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의 구멍 초월 3
현호정 지음 / 허블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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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의 구멍』을 관통하는 가장 선명한 이미지는 제목 그대로 고고의 가슴에 뚫린 구멍이다. 처음에 이 구멍은 비교적 쉽게 이해되는 상징처럼 보인다. 노노를 잃고, 자신이 살던 터전을 잃고, 혼자가 된 고고에게 구멍은 상실과 결핍, 그리고 공동체에서 밀려난 소외의 흔적처럼 보인다. 그래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고고의 여정을 ‘구멍을 메우는 과정’, 다시 말해 상실을 치유하고 완전성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소설이 진행될수록 이 구멍은 그렇게 단순한 의미를 거부한다.

거인들의 땅에 이르렀을 때 구멍은 고고에게는 명백하게 존재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된다. 비비낙안과 비비유지는 고고를 먹이고 입히고 보호하며 그의 생존을 돕지만, 정작 고고가 가장 절박하게 느끼는 구멍을 보지 못한다. 그들에게 그것은 실제 몸에 난 구멍이라기보다 기껏해야 ‘정신적인 구멍’으로 해석될 뿐이다.

이때 고고의 괴로움은 단순히 상처가 있다는 데서 생기지 않는다. 내가 분명하게 경험하고 있는 고통을 타인이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더욱 커진다. 그래서 고고가 조바심을 내고 화를 내는 것은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이 느끼는 분노와 닮아 있다. 아무리 친절한 타인이라도 나의 고통을 실재하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친절에는 도달할 수 없는 벽이 남는다.

비비낙안과 비비유지는 고고에게 가장 많은 것을 제공한 존재들이지만, 역설적으로 고고의 가장 중요한 결핍 앞에서는 무력하다.

반대로 작은 사람들의 세계에서 구멍은 더 이상 고고 혼자만의 이상 현상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구멍이 보이고, 공유될 수 있으며, 다른 존재와 연결되는 통로가 된다. 금은 고고의 구멍을 실제로 메울 수 있다. 여기서 고고는 처음으로 자신의 결핍이 타인에게 이해되는 경험을 한다.

그런데 소설은 바로 그 지점에서 예상했던 치유의 서사를 뒤집는다.

구멍이 메워진다는 것은 단순히 상처가 사라지는 일이 아니었다. 너무 깊게 연결됨으로써 타인의 감정과 경험이 고고에게 밀려들어온다. 완벽한 이해와 완벽한 공감은 오히려 자아의 경계를 위협한다. 고고가 원했던 것은 분명 구멍의 치유였지만, 막상 그것이 가능해졌을 때 그 치유는 또 다른 고통이 된다.

나는 이 대목이 『고고의 구멍』에서 가장 흥미로웠다.

우리는 흔히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의 반대편에 ‘완벽하게 이해받는 상태’를 놓는다. 그러나 현호정은 양쪽 모두를 불완전한 것으로 만든다.

아무도 내 구멍을 보지 못한다면 나는 고립된다.
그러나 누군가가 내 구멍 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오면 나는 그 사람에게 압도된다.

그렇다고 고고가 구멍을 메우고 싶다는 욕망을 버리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끝까지 그 욕망은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고는 구멍을 지닌 채 사는 법을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인물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그것이 없어지기를 바라고, 동시에 그것이 쉽게 없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경험하는 인물에 가깝다.

그래서 고고의 여정은 ‘구멍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기보다, 구멍을 메우고 싶다는 욕망과 그것이 메워질 수 없거나, 메워진다 해도 또 다른 고통을 낳을 수 있다는 현실 사이에서 끝까지 흔들리는 과정처럼 읽힌다.

노노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노노를 되찾으면 구멍도 사라질 것처럼 느껴진다. 상실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간다면 모든 것이 복구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노노새를 찾는다고 해서 구멍이 단순히 메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구멍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특정한 사건 때문에 생겨난 하나의 상처라기보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한 완전히 제거하기 어려운 결여에 가깝게 읽었다.

노노를 잃어서 생긴 구멍이기도 하지만 오직 노노만이 채울 수 있는 구멍은 아니다. 고향을 잃어서 생긴 구멍이지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사랑으로 채울 수도 없고, 완벽한 공감으로 채우려 하면 오히려 자신이 사라질 위험이 있다.

