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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예찬 - 번역가의 삶과 매혹이 담긴 강의노트
이디스 그로스먼 지음, 공진호 옮김 / 현암사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책을 읽으며 그동안 이런 저런 번역에 대해 제기했던 불만을 반성하게 끔 하는 책이다. 우리는 그동안 번역의 가치를 많이 평가절하해 왔다.
알파벳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비영미권 언어를 번역한 책들에 대해서도 매끄럽고 유려하게 번역되었다느니, 거칠게 번역되었다느니 하는 판에 박힌
표현으로 번역자의 노고를 폄하하여왔다. 이 책의 저자 이디스 그로스먼은 전문 번역가이며, 번역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 그리고 확고한 철학을
가졌다. 그리고 이 책을 빌어 번역 작업을 예찬한다. 이디스 그로스 먼에게 번역은 창작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번역으로 인해 다른 여러
나라와의 풍부한 문화들이 서로 조우하는 확장된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200페이지 남짓으로 짧고, 그 중 반 정도는 시 번역 작업의 실례를 들고 있기 때문에 실제 저자의 통찰력을 읽을 수 있는 내용은
100페이지 남짓하다. 그가 단호하게 주장하는 사항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는 자국문화의 틀에 갇힌 채 타 언어의 영미 번역을 기피하는 영미의 출판, 평론계에 대한 비판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영미권
번역서를 많이 접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영미국의 출판업계가 영어 이외의 타언어에 대한 문화적 무시, 기피 현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별로 알
길이 없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출간 되는 번역서의 50%는 영어원서 번역본이고 영어로 번역되는 것은 6% 뿐이라고 한다. 놀라운 사실이다.
아무리 국제적 표준 언어로서 영어가 전세계적으로 자리 잡고 있고, 미국의 군사 경제력이 세계최강이라고 하더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라도 영어는
다른 모든 언어와 융합하고 교류해야 풍성한 언어적 발전이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번역 및 번역가에 대한 평론가들의 관심 역시 출판사들 못지
않게 소극적이라고 한다. 이러한 영미 문화의 배타성은 비단 번역기피 현상으로 그치지 않는다. 미국민의 대다수가 지도에서 아시아의 굵직한 나라들을
찾지 못하고, 80 퍼센트가 여권을 아예 갖고 있지 않으며 태평양과 우방으로 둘러싸인 편협함의 섬에서, 자국의 거대 소비를 충족시켜주는 각국의
역사 문화와 사회에 무지한 채 오해와 해소되지 않은 갈등, 그리고 전쟁이 자라기 비옥한 땅을 가꾸고 있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미국이라고 해서 출판 시장이 그리 대단히 큰 거 같지는 않다. 필립 로스는 미국에서 책을 사는 사람을 4000 명으로 추정했다고
한다. 책을 한권 내서 그 사람들과 도서관에 팔고 나면 기본적으로 그게 다라는 것이다.
두번째는, 번역 작업 자체가 갖는 문화 전달과 창작으로서의 가치를 일깨운다. 우선 하나의 문화가 다른 문화와 관계함으로써 서로 영향을 주고
새롭고 풍성한 표현 수단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번역은 문학을 통해 다른 사회, 다른 시대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탐구하는 능력을 키워줍니다. 낯선 것을 익숙한 것으로 바꾸어 그것을
음미할 수 있게 해줍니다. 잠시나마 우리 자신의 삶, 우리 자신의 편견과 착각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살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한하고
형언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세계의 우리 의식의 폭과 깊이를 더해 줍입니다
문학 뿐 아니라 언어 자체도 다른 언어와 서로 관계를 맺을 때 풍성 해 집니다. 한 언어에 주입되는 새로운 표현 수단이 가져오는 좋은
결과는 어휘의 확장, 연상 잠재력, 구성상의 실험입니다.
세번째로, 번역가로서의 직업적 자부심을 가진 저자는 미국에서 번역가들이 익숙한 풍경의 일부인듯 종종 무시되어 오고 출판업계 및 평론가들은
번역의 가치를 깎아 내리고 번역가들 역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러한 경향이 출판업계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비영미권 원서의
저조한 영어 번역과 기피현상으로 나타난다.
네번째로, 비번역가로서 가장 공감을 얻은 주장으로, 영혼없는 일대일 단어 변환식의 직역에 대한 통탄과 비판, 그리고 프로페셔널 번역가로서
좋은 번역에 대한 그의 철학을 이야기한다. 그는 단어란 개별적으로 분리될 경우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단어는 문백 전체에 필요한 부분이 될 때,
의미를 띤다고 말한다. 단어라는 것이 구절에서 개별적으로 떼어 놓으면 구절이 주는 의미를 충실하게 전달할 수 없으며 따라서 번역가는 의미를
재현하기 위해 유추를 사용하여 문맥을 번역하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그가 인용한 존 드라이든의 서신 번역본은 이러한 저자의 생각을 잘 대변해
준다.
원작의
힘이나 정신을 살려 번역하고자 하면 원작자의 말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번역가는 총력을 기울여 원작자의 특징과 맛을, 주제의 본질을 해당 예술이나
주제에 관한 용어를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그런 다음 그렇게 이해한 것을 원작을 쓰듯 적절하고 생생하게 표현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단어에
단어를 하나씩 대응시켜 옮기면 원작의 정신이 그 지루한 수혈 과정에서 모두 상실된다.
저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훌륭한 글의 합은 그것을 이루는 부분 혹은 개별적인 낱말의 합보다 크다. 그리고 번역문은 원작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게 분명하다는 저자의 의견에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가끔 좋은 번역서를 읽으면 우리가 가진 한국적인 고유 정서를 통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외국의 문화와 정서를 매우 현실감있게 경험하기 때문이다.
영어가 아닌 타언어로 된 문학이 노벨상을 받으려면 우선 영어로 잘 번역되어야 한다. 이 단순한 팩트는 단순히 자만심과
편협함으로 영미 국가 내 문화적 경향이 타언어를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이 실로 인류의 발전에 커다란 장애와 위협으로 작용하게 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