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 두 권 따로 출간되었는데, 종이책은 품절이고, 이북은 알라딘에서는 두권 세트(2만2천원)와 2편(1만1천원)만 팔고 있다. 이북은 PDF 파일이라 폰이나 리더기로는 읽기 불편하고 창문짝 만한 PC 스크린으로 즐겁게 읽었다. 가족이 차를 몰고 유라시아와 남미 여행을 1년간 하는 과정을 사진과 함께 적은 여행기이다. 1편은 유라시아, 2편은 남미다.






1편 유라시아



넓디 넓은 유라시아 동쪽 끝 우리나라는 반도에 자리잡고 있지만 남북으로 갈라져 통행이 금지된 덕에 섬 아닌 섬나라다.  육로 이동은 좁은 남쪽 땅덩어리에서 동서로 300km 남북으로 400km가 최대 범위다. 유럽에서 캠핑카와 차로 자유롭게 타국을 여행하는 게 보편화된 것처럼 통일이 되면 차를 몰고 대륙을 횡단하는 여행이 일도 아닐텐데 내가 죽기 전에 그런 날이 올지 내 아들이 죽기 전에 그런 날이 올지 언젠가 그런 날이 올지 참으로 궁금하다. 이제 분단으로 인한 이산가족과 실향민의 세대도 끝나가고 다음 세대에는 더욱 절실함은 사라질테고 남북 대치 국면을 정치적으로 외교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이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므로 통일에 대한 전망이 그리 밝아 보이지도 않는다. 다만 지척에 있으니 서로 자유롭게 왕래라도 하게 되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이렇게 섬 아닌 섬에 살지만 잘 살펴보면 차로 대륙 횡단을 하는 방법이 있다. 동해시에서 배를타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차를 싣고 간 다음 거기에서 유럽까지 러시아와 몽골, 중앙아시아를 경유하는 방법이다. 저자 이름이 가수 조용필과 같은데, 조용필은 랜드로버에 본인 포함 가족 3인과 캠핑장바들을 배에 싣고 동해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건너가 시베리아 ㅡ 몽고 ㅡ 중앙 아시아 ㅡ 러시아 ㅡ 발트 3국 ㅡ 동유럽 북유럽 ㅡ 서유럽 대충 이런 순으로 여행했다. 4월말에 시작한 여행이 70일동안 2만1천 km를 달려 모스크바에 도착했고 이후 영국을 끝으로 유럽을 돌았을 때가 7,8월. 그동안 타이어는 최소 6차례 이상 교환 서스펜션이니 뭐니 하는 부품들도 차례로 고장나고 중앙 아시아에서는 하루에도 수십번씩 깡패 경찰들에게 부당하게 돈을 뜯꼈고 바르셀로나에서는 아예 주차한 동안 차 내의 소지품을 거의 다 도난 당해 엄청난 피해를 보기도 했다. 



가장 아슬아슬했던 건 키르기스탄인가 하는 곳에서 가족들이 먼저 도보로 국경을 통과한 후 운전자에게 자동차용 서류를 요구해서 생이별을 해야 했던 순간이다. 뭐 휴대폰 같은 게 있으니까 어떻게든 연락이야 되었겠지만 한 사람은 차와 함께 국경을 통과하지 못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이미 나갔기 때문에 다시 들어오지 못해 생이별을 하게 되었으니 이게 무슨 아찔한 순간인가. 2015년 4월 19일에 출발할 때 그의 블로그 회원은 손에 꼽혔으나 이 책에는 소개되지 않고 다음권에 계속되는 남미 북미 여행을 끝냈던 같은 해 10월 19일에는 4천명으로 늘어 있었다. 블로그 독자들은 저자가 한국인으로서는 거의 처음 시도하는 자기 차로 직접 운전하는 여정을 실시간으로 읽을 수 있었을 것이므로 빠르게 입소문을 탔을 것이리라. 


사진 위주라 비슷한 여행을 꿈꾸거나 대리만족이라도 얻으려는 독자에게는 종이책을 추천하고 싶은데 아쉽게도 2016년 출간인데도 품절중이시다. 여행서는 정보 업데이트가 안되면 정보가 무가치해지니 다시 찍을 때는 신중해야 하지만 이 책은 사실 여흥 정보책이라기 보다는 여정을 따라 사진과 경험을 쓴 글이기에 그럴 염려는 안해도 될거 같은데 말이다. 차로 하는 다른 여행 책자가 더 많이 나왔을 수도 있겠다.


