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투자 사이클 - 자산 시장의 보이지 않는 진실
김영기.이재범 지음, 트루카피 감수 / 프레너미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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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온갖 대책을 다 쏟아 내어도 계속해서 아파트가 오르는 이유.. 쉽게 풀어 쓴다면 유동성 자금(달러)이 투자처를 찾아 흘러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집값을 수요 공급의 법칙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한국의 부동산 가격은 국제 부동산 가격과 동반 상승 하락한다. 문제는 저자들이 '비핵심대출'이라 불리는 유동성 달러가 이런 저런 방법으로 알게 모르게 부동산 금융에 스며들고 있기 때문인 것인데 문제는 이러한 유동 자금은 밤나방처럼 약간의 빛만 보여도 몰려들지만 위험신호가 감지되면 서민들에게 치명적인 고통만을 남기고 잽싸게 가장 먼저 떠나버리면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큰 줄기는 결국 이런 내용인데 더 전문적인 용어로 알아듣기 쉽게 같은 내용을 여러 챕터에 계속 반복해서 설명한다. 집을 사야할까 말아야할까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모두 개별적인 스토리가 다르기 때문에 결국 결정은 자신이 해야 하지만 수요 공급의 법칙 만으로 앞으로 인구가 줄 테니.. 라는 안이한 마음으로 집을 안사기로 한다거나 강남불패라는 미신을 신앙으로 정하고 만일 버블이라면 그게 언제 어떻게 터질 지 모르는 버블에 전재산과 미래재산까지 몽땅 거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다.

비교적 충실한 내용에 비해 이 책에 대한 별점이 짠데 일부는 경제전문부분에 부정확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고(이 부분은 내가 몰라서 뭐가 잘못됐다는 건지 모르겠고) 또 별거 아닌 내용 예전에 미네르바나 여러 자칭 경제 전문가들이 늘 했던 내용을 새로운 것인양 말한다는 것인데 시대가 변하면 모든 경제 제재나 규칙 흐름 정세들도 바뀌니 경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업데이트되어야 하고 그게 결국 예전에 여러 번 휩쓸었던 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더라도 또다시 되풀이되는 순환이라면 또다시 돌다리를 두들겨봐야 할 것 아닌가. 가장 큰 불만은 그래서 어디에 투자하라는거야? 하는 투의 불만인데 드러누워서 누가 먹여주는 떡을 먹다가 목에 걸려 캑캑대어도 호소할 곳 없는 나는 ㅇㅇㅇ해서 10억 벌었다 라는 식의 일화성 자기 운빨 자랑 스토리를 책이라고 써 놓은 제목의 책을 사는 것이 좋겠다. 세상에 책에서 (교과서처럼) 알려주는 부동산 사이트 투자(투기)로 돈을 벌 수 있게 그렇게 경제라는 놈이 만만하다면 정부에서 집값 잡겠다고 그롷게 용을 써도 안잡히는 게 다 쇼라는건가.

아 그리고 집값이 오르는 건 이명박근혜 정부에서 부동산 경기를 부흥시키기 위해(왜 ?) 노무현 정부에서 실시한 (성공적인) 규제들을 차례로 하물어뜨리고 부쉬고 망가뜨린 결과가 달러 유동성 자금의 흐름으로 맞불이 붙은 결과다. 수출도 잘되고 주택대출이 아니어도 전세자금 대출이니 전세니 하는 여러 단계를 통해 해외 유동성자금들이 흘러들어오고 있다는 것. 저자들은 그렇다고 현재의 집값 상승을 딱히 거품으로 보지도 않는다. 주식에 비해 부동산 가격은 안정적이지만 수익은 낮은 편이다. 급등 기간이 오면 정부가 발빠르게 온갖 규제정책을 펴고 다시 안정세로 돌아서는 사이클을 반복하기 때문에 장기로 봤을 때는 물가 상승률에 비교해서 현금을 가지는 것보다는 훨씬 높고 주식보다는 훨씬 안정적인, 그러니까 적당한 수익률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노년으로 갈수록 부동산 자산을 선호하는 것이다. 


내 생각. 언젠가는 꺼질 거품일까? 일본 모델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면 언젠가의 시점부터 향후 수십년간은 빈집이 속출하는 부동산 정체기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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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스트리밍 서비스를 넷플릭스에서 프라임 비디오로 갈아탔다. 넷플릭스를 처음 접했을 땐, 이게 웬 신세계인가 했는데 장기 시즌의 시리즈 몇 개를 징하게 밤을 패며 몇 번 봤더니 언젠가부터 재밌는 거 취향에 맞는 거 찾아서 이것 저것 조금조금씩 맛보기 하느라 정작 보는 거는 없고 시간만 낭비, 이게 마치 수백개 채널 채널만 돌리다가 정작 아무 것도 못보는 케이블 티브이 시청(?)이랑 다를 바가 없게 되고, 요즘엔 그마저도 거의 안보게 되더라고. 아님말고 거짓정보로 가득찬 뉴스 채널 안보이는 청정 지역은 유튜브로 정착이 되어가는 중인데. 아 그 이유가 있다. 얼마전 바꾼지 얼마 안되는 SKB 수신기를  교체했는데, 그 이유는 수신기에 유튜브 앱이 내장되어 있어서였다. 리머컨에 마이크가 있어서 음성인식도 잘 먹는다. 구글 어시스턴트까지 있어서 날씨나 환율 이런 루틴한 거 물어보면 잘도 대답해준다. 어쨌든 유튜브만 보다 보니 넷플릭스에 매달 1만 5천원씩 내는 돈을 유튜브 프리미어에 내고 넷플릭스를 끊는게 낫겠다 싶었는데... 어쩐지 이게 용기가 필요하더라구.. 그러니까 넷플릭스를 끊는데 웬 용기가 필요한가. 그 이유는 나도 모르겠지만 구독해제 해야지 해야지 몇달씩 벼르면서도 그걸 실행하기가 참으로 힘들더라는. 