이와 함께 흥미로웠던 것은 작품 속 ‘몸’의 문제다. 『고고의 구멍』에서는 몸의 크기와 형태가 관계를 결정하는 중요한 조건으로 작동한다.

거인인 비비낙안에게는 하찮을 만큼 작은 음식 한 조각이 고고에게는 넘치는 식량이 된다. 처음에 고고는 비비낙안에게 먹고 입고 이동하는 거의 모든 것을 의존하지만, 떠날 무렵에는 자신의 작은 몸 자체가 오히려 생존에 유리한 조건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작은 사람 금과의 관계에서는 그 구조가 다시 뒤집힌다. 이번에는 고고가 금을 먹이고 보호하며 생존을 돕는다. 그러나 고고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구멍의 문제에서는 금이 우위를 갖는다. 금은 고고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고고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

따라서 둘의 관계에는 일방적인 강자와 약자가 없다.

고고는 금을 살게 하고, 금은 고고의 구멍에 접근한다.

한쪽의 결핍이 다른 쪽의 능력을 필요로 하고, 그 능력이 다시 상대에게 의존을 만들어낸다. 이 소설에서 권력은 몸의 크기에 단순히 비례하지 않는다. 누구의 몸이 누구에게 필요한가에 따라 끊임없이 이동한다.

밤과 금의 이야기에서도 이런 구조가 반복된다. 몸을 굽혀 사족보행을 하며 금을 등에 태우는 밤은 외형적으로는 낮은 자세를 취하지만 오히려 의기양양해진다. 낮아진 몸이 반드시 낮은 지위를 뜻하지 않는다. 상대를 운반할 수 있는 몸, 먹일 수 있는 몸, 구멍을 볼 수 있는 몸처럼 각각의 몸이 가진 능력이 순간순간 관계의 권력을 재배치한다.

그런 의미에서 『고고의 구멍』에서 몸은 단순한 외형이 아니다. 몸은 관계가 이루어지는 방식 그 자체이다.

또 하나 내가 계속 의문을 품게 된 부분은 고고의 성별이다.

해설이나 작품 외부의 소개에서는 고고를 흔히 ‘소녀’라고 부른다. 그러나 적어도 소설 자체를 읽는 동안 나는 고고를 여성으로 확정할 만한 뚜렷한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고고의 성별을 처음부터 소녀라고 규정하면 고고가 타인에게 느끼는 애착과 질투 역시 자연스럽게 연애의 언어로 번역되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 안에서 고고가 비비낙안이나 다른 존재들과 맺는 관계를 반드시 이성적 사랑이라고 읽어야 할 이유는 별로 없어 보였다.

고고가 비비낙안과 비비유지의 키스를 목격하고 분노하는 장면 역시 꼭 ‘좋아하는 사람을 빼앗긴 연애 감정’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고고가 자라온 쌍둥이 마을의 문화가 더 중요해 보인다.

고고가 알고 있던 세계에서는 존재들이 둘씩 짝을 이루어 살아간다. 그것은 사랑에 앞서 삶의 기본적인 형식이며 거의 자연법처럼 받아들여지는 질서다. 노노와 고고 역시 그런 한 쌍이었다.

그렇다면 노노를 잃은 뒤 고고가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품게 되는 욕망은 반드시 연애적 욕망이라기보다 ‘누군가와 다시 배타적인 한 쌍이 되고 싶다’는 욕망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고고가 이 오래된 관념에서 깔끔하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고고는 다른 관계의 가능성을 보고, 그것을 이해하려고도 한다. 하지만 이해와 수용은 감정의 해소와 같지 않다. 금과 곰의 관계를 보는 일은 여전히 고고를 아프게 하고, 노노새와 커플새가 한 쌍으로 존재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다시 상처받는다.

고고는 밀접한 상대에게 자신 말고도 다른 짝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점차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덜 아픈 것은 아니다.

이 점이 오히려 현실적이었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관계의 관념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다른 방식의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래 몸에 밴 욕망과 상처까지 이성적으로 정리되지는 않는다.

고고는 ‘둘이 한 쌍’이라는 관습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그 관습이 자신을 얼마나 깊이 지배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된 채 계속 아파한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관계에 대한 명쾌한 해답도 없다.

