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여왕 안데르센 걸작그림책 1
한스 크리스찬 안데르센 지음, 키릴 첼루슈킨 그림, 김서정 옮김 / 웅진주니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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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의 얼음 왕국은 안델센 원작의 눈의 여왕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눈의 여왕에서 모티브만 가져왔을 뿐 스토리는 거의 모든 부분에서 다르다. 나는 과거 유치원을 제대로 안다녔던 모양인지 이제서야 처음으로 윈작을 봤을 뿐만 아니라 아이를 키우면서도 눈의 여왕 자체 스토리를 접해보지 못했다. 원작의 제목으로 등장하는 눈의 여왕은 북극 근처의 스피츠베르겐 섬에 살며 게르다가  카이를 찾아 간 곳은 눈의여왕이 여름을 지내기 위해 가 있던 핀란드의 라플란트라는 곳이었다. 눈의 여왕은 차갑고 흰 눈으로 된 코트와 모자를 쓰고 있으며 카이를 납치하고 자신의 코트안에 들어오게 하고 두번의 입맞춤으로 카이를 춥지 않고 기억을 잊도록 하는 마술을 부리고, 그가 자유로워지려면 얼음 조각으로 영원 이라는 말을 맞춰야 한다는 과제를 내주는 것 외에는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이 캐랙터와 차갑고 흰 눈의 나라라는 환상적아 배경은 나니아 연대기를 비롯한 많은 작품의 모티브가 된다.

 

이야기의 시작은 악마가 만든, 모든 것을 못생기고 찌그러지고 일그러지게 보이도록 하는 거울을 신들이 있는 곳으로 가져가다가 떨어뜨려 산산조각이 나고, 그 조각이 카이의 심장과 눈에 박히면서부터 전개된다. 카이와 게르다는 서로 옆집에 살며 오누이처럼 지내는 사이이다. 둘은 정원의 장미꽃 아래에서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곤 하면서 자란다. 그러나 악마의 거울이 박힌 카이는 썰매를 타고 나타난 눈의 여왕의 썰매에 자신의 썰매를 묶고 놀다가 납치되어 떠나버리고, 카이를 좋아하던 게르다는 카이를 찾아 나선다. 처음 만난 외로운 노파는 게르다를 곁에 두고 싶어 게르다의 기억을 없애고 정원에 핀 장미를 땅 속으로 감춘다. 노파의 모자에 있던 장미를 보는 순간 정원에 장미가 없음을 이상하게 여긴 게르다는 정원으로 나가 장미꽃을 찾다가 울음을 터트리고, 흘러내린 눈물은 땅속으로 스며들어 장미를 다시 밖으로 피어나게 한다. 배경처럼 카이와 늘 함께 했던 장미꽃밭을 본 순간 모든 기억을 회복한 게르다는 다시 카이를 찾아 나서고, 까마귀에게 카이가 어떤 성에서 공주와 함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지만 공주와 살고 있는 남자 아이는 카이가 아니다. 게르다의 이야기에 감명을 받은  공주는 게르다가 카이를 찾을 수 있도록 그녀에게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진 화려한 마차와 시녀들 따뜻한 부츠,  털장갑 등을 선사하지만 산적떼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산적 딸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목숨을 건진다. 그리고 산적의 딸 역시 게르다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가 카이를 찾을 수 있도록 자신의 순록을 제공하고 성을 빠져나가도록 돕는다. 우여곡절 끝에 카이를 만난 게르다가 눈물을 흘리자 그 눈물은 카이의 가슴에 스며들어 심장 속에 박혀있던 거울 조각을 빼내고, 기억을 찾은 카이의 눈물은 눈 속에 박힌 또다른 거울 조각을 빼내으로 카이는 예전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얼음조각은 영원 을 맞추어 성에서 풀려나게 된다. 마을로 돌아온 카이와 게르다는 기쁜 마음으로 할머니가 성경을 읽고 있는 방문을 열고, 이 모든 모험을 끝낸 그들은 이제 어른이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원작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역시나 아이들을 위한 동화라, 사건의 디테일은 빠지고 어른의 마음으로는 이해불가한 요소들과 엽기적인 면들을 볼 수 있다.  가령 엄마에게 업혀있던 산적의 딸은 엄마의 귀를 물어뜯고 해괴하지만, 그녀가 게르다에게 도망갈 계획을 주도하는 행동은 어른같다. 또한 당시 인육을 먹는 문화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듯한 문장 하나가 눈에 띈다. 산적들이 공주가 마련해준 게르다의 화려한 마차를 습격하고 시녀와 마부들을 모두 죽인 후  게르다의 엄마가 게르다를 보며 포동포동하게 맛있게 생겼다며 칼을 들이대는 장면이다. 우리는 조선시대 선조 때 임란으로 피폐해진 백성이 인육을 먹는다고 보고받는 실록의 기록을 읽고 끔찍해하지만, 그들은 엄연히 사람이고 백성 중 하나였던 산적이 인육을 먹는 듯한 장면이 어린이의 동화책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표현되어 전해져 오는 점을 있을 무심히 지나간다. 눈과 심장에 마법의 거울이 박힌 카이는 대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생생한 캐릭터가 없다. 게르다가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알 길이 없다.  악마의 거울이 박히기 전의 카이와 게르다가 서로 오누이 처럼 사이가 좋았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단서가 없고, 오직 그 이후 이야기 뿐이다.  카이 뿐 아니라, 신비한 눈의 여왕도 마찬가지이다. 카이를 왜 데려갔는지, 무엇을 할 작정이었는지 오리무중이다.  그동안 게르다가 카이를 찾기 위해 겪은 모험 속에 모두 꿈인듯 희미하나, 그 모험이 끝나고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을 때, 그 둘은 성인이 되어 있었다.