이유를 생각해보니 대략 이렇다. 갑자기 넷플릭스의 컨텐츠가 보고 싶어지면 어쩌지? 하는 마음이다. 예를 들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코미디 프로인 빅뱅이론은 가족이 별로 즐기는 거 같지 않아 혼자 있을 때만 봐야 해서, 못본 에피소드도 많고 또 좋아하는 컨텐츠니 아껴 두었다가 봐야지 이런 생각. 예전에 아주아주 재밌게 봤는데 나중에 또 봐야지 하면서 흐뭇해 하고 있던 드라마들 예를 들어 '프랜즈' 같은 것들이 마음을 흐뭇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 등등이다. 게다가 얼터드 카본 시즌 2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책을 먼저 읽으려고 못보고 있었던거다. 이런 저런 이유들 때문에 구독해제하지 못하다가 결국은 실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프라임 비디오였다.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에서는 필립 K 딕의 <높은 성의 사나이>에서부터 닐 게이먼의 <멋진 징조들>과 <아메리칸 갓>, 제임스 쿄리의 <익스팬스> 등 몇몇 선호하는 작가들의 원작을 기반으로 한 드라마 시리즈들이 포진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필립 K 딕의 단편들을 원작으로 한 <일렉트릭 드림>은 프라임 비디오를 구독하는 첫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넷플릭스에서 가장 선호하는 프로그램을 꼽자면 <블랙 미러>와 <러브 데스+로봇>인데 일찌감치 다 봐버리고 새시즌을 기껏 기다렸더니 고작 4에피소드 밖에 안돼서 실망했는데, 원작까지 있는 <일렉트릭 드림> 10편은 원작 영문=>번역본=>드라마 순서로 아껴아껴 보면 아주 즐길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게다가, 넷플릭스처럼 1달 무료 정책은 아니지만 첫 6달까지는 매우 저렴하다. 얼만지 생각 안나는데 커피 한 잔 값이다. 막상 구독을 하고 뚜껑을 열어보니, 컨텐츠가 넷플릭스에 비하면 손에 꼽을 수 있을만큼 몇 개 안되고 미미하다. 괜찮다. 이제 구독을 갈아타는 용기를 내는 법을 알았으니 언제든 넷플릭스로 돌아가거나 왓차 혹은 디즈니에서 서비스 계획이라는 것도 출시되면 그걸로 갈아탈 수 있으니까.


고대하던 일렉트릭 드림을 손에 넣고, 국내에서 출간된 필립 K 딕의 책은 다 있으니 이제 원작을 찾기만 하면 되는데, 없는 게 많다. 5권의 영문 원작 단편집에도 안보이는 게 많다. 특히 드라마의 첫 에피소드 Real Life부터 꽉 막혔다. 출간 목록을 뒤져도 그런 책이 없는 거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제목을 바꾸었던 거다. 그걸 어떻게 알게 되었냐면, 일렉트릭 드림이라는 동일 제목의 필립 K 딕 컬렉션이 이미 출간되었더라는 거다. 약삭빠른 출판사들이 원작이 있는 걸 드라마로 만들었는데 하나 하나 찾아다니도록 놔둘 리가 없다. 목차와 리뷰들을 뒤져보니고야 작품 Real Life는 제목이 바뀌었다는 걸 알았다.  영문판 위키를 먼저 찾아봤으면 더 좋았을 것을. 


일렉트릭 드림에서 차용한 PKD의 원작품들은  컬렉션 도서는 국내 폴라북스에서 출간된 몇몇 개의 단편집에 일부 수록되어 있는데, 이게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에서 우선 맞춰볼 작정이다. 도서 컬렉션인 일렉트릭드림의 번역본은 나오지 않았고, 영문판 역시 크레마 판으로는 구하기 힘들고, 구글 도서에도 없지만, 아마존에서 킨들 에디션을 구할 수 있으며, 오더블 오디오북으로도 들을 수 있다.가격은 9.99 정도이다. 오더블도 멤버쉽으로 듣는 거 같으니까 오디오북 20불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고.  드라마는 영국의 채널4에서 2017년부터 송출하기 시작해서 2018년에 10편의 에피소드로 종료했다. 시즌이 더 나오면 좋을텐데.. 


