함께 흩어질 것이다.  시간이 알고 있는 진실은 오로지 하나 뿐이지만 기억에 새겨지는 진실은 강렬한 감정을 일으킨 순간 뿐이기에 미래를 알고 있는 남자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 직전에 여자를 떠남으로써 여자에게 남겨질 남자에 대한 기억을 공포애서 구해낸다. 더욱 슬픈 건 일진 엄마의 자신을 위한 복수를 합리화시켜주기 위해 취한 행동이다. 스스로를 죽음에 내 맡기고도 모자라 사람들에게 거짓 기억을 심어 놓다니. 이것이 속죄였을까. 이렇게까지 철저히 자신을 버려야 했을까. 


기억 속의 어떤 일은 삶의 문맥 속에서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인지를 구분하지 않는다. 이 모든 끔찍하고 힘겨운 순간을 살아내고도, 다시 돌아가서 다시 또 삶을 살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이유가 있다고, 남자는 생각한다. 살인자라고 낙인 찍힌 그 힘겨운 삶을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 그것이 사랑인 것이다. 우리는 기억이 모두 필터링 하고 남겨 놓은 그 마지막 조각 그것만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만일 진실된 과거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기억과는 다른 진실과 마주해야 하는 부담을 갖게 된다. 돌아가게 된다면 무엇이 이유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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