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재미있게 읽히는 책은 좋은 스토리를 가져야 하지만, 튼튼한 스토리는 사설이 길다. 때문에 첫장부터 흥미를 느끼려면 매력적인 문체가 글자 속으로 빨아들여야 하는데, 이 작가의 책이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여기 실린 연작 네 편 모두가 남주가 여주를 문자 그대로 (스토커처럼) 쫓아다니면서 생기는 일이다.  앞서가고 뒤따라가는 두 사람의 동선을 주의깊게 파악해야 전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문체가 재치있고 발랄해서 처음부터 충분히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시작인데, 이야기를 진전시키다보면 또, 문체만 가지고 노닥거릴 수는 없지 않나. 독특하고 재치있는 문체로 시작한 첫번째 이야기는 한밤 교토의 거리 본토초 주변을 배경으로 하기에, 자연스럽게 배경에 대한 묘사로 이어진다.  개인적으로 배경 묘사를 그닥 즐거워하지 않는 나지만, 나오는 곳곳의 실제 모습이 궁금해,  구글의 한일번역사이트를 오가며 확인했다.  이 책에서 이야기의 진행과 판타지의 실제가  공간을 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끝까지 이름도 없는) 두 주인공 남녀는 하루 혹은 밤동안 일정 범위에서 작은 모험을 한다. 엉뚱 발랄한 돈키호테가 호기심과 영웅심에 쩔어 집을 떠나고 온갖 기이한 일들을 겪고 개고생을 한 끝에 돌아오는 모험담이라면, 이곳의 두 주인공이 겪는 일탈은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아주 아주 작은 판타지로 채워진 모험이다. 표지의 모습처럼, 까만 머리의 막 대학생이 된 여주를 짝사랑하는 남주는 학교 선배이고 클럽에서 알고 지내는 사이이면서도 직접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채, 우연을 가장한 인연을 만들고 싶어 여주가 가는 곳을 멀찌감치 따라다닌다.


하지만 곧,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인가가 생겨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따로따로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엮여 하룻밤 혹은 하루낮 동안의 모험을 경험하는데, 당연히 여자를 따라다니다가 잃어버렸으므로 두 사람은 여전히 아주 가까운 곳에 있으며, 남주가 만난 사람을 여주가 만나고 여주가 만난 사람을 남주가 만나고, 남주가 있던 곳에 여주가 가고 여주가 갔던  곳에 남주가 가면서 동선이 절묘하게 포개졌다 떨어졌다 한다. <밤은 짧아..>에서는 결혼식 연회장 멀리 달팽이를 들여다보던 까만머리 후배를 멀리서 바라보는 장면으로 시작하다가, 까만머리가 먼저 일어나 나가자 그녀를 쫓아다니기 시작한다. <심해어들..>에서는 이벤트성으로 열리는 헌책시장에 까만머리가 간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우연을 가장해 같은 책을 집었다가 양보하는 그럴 듯한 계획을 가지고 헌책 시장을 간다.


<밤은 짧아..>에서는 술 마시는 이야기가 펼쳐지고, <심해어들>에서는 책 이야기가 펼쳐진다. 둘 다 너무 좋았다. 첫편을 읽을 때는 마치 잔뜩 취해 흐느적거리는 기분이 되었고, 둘째 편을 읽을 때는 애독자로서 책에 대한 애정과 헌책 시장 풍경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네 편 모두 연작 로맨틱 판타지이다.


첫편에서 어른들의 세계가 궁금해 밤거리를 홀로 걷는 까만 머리 여주는 처음부터 성추행을 당하고 성기가 그려진 그림을 부적으로 선물받고 또 춘화를 접하기도 하지만, 그 못지 않게 그녀를 지켜주는 사람들(하구치와 히다치)이 있어, 따라다니면서 온갖 다채로운 성인 문화를 겪는다. 이 때 그녀를 가이드해주는 사람들이 다른 시리즈에서도 계속 등장하는데 이들을 매개로 하여 만나는 세계는 현실과 괴리된 판타지적 세계이면서도 또 현실과 밀착되어 있기도 하다. 판타지적 세계가 펼쳐지는 방식은 비단 잉어가 회오리에 쓸려 하늘로 올라가고 다시 내려오거나, 하구치의 입에서 종이 잉어가 나오고 귓구멍에서 마네키네코를 꺼내 보이는 것 같은 소소한 것도 있지만, 그 클라이맥스적인 것은 공간의 왜곡에서 보여준다.