물론, 20세기에 쓴 미래 소설을 21세기에서 상상 가능한 미래로 바꾸려면 원작의 내용이 시대를 잘 반영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10개 에피소드 중 일부만 원작 및 번역본과 비교해 봤는데, 어떤 소설의 원작을 영화화했다기 보다는, 아이디어에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 편이 더 맞다.  단편 원작과 드라마를 맞춰보자.


 Script title 원작 타이틀번역 타이틀/ 번역서 타이틀(출판사) 
 1) Real Life Exhibit piece   
 2) The Commuter 동일 통근자 / 마이너러티 리포트(폴라북스) 
 3) The Impossible Planet 동일  
 4) The Hanging Stranger Kill All Other 
 5) Crazy Diamond Sales Pitch 자가 광고 / 마이너리티 리포트(폴라북스)
 6) The Father thing  동일  
 7) The Hood Maker 동일 머리띠 제작자/진흙발의 오르페우스
 8) Safe & Sound Foster, You're Dead 포스터 넌 죽었어 / 마이너리티 리포트 
 9) Human is 동일  
 10) Autofac Autofac  


역시 폴라북스 번역본 3권에 포함되지 않은 게 많다. 위즈덤 커넥트에서 나온 짧은 이북들도 대충 훑어봤는데 없는 거 같다. 원작도 여러 컬렉션에서 섞여있는 것 같고, 대표작 컬렉션에 없는 작품도 있는 것 같으니, 굳이 이 시리즈를 작품과 같이 읽고 싶다면 시리즈 컬렉션 도서인 <일렉트릭 드림> 을 구해서 (사전 찾아가며) 읽는 게 답이다. 


프라임비디오 구독을 시작하자 마자 가장 먼저 본 에피소드는 The commuter다.  내 경우, 여름에 필립 K 딕의 폴라북스 작품집에서 통근자를 이미 읽어서 내용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기억이 안나더라. 그래서 다시 읽었다. Hood maker도 머리띠 제작자라고 번역본이 눈에 띄어서 읽으면서 봤다. 실은 먼저 책을 읽고 비디오를 보면 딱 좋은데, 그렇게 하려고 작정을 하고 먼저 책을 읽다가 보면 다 읽기도 전에 비디오를 보게 된다. 이해가 잘 안가거나 시각적 상상력이 부족해서 문맥 파악이 안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다. 


두 편을 각각 책과 비디오로 본 인상은 두 작품은 크게 다르다라는 점이다. 작품의 제작자들도 에피소드별로 달라서 분위기나 작품의 색상, 작품적 질도 다양한 거 같다. 책을 읽고 비디오를 보는 것의 가장 큰 재미는 이 내용을 어떻게 변주하고 해석했느냐를 비교하는 것이다. 책을 읽을 때에 떠오르는 인물 배경 및 작품 전체의 이미지는 독자들의 머리속에서 독자들의 경험과 감성에 크게 의존하지만, 이게 드라마가 되었을 때에는 제작자들이 해석한 인물의 성격, 행동 풍경과 이미지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생각은 책에서 하고 행동은 화면에서 한다. 전반적으로 마초적인 PKD의 소설들에 여성 인물들을 부각시킨 점, 20세기적 과학적 상상력을 21세기의 새로운 기술들을 바탕으로 새롭게 창조한 점 등 전반적으로 에피소드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블랙미러와 매우 비슷하지만 블랙미러의 새로운 테크놀러지 위주의 환하고 빛나는 화면에 비교하면 디스토피아적인 침울하고 어두운 분위기에 레트로하다.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 <마이너러티 리포트> 등 주옥같은 명불허전의 영화들이 필립 K 딕의 원작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졌고, 드라마 계에서도 다른 어떤 작가보다 필립 K 딕의 작품이 특히 많이 제작되었고 있다. 필립 K 딕의 무엇이 그렇게 만든걸까. 게다가 쓰여진지도 한참이나 지나 과학적 상상력의 디테일이 시대에 한참 뒤떨어져있을 수 있는데. 다른 작가들도 많은데.. . 내 짧은 견해로 보면, 그의 모든 단편들은 매우 압축적이다. 짧은데 거기서 파생될 수 있는 이야기의 종류가 많은 것이다. 그를 작가들의 작가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새로운 상상력이 부족한 현대의 드라마 영화 작가들은 물론 상상력이 풍부한 SF 소설가들에게조차 그의 작품에 깃들어 있는 무궁무진한 상상력은 작품의 상상력의 영감이 된다. 심지어 르귄의 <하늘의 물레>는 필립 K 딕이 쓰지 않은 필립 K딕의 가장 훌륭한 소설이라고도 말해지고 있다(출처 토머스 M 디시 -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서문 중, 폴러북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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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을 만든 기막힌 우연들 - 우주.지구.생명.인류에 관한 빅 히스토리
월터 앨버레즈 지음, 이강환.이정은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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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히스토리는 거의 전 분야의 과학을 비롯하여 역사와 인류학을 총망라하는 여러 줄기의 학문을 서로 연결시켜 총체적으로 거시적으로 역사와 우주를 바라보는 학문이다. 시작은 늘 빅뱅부터다. 학문과 학문 사이에 존재하는 갭과 간극을 좁혀, 서로 연결된 관점에서 해당 학문들의 존재의 이유와 가치를 전체적으로 맥락에서 바라본다.  잴 수도 없고, 어림해서 숫자로 표기해도 그 개념조차 아득해, 억겁인 시간과 공간은 앞으로도 뒤로도 나와 내가 아는 모든 것들을  순간적이고 찰라적인 존재로 만든다. 빅히스토리를 읽을 때, 안하던 사색의 틈으로 빠지게 되는 이유이다. 