누군가와 깊이 연결되면 다른 관계를 배제하고 싶어지고, 그러나 상대는 나만의 존재가 아니다. 그것을 이해하면서도 질투하고, 수용하면서도 상처받는다. 고고의 구멍이 끝내 완전히 메워지지 않는 것처럼, 이 관계의 모순 역시 끝까지 풀리지 않는다.

그래서 『고고의 구멍』을 다 읽고 나면 처음의 질문 자체가 조금 달라진다.

고고의 구멍은 무엇으로 메워질 수 있는가?

라고 물었던 것이,

우리에게 있는 구멍은 과연 완전히 메워질 수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바뀐다.

우리 모두에게도 각자의 구멍이 있을지 모른다.

어떤 구멍은 너무도 분명해서 나 자신에게는 견딜 수 없이 아픈데, 다른 사람의 눈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설명하려 애쓰고, 보아달라고 요구하고,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할 때 화가 나기도 한다.

그러나 반대로 누군가가 그 구멍을 너무 완벽하게 이해하고, 너무 깊이 들어온다면 그것 또한 구원이 아닐 수 있다. 타인의 감정과 상처가 내 안으로 밀려들어오고, 서로의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 공감은 또 다른 고통이 될 수도 있다.

고고는 끝까지 구멍을 메우고 싶어한다. 아마 우리도 그럴 것이다.

잃은 것을 되찾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 있으면, 누군가가 나를 완전히 이해해주면 비로소 이 구멍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구멍은 그렇게 사라지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구멍이 없다고 가장하는 것도, 그것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것도 아닐 것이다.

내 안에 그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때로는 아파하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때로는 끝내 이해받지 못한 채로도 그것을 끌어안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책을 덮고 나서 나는 결국 이런 질문으로 돌아왔다.

고고의 구멍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나의 구멍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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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더모트도 아닌데 왜서인지 야당 지도자는 그 이름을 말할 수 없었던 신천지, 볼더모트도 아닌데 시장은 누가 5만원짜리, 그러니까 관리비에도 못미치는 공짜 주거지의 혜택을 받고 있었는지 밝히지 못했던 한마음 아파트 주거주인들. 알베르트 카뮈가 이 책을 쓰던 당시 페스트가 창궐하던 도시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볼더모트도 아닌데 그 이름을 말하지 못했던 건 다름아닌 페스트였다. 지금 일본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거울로 보는 것같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페스트를 부인했던 시 당국과 검사하지 않음으로써 코로나19 확진자 숫자를 업데이트하지 않고, 젊은 갑작스런 주검마저도 폐렴과 뇌수막염 같은 얼토당토않은 병명을 붙여 세계를 속이는 아베 정권에게 이 책을 읽으라 하고 싶다. 어쨌든 부정하고 부인함으로써 외면했던 페스트가 도시를 점령하자, 결국 시당국은 공식화할 수밖에 없었고, 도시는 폐쇄된다. 


이제 도시에는 산 자와, 죽은자, 그리고 살아남을 자와 곧 죽을 자들이 남았다. 도시 밖에 있는 사람과 도시 안에 있는 사람은 언제 재회하게 될 지 모른다. 죽음의 도시가 주검을 처리하는 방식은 아우슈비츠를 연상시킨다. 관이 모자르자 관을 생략하고, 묘지가 모자르자 거대한 구더기가 더 많은 주검을 담기 위해 남녀혼탕체계로 전환되고 바람이 불면 시체처리 냄새를 맡는다. 페스트는 시민들을 도시 안에 유폐시키지만, 비극의 본질은 유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계속된다는 거다. 


성곽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편지 한 통 보낼 수 없고 전화 통화도 가능하지 않는 시대다. 떨어져 있는 연인에게, 가족에게 허락된 건 짧디 짧은 전보 메시지가 전부다. 그 짧은 메시지에 사람들이 담을 수 있는 말은 진부함 밖에 없다. 사랑한다. 잘있다. 보고싶다. 계속된다는 건 끝나지 않는다는 것, 답보 상태의 질병이 계속해서, 이웃의 가족의 친구의 생명을 앗아하고 있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헌신적으로 사람들을 '돌보는' 의사와 민간 보건대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페스트임을 확인시켜주고 격리수용시키는 서류에 사인을 하고, 행정적인 도움을 주는 일 뿐이다. 그 도시가 계속된다는 것은 시민들의 삶이 먹고 마시고 떠들고 즐기는 모든 인간의 삶이 나름대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며 계속된다는 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야말로 피가 철철 흐르듯이 우리의 가슴으로부터 솟구쳐 나왔던 그 말들은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당시 우리 시민들은 생명력을 잃은 구절들을 가지고 우리의 고달픈 삶의 징표들을 전달하고자 애를 쓰며 편지들을 기계적으로 베끼고 있었다. 85