 

안델센은 무한한 상상력으로 환상적인 이야기의 뼈대만 만들었을 뿐, 각각의 캐랙터에 생명력을 불어놓지 않았다. 어린아이용 동화는 정서적인 디테일이 필요하지 않다. 아이들은 스토리에서 고유의 느낌들을 스스로 찾는다. 만일 5~6세의 아이들에게 눈의 여왕은 어떤 사람이야? 게르다는 어떤 사람이야? 좋아 싫어? 이렇게 묻는다면, 그 아이들이 이야기속에서 창조해낸 캐랙터는 동심 속에서 무한한 생명력을 갖는 생생한 캐랙터가 될까. 나는 참 궁금하다. 느낌을 전지적 시점에서 전달해줘야 알아먹는 성인들의 세계와 스토리만 가지고도 무한한 세계를 창조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를 어린이들의 잠재력. 그것들의 커다란 시간이라는, 성인이 된다는 것의 갭을 안델센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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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예찬 - 번역가의 삶과 매혹이 담긴 강의노트
이디스 그로스먼 지음, 공진호 옮김 / 현암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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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읽으며 그동안 이런 저런 번역에 대해 제기했던 불만을 반성하게 끔 하는 책이다. 우리는 그동안 번역의 가치를 많이 평가절하해 왔다. 알파벳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비영미권 언어를 번역한 책들에 대해서도  매끄럽고 유려하게 번역되었다느니, 거칠게 번역되었다느니 하는 판에 박힌 표현으로 번역자의 노고를 폄하하여왔다. 이 책의 저자 이디스 그로스먼은 전문 번역가이며, 번역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 그리고 확고한 철학을 가졌다. 그리고 이 책을 빌어 번역 작업을 예찬한다.  이디스 그로스 먼에게 번역은 창작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번역으로 인해 다른 여러 나라와의 풍부한 문화들이 서로 조우하는  확장된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200페이지 남짓으로 짧고, 그 중 반 정도는 시 번역 작업의 실례를 들고 있기 때문에 실제 저자의 통찰력을 읽을 수 있는 내용은 100페이지 남짓하다. 그가 단호하게 주장하는 사항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는  자국문화의 틀에 갇힌 채 타 언어의 영미 번역을 기피하는 영미의 출판, 평론계에 대한 비판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영미권 번역서를 많이 접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영미국의 출판업계가 영어 이외의 타언어에 대한 문화적 무시, 기피 현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별로 알 길이 없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출간 되는 번역서의 50%는 영어원서 번역본이고 영어로 번역되는 것은 6% 뿐이라고 한다. 놀라운 사실이다.  아무리 국제적 표준 언어로서  영어가 전세계적으로 자리 잡고 있고, 미국의 군사 경제력이 세계최강이라고 하더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라도 영어는 다른 모든 언어와 융합하고 교류해야 풍성한 언어적 발전이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번역 및 번역가에 대한 평론가들의 관심 역시 출판사들 못지 않게 소극적이라고 한다. 이러한 영미 문화의 배타성은 비단 번역기피 현상으로 그치지 않는다. 미국민의 대다수가 지도에서 아시아의 굵직한 나라들을 찾지 못하고, 80 퍼센트가 여권을 아예 갖고 있지 않으며 태평양과 우방으로 둘러싸인 편협함의 섬에서, 자국의 거대 소비를 충족시켜주는 각국의 역사 문화와 사회에 무지한 채 오해와 해소되지 않은 갈등, 그리고 전쟁이 자라기 비옥한 땅을 가꾸고 있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미국이라고 해서 출판 시장이 그리 대단히 큰 거 같지는 않다. 필립 로스는 미국에서 책을 사는 사람을 4000 명으로 추정했다고 한다. 책을 한권 내서 그 사람들과 도서관에 팔고 나면 기본적으로 그게 다라는 것이다.