우주는 넓고, 시간 또한 광할하여 빅히스토리가 다루는 것 역시 우주의 먼지만큼이다. 각각의 학문의 영역에서 아주 간략하게 빅히스토리를 바라볼 때, 당연히 각각의 디테일이 소홀히 다루어질 수밖에 없음을 빅히스토리의 창시자라 일컷는 데이비드 크리스천 역시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각기 다른 영역의 학문을 빅히스토리적 관점에서 볼 때 조금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국내외 과학 저술 분야중 가장 잘 나가는 분야는 (내 생각에) 생명공학과 두뇌 과학 정도라고 생각된다. 간혹 우주나 물리 등을 알기 쉽게 저술한 책도 종종 보인다. 하지만 지질학이라면 ? 글쎄 누가 돌덩어리에 그리 관심이 많겠는가. 내가 학교다닐 때는 지구과학이라고 불리던 과목과 연결되기 때문인지, 선뜻 지질학 관련 대중 과학서가 나온다고 해도, 별로 관심이 생길 것 같지가 않다.  그게 그거 같은 돌멩이들의 이름과, 외우기도 어려운 지질연대표에 등장하는 트라이아스가니 실루리아기니 데본기니 하는 부르기도 어려운 이름과 각 시대들의 특징들이 그닥 흥미를 일으키지 않았던 기억 때문인가.


그런 인식의 지질학이 빅히스토리와 만나니 급 흥미가 생긴다. (이 책이 지질학 책은 아니며, 빅히스토리를 다룬다.) 이제껏 내가 접한 보잘것 없는 빅히스토리 독서 목록에서는 주목하지 않았던 지구적 차원의 빅히스토리가 인류 문명과 역사의 맥락과 함께 해석되어 있는 점이 흥미로왔다. 45억년의 지구적 관점의 시간은 100만년이 기본 단위이다.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의 출현 시기는 고작 십여만년 전이라니 지구 역사에 있어서는 기본 시간 단위로 표기 불가능할 만큼 짧은 순간에 번성했을 뿐이고, 보노보 침팬치와 같은 유인원과의 분화도 겨우 5~6백만년  전이니, 우주 속 지구가 지금이 아닌 어느 다른 단위의 시간을 흐를 때 쯤이면 전혀 다른 종으로 바뀌어 있거나 사라져 있을 것을 생각하면 인생무상이 실감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맨 처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정말 알지 못한다.



지구는 특별한 행성이다. 지구가 어떻게 생명을 품게 되었을까. 지구 탄생 당시 태양계의  대부분이 수소와 적당햔 양의 헬륨, 그리고 극소량의 다른 모든 원소들의 배합이었던 것에 반해, 지구에는 산소, 마그네슘, 규소, 철 이 네 원소가 월등히 많고 나머지는 우주의 원소 구성에서 우위를 점하는 수소와 헬륨을 포함해서 모든 다른 원소는 극히 미량만 존재한다. 즉, ‘지구는 태양계에서 희귀한 원소들 중 몇 가지를 선별적으로 축적했다(p76)’. 그리고 그 물질들이 바로 지구 역사상 한 줌도 안되는 기간 동안 인류의 진화를 촉진하고 문명을 탄생시키고 우주를 이해하는 능력을 탄생시킨 것이다.


저자는 인간을 구분하는 많은 특징 중 도구, 인공물질, 그리고 컴퓨터 세 가지를 꼽는다. 도구는 자연적인 손과 몸이 할 수 없는 것들을 하게 해주고, 인공물질은 자연물질로는 불가능했던 일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컴퓨터는 우리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을 할 수 있게 해주는데,  이러한 세 가지 특징을 석기, 유리, 컴퓨터 칩 세 가지를 예로 들며 각각이 지구가 가장 선호한 네 가지 물질 중 하나인 규소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규소는 컴퓨터 칩을 만들고, 유리를 만들고, 또 인간의 초기 도구인 석기 도구들을 만든다.  날카로운 석기 도구를 만들기에 가장 좋은 물질 중 하나가 바로 규질암이인데, 지구는 규소를 축적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규질암이 있었기에 석기 시대의 도구가 가능했고, 그로 인해 촉발된 도구의 사용이 인간의 뇌와 지성이 발달을 촉진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지구는 철과 마그네슘과 같은 주요 원소와 우리 행성에 있는 소량의 모든 원소들에서 이산화탄소를 분리해내는 생물학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알고 있다.