페스트의 발생에서부터 물러가기까지의 기간동안 도시의 모습을 서술자에 의해 객관적인 모습으로 그려진 이 소설에는 도시 풍경 외에, 네다섯 명의 인물이 등장해서, 서술자와의 대화하며 그들의 과거 삶의 궤적과 함께 현재, 그 병든 도시가 그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준다. 후에 밝혀지는 서술자는 실제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임에도 가장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 주인공 베르나르 리유다. 


그토록 악의적인 비방과 근거없는 가짜뉴스에 휘둘리면서도 투명하고 선진적이고도 헌신적인 조치로 묵묵히 질병 관리에 애쓰는 사람들의 보면서, 베르나르의 행동과 많이 겹쳐보인다. 페스트의 전조 증상인 죽은 쥐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올 때, 그의 아내는 다른 병으로 인해 도시 밖의 어느 '산'에 있는 요양원으로 떠나고, 대신 어머니가 살림을 맡아주러 와있다. 그는 자신을 돌보지 않으며 헌신적으로 일하지만 농부처럼 과묵하고 주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다. 따라서 떠난 아내에 대한 애틋함과 페스트에 대한 자신의 불안이 독자들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데, 그 때문에 페스트가 물러나고 도시가 제자리를 찾을 즈음 듣는 아내에 소식은 더욱 애닯고 마음아프다. 아내를 위해 마지막으로 베풀었던 기차 침대칸과 다시 볼 수 없음을 짐작하고 맺혀있던 그 아내의 눈물이 그를 그토록 한 의사를 무기력한 상황으로 몰고가는 페스트 국면에서 그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맡은 일을 묵묵히 해 나가고, 아이들의 죽음을 견딜 수 없이 슬퍼하고, 랑베르의 탈출에 행운을 빌고, 페스트가 죄지은 인간에 대한 벌이라는 신부에게 참고 참았던 감정을 폭발하고, 떠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채울 형용사들에 대해 고민하는 그랑의 말을 들어주고, 보건대를 조직한 장 타루에게서 우정을 느낀다. 


그렇다고 항상 죽음만 생각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휴가 중인 셈이었다. 타루는 이렇게 적고 있다 하지만 가장 나쁜 것은 그들이 잊힌 사람들이었다는 것, 그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296


도시 봉쇄를 결정하고, 그것 때문에 더 큰 혼란을 가져온 이탤리 당국을 보내 랑베르가 생각난다. 

우연히 취재차 왔다가 떠나지 못하고 도시에 갇혀버린 랑베르는 자신은 오랑 시민이 아니며, 어떻게 해서든 도시를 빠져나가는 게 새로운 삶의 목적이 되어 버렸다. 서류를 작성하고, 사인을 받으러 다니고, 거절되고, 또다른 사람을 만나서 설명을 하고, 서류를 작성하고 또 거절당하고 그렇게 매일 매일을 도시 탈출에 온 에너지를 쏟느라 막상 나가야 하는 이유였던 연인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지만, 결국 성문을 지키는 사람들과 인연이 닿아 몰래 빠져나갈 기회를 찾게 된다. 위험을 무릎쓰고 도전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페스트 때문에 도시 사정은 한치 앞을 알 수가 없고, 문지기들을 만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서, 이 비공식적 탈출 계획 역시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나가려고 했을 때만큼 번번히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뭔가 쿨하고 그리스인 조르바를 연상시키는 장 타루는 오랑 시민도 아니고, 호텔에서 묵고 있는 이방인에 불과하지만, 랑베르와는 달리 도시의 자원봉사대가 필요하리라 생각하고 보건대를 조직하여 앞장선다. 그 일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었고, 살아남을 가능성은 1/3밖에 안된다고 리유는 타루가 보건대를 조직하겠다고 했을 때, 사실을 알려주지만 타루는 개의치 않고 민간보건대를 조직한다. 타루가 이끄는 보건대의 활약은 짐작하건데 도시의 질서 유지에 큰 도움을 주고 페스트로 마음마저 황폐해졌을 시민들에게 희망을 주었을테지만, 이 소설에서 그런 감상적 개입을 원치 않은 서술자는 보건대의 활약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며, 그 의미마저 축소시킨다. 그의 과거 역시 리유에게 자신을 설명함으로써 알게 되는데, 그의 약간은 냉소적이면서도 초월적인 면은 그의 어릴 때의 환경과 그것이 심어놓은 개인적인 가치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가 발견되는 모순을 통해 이해 가능하다. 