 

두번째는, 번역 작업 자체가 갖는 문화 전달과 창작으로서의 가치를 일깨운다. 우선 하나의 문화가 다른 문화와 관계함으로써 서로 영향을 주고 새롭고 풍성한 표현 수단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번역은 문학을 통해 다른 사회, 다른 시대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탐구하는 능력을 키워줍니다. 낯선 것을 익숙한 것으로 바꾸어 그것을 음미할 수 있게 해줍니다. 잠시나마 우리 자신의 삶, 우리 자신의 편견과 착각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살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한하고 형언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세계의 우리 의식의 폭과 깊이를 더해 줍입니다

 

문학 뿐 아니라 언어 자체도 다른 언어와 서로 관계를 맺을 때 풍성 해 집니다. 한 언어에 주입되는 새로운 표현 수단이 가져오는 좋은 결과는 어휘의 확장, 연상 잠재력, 구성상의 실험입니다.

 

세번째로, 번역가로서의 직업적 자부심을 가진 저자는 미국에서 번역가들이 익숙한 풍경의 일부인듯 종종 무시되어 오고 출판업계 및 평론가들은 번역의 가치를 깎아 내리고 번역가들 역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러한 경향이 출판업계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비영미권 원서의 저조한 영어 번역과 기피현상으로 나타난다.

 

네번째로, 비번역가로서 가장 공감을 얻은 주장으로, 영혼없는 일대일 단어 변환식의 직역에 대한 통탄과 비판, 그리고 프로페셔널 번역가로서 좋은 번역에 대한 그의 철학을 이야기한다.  그는 단어란 개별적으로 분리될 경우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단어는 문백 전체에 필요한 부분이 될 때, 의미를 띤다고 말한다. 단어라는 것이 구절에서 개별적으로 떼어 놓으면 구절이 주는 의미를 충실하게 전달할 수 없으며 따라서 번역가는 의미를 재현하기 위해 유추를 사용하여 문맥을 번역하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그가 인용한 존 드라이든의 서신 번역본은 이러한 저자의 생각을 잘 대변해 준다.

 

원작의 힘이나 정신을 살려 번역하고자 하면 원작자의 말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번역가는 총력을 기울여 원작자의 특징과 맛을, 주제의 본질을 해당 예술이나 주제에 관한 용어를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그런 다음 그렇게 이해한 것을 원작을 쓰듯 적절하고 생생하게 표현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단어에 단어를 하나씩 대응시켜 옮기면 원작의 정신이 그 지루한 수혈 과정에서 모두 상실된다.