생명의 탄생 역시, 다른(other) 행성과는 다른(different) 지구의 조건과 작용으로 가능해졌다는 관점을 유지한다. 진정세균과 고세균은 우리와 이들 세균이 서로 다른 것 만큼이나 다른데,  우리가 알고 있는 광합성을 하는 것도 있지만, 철, 질소, 황에서 뽑아내는 에너지를 이용하여 살아가는 미생물도 있다. 열수구에서 탄생한 초기 생명체가 광합성 대신 철, 질소, 황 등을 먹고 살았다. 그것들에게 산소는 치명적인 독이었기에 광합성의 부산물인 산소가 많아지자, 생태계가 교란되었다.  이것은 정말로 놀랄만하고 흥미로운 관점이다. 오늘날 산소부족과 이산화탄소 배출과 관련된 환경문제적 관점에서 볼 때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지구적 관점의 시간 유닛으로 볼 때는 그렇다. 결국 ‘우리는 산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진화한 미생물의 후손이다(206)’.  산소는 또한 산업 문명이 크게 의존하는 엄청난 양의 철광석 만들어내게도 했다.


드문 지구 가설이라는 것이 있는데, 단세포 생물이 다세포 동물로서 공존하기까지 30억 년이 함께 걸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확률에 당첨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30억년동안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다세포 동물로의 진화가 30억년만에 일어났다는 것은,  생명이 필연적으로 진화해 나가는 단계가 다세포 동물이 아닐 거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고, 아울러 외계 생명체가 있다면 단세포 생물일 가능성이 많다. 광합성을 하는 생명체 역시 드문 가설이라면 산소의 발생 역시 지구에만 있는 특징이 될 거 같은데, 그렇다면 지구인보다 더 진보된 과학 문명을 이룩하여 지구로 여행한 외계인이 있다 하더라도,  산소호흡을 할 가능성이 없으므로 지구가 무력으로 정복하고자 할 만큼 쓸모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까마득한 산소 호흡 조상이 다세로포 진화한 후, 생명체는 다양한 형태의 몸으로 진화했는데, 가장 오래된 형태는 해면동물, 산호초 , 해파리와 같은 방사대칭을 띄고, 우리 선조들은 이런 단순한 형태에서 다양하게 분화되어 좌우대칭을 몸이 되었다. 좌우대칭의 얼굴과 몸은 ‘6억년 전에 갈라져 나와 지금까지 이어져온 몸의 역사적 기록을 보고 있는 셈이다(p210)’.


지질학자가 쓴 빅히스토리의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지각의 변화에 대한 내용이다. 100만년 단위의 시간 속에서 찰라에 불과한 인류의 기록 역사 속에서 지구는 당연히 정지된 것으로 보이지만, 대륙 이동은 계속되고 있는데, 끊임없이 판과 판이 서로 밀어 붙이고 멀어지고  찌그러뜨리고 새로 생성하는 동안 해양 지각이 생기고 없어지고 산맥이 형성되고 퇴적되는 일련의 작용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교과서처럼 딱딱하지만, 1444년 사하라 사막의 남쪽 경계가 되는 녹색 곶인 카보베르데에 도착한, 항해자 엔히크 왕자에게 지원을 받은 포루투갈의 탐험가들은 ‘지금은 적도 근처이지만 4억 5천만년 전인 오르도비스기와  실루리아기에는 남극점이 었던 지점에 있었다(p234)’. 1960년대 초 오르도비스기 빙하의 잔해를 알제리 사하라 사막의 중심부에서 처음으로 발견했던 대륙이 움직일 리가 없다고 믿던 시기였다. ‘빙하의 잔해는 아프리카가 속해 있던 초대륙 곤드와나가 얼어붙은 남극점을 지나 이동하던 시기에 대한 지구의 기억이다.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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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맛있을까 - 옥스퍼드 심리학자 찰스 스펜스의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음식의 과학
찰스 스펜스 지음, 윤신영 옮김 / 어크로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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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트로피직스Gastrophysics 는 미식학과 물리학 Gastronomy와 physics를 합성한 단어로 음식의 맛을 뇌과학과 심리학 등등의 과학과 융합하여 연구하는 새로운 분야로 책의 원제이디도 하다. 똑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다른 맛을 느끼는 조건은 뭐니뭐니해도 배고플 때 먹는 거겠지만 그런 기본적인 조건 말고도 맛 이외의 감각과 함께 결합하면서 더욱 풍성한 맛과 맛에 대한 기억을 창출해낼 수 있다.