내용상으로 보면 사실 유럽 부분은 널리고 널린 다른 여행서들과 크게 차별화된 점을 찾을 수는 없다. 하지만, 여행의 초반부에 해당하는 동해에서 중앙 아시아 몽골 여정은 다르다.  고화질 짱짱 티브이에서 많은 준비와 현지 도우미 전문가들이 동원되어 찍어 내보내는 정제된 여행 프로그램은 많이 접하지만 이 책에서 주는 것은 개인이 직접 부딛치고 얻은 값진 개인 자동차 여행이라는 경험과 정보다. 50차선에 몽골 초원을 달리거나 고원 터널이라는 곳이 포장도 안되어 있고 경사로 웅덩이에 구불구불하고 조명도 없는 곳을 지날 때의 아짤함을 그리고 해발 4천미터에서 차가 고장나고 고산증에 걸리고 하는 경험들은 유럽뿐만 아니라 동유럽이나 러시아에서도 체험할 수 없는 극오지의 경험이다. 




2편 남미


4개월의 유라시아 여행을 마치고 10월 런던 틸베리 항에서 브라질로 차를 선적, 운임, 관세, 수수료, 벌금, 컨테이너 사용료, 등을 합해 예상의 서너배가 넘는 천만원 넘는 비용을 지불(중고로 차를 하나 사는 편이 나을 것 같음..) 후, 모로코와 쿠바 여행후 브라질 리우에 차를 찾으러 갔는데, 통관문제로 3주나 발이 묶인다. 차를 몰고 리우를 떠난 날은 12월 22일. 이 때부터 남미 중미의 도시와 유적지 및 자연풍광을 거쳐 1년여를 총 9만킬로미터를 차를 몰고 여행을 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까지는 다른 남미 나라들에 비하면 그나마 치안이라던가, 공무원의 부패나, 도로 사정 같은 게 그나마 덜 나쁜 듯했다. 자연 풍광도 아름답고. 여기까지는 대부분의 내용이 여기저기 들른 곳에 대한 자연에 대한 감상과 이 주를 이룬다.


칠레에서 볼리비아 국경을 넘어가는데 출국사무소가 없어서 되돌아간다. 차도 슬슬 고장나기 시작이다. 페루의 해발 3,800 티티카카 호숫가 언덕 고산 도시 푸노에서는 차가 고산병에 걸려 , 시동이 잘 걸리지 않는다. 에콰도르 지붕열차를 타려고 먼 길을 돌아갔는데 매일 출발한다는 블로그 및 여행 서적 정보와 달리 매주 수요일 한차례로 축소되었다. 여행가려면 블로그나 서적을 전적으로 믿어서는 안된다. 나도 전에 말레이지아에서 몰라카 가는 차를 타려고 새로 산 여행서를 참조해서 찾아간 곳이 엉뚱한 곳이어서 반나절을 낭비한 적이 있는데,  여행와서 반나절이면 호텔과 여정을 생각할 때 무지무지하게 비싸게 지불한 그곳에서의 시간을 낭비한 셈이다. 



타이어 교환시 막내 아들이 크게 다칠뻔 하게 할 뻔 했던 차가 드디어 콜롬비아 첩첩산중에서 멈춘다. 겨우 마을까지와서 정비소 찾았으나, 안된다고 해서, 수십km 떨어진 큰 마을에서 견인해갔으나 거기서도 불가능, 하루종일 정비소를 뒤졌으나 실패하고 몇일만에 다른 견인차로 세번째로 큰 도시 칼리까지 가서 수리를 알아본다. 문제는 이 메이커 차가 이 나라에 귀하다는 것이다. 여행포기해야 할 상황까지 이르렀으나 그 와중에 국내의 많은 분들에게서 연락을 받고 힘을 얻어  5일만에 보고타로 가서 가까스로 수리에 성공한다. 실시간 블로그와 익명의 이웃의 힘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그렇게 천신만고끝에 하는 여행이지만, 천만다행인 건 에콰도르 지진을 피했다는 것이다. 후에 묵었던 호텔 인근 산이 다 무너져 내렸다. 다치거나 갇히지 않아 다행이다. 이제까지도 중남미에서 개고생을 했지만 진짜로 개고생 길이라고 불리는, 길이 없는 구간, 다리엔 갭을 통과해야 콜롬비아에서 육로로 파나마로 이동할 수 있다. 더 위험한 이유는 게릴라 반군의 주된 활동 영역이기 때문이라고. 결국 컨테이너에 싣고 파나마로 보낸다. 선박회사는 개인과 거래 하지 않아 많은 비용, 복잡한 절차, 검색 등이 필요한 에이전시를 이용하게 된다. 차를 파나마로 보내고 났더니 이번엔 파나마로 입국하기 위해 공항 발권에서부터 말썽이다. 파나마에서 출국을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결국엔 쓰지 않을 티켓을 사람 수대로(4인 가족) 구입하는 일도 생겼다. 



앉을 곳도 없는 파나마 세관에서 차량 임시 반입 허가서 한장을 받기 위해 75분 벌서고 있는 건, 애교에 불과하다.  몇일 있을 나라에서 6개월짜리 자동차 보험을 가입해야 했고, 이틀동안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13개의 스탬프와 서류를 받고 엄청난 수수료 지불 후 겨우 세관에서 에서 차를 인수하게 된다. 개고생길을 포기한 것에 대한 대가다. 



