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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오르페우스의 창 (1~18권)
Riyoko Ikeda / 대원씨아이(만화) / 2013년 11월
평점 :
중고등학교 시절에 해적판으로 읽었는데, 당시 러시아 혁명을 다룬 내용이 출판금지여서 그림 위에 엉뚱한 스토리를 끼어 입혀있었다. 배경이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에서 핀란드의 독립운동으로 완전히 바뀌었던 것이다. 나의조국 러시아가 아니라 나의조국 핀란드 이런 식으로 대충 바뀐 게 아니라, 그림을 그대로 두면서 핀란드 독립운동의 역사에 끼워맞춰 스토리 자체를 완전히 바꾸는 작업도 만만치 않았을거란 생각이다.
신장판이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는데, 러시아 혁명 역사를 그대로 번역한 본이 처음 나온 게 언제인지 모르겠으나 이 책은 2012년이 초판본이다. 그 전에 정식 번역본이 안나왔다면 수십년동안 이 만화책의 정식 번역판을 기다려온 독자들은 목이 빠지다못해 늙어죽을 뻔 했다. 기다린 보람이 있다(기다렸다기 보다는 잊고 있었다는). 한 권 한권씩 야곰야곰 나와서 7편 정도까지 종이책으로 사두고 읽다가, 어쩐지 좀 시시해져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얼마전부터 읽던 책에 러시아 혁명과 그 망명자들에 대한 얘기가 나와서 러시아 혁명사에 대한 공부도 할겸 이번 주말에 나머지 18편까지를 이북으로 다운로드 해서 휴대폰에서 읽었다.
18편까지 나오는 등장인물만 해도 50여명이 넘고, 혁명 이전의 1900년 경의 샹트페테르부르크에서부터 러일전쟁, 2월 혁명과 10월 볼세비키 혁명, 그리고 내전에이르기까지 급박하게 돌아갔던 러시아 혁명이 9권부터 18편 마지막까지의 배경이고, 그 배경속에서 사랑과 음모와 배신과 전쟁과 예술, 그리고 혁명가의 비극적인 삶이 길쭉길쭉한 순정만화 속에서 아름답게 펼쳐진다.
독일의 유서깊은 도시, 푸른 도나우 강이 흐르고, 고풍스런 대성당이 랜드마크를 자랑하는 아름다운, 레겐스부르크에 성 세바스찬 음악학교(실재하지 않음)가 있다. 그 학교 전설에 오르페우스의 창이라는 아주 오래된 창(window)이 있는데 그곳에서 내려다보다 마주치는 사람과 비극적인 사랑을 하게 된다.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남장을 하고 이 학교 피아노 과에 다니는 율리우스는 그 곳 창에서 클라우스를 만나고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클라우스는 러시아 귀족의 아들로, 혁명의 도화선에 불이 붙기 시작한 시점에 동료의 배반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드미트리의 동생으로 그의 뜻을 물려받아 혁명운동을 하다가 잠시 피해 독일로 온 러시아 혁명가다. 클라우스는 율리우스가 처음엔 남자인 줄 알았으나 아름다운 금발과 남장 속에 가려진 여린 몸과 그를 바라보는 눈빛에 이끌려오다가, 어느 날 그가 여자인 줄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지만, 곧 러시아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이다. 그는 사랑하는 율리우스에게 거짓 약속을 하고 혁명을 위해 자신을 불사르기 위해 조국 러시아로 떠난다.
한편 율리우스는 가족 내 복잡한 사정으로, 유산 상속을 위해 정부였던 엄마에게 남자로 길러지다가, 아버지가 죽자 저택으로 돌아와 공식 상속자가 되지만, 그 내막을 알고 있는 주치의에게 엄마가 협박을 당하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고 살인을 저지르고 칼과 시체를 저택의 정원에 묻는다.(여자 둘이 한 밤중에 꽝꽝 얼어붙은 땅을 파서 시체를 묻는다니.. 힘도 세군). 죄책감과 사랑에 몸부림치던 율리우스는 클라우스에게 모든 것을 걸지만, 자신을 배반하고 떠난 클라우스를 잊지 못해 가문의 모든 걸 포기하고 홀홀 단신 러시아로 향한다.
우여곡절 끝에 몇 번 아슬아슬 클라우스를 만나지만, 매번 클라우스는 사랑을 버리고 혁명을 선택한다.
클라우스의 본명은 알렉세이로, 처음에는 형의 노선을 따르는 형의 약혼녀의 영향하에 부르조아와 협력하는 멘세비키였지만, 부르조아와의 협력에 있어서의 한계를 깨닫고 노선을 달리해 볼세비키가 되어 혁명의 최전선에서 싸운다. 20세기 초반의 거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무능한 왕조, 부패한 귀족, 굶주린 민중과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혁명 밖에는 살아남을 수 없는 배경을 이 만화는 실제 역사 실재한 인물 그리고 허구를 거대한 스케일의 드라마 속에 끌어들이고, 잘 조합하였다. 급박하게 돌아갔던 역사적 디테일들이 그대로 드라마 속에 녹아 들고, 주인공 알렉세이는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 딛고 올라서야 했던 디딤돌이 되어 스러지고,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온몸으로 돌리다가 이름 없이 부서져간 위대한 영혼 그 자체다.
대의를 위해 사랑을 저버려야 하는 안타까운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오르페우스의 비극적 사랑에 대한 전설은 전체 서사를 관통한다.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이유, 그것은 결코 수천만의 생명을 담보하지 않고는 꿈꾸어볼 수 없었던 조국 러시아에 대한 혁명적 사랑 때문이다. 자기 한 목숨을 바쳐 사랑을 찾아가는 율리우스의 사랑은 온전히 알렉세이(클라우스)만을 위해 바쳐지는 사랑이다. 엇갈린 사랑은 운명의 장난으로 아슬아슬 스쳤다 지나가고 스쳤다 지나기가를 반복한다. 러시아 혁명사를 로맨스로 읽고 싶다면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