저자의 연구실에서는 이렇게 어떤 그릇에 먹느냐 혹은 어떤 소리가 나느냐와 같은 것들을 연구한다. 요리 방식이나 재료와 같은 맛을 느끼게 하는 조건이 아닌 맛을 느끼는데 영향을 끼치는 외부적인 요소들 말이다. 먹는 일는 모든 인간에게 매일 하루에도 여러번씩 일어나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다. 그 욕망은 어떠한 형태로든 해소하는 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우리의 먹는 행동은 대개 만시간의 전문가 법칙에 필요한 수행 시간을 만족시켰을 것이며 따라서 누구든 먹는 것에 있어서는 전문가들이다. 하지만 그 전문성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개인적 기호가 기준이어서 자신만을 충족시킨다. 자기 자신을 위한 전문가인 셈이다. 내가 맛있게 느꼈다고 해서 남들도 똑같이 느끼리라는 법이 없기에 이런 학문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저자가 한국에 왔을 때 미슐랭 별을 받은 냉면집에 함께 갔다가 긴장했다단 이야기를 듣고 일단 서양과 동양의 외식문화의 차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책에서 언급하고 저자들의 연구 결과를 공유하는 영국의 팻덕 레스토랑과 스페인의 무가리츠와 엘 셀러 드 칸 로카, 스웨덴 교외의 페비켄 등의 레스토랑은 우리 같은 일반인은 꿈도 꿔보지 못할 만큼 대단히 비싼 고급 레스토랑이고 평양 냉면집은 미슐랜 스타를 받았다고는 하나 메뉴 자체가 누구든 들어가볼 수 있는 수준의 가격이 예상되는 식당 아닌가. 사실 식당과 레스토랑은 다르고 밥 한끼 제공하기 위한 일반음식점에서 맛과 분위기보다 더 많은 걸 기대한다는 게 무리다. 

이 책이 제공하는 것은 음식과 함께 제공하는 분위기, 소리, 식기의 질감과 색, 서비스, 음악, 냄새 등등이 얼마나 맛에 영향을 느끼느냐를 연구한 내용들이다. 이와 곁들여 그런 결과들을 실제로 구현한 실제 레스토랑의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한다. 밥을 떠먹여준다는 레스토랑에서부터 연극 공연인지 레스토랑인지 구분이 갈 수 없을 만큼 식문화가 하나의 체험 문화로 바뀌고 있는 추세도 엿볼 수 있다.

일상 생활에서 맛을 풍성하게 느끼는 가장 쉬운 방법은 공감각을 이용하는 것이다. 시각적 효과는 일반적인 레스토랑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흔히 쓰는 발법이다. 예쁜 그릇에 맛있어 보이게 플레이팅을 하고 깔끔한 식탁보릉 씌우고 무겁고 좋은 수저 세트를 사용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같은 음식이라도 무거운 식기와 커트러리 세트에 담으면 맛있어 보이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분식집이나 저렴한 식당에서 쓰는 플라스틱 식기가 주방의 서빙과 설겆이 등 노동과 가격까지 줄여주는 데에는 고객에게 같은 음식이라고 하더라도 덜 맛있게 느끼게 만드는 대가를 지불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면 맛에 들이는 정성 만큼 식기류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메뉴에 붙인 이름도 맛의 감각에 영향을 미친다. 심해에서 잡힌 파타고니아 이빨고기였을 때 팔리지 않던 생선의 이름을 칠레산 농어로 바꾸자 인기 메뉴가 되었다. 파스타 샐러드를 파스타를 곁들인 샐러드로 이름만 바꿔도 건강요리로 변신한다. 슈퍼마켓에서 판매하는 제품에 가짜 농장의 이름과 가짜 생산자의 이름만 붙어도 소비자는 그 음식의 가치을 더 높게 평가한다.이름과 라벨에서 브랜드와 가격까지 음식을 먹기 전에 접하는 각종 정보는 뇌의 특정 영역을 자극해 맛을 다르게 느끼게 한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 우리는 모두 다른 미각의 세계에 살고 있다. 특정 분자를 후각적으로 느끼는 유전적 변이의 다양성으로 인해, 어떤 냄새에는 민감하고 어떤 냄새는 후맹인 사람들의 여러 조합으로 구성된 인간 사회는 그 유전적 변이의 다양성 만큼이나 같은 음식을 다르게 느낀다. 고수에 대한 호불호에서 특히 큰 차이를 볼 수 있는데 어떤 고수에서 감귤처럼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고 하는 사람과 절대로 먹고는 싶지 않은 비누 냄새가 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극단적 차이가 유전적 차이에서 비롯되었을 거라는 추측이다. 맛에 대해서는 특히 쓴 맛에 민감한 집단이 있는데 진화의 역사에서 독성을 가려내기 위해 그런 쓴 맛에 대한 민감도를 증가시켰을 거라는 견해다. 