중남미가 전체적으로 다 치안이 나쁘지만 멕시코는 경찰 마저도 위험하며, 산적 떼강도 권총강도가 온갖군데서 출몰하니 조심하라고 귀에 딱지가 않도록 얘기를 듣는걸 보니, 멕시코 여행도 아웃이다. 세관원들은 외국인이 봉이다. 20일후 출국하는 사람에게 묻지도 않고 180일 입국 필증을 찍고는 180일어치의 출국세 요구하는 센스. 듣던 중 반가운 소식 하나. 지나가다가 우연히 랜드로버 서비스 센터에 들렀다가 대접 받고 광고까지 찍는다. 한국서 올만큼 차가 튼튼하다는 것과, 서비스 명성을 듣고 찾아왔다는 광고 내용까지 보태서. 그래서 광고비는 받았는지 모르겠다. 선물은 받았다고 하던데.


과테말라에서는 담당자 퇴근해서 입국 통관이 안돼 보세 구역(? 면세구역 말하는 듯)에 텐트를 치고 자는 일도 생긴다. 이런 남미에 있다가 미국으로 간 일행은 쾌적함에 한 숨 돌리지만, 워싱턴에서 무장 경찰에게 포위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난다. 일대 교통은 마비되고 건물 위의 총들이 차량을 겨누는 상황까지 마주친다. 차는 견인되고 워싱턴 시내 진입은 금지되었다는 딱지와 함께 되찾는다. 주차장 찾는 모습에 수상한 차량으로 몰려 생긴 일이다. 그러고보니 그 위험한 나라들에서도 총을 겨눈 사람은 없었는데, 미국이란 나라가 가장 무섭다. 


미국 여행을 마치고, 드디어 한국. 450일 만에 집으로. 인천세관은 15개월동안 거친 세관중 가장 친절한 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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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1 0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8-09-11 10:28   좋아요 2 | URL
저도 가족 1인이랑 블라디보스톡 출발 바이칼 호수까지 가는 계획을 세웠는데, 차량 고장 얘기에 찌글어져있어요

카알벨루치 2018-09-11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대단한 분들이네요! 제 지인중에도 이탈리아 관광갔다가 지갑이랑 폰을 잃어버렸다고 하더라구요 맥도날드에서~치안과 위생수준이 엉망이라고 하던데~ㅎ

CREBBP 2018-09-11 10:29   좋아요 1 | URL
유럽의 주요 관광지들에서 개인 여행중 돈 안잊어버린 사람을 거의 못본 것 같아요 ㅋㅋ
 
한권으로 읽는 의학 콘서트
이문필.강선주 외 지음, 박민철 감수 / 빅북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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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에게 약 70~80년간의 평균 수명이 보장된 건 불과 200년 사이의 일이다. 평균수명은 19세기 중반까지 30년대였다고 한다. 평균 수명의 연장은 한 세대 한세대 거쳐 서서히 진행되었기에 예수탄생이나, 철, 종이 화약 인쇄술 같은 것의 발명과 같이 인류사의 대박 사건으로 손에 꼽힐 수는 없었으나, 전체 인류 문화사를 통틀어볼 때, 이처럼 의료가 개인이 생명을 노후까지 보장하는 때가 없었으니, 이렇게 되기까지 인류사에 있어서 의학은 어떻게 발전 혹은 변화하여 왔는지 여러가지 궁금할 때가 많다.  


요즘은 어린 영아 시기부터 생명과학과 관련된 지식들을 접하기에, 19세기까지 의사들도 몰랐던 기본적인 위생 개념과 의학지식을 언어를 습득하듯 자연스럽게 습득한다. 하지만 이렇게 태어날 때부터 알고 태어난 듯 당연히 알고 있는 의학적 지식; 심장박동, 혈액 순환, 위연동운동과 위액,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 이런 것의 작동원리와 존재를 알기 시작한 것은 수천년의 인류 문명의 역사에서 단 200년 전부터의 일이다. 그 전까지 몸의 동작은 보이지 않는 '신의 섭리'였다. 과학 혁명의 시대에 수많은 의료인이 혁명적 아이디어를 보태던 18세기, 19세기까지도, 일반인에게 의사는 마차나 기차를 타고, 자신이 가진 의료백에 있는 보잘것 없는 기구와 진통제를 비롯한 몇몇 약 중 하나로 처방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지식이 공유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이 책을 통해 긴 인류 인류 문명의 의료 행위의 세계사를 살펴보니, 최근 100~200년 이전의 의료는 그저 스스로 '의사'라고 칭한 사람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기는 행위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 점에서 19세기 이후 혈액순환원리발견, 신경기능의 발견, 뢴트겐의 X 선 발명, 종균법과 면역학, 현미경의 발명과 세포의학, 파스퇴르의 백신 개발 등 연이어 발생한 의학계의 사건들은 혁명적이다. 그 중에서도, 통계를 의학에 접목하여 의학통계의 아버지로 불린다는 피에르 루이스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의학적 실험은 인간의 목숨을 담보로 하므로, 과학실험과는 달리 마구 실험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록과 분석을 통해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는 수치적 통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처음 주장한 사람이 피에르 루이스이다.  질병 표본을 일정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꾸준히 조사해야 하며 효과는 수치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그의 이런 주장으로 이전까지 의사 맘대로 아무 제약 없이 독약도 사용가능했던 치료 방법이 근본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그전까지 만병통치약으로 사용되던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사혈요법의 무익성을 알린 것도 그가 통계를 통해 그 사실을 증명해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문명이 발생한 곳에 전쟁과 질병이 있었고, 삶을 구하는 행위가 의료행위였으므로, 생물학 구조와 지식이 축적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의 몸은 블랙박스였을 터다. 기독교 전파 이전, 고대 이집트, 히브리, 인도 메소포타미아, 중국 그리스 로마에이르기까지 의학은 신앙적 성격이 융합되긴 했으나, 나름대로 과학적 가설하에 인체를 철학적으로 이해하고, 긴 시간동안 축적된 경험으로 약초와 침술 사혈 등이 임상적 효과를 보고 있었다. 