저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훌륭한 글의 합은 그것을 이루는 부분 혹은 개별적인 낱말의 합보다 크다. 그리고 번역문은 원작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게 분명하다는 저자의 의견에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가끔 좋은 번역서를 읽으면 우리가 가진 한국적인 고유 정서를 통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외국의 문화와 정서를 매우 현실감있게 경험하기 때문이다.


영어가 아닌 타언어로 된 문학이 노벨상을 받으려면 우선 영어로 잘 번역되어야 한다. 이 단순한 팩트는 단순히 자만심과 편협함으로 영미 국가 내 문화적 경향이 타언어를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이 실로 인류의 발전에 커다란 장애와 위협으로 작용하게 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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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골리앗 - 강자를 이기는 약자의 기술
말콤 글래드웰 지음, 선대인 옮김 / 21세기북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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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에 사용되는 재료가 너무 진부하면 제 아무리 뛰어난 요리사가 정성껏 요리를 하더라도 맛의 퀄리티는 사용된 식재료의 범위 내로 제한된다. 언젠인가부터 조금씩 느끼는 바이지만 이번에 맬콤 글래드월이 들고 나온 소재는 딱 제목만큼이나 익숙한 소재다. 그가 책을 엮어나가는 방식, 여러 사건과 사례와 역사를 추적하여 하나의 커다란 틀 안에 넣고 통합하고 수렴하는 배합 능력은 여전히 훌륭하다. 그러나, 과거 그의 저술에 비해 희소성이 부족한 평범한 소재로 인한 강한 임팩트의 부족, 급한 번역 때문으로 보이는 문장과 문장 사이의 거친 호흡, 이런 자잘한 요소들이 이 야무진 베스트셀러 작가의 명성을 자잘하게 흠집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 책은 선대인씨가 번역했다. 글래드웰은 문장을 쉽게쓰는 데 탁월한 작가이다. 쉬운 단어, 명료한 문장이 특징이다. 따라서 영어 독해력이 보통 정도만 된다고 해도 그의 영문 책을 읽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영문판보다 번역판이 가독성이 떨어진다면, 그것은 아마도 번역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문화 차이에서 오는 문단과 문단 사이의 호흡을 조절해줄 필요가 있었다.

 

지게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싸움을 이기는 방법. 이 주제에 대해 글래드웰이 내리는 결론은 정당하지 않은 과도한 힘의 사용은 유연함을 누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적절한 힘의 사용에 비해. 적당한 학생수의 학급이 더 적은 학생수의 학급보다 학업성취도가 높은 현상, 난독증으로 글자의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높은 비율로 크게 성공한 이유, 인상파 화가들이 큰 연못인 살롱 출품을 포기하고 작은 연못인 자신들만의 작품 전시회를 열어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었던 사례.  높은 형량이 범죄율을 낮추지 못하는 현상들을 풀어놓는다.

 

필요해서 배우는 것은 쉽게 배우게 된 것보다 필연적으로 더욱 강력하기 때문이다. P141

 

골드만삭스의 회장 개리콘은 난독증을 가졌다. 학교에서 쫓겨나고 바보라고 무시당하면서 낙제를 거듭하여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었을때 22 페이지의 책을 읽을려면 6시간이 걸렸고, 그의 어머니는 그가 트럭운전사만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글자가 거의 전부일 수도 있는 학교라는 사회에서 난독증을 가진 채 살아남으려면, 대학을 졸업할 때 쯤에는 실패를 다루는 능력이 극도로 발달되어야 했다. 그는 난독증이 아니었으면 잠재되어 깨어나지 않았을 기술을 개발하게 했다.  세계적인 변호사 데이비드 보이스는 난독증을 뛰어난 기억력으로 극복했다. 잘 읽지 못하는 대신, 집중해서 기억했고, 핵심 내용을 머리속에 잘 정돈하여 필요할 때 불러올 줄 알았다. 그러니까 강의 시간에 필기를 하면서 분산되는 힘을 기억에 쏟았고, 겨우겨욱 어렵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법학대학원 진학의 헛점을 이용하여 변호자자격증을 따낸 이후 머리속의 지삭들을 가지고 재빨리 판단해야 하는 소송 변호사가되어, 배심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논거를 제시하여 세부사항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는 학자 타입의 변호사를 상대했다.