또한 미뢰는 아주 낮은 온도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찬 청량음료를 실온에 두었다가 마시면 몸서리치게 달게 느껴진다고. 식품 회사들은 단맛을 내기 위해 바닐라 향을 첨가한다. 이제 아이스 커피에 그토록 많은 양의 설탕을 넣는 이유를 알겠다

그닥 집중이 요구되는 책은 아니었으나 막상 리뷰를 쓰려니 뭐라도 제대로 기억나는 게 없어서 아쉽다. 식당을 운영하고 있거나 할 계획이라면 필수로 읽기를 권하다. 일반인에게는 매일 먹는 먹거리의 맛을 먹거리 그 자체가 아닌 다른 요소로 느끼는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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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책을 읽은 이유는, 책 속의 어떤 이상화된 가상의 인물과의 만남이 설레임과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영원히 삶을 지배할 것 같은 학업이라는 억압과 굴레 속을 지나가고 있을 때, 문득 문득 불빛처럼 책 속의 인물들과 교감하고 있었다. 창조된 인간의 내면과 상상적 교감이 기성 세대가 기대하는 ‘꿈’과 ‘미래’에 어떤 부정적인 역할을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어른이 보기에는 달갑지 않은 책읽는 모습과 공부하는 모습이 겉으로는 거의 비슷해 보인다는 점 때문에, 공부하지 않으면서 압력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도 했다. 외우지 않아 받은 불이익은 곧바로 성적표에 나타났지만, 읽는 대신 외웠다면 한없이 더 궁핍했을 가장 활발할 나이의 정신적 활동을 책이라는 매체가 풍요롭게 해준 건 분명했다.


최근에 책을 읽는 이유는 좀 다르다. 아마도 예전에 받았던 그런 느낌, 책 한 권을 끝내고 나서도 인물들은 계속해서 마음속에 살아서 나와 함께 밥을 먹고 돌아다니고, 말을 걸고 하던 무엇인가가 가슴을 가득 메우고 풍부했던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 때문은 아니다. 하지만 가끔은 그런 책을 만날 때가 있다. 책 속의 인물이 너무나 생생해서 책을 덮고도 한동안 나를 떠나지 않는 인물이 만든 책. 모스크바의 신사 로스토브 백작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이 한 사람에 대한 나의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이토록 서론이 길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을 뺀다면 내용은 크게 설명할 게 없다. 2천만명이라고 했던가 2백만명이라고 했던가 아직도 믿기지 않는 수의 목숨이 스탈린 치하에서 전쟁과 숙청으로 학살 되고 있을 때 구시대 인물(귀족)의 자택감금은, 그 이후 백작의 수십년간 감금 기간 백작의 지인들에게 일어난 일에 비하면 오히려 사치에 가까운 처벌이었다. 그의 대저택은 이미 인민의 이름으로 접수했을 테고, 4년째 스위트룸에 묶고 있던 백작의 거처는 종탑의 작은 다락방으로 옮겨진다. 다행인건가. 그가 묵던 메트로폴 호텔은 모스크바 최고의 호화 호텔로, 최고급 식당과 대중적 식당, 바, 세탁소 상점 등의 편의 시설들이 입점해 있어 남의 도움이 없어도 생활에 그닥 어려움이 없어보인다. 하지만 호텔 문을 한 발작만 나가도 그는 바로 총살된다.


소설의 제목에 신사라는 말이 쓰였는데, 신사와 영국신사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신사라는 이미지가 속을 알 수 없는 이중적 모습이 연상되었지만 로스토프 백작의 신사다운 면모는 신사의 정의를 새롭게 원위치시킨다. (자신도 동의했던) 시대의 요구에 의해 새롭게 태어나는 러시아와 시대의 배반을 종신구금형이라는 결과로 받아들이는 태도만으로도 소설의 도입은 독자를 로스토프 백작의 정신세계로 깊이 이입시킨다.


니나와의 만남과 자연스런 이별, 우연히 돕게 된 여배우와의 하룻밤 정사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재회와 사랑, 최고급 식당의 웨이터로 일하게 되고, 식당 삼총사들과 맺는 작고 충직한 관계들, 재봉사를 비롯한 호텔 직원들과의 자잘한 관계들. 이런 이야기들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와중에, 일생 일대의 가장 큰 사건이 생긴다. 호텔 감금이 시작된 초창기에 열세살 소녀였던 니나가 청년당원을 만나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됨과 동시에, 그 남편이 체포되어 행방을 찾기 위해, 6살 소피아를 잠시 맡기기 위해 찾아왔다는 점이다. 조용하고 착한 아이지만, 아이는 아이. 가뜩이나 좁은 방에 어린 아이 한 명이 차지하는 공간은 예상을 넘어서고, 그동안 만들었던 고요한 생활의 질서는 깨어지고, 아이를 다룰 줄 모르는 백작은 쩔쩔맨다. 한 달 후에 찾으러 온다던 니나의 행방은 묘연해지고, 감금 초기 그를 늘 찾아던 둘도 없는 친구 미시카는 시베리아 유형에서 돌아와 몰래 그를 만나러 오는데, 그가 하는 말이 가슴을 친다. 알고 보니 자네가 가장 운이 좋았다는 것.


잔잔하게 이어지지만 지루할 새 없이 자잘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와중에, 미시카의 죽음과 함께 밝혀지는 비밀이 있고, 백작에게 사실상 딸이 되어 훌륭히 자란 소피아가 피아니스트가 되는 과정, 오랜 시간 감금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듯했던 백작이 드디어, 딸의 장래를 위해 위험하고도 대담한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기는 장면 등의 클라이맥스와 안도감으로 맺는 결말이 찾아온다.