고대부터 이어져온 의학의 맥이 끊긴건, 기독교가 인간의 정신 뿐만 아니라 지식, 사회, 제도 등 모든 것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과학과 수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중세의 암흑기에 마녀사냥과 주문 등으로 병을 대할 때 고대 의학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건 아랍과 페르시아 쪽이다. 알다시피, 성경은 정신병의 원인을 마귀로 설명한다. 그래서 의료 행위는 마귀를 쫒는 의식이었고, 여기에는 온갖 고문, 화형과 교수형도 포함되었다. 20세기까지도 성경에 여성은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고통받아야 하기 때문에 출산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마취제를 사용하는 것을 종교계가 반대했다고. 종교가 어디 도움이 되었다는 소리를 어느 역사서에서건 본 적이 없는 거 같다.


제목이 '한권으로 읽는 의학콘서트'로 되어 있는데, 독자로서 부제를 붙여보면 '세계사 속의 의료인' 혹은 '의료위인전의 세계사' 쯤으로 붙여야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즉 이 책은 세계사 전체를 훑으며 방대한 양의 의료계의 주요 인물들을 소개한다. 너무 많은 의료인이 등장해서 의료인 사전 비슷한 느낌도 든다.  그렇다고 사전식으로 주요 정보만 압축해서 보여주는 건 아니고,  마치 어린이 위인전처럼 어디서 태어나서 어떻게 자랐고, 저서가 무엇무엇이 있고, 누구의 제자였고 이런 깨알같은 정보가 촘촘히 박혀져 있다. 


따라서, 잘 정리된 의료과학적의 역사를 기대했던 전문인들에게는 두서가 없게 느껴질 수도 있을텐데, 일반인에게는 따라가기 힘든 전문적 내용만 나오는 것 보다는 이런 의료인들의 삶에 있어 크게 의료부분과 관계가 없을 수도 있는 부수적인 이야기가 읽기를 용이하게 해줄 수도 있다 하겠다. 맥락이 서로 연결되지 않고, 여러 인물들을 짧게 정리한 위인전처럼 시대별로 엮은 듯한 느낌이 아쉬웠다. 


편집 면에서는 20명 저자들의 소개가 전혀 없어, 정보의 신뢰성에 의문을 줄 소지가 있다는 점과, 레퍼런스가 전혀 표시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다. 무슨 논문도 아닌데 문단 마다 레퍼런스를 미주에 표시해놓으라는 말이 아니라 읽으면서 의심이 가거나 흥미로운 부분이 생기면 어디서 더 정보를 찾을 수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도록,  또한 내가 알고 있던 부분과 다른 거나 이상하다 싶은 부분이라도 생기면 그 출처가 어디인지 확인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에세이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자기계발서도 아니고 과학서적이니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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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 -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문학동네 2015년 봄호에 처음 발표한 소설인데, K 시리즈의 단행본으로 영역본과 함께 나온 이후, 한승원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수상작품인 <한정희와 나>와 함께 실렸고, 이후 이기호 소설집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에 비로소 이기호의 단편들이 한꺼번에 묶여 나왔다. 나는 한승원문학상수상작품집 <한정희와 나>에 실린 작품을 읽었고, 이기호의 작품들이 모두 그렇지만, 이 단편이 특히 인상적이어서 기록을 남긴다. 


집 바로 앞에서 허름한 텐트를 치고 거기서 먹고 자면서  1인 시위를 하는 권순찬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여름에 시작한 일이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도 해결될 기미가 없고, 춥고 불편한 권순찬을 걱정하는 ‘착한’ 마을 사람들은 그의 일을 해결해주기 위해 십시일반한다. 알고 보니 권순찬의 사연은 이렇다. 얼마전 죽은 양어머니가 사채를 갚아달라며 주고 간 계좌로 뒤늦게 700만원을 넣고 나니, 이미 어머니가 입금을 한 상태여서 중복 입금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채업자는 연락 두절이고, 수소문한 끝에 주민등록상의 주소로 찾아온 곳이 사채업자 대신 그 사람의 어머니가 살고있는 지방 소도시의 아파트로, 화자 역시 이곳에 살고 있다.