평생 말단 임시직 서기인 그랑은 자신의 건물에 함께 사는 코타루가 목을 매 자살을 기도하는 것을 구해내 의사를 불렀을 때 리유와 알게되는데, 이후 리유에게 자신이 쓰는 글에 대해 계속해서 언급한다. 사랑하는 연인과 결혼했지만, '만사에 무심해졌고, 점점 더 과묵해진 데다, 자신의 젊은 아내에게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한 그랑은 떠난 아내가 남긴 편지를 끌어안고 남은 평생을 살아간다. '제 때 그녀를 붙잡아둘 말들을 찾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주기 위해 편지를 쓰기 시작했으나, 적합한 말을 고르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의사 리유에게 계속 형용사를 바꾸며 의견을 묻고, 또 바꾸고를 되풀이하지만, 편지는 완성되지 못한다. 


'죽음이라는 빈틈없는 평등이 남아있기는 했으나' 공연을 왔다가 페스트 공포에 유페된 극단은 연일 매진 사례를 이루며 공연을 하고, 사람들은 술집으로 몰려다니며 죽음을 나눈다. 재난 영화의 전형처럼 보이는 방화, 약탈, 폭동, 강탈, 반란 등의 사건이 일어나 총격전도 발생하지만, 그것들은 짧은 뉴스 정도로 다룬다. 당연히 기회를 만난 사람도 생긴다. 바로 목을 매 자살을 시도했던 코타르인데, 사형이나 무기징역형을 받을만한 중범죄를 저질러 쫓기고 있던 그는, 모든 공권력이 페스트로 쏠린 덕에 경찰의 주목을 받지 않았고, 여기저기 벌인 자잘한 투기와 불법적인 거래로 호황을 누린다. 소설에서 악인을 뽑아야 한다면 주인공이 될 수도 있을 코타르지만, 여기 나온 모든 등장인물들과 관계를 맺는 그는 그들에게 그냥 이웃일 뿐이며, 랑베르에게 탈출을 주선하기도 한다.


감정을 잘 추스리고 맡은 바 임무에만 집중하는 리유가 딱 한 번 감정이 격해지는 적이 있는데,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오통 판사의 아들을 신부 파눌루와 함께 지켜본 후의 일이다. 파눌루의 열정적인 설교를 기억하는 리유는 그 어린 아이가 어째서 그렇게도 고통스럽게 죽었어야 했는지를 절규하듯 묻는다. 이에 충격을 받은 파눌루는 다소 불안하고 극단에 치닫는 길고 지루한 설교를 하는데, 이후 페스트가 아닌 다른 병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내용이 뭔가 심오해보인다. 


카뮈 자신은 이 소설을 2차대전때 독일에게 함락된 파리에 대한 은유이며 페스트는 나치 전제주의를 상징한다고 하고, 또한 본문 중에도 페스트는 어떤 무언가를 상징하는 듯한 내용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재난 소설로서만 보아도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잘 계산된 인물의 배치와 그들의 역할은 촘촘하게 다양한 인간의 군상과 의미를 전달하고, 리유라는 인물이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보여준 헌신적인 행동과 특히 의미마저 축소시켜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었던 민간보건대의 역할은 훗날 랑베르와 그랑을 모든 인물과 엮으면서 삶의 무엇이 중요한가를 생각하게 하는 천재적인 구성이다. 랑베르의 결정이 있은 후, 잠시 숨을 고르느라 책을 덮어야 했다. 그리고 리유가 만났던, 리유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던 이들 중 허망하게 죽은 자와 죽음에서 살아나온 자들에 대해 한명 한명 모두 감정이입이 되고 특히 리유의 이미지가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읽은 책을 읽자 마자 다시 시작하는 경우가 드문데, 이 책이 그 케이스였다. 비록 알베르의 독립을 반대했던 그의 정치관에는 찬성하지 않지만 카뮈는 진즉 읽었어야 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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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5 1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8-14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연히 만드는 새로운 관계를 기존의 범주에 집어넣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거기에서 일반적이거나 공통적인 것을 본다. 반면 당사자들은 개별적이고 자신들에게 특수한 것만 본다—느낀다. 우리는 말한다, 얼마나 뻔한가. 그들은 말한다, 얼마나 놀라운가!˚