 

뒤집힌 U자 곡선 논리는, 처음에는 아주 잘 먹혀들은 전략이 어느 지점을 지나서부터 기능을 멈추어 소강상태에 머물다, 또 어느 지점을 지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나는 현상이다. 다시 말해, 거꾸로된 U자 모형의 오른쪽 맨 끝은 결국 과도한 힘이 부재된 힘과 같아진다. 최소한의 학급당 학생수와 학업성취도와이 관계는 거꾸로된 U자 모형을 그린다. 교사 1인당 1명의 학생을 맡는 1대 1 학습 시스템이 수십명씩 한 반에 우굴거리는 학급과 마찬가지의 저조한 성취도를 보인다는 뜻이다. 학급당 학생수가 줄수록 학업 성취도가 더이상 높아지는 경계는 약 18명 수준이라고 한다. 12명 이하의 학생들로 구성된 이상적인 학급당 학생수로 구성된 클래스를 가르치는 선생들은 학생수가 줄어든 만큼 생겨나는 여유를 더 이상 학생의 학업 성취를 위해 쏟지 않는다. 아이들은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렇게 저렇게 여러 규모와 형태로 그룹을 형성하는데, 학생수가 줄어들면 특히 학업 성취도가 낮은 학생들이 자신과 동질감을 느끼고 서로 협력할 그룹을 형성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모의 수입과 양육의 관계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부모의 부가 더이상 바른 양육에 도움이 안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힘과 권위를 행사하는 것 또한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오기 시작하는 지점이 있다. 이를 이해하지 못했던 북아일랜드 총사령관 프리랜더는 북아일랜드 내 소수집단인 카톨릭교도들에 대한 강력한 군사력의 개입으로, 30년 간에 걸친 유혈사태와 대혼란으로 이어진 분쟁과 반목을 야기시켰다. 영국 개신교도로 구성된 영국군은 가톨릭 구교와 개신교들 사이의 갈등을 완화할 목적으로 선의를 가지고 북아일랜드로 갔지만 그들은 이미 가난하고, 소수였고, 원래 그들 삶의 터전인 아일랜드 토착민이었던 카톨릭교도들을 무기와 병력으로 압도했다. 궁지에 몰린 카톨릭교도들이 할 수 없이 선택한 길은 길고 긴 피의 저항뿐이었다.

 

우리는 힘의 사용을 통해 무엇을 이룰 수 있나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북아일랜드의 반목은 가진 것 없고, 소수민에 불과한 카톨릭에 행사한 불의의 힘이 원인이 되어 30년간 많은 목숨과 맞바꾸었다. 딸을 죽인 범죄자에게 삼진아웃이라는 법개정까지 이루어낸 복수를 통해 3번 이상의 중복범죄자에게 행해졌던 25년이라는 긴 형량이 범죄의 감소를 가져왔다는 결과는 10여년이 지난 후, 허상임이 드러났다. 누군가의 아버지가 약물소지, 절도와 같은 비교적 가벼운 범죄의 삼진 아웃 덕에 거의 평생을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 그들의 기본적인 의식주조차도 해결되지 못하는 최악의 환경에서 자라난 범죄자의 아이들을 또다시 범죄자로 양성했던 것이다. 