“고양이와 달마오뚝이가 우글우글한 바, 쌍둥이 형제가 운영하는 커피숍, 요염한 분위기의 재즈바, 지하 감옥 같은 술집…… 차례차례 나타나는 술 그리고 또 술, 문 그리고 또 문, 술 그리고 또 술”


이 때문에, 어? 내가 뭘 놓쳤나? 여기가 어떻게 된 상황이라는 거야 하며 다시 책을 찬찬히 뒤져봐야 했다. 밤새도록 이 술집 저술집을 돌아다니며 온갖 사람들을 만나고 흐느적거리는 궤변춤 같은 온갖 해괴한 짓을 배우고 술이 떡이 되어 다니는데, 그 곳 거리의 술꾼들에게 수도 없이 들은 전설의 이백 옹을 만나 술내기를 벌이는 장면이 벌어지는 곳은 다름아닌 이백옹의 전차다.


“3층짜리 전차의 옥상에서 자란 풀이 바람에 흔들렸습니다. ..   수초가 떠다니는 오래된 연못도 있었고 연못 기슭에는 대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었습니다. 대숲 속에 등롱이 걸렸는데, 그 뒤편으로는 벽돌로 만든 그슬린 굴뚝 하나가 서 있고 그 옆으로 나선 계단이 아래로 나 있었습니다. 목욕탕 카운터가 있었고 옆에 놋쇠 열쇠가 딸린 목제 사물함이 벽을 가리고 섰으며 대나무 발을 깐 마룻바닥에는 옷 담는 바구니가 늘어섰습니다.”


상상이 되나, 본토초의 거리에 호수와 대나무 숲을 통채로 담을만한 항공모함 크기의 3층 전차가 나타난다니 이거 말이 되나.  해리포터 시리즈 영화에서도 밖에서 보기에는 엄청 작은 공간이 문을 열고 속에 들어가면 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크기로 변하는데, 정말 이런 말도 안되는 공간적 왜곡을 통한 판타지의 실현은 매혹적이다.  이런 공간의 왜곡은 심해어들에서도 나타나는데, 까만머리 여 주인공이 책을 통해 어릴 때 기억을 하나씩 떠올리다가 그리움에 몸을 떨며 찾아 헤매기 시작한 동화책 <라타타탐(비네텟 쉬레더)>이 그 여성을 따라다니던 남주에게 우연히 눈에 띄어 필사적으로 책 대결에 들어가게 되는 이상한 공간도 그러하다.  헌책 시장은 교토의 시모가모 신사의 다다즈 숲 내 승마장이다. 헌책방은 텐트로 지어진 임시 매장에 불과한데, 그 이상한 공간에는 책꽂이로 건축물 같은 공간을 만들었다. 각자 저마다의 책을 구하고자 하는 대결자들은 이 책꽂이 사이의 통로를 통해 안쪽으로 들어가는데, 통로의 한쪽 끝은 다른쪽으로 구부러져 있고, 그 사이에 가득한 헌책들이 점점 더 낡아 나중에는 변색된 종이 다발에 지나지 않는 공간을 통해 계속 걷다보면, 경마장 흙길의 바닥이 서양풍의 돌길로 바뀌고 계단이 나타나고 중후한 철문이 나타나고 거기에서 목숨을 건 책시합이 나타난다.


책시합. 이게 무슨 소린지 궁금하신 분은 책을 보시라. '그래봤자 종이 다발이야.' 어떤 사람에게는 보물인 책이 또 다른 사람에게는 종이다발이 될 수도 있다. 한 철도연구회 회원인 학생은 이 목숨을 건 시합에서 메이지 시대의 열차시각표 기차 노선 여행 안내 일년분을 얻고자 했고,  자신을 도와달라고 남주를 꼬셔 데려온 규방조사단 대표 치토세가 노리는 책은 누군가가 그렸다는 음서고, 또 어떤 사람은 기시다(?)가 직접 쓴 일기장이다. 이렇듯 목숨을 건 대결에서 서로에게 양보하라며 하는 말은 그깟 기차시간표, 그깟 동화책, 그깟 음서 하며 다른 사람이 구하는 책을 깎아내리는데 여념이 없다.


어릴 때 읽었던 책들은 그 누구도 어른이 되도록 간직하는 경우가 드문 것 같다. 삐뚤빼뚤 자기 이름까지 새겨진 자신의 어린시절에 가장 좋아했던 책을 헌책방에서 조우하는 기분은 어떨까. 시간 여행을 떠나 멀고 먼 아득한 자신의 어린 시절과 만나는 감동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이 과거의 어떤 물건, 특히 책을 갖고 싶어하는 것은 책을 통해 경험한 그 소중한 감정, 차곡 차곡 쌓여 나를 만들고 인생의 일부가 되어 온 정신 세계에 관여했던 그 기억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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