몇몇 장면은 영화에서 본 것처럼, 혹은 현실에서 만난 것처럼 생생하고 또 몇몇 장면은 잊지 못할만큼 감동적이다. 니나가 마스터 키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던 장면, 백작이 처음으로 자신의 낡은 바지를 세탁소에 가져가 재봉사에게 바느질을 배우면서 둘이 주고받는 정겨운 대화들, 자살하려고 종탑 지붕에 올라갔다가, 우연히 만난 직원과의 해프닝, 두 마리 개를 컨트롤 하지 못해 쩔쩔매는 여배우와를 돕던 첫 만남, 그렇지만 백작의 인생에 가장 큰 변화를 주는 사건은 니나가 아이를 데려와 맡기는 장면인데, 이 장면은 러시아의 설원에서 러시아 혁명을 비판적 시각으로 보여준 서구 영화, <닥터지바고>적 비애를 연상시킨다. 똑똑하고 철두철미한 공산당원으로 성장한 니나는, 당에 충성하고 열성적인 모습으로 비처지는데, 결과는 결국 남편의 숙청으로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태로 전락하고 만다.


니시카의 말이 옳았다. 백작이 살아남은 것은 스탈린의 광기가 아닉 광범위한 처형과 학살을 낳기 전 단계에서 감금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감금이 처형이 아닌 감금으로 끝난 데에는 더욱 아이러니한 진실이 숨어져 있다. (이것은 스포라 여기까지만).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최근 들어 읽은 소설 몇 개가 마음 속을 걸어다니고 있는데, 언제까지 머물지는 모르겠다. 지난 달쯤 알라딘에서 기획으로 열 몇 개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 이라는 제목으로 소설 여러권을 골라서 세트에 묶어 전자책 3개월 대여로 판매했는데, 이미 구매한 책들과 많이 겹쳤지만, 벼르다 사지도 읽지도 못한 책들과, 내겐 생소한 책들이 섞여 있어서 대여했다. 지금 여러권 읽었는데 한 마디로 주옥같다.


무엇보다도, 기획세트 대여의 가장 큰 동기가 된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런 탐정들>은 마케팅도 많이 해서 잘 알려져있긴 하지만 끝까지 이토록 생소하고 낯선 먼 이국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에 관심을 갖을 독자가 그리 많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과,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느낌으로는 100명도 넘을만한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이 소설을 끝까지 정독할만한 독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다. 내 경우 종이책으로 읽으라고 했다면 끝까지 못읽었을테지만, 없는 난독증도 일으킬 듯한 생소한 라틴어 이름들과 지명들을 읽어주는나 대신 이북의 읽어주기 기능 덕분에 끝까지 듣는 데는 성공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끝까지 읽으면 험난한 길을 끝내고 목표지점에 다달을 때같은 성취감을 주는 책이다. 쌍동이같이 똑같은 두 사람이 추구한 문학과 삶은 앞에 언급한 모스크바의 신사와 비교할 때 한 마디로 시궁창같지만, 무기력한 시대의 문학에 저항하고 끝없이 비루하고 구차한 삶을 헤치며 살아간 두 사람 역시 내 머리속에서 한동안 살아있을 듯하다. 로베르토 볼라뇨에게 반해버려, 그의 다른 소설 <칠레의 밤>을 읽었고 <2666>도 읽고 있는데, 사실 그의 소설이 캐릭터가 살아나올듯 생생하기 보다는 뭔가를 캐는 듯한 탐정적 문법을 따르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열어주지 않은 인물들의 마음 그 꽉닫힌 미지의 마음을 통하는 온갈래의 길에서 서성이게 된다. 이런 책들은 일단 번역에 감사함























개구지고 말썽꾸러기 소년이지만 수줍고 다정하게 다가와 머리속을 배회하는 착한 소년이 있다. 

 작가 심윤경을 겨우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해보았지만, 난독증에 걸린 소년의 일대기에 1979년과 1980년에 일어났던 역사적 비극과 개인적 비극을 통해 한 가족을 성장시키고, 스스로 성장하는 이야기는 슬프고 아름답고 짠했다. 콩가루 같은 한 가정의 갈등과 문제는 시대가 안고 있던 시대의 표상과 다름없었고, 갈등과 아귀다툼만이 지배하던 가정에 희망을 비추고 서로를 이어주던 것(스포 때문에 ..)의 상실은 박정희의 죽음으로 군부의 종식과 더불어 잠시나마 살랑살랑 불어왔던 민주화에 대한 봄바람이 군부 구테타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지고 수천의 양민이 학살되었던 시대의 비극과  완전하게 일치한다. 희망이 사라진 후, 우리는 남겨진 사람들, 살아남은 사람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비극의 끝에서 순진하고 착하기만 한 난독증 소년이 보여준 해법을 갈등의 시대에 어떻게 해석해야 각자의 몫이겠지만, 소년의 맑은 마음이 그리고 그가 떠나보내야 했던 그토록 사랑했던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이 오래도록 여운처럼 맴도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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