 

말콤 글래드웰의 책은 여전히 맛있다. 재료는 평범했지만, 그 디테일이 살아있다. 역사라는 팩트 속에 감추어졌던 작은 사실들을 끌어내어 주제속에 융합하는 힘은 그의 저력이다. 90년대에 정점을 찍은 북아일랜드의 유혈사태에 대한 궁금증은 소설처럼 풀렸다. 미국 흑인 운동의 역사에서 킹 목사가 진정으로 상대한 것은 힘이 아니라, 부당한 힘의 사용을 세상에 호소해야 했던 절박함을 이끌어내는 전략이었다. 부, 명성, 지능, 좋은 환경 이런 것들이 더이상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는 지점이 있고, 그것들이 오히려 부정적으로 작용하기 시작하는 지점이 있음을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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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돌아간 제돌이
핫핑크돌핀스 지음, 박주애 그림 / 두레아이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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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동화책이다. 제돌이를 바다로 돌려보내 달라는 소망이 담긴 아이들의 그림도 함께 실려있다. 이 아이들 만큼도 진화되지 않은 어른들, 돌고래의 불법 포획과 감금과 폭력에 동참했던 모든 어른이 이제 동화책에 감명받고 눈물 흘릴 줄 아는 아이들의 시선으로 책을 읽고 반성할 때다. 동화책에 담긴 제돌이의 목소리에 공감과 희망을 담을 차례다. 그래야 이 책을 읽고 눈물 흘릴 줄 아는 가슴을 가진 어린 세대가 자라서 그 다음 세대에 또 다음 세대에, 조금이라도, 파괴 속에 남은 자연과의 공존을 유산으로 남기고 건네줄 수 있다.

 

무지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오만함의 틀 속에 박힌 인식의 발전없는 정체가 과거에도 지금도 그대로 자연과의 화해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노에제도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 서양인들의 눈은 검은 피부의 그들의 문화적 문명적 차이를 진화 단계에서 열등한 포지션으로 인식했고, 그래서 그들을 자신들을 위해 존재하는 하등한 존재로 취급했다. 그 땐 그게 죄가 아니었다. 천사같은 어린 아이에게도 노예는 자신과 동일한 종이 아니었으므로 맘껏 노동력을 착취하고 학대해도  되는 존재였다. 열악해져가는 자연 환경에 그나마 어렵사리 적응해가며 종족을 보존해가고 있는 돌고래를 맘대로 잡아 가두고 훈련이란 이름의 폭력을 통해 그들의 고유 권리들을 마구 빼앗고 짓밟고 서커스단의 구경거리로 만들어 버린 우리 인간들. 나도 한때 좋다고 구경했던 적이 있었다. 그 잔인한 돌고래쇼를..자신과 다른 문화를 가졌다고 해서, 자신이 가진 파괴적 도구를 지니지 안았다고 해서 정복이라 개척이라 맘대로 이름 붙여 학살한 인류 역사에서 단 한발짝도 더 나가 보이지 않는다. 


 

제돌이는 제주도 앞바다에만 사는 남방큰돌고래로 무리들 속에서 자유롭게 살다가 불법으로 포획되어 이리저리 노예처럼 팔려다니면서 동물원 서커스의 일종인 돌고래쇼에 섰다. 하루 100Km를 자유롭게 헤엄치고 물고기떼를 사냥하는 이들에게 인간은 좁은 우리 안에 가두어 두고 죽고 비린 생선을 먹이며 탐욕을 채웠다. 돈을 버는 탐욕, 자신보다 "하등"하다고 규정한 동물들이 자신을 위해 물을 뿜고 재주를 넘는 쇼를 즐기는 탐욕을 함께 채워갔다.


돌고래가 인간보다 하등하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생각하고 공감하고 소통하고 무리를 지어 사회생활을 하고 그들만의 세겨에 인간이 납치된다면 과연 돌고래쇼 대신 인간쇼를 할 만한 어떤 재주를 가졌는가.

인간이 지닌 의사소통 방법과 비슷한 초음파를 이용하여 대화를 하고 이를 통해 감정을 교류하고 공감할 줄 아는 이 고등 동물의 세계를 침입하여 강제 납치에 강금, 학대를 거쳐 동물원의 쇼돌고래로 전락하게 만든 인간. 우리는 그들 보다 더 나은가? 수백만년동안 형성한 자연을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파괴할 수 있는 기술을 가져서?