영국식으로 보이는 냉소적 유머와 자의식에 가득찬 주인공 케이시 폴이 젊은 시절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두 딸을 둔 40대 여성과 사랑하며 함께했던 한 때를 회상하는 것이 1장의 내용이다. 방학 중 뒹굴거리던 폴은 부모의 성화에 못이겨 테니스 클럽에 입회하게 된다. 테니스 클럽은 중산층 보수당의 인맥 형성 거점 장소로, 부모들은 폴에게 그들의 입맛에 맞는 낙천적 소유의 멋진 크리스틴이나 버지니아 같은 이름을 가진 또래 여성을 만나 교재하기를 원했던 것인데, 폴은 복식 경기에서 만난 미시즈 수전 매클라우드를 데리고 온다. 이후 젊은 시절 수전과 다니면서 생긴 잘잘한 일화들과 그 일화를 떠올리다 가지를 친 다른 이야기들과 그 때 했던 생각들로 전반부의 내용이 두서없이 서술된다. 

대체 20살도 안된 어린 아이와 사귀는 엄마 나이의 수잔은 어떤 종류의 사람일까? 수전의 성격은 폴의  회상 속에서 조금씩 드러난다. 어릴 때는 성추행을 당했고,  전쟁 중에 애인을 잃었고, 참전하지 못한 못난이들과 사귀다 결혼한 남자가 현재의 남편 고든이다. 딸 둘을 기적적으로 낳은 후로 남편과의 사이에는 관계가 없고, 서로 눈을 쳐다본 지도 오래 되었다. 폴은 수잔의 남편이 수잔에게 몸이 냉랭하다고 한 것에 분개하며 그녀를 사랑으로 지켜주겠다고 생각하며 약 12년간 함께한 시간을 현재의 시점에서 뒤돌본다.

1장에는 그 여자의 사랑이라는 자극적 소재만큼 자극적이거나 충격적 이야기가 들어있지 않다. 둘이 섹스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폴은 영국 보수적 중산층 계급의 신물나고 뻔한 모습을 위선적으로 느끼고, 수전의 모든 행동과 대화에서 새로운 기법의 유머와 진실됨 그리고 지적인 충만함, 모험심 같은 것들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이 때의 폴의 나이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콜필드 <서부전선 이상없다>의 파울 보이머로, 정신연령과 어른들의 위선에 대한 강한 저항감으로 일탈을 저지르는 농도가 콜필드와 유사하다.

˚나와 수전의 관계는 낡은 규범만큼이나 새 규범에도 거슬리는 것이 되어버렸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서술 도중 자신의 기억과 기억 자체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전하기도 하고 기억의 본질인 왜곡에 대한 사색이 쉴새 없이 끼어드는데, 이러한 의식의 흐름은 작가의 전작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간접적으로 보여준 내용에 불필요한 설명을 얹었다는 느낌이다. 

현재이건 과거이건 어느 공간에서건 유부녀와의 연애는 터부시되어 왔고, 금기였기에, 둘의 연애는 대개 비밀리에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읽다 보면, 이 사람들이 대놓고 연애를 했는가 싶은 상황을 자주 맞닥뜨린다. 폴은 천연덕스럽게 수잔의 집에 방문하여 그 집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고, 수잔의 남편과 이야기를 하고, 때로는 오밤중에 찾아가 그 곳에서 자고 싶어한다. 부모가 찾아와서 데려가기는 했지만, 이런 아슬아슬한 연애를 펼치면서도 둘 중 어느 하나도 죄책감을 느끼거나 발각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폴은 수전의 남편이 수전을 냉랭하다고 비난한 것에 대한 대가이며, 가부장적 분위기를 보면서 부부관계도 전혀 없는 이 가정에서 수잔을 구출해야 겠다는 생각 뿐이다. 수전의 결혼 생활이 폭력으로 점철되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 이후에 폴과의 관계에서 형체를 갖출 그녀의 불행의 원천으로 해석된다.