사채업자의 행방을 모르는 권순찬은 사채업자의 어머니가 사는 그 아파트 앞에서 텐트를 치고, 잘못입금된 돈 700만원을 돌려달라며 시위를 시작한다. 7월에 시작하여 8월이 지나고 찬바람에 보일러를 때야 하는 계절이 되도록 권순찬이 찾고 있는 사채업자는 나타나지 않고, 영문도 모른 채 근근히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사채업자의 어머니는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다. 


오며 가며 딱한 사정을 듣고 전하던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스티로폼이랑 박스 같이 도시 야영에 필요한 것들을 주워다 주고, 혼자 사는 분의 빈 방에 거처를 마련해 주기도 하고, 또 파트타임 청소 일자리까지 주선해주는 등 그에게 호의를 베풀어주지만, 사채업자는 나타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권순찬이  추운 겨울에 어떻게 될까봐 걱정이 가득한 마을 사람들은 올해의 불우이웃돕기 성금 대신 돈을 걷어 그에게 건네며, 사채업자의 어머니가 주는 돈이라 생각하라고 한다. 


여기까지는 남의 돈을 두번이나 받고 연락 두절된 사채업자와 그의 어머니에게는 큰 잘못은 없어보인다. 사채업자로서는 통장에 돈이 두 번 들어왔으니까, 이게 웬 떡이냐 했을 텐데,  권순찬의 어머니가 이미 죽은 마당에 연락처를 찾기 어려워 되돌려 주기 어려웠을 거라는 추측도 해볼 수 있다. 또 그건 그쪽 사정이고 확인도 않고 송금한 권순찬 잘못 역시 없어 보이지는 않지만, 이중 입금된 돈을 되돌려 받으려고 몇달간 노숙을 하는 신세는 처량하다. 


건강 때문에 사채를 쓰고, 그걸 못갚아 오랫동안 만나지 않던 양아들을 찾아가 부탁했다가 결국 자기 손으로 갚고 자신은 자살한 권순찬의 양어머니도 참으로 시대가 감추고 싶은, 암울한 뒷골목 풍경아닌가. 사채업자 어머니의 이름으로 건네는 마을 사람들의 돈을 눈물 겨운 친절로 받아들이고 감사를 드리고 떠났다면 모두에게 행복한, 오래도록 기억될 훈훈한 일화가 되었을 사건이다. 하지만, 착하고 순박한 권순찬이, 착한 마을 사람들의 호의로 잃어버린 돈을 쥐어주고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떠나는 그런 훈훈 장면은 연출되지 않는다. 


애시당초, 그들의 그 착한 모금 운동의 모티브가, 사채업자를 만나 직접 해결하고자 했던 권순찬의 목적과는 달랐었다는 걸, 그 글이 안써져서 애꿎은 사람에게 화를 내고, 애꿎은 술에게 화풀이를 했던 (화자인) 교수 양반도, 권순찬의 말을 들어주고 이해해주려고 했던 착한 마을 사람들도 알지 못했다. 


선함, 착함 이런 것은 내 마음으로 들어오는 불편함을 씻어버리고픈 행위일 수 있다. 교수가 권순찬의 멱살을 움켜쥔 이유는 그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 아파트 근처에서 노숙하는 일을 겨울이 될 때까지 봐야 하며, 이렇게 훈훈(하다고 생각했던)한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 겨우 술을 끊고 글을 쓸만한 상태가 되었다가 다시 그 막막했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원인이, 이 먼지같은 남자가 내 인생 내 삶의 언저리에서 눈에 보이게 알짱거리는 채로 추운 겨울을 맞게 될 것에 대한 불편함인 것이다.  그는 애초에 청소 안한 방구석에 굴러다니는 먼지처럼 보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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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권이 묶여져 있는 세트를 샀는데 그 중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를 먼저 읽었다.  첫번째 평은 짧다는 것. 아주 짧다. 텍스트의 양은 세 권 묶인 것 다 합해서 일반 서적 한 권 분량. 그림은 판화로 정선껏 제작했다지만 조금 정적이고, 그닥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하루키의 사생활이나 평소 하는 생각들을 엿볼 수 있고, 그런 그의 특성이 소설과 연결되는 지점을 찾을 수 있었다.  고양이와 함께 하는 고적한 시간, 평소에 말이 없고, 특히 소설가와 문인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이유들도 딱 그럴만한 이유들이 있는 것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이런 글들을 쓰려면 힘들겠네 라고 생각했는데,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를 펼치자 마자 내막이 나온다. 이런 글의 소재가 한 50가지 정도 쌓여 있다고 한다. 거기서 골라 쓰면 된다고. 