 

그저 생명을 경외하는 어린 시선으로, 우리 어른들이 읽어야 할 책애다. 끝에 실린 아이들의 그림을 책의 일러스트로 썼어도 좋았을 뻔 했다. 동화책에 실린 그림은 색감과 그림이 비슷비슷하여 약간 지루한 느낌을 줄 수 있다. 제돌이의 해방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성인들의 무지를 일깨워준 두레아이들과 서울 시장 및 기타 여러 기관들에게 응원과 고마움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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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2-13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돌이가 그림책뿐 아니라 동화책으로도 나왔군요.
널리 읽히면서 사랑받기를 빌어요.

CREBBP 2014-02-19 15:15   좋아요 0 | URL
아 이거 그림책이에요. 제가 잘못 썼네요.
 
타고난 거짓말쟁이들 - 누가 왜 어떻게 거짓말을 하는가
이언 레슬리 지음, 김옥진 옮김 / 북로드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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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의 범위는 어디부터 어디까지일까요. 학계에는 실제로 멘테올로지라는 거짓말 전문 분야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아마도 일상에서 가장 흔한 거짓말은 '알았어 지금 가'와 '알았어 지금 간다니까'일 것입니다. 매일 똑같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연인들이 어느날 그 말 속에 별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다고 해도 거짓말이라고 보아야 할까요. 또 세월 속에 묻힌 기억이 아주 희미해서 신념처럼 굳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진실에서 조금 멀어졌다면 그로 인해 피해자가 생기지 않았거나 또 생겼다면 거짓말이 성립될까요. 가장 순수하고 때묻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어린 아이들은 왜 끊임없이 거짓말을 할까요. 거짓말은 인간의 속성일까요. 

 

 

어느날 우연찮게 펼쳐들었던 이안 레슬리의 '타고난 거짓말쟁이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생각의 물꼬를 터 주었습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거짓말은  누구를 일부러 속이기 위해 말로 하는 단순한 거짓말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인간 본성에 근거하는 위선적인 행동,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속이는 행위, 작화증과 같은 병리학적 거짓말,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자기와 세상을 모두 속게 하는 뇌구조와 인간의 심리까지 거짓말의 세계를 무한하게 확장합니다. 이언 레슬리가 다루는 거짓말이라는 주제의 예리하고 깊은 인간적인 통찰은 저에게는 큰 감명이었고, 이를 통해 기회가 닿는 대로, 또다른 시각으로 거짓말을 바라보는 책들을 읽어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원제는 born liar 로 한글로 붙인 제목도 원제와 가깝고 내용과도 적절합니다(요즘은 인간의 심리를 다루는 책에 낛시가 아닌 정직한 타이틀을 붙이는 것만 해도 웬지 감동스러운 데가 있습니다.  책제목도 거짓말을 하는 것이지요.) 거짓말을 인간의 속성으로 본다는 저자의 의지가 담겨있는 듯합니다. 

 

저자는 직업적인 저술가입니다. 가디언, 타임스 등에 정치, 문화, 마케팅, 심리학 등에 글을 쓴다고 나와 있고, 이 책 말고 다른 걸 많이 쓴 거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정직하게 단 하나만의 주제인 거짓말에 대해 일관된 자세로 글쓰기를 임하고 있습니다. 심리학, 역사, 정치와 사회, 철학, 예술, 문학 등 다양한 모든 방면에서 방대한 지식과 놀라운 통찰력으로 인간 본성의 거짓말 적인 속성을 해부합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거짓말을 시작하면 자기 방어를 위한 자아가 발달되는 과정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니 감동해야 할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거짓말이라는 본능적 방어를 통해 자아와 사회성을 형성해 나가는 단계를 거쳐 거짓과 진실의 접점을 찾아간다고 합니다.  이안 레슬리의 거짓말에 대한 통찰은 단순히 "고마워" "난 괜찮아" 등의 사소한 문화적 언어에서부터, 작화증 환자,사기꾼의 악의적인 전문 거짓말 등 거짓말의 세계를 탐구하다가 자기 위안과 암시를 위한 자기 기만과 선택적 기억의 오류, 궁극적으로는 철학적인 자아에 대한 성찰을 불러 일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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