˚나는 수전과 나 사이에 벌어지는 일은 그와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다˚


서술의 시점이 1인칭으로 시작되었다가 2인칭과 3인칭으로 옮겨지는 것을 주목할 수 있다. 읽다가 어느 순간 시점이 너로 바뀌어져 있는 점이 특이해서 찾아보니, 그 이유는 애초에 작가가 스스로 밝히고 있다.  즉 사랑이 1인칭이었던 순간, ‘나‘의 시선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3인칭으로서는 설명이 불가능한 콩깍지 연애 감정의 일화들을 1인칭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첫사랑은 늘 압도적인 일인칭으로 벌어진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압도적 현재형으로. 다른 사람들, 다른 시제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어느 순간 시점은 ‘너‘로 바뀌어있다. 수전과 함께하는 동안, 수전이 겪는, 아니 수전 스스로 자초하는 불행은 폴이 어쩔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토록 많은 반대와 혐오의 시선을 이기고 함께 시작한 삶에서 비록 평탄치는 않을 지라도 행복을 기대했을 폴에게, 수전은 이미 스스로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던 걸까. 나는 그가 수전의 불행을 서술하고, 수전에게서 서서히 멀어져가는 자신을 너라고 지칭하는 시점 속에서 어떤 비난조의 톤이 느껴졌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을 테지만. 나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을 반려자로 선택해야 했던 그 많은 이유를 설명하지만, 너는 네가 스스로 책임져야 할 그 몹쓸 불장난으로 인한 책임을 스스로 설명하지 못해 타자의 입을 통해 전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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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하다가 아들놈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해킹해서 들이다보게 되었는데, 아들놈 보다 한 술 더 뜨는 놈이 아들에게 뭔가를 부탁하고 있었다. 리포트 숙제였던 모양인데, 지는 열심히 책 뒤지고 해서 겨우 마치고 게임하려고 하는데 내가알기로 베프쯤 되는 절친이 자기 어디 놀러가 있는 중이라고 자기 리포트도 써달라고 하는거다. 사내놈들 문자가 길지가 않아서 짧은 말들(주로 욕)로 이어지는 대화를 보고 내가 흐뭇했던게, 싫다고 단호하게 거절을 했던 거다. 그런 부탁 거절하기 위해 구구절절 설명하려면 카톡에 얼마나 길게 써야 할텐데. 싫어 이 OO놈아. 니가 해. 거절하는 사람이 세게 나가니까 부탁하는 사람은 점점 더 구질구질해진다. 인터넷 뒤져서 아무거나 베껴서 이름 만 써서 내달라는 거다. 미친놈 싫어 / 말이 되는 부탁을 해야 들어주지/ 뭐 이런 류의 문자. 하도 끈덕지게 부탁한 터라 나중에 어떡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연한 거절을 심리적 갈등 없이 당연하게 처리하는 아들의 단호함이 좋았다.

MT(요즘도 그런 걸 가는지 모르겠지만) 같은 데 가면 주로 일하는 사람은 일하고 노는 사람은 놀고 그러는데, 나는 궂이 나서서 일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일하는 사람한테는 같이 놀자 하고 노는 사람들한테 같이 일하자 하고 부추기는 편이었다. 그런데 자기가 해야 되는 걸로 아는 사람이 있다. 남들 다 놀아도 혼자서 뒤치닥거리 하고, 뭔가를 나르고 가져오고 해주고... 그런 사람들은 원래 내 어릴적 할머니처럼 누구한테 뭔가를 해주는게 즐겁고 좋아서 그러는 줄로만 알았는데, 책을 읽다보니 거절하지 못해서, 싫은데도 하는 모양이다.  같이 즐기고 노는데 필요한 일이 산더미같으면 누군가가 일을 해야 하는데, 그 누군가는 모두가 되어야지 한두사람이 되어선 안되지 않나. 그런데 그 한두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으니, 그런 사람들이라면 읽어볼만한 책이 있다. 이하늘의 [거절 잘하는 법]이다.거절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라고 조언하는 게 이 책의 핵심 주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거절을 해야 할 다양한 상황들의 단막 스토리들이 굉장히 공감이 갔다.