에세이건 소설이건 하루키는 제목을 참 잘 뽑는다. 너무 무겁지도 너무 빤하지도 않고 평범하지도 지루하지도 않고, 살짝 쿨한듯 하면서, 한마디로 그답다.  세트 상품인 하루키의 무라카미 라디오 3부작이라는 뻣뻣한 제목으로 상품이 포장되어 있는데,  세트 내의 세 권은 다 따로따로 나온 책으로 각자의 제목이 있다.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대충 에세이에 나온 내용이다. 하루키의 이런 유쾌한 에세이들이 잘나가면서, 김중혁 작가 같은 국내 작가들도 가볍고 재치있는 에세이 모음들을 자주 묶어 낸다. 좋은 현상이다. 


섹스를 한 다음날 티셔츠와 헐렁한 사각 팬티를 차림으로 오믈렛을 만들고 큼직한 남자, 면셔츠를 잠옷 대신 입고 침대에서 눈비비며 나온 여자가 함께 슈베르트의 소나타를 들으며 아침을 먹는 광고에서 본 듯한 장면은 그의 상상 속에서 오믈렛 만들기에 가장 적합한 타이밍이다. 영어권 나라의 레스토랑에서 soup or salad? 라고 묻는 웨이터의 질문을 슈퍼 샐러드? 라고 이해하고는 그거 좋겠네요 슈퍼 샐러드주세요 하는 장면을 실은 핀란드 영화 애기. 또는 헬스클럽의 바이크에서 생산되는 노동력을 전기 에너지로 전환하고 그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 성욕에너지를 전력으로 바꾸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있다. 


어떤 책에도 다른 책을 언급하지 않는 경우가 없는데, 터프한 아프리카 대륙 종단기인 폴 서루의 <아프리카 방랑> ,과학자들의 실화를 모은 《세상을 살린 10명의 용기 있는 과학자들>,트루먼 카포티의 단편소설 <마지막 문을 닫아라>를 카트에 담아둔다.  카포티 책이 하도 많아, <마지막 문을 닫아라>가 실린 단편을 찾느라 손가락 품 좀 팔았다.












《아프리카 방랑》 속에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폴은 동아프리카의 어느 나라를 여행하고 있었다. 참으로 살벌한 지역이어서 오락거리도 없고 볼거리도 없고, 마을에서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 하나 만나지 못했다. 시간이 남아돌아 진절머리가 나던 참에 한 일본인을 만났다. 일본 기업에서 파견 나온 기술자로 영어를 상당히 잘했다. 폴은 기뻐하며 대화를 시작했지만, 이내 상대가 말도 안 되게 지루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얘기가 틀에 박혀 있다고 할까, 조금도 깊이가 없다. 그는 이러느니 혼자 벽 보고 있는 편이 차라리 낫겠다고 생각한다.


투루먼 카포티의 단편집은 꼭 읽고 싶다. 그의 소설 제목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카포티의 단편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트루먼 카포티의 단편소설 <마지막 문을 닫아라>의 마지막 한 줄, 옛날부터 왠지 이 문장에 몹시 끌렸다. Think of nothing things, think of wind, 내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도 이 문장을 염두에 두고 붙인 제목이었다. nothing things라는 어감이 정말 좋다.












토르 고타스의 <러닝>을 읽고 커다란 귓밥을 파낸 듯이 개운하게 풀린 오래 묵은 의문 하나가 풀리는 대목.

고타스 씨에 따르면 그리스에서 전령은 온전히 직접 달리는 걸로 정해져 있다고 했다. (..) 그냥 달리는 사람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말을 타고는 가지 못할 좁은 길이나 험한 길도 거침없이 갈 수 있다. (..)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필리피데스라는 전령은 마라톤 전쟁 전에 지원군을 요청하는 서한을 들고 아테네에서 스파르타까지 이틀에 걸쳐 약 466킬로미터를 달렸다. (...) 그러나 스파르타 왕의 대답은 “노”였다. 지원군은 보낼 수 없다. 필리피데스 씨는 실망하면서 같은 길을 또다시 달려서 돌아왔다. 그리고 일설에 따르면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그 길로 마라톤까지 40킬로미터 넘는 길을 달려 전쟁의 결과를 지켜본 다음 다시 달려서 아테네로 돌아가, “이겼다!” 하고 시민에게 알리고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그럼 죽을 만도 하지, 


존 어빙의 <곰 풀어주기>(직접 번역한 소설)은 못찾았고(국내 번역본이 없는 것 같아), 책보다 영화와 음악 이름이 더 많이 언급되어 있다.


저자가 언급한 기야마 쇼헤이의 <가을> 라는 짧은 시가 좋아서 옮겨본다. 

새 나막신을 샀다며    

친구가 불쑥 찾아왔다.    

나는 마침 면도를 다 끝낸 참이었다.    

두 사람은 교외로    

가을을 툭툭 차며 걸어갔다.


미국의 작가 도로시 파커가 자신의 묘비에 써지기를 희망한 말 ‘이 글씨를 읽을 수 있다면 당신은 내게 너무 가까이 와 있다’. 이 얘기에서 나아가 자신의 묘지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라. 그저 바람을 생각해라.'라고 적으면 어떨까를 생각한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는 이 문장이 제일 좋았다. <노르웨이의 숲>의 분위기를 이 평범한 문장 하나에 고스란히 옮겨온 듯하다.


스무 살 전후였던 나는 사귀던 여자친구하고도 잘 안 되고, 학교에도 흥미를 잃고, 좀 힘든 일이 많았지만 그래도 오후의 양지에 고양이와 둘이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으면, 시간은 나름대로 부드럽고 따스하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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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재미있게 읽히는 책은 좋은 스토리를 가져야 하지만, 튼튼한 스토리는 사설이 길다. 때문에 첫장부터 흥미를 느끼려면 매력적인 문체가 글자 속으로 빨아들여야 하는데, 이 작가의 책이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여기 실린 연작 네 편 모두가 남주가 여주를 문자 그대로 (스토커처럼) 쫓아다니면서 생기는 일이다.  앞서가고 뒤따라가는 두 사람의 동선을 주의깊게 파악해야 전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문체가 재치있고 발랄해서 처음부터 충분히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시작인데, 이야기를 진전시키다보면 또, 문체만 가지고 노닥거릴 수는 없지 않나. 독특하고 재치있는 문체로 시작한 첫번째 이야기는 한밤 교토의 거리 본토초 주변을 배경으로 하기에, 자연스럽게 배경에 대한 묘사로 이어진다.  개인적으로 배경 묘사를 그닥 즐거워하지 않는 나지만, 나오는 곳곳의 실제 모습이 궁금해,  구글의 한일번역사이트를 오가며 확인했다.  이 책에서 이야기의 진행과 판타지의 실제가  공간을 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끝까지 이름도 없는) 두 주인공 남녀는 하루 혹은 밤동안 일정 범위에서 작은 모험을 한다. 엉뚱 발랄한 돈키호테가 호기심과 영웅심에 쩔어 집을 떠나고 온갖 기이한 일들을 겪고 개고생을 한 끝에 돌아오는 모험담이라면, 이곳의 두 주인공이 겪는 일탈은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아주 아주 작은 판타지로 채워진 모험이다. 표지의 모습처럼, 까만 머리의 막 대학생이 된 여주를 짝사랑하는 남주는 학교 선배이고 클럽에서 알고 지내는 사이이면서도 직접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채, 우연을 가장한 인연을 만들고 싶어 여주가 가는 곳을 멀찌감치 따라다닌다.


하지만 곧,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인가가 생겨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따로따로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엮여 하룻밤 혹은 하루낮 동안의 모험을 경험하는데, 당연히 여자를 따라다니다가 잃어버렸으므로 두 사람은 여전히 아주 가까운 곳에 있으며, 남주가 만난 사람을 여주가 만나고 여주가 만난 사람을 남주가 만나고, 남주가 있던 곳에 여주가 가고 여주가 갔던  곳에 남주가 가면서 동선이 절묘하게 포개졌다 떨어졌다 한다. <밤은 짧아..>에서는 결혼식 연회장 멀리 달팽이를 들여다보던 까만머리 후배를 멀리서 바라보는 장면으로 시작하다가, 까만머리가 먼저 일어나 나가자 그녀를 쫓아다니기 시작한다. <심해어들..>에서는 이벤트성으로 열리는 헌책시장에 까만머리가 간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우연을 가장해 같은 책을 집었다가 양보하는 그럴 듯한 계획을 가지고 헌책 시장을 간다.


<밤은 짧아..>에서는 술 마시는 이야기가 펼쳐지고, <심해어들>에서는 책 이야기가 펼쳐진다. 둘 다 너무 좋았다. 첫편을 읽을 때는 마치 잔뜩 취해 흐느적거리는 기분이 되었고, 둘째 편을 읽을 때는 애독자로서 책에 대한 애정과 헌책 시장 풍경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네 편 모두 연작 로맨틱 판타지이다.


첫편에서 어른들의 세계가 궁금해 밤거리를 홀로 걷는 까만 머리 여주는 처음부터 성추행을 당하고 성기가 그려진 그림을 부적으로 선물받고 또 춘화를 접하기도 하지만, 그 못지 않게 그녀를 지켜주는 사람들(하구치와 히다치)이 있어, 따라다니면서 온갖 다채로운 성인 문화를 겪는다. 이 때 그녀를 가이드해주는 사람들이 다른 시리즈에서도 계속 등장하는데 이들을 매개로 하여 만나는 세계는 현실과 괴리된 판타지적 세계이면서도 또 현실과 밀착되어 있기도 하다. 판타지적 세계가 펼쳐지는 방식은 비단 잉어가 회오리에 쓸려 하늘로 올라가고 다시 내려오거나, 하구치의 입에서 종이 잉어가 나오고 귓구멍에서 마네키네코를 꺼내 보이는 것 같은 소소한 것도 있지만, 그 클라이맥스적인 것은 공간의 왜곡에서 보여준다.


“고양이와 달마오뚝이가 우글우글한 바, 쌍둥이 형제가 운영하는 커피숍, 요염한 분위기의 재즈바, 지하 감옥 같은 술집…… 차례차례 나타나는 술 그리고 또 술, 문 그리고 또 문, 술 그리고 또 술”


이 때문에, 어? 내가 뭘 놓쳤나? 여기가 어떻게 된 상황이라는 거야 하며 다시 책을 찬찬히 뒤져봐야 했다. 밤새도록 이 술집 저술집을 돌아다니며 온갖 사람들을 만나고 흐느적거리는 궤변춤 같은 온갖 해괴한 짓을 배우고 술이 떡이 되어 다니는데, 그 곳 거리의 술꾼들에게 수도 없이 들은 전설의 이백 옹을 만나 술내기를 벌이는 장면이 벌어지는 곳은 다름아닌 이백옹의 전차다.


“3층짜리 전차의 옥상에서 자란 풀이 바람에 흔들렸습니다. ..   수초가 떠다니는 오래된 연못도 있었고 연못 기슭에는 대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었습니다. 대숲 속에 등롱이 걸렸는데, 그 뒤편으로는 벽돌로 만든 그슬린 굴뚝 하나가 서 있고 그 옆으로 나선 계단이 아래로 나 있었습니다. 목욕탕 카운터가 있었고 옆에 놋쇠 열쇠가 딸린 목제 사물함이 벽을 가리고 섰으며 대나무 발을 깐 마룻바닥에는 옷 담는 바구니가 늘어섰습니다.”


상상이 되나, 본토초의 거리에 호수와 대나무 숲을 통채로 담을만한 항공모함 크기의 3층 전차가 나타난다니 이거 말이 되나.  해리포터 시리즈 영화에서도 밖에서 보기에는 엄청 작은 공간이 문을 열고 속에 들어가면 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크기로 변하는데, 정말 이런 말도 안되는 공간적 왜곡을 통한 판타지의 실현은 매혹적이다.  이런 공간의 왜곡은 심해어들에서도 나타나는데, 까만머리 여 주인공이 책을 통해 어릴 때 기억을 하나씩 떠올리다가 그리움에 몸을 떨며 찾아 헤매기 시작한 동화책 <라타타탐(비네텟 쉬레더)>이 그 여성을 따라다니던 남주에게 우연히 눈에 띄어 필사적으로 책 대결에 들어가게 되는 이상한 공간도 그러하다.  헌책 시장은 교토의 시모가모 신사의 다다즈 숲 내 승마장이다. 헌책방은 텐트로 지어진 임시 매장에 불과한데, 그 이상한 공간에는 책꽂이로 건축물 같은 공간을 만들었다. 각자 저마다의 책을 구하고자 하는 대결자들은 이 책꽂이 사이의 통로를 통해 안쪽으로 들어가는데, 통로의 한쪽 끝은 다른쪽으로 구부러져 있고, 그 사이에 가득한 헌책들이 점점 더 낡아 나중에는 변색된 종이 다발에 지나지 않는 공간을 통해 계속 걷다보면, 경마장 흙길의 바닥이 서양풍의 돌길로 바뀌고 계단이 나타나고 중후한 철문이 나타나고 거기에서 목숨을 건 책시합이 나타난다.


책시합. 이게 무슨 소린지 궁금하신 분은 책을 보시라. '그래봤자 종이 다발이야.' 어떤 사람에게는 보물인 책이 또 다른 사람에게는 종이다발이 될 수도 있다. 한 철도연구회 회원인 학생은 이 목숨을 건 시합에서 메이지 시대의 열차시각표 기차 노선 여행 안내 일년분을 얻고자 했고,  자신을 도와달라고 남주를 꼬셔 데려온 규방조사단 대표 치토세가 노리는 책은 누군가가 그렸다는 음서고, 또 어떤 사람은 기시다(?)가 직접 쓴 일기장이다. 이렇듯 목숨을 건 대결에서 서로에게 양보하라며 하는 말은 그깟 기차시간표, 그깟 동화책, 그깟 음서 하며 다른 사람이 구하는 책을 깎아내리는데 여념이 없다.


어릴 때 읽었던 책들은 그 누구도 어른이 되도록 간직하는 경우가 드문 것 같다. 삐뚤빼뚤 자기 이름까지 새겨진 자신의 어린시절에 가장 좋아했던 책을 헌책방에서 조우하는 기분은 어떨까. 시간 여행을 떠나 멀고 먼 아득한 자신의 어린 시절과 만나는 감동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이 과거의 어떤 물건, 특히 책을 갖고 싶어하는 것은 책을 통해 경험한 그 소중한 감정, 차곡 차곡 쌓여 나를 만들고 인생의 일부가 되어 온 정신 세계에 관여했던 그 기억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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