여기 나와 있는 사례들 중 화나게 답답한 ‘착한 사람들‘ 얘기가 많다. 아들에게 리포트 부탁했던 것과 비슷한 거가 언니의 친구 자기 소개서까지 써주는 일, 지인의 일을 적극적으로 돕다가 혼자서 모든 일을 덤탱이 쓰고 다 해야 했던 일. 대리 출석도 아니고 대리 수강 부탁에 응한 일, 사내에서 도시락 싸기 귀찮다는 선배의 도시락을 매일 도맡아서 싸싸야 하고, 게다가 한술 더떠 반찬투정까지 받아야 하는 사람, 시도때도 없이 10만원씩 빌려가서 갚지도 않는 친구, 직장녀가 된 딸에게 시시콜콜 잔소리하는 엄마까지 세상은 넓고 마음 약한 남을 이용해먹는 인간군상의 종류들도 참으로 많다. 

이쯤 되면 거절하는 수업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고, 그 사람들을 이렇게까지 이용해먹는 사람들은 양심의 크기가 크고 작은 범죄에도 가담할 가능성이 있어보이는 사람으로 경찰에서 주시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나는 거절을 잘 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거절을 할 때 마음이 불편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살다보면 이런 저런 부탁을 받을 일이 있고, 그러다보니 나름 몇 가지 규칙이 생겼다. 

1.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지인이 있다면, 먹튀해도 안아까울 만큼의 돈을, 먹튀해도 안아까울 만큼 아끼는 사람에게 준다는 느낌으로 빌려준다. 그래도 소식 없이 안갚으면 섭섭하더라. 

2. 물건을 사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거절할 건 거절하고, 살건 사고.

- 암OO류의 피라미드는 꼭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사지만, 회원가입이니 한 번만 가보자는 둥의 행동에는 확실하고 명확하게 절대로 두 번 다시 물어보지 않게 의사표현을 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나는 피라미드가 그닥 윤리적인 상행위라 생각하지 않아‘ 이렇게 하면 물러설 것 같지만 이 말은 반론의 여지를 주고 수년간 갈고 닦은 마케팅 기법의 대화에 말려들게 할 가능성이 생기게 한다. 그냥 간단히 ‘나는 절대로 거기 안가, 나를 거기 끌어들일 목적으로 만나는 거 아니라면 그 얘기 그만해‘  섭섭해하던지 말던지. 이렇게 해서 일단 관련 대화를 끝내는 게 상책이다. 종교나 피라미드성 판매는 모두 마찬가지.

- 피라미드성이 아닌데 물건을 파는 경우 : 생계와 관련이 있고, 값비싼 사치품이 아니라면 가깝던 멀던 대개는 사는 편이다. 이건 내 엄마에게 배운 작은 생활의 지혜라고나 할까. 그닥 제품이 좋아보이지도 않는 값비싼 방판 화장품을 쓰기에, 내가 딴거 사다주까 했더니, 아니라고 이거 파는 이가 동창인데, 남편 죽고 혼자서 이거 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내가 단골인데 계속 사줘야한다고.. 1천원 2천원은 그렇게 아끼면서 남을 생각하는 이런 작은 세심함은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힘이라고 믿는다. 상조 서비스를 판매하는 친구가 있다면 들어준다고 손해볼 거 1도 없다.

3. 다른 부탁은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거절할 기회도 없다. 
아마도 무례한 부탁을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거절당할 염려가 없는 앞에서 언급한 종류의 ‘착한‘ 사람들에게 주로 무례한 부탁을 하는 거라고 여겨진다. 그래서 그런지 누가 뭘 부탁하는 걸 못봤다. 그래서 생각해보니 내가 누구에게 부탁을 거의 안하는 거 같다. 대학때 절친이 노트정리를 예술적으로 해서 과의 대표 노트가 되어 돌아다녔는데, 절친임에도 불구하고, 그거 빌려달라는 말이 안나오더라. 아니 빌리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암튼 그친구 정리 기술은 시험 막판에 더욱 효과를 발휘해서, 시험앞두고 머리속에 정리되어 있는 걸, 도표를 그려가며 막판에 자기 정리겸 애들한테 정리해주면 그걸 5분내에 암기해서 시험 잘보는 단골들도 꽤 있었는데, 나는 졸며 흘겨쓴 노트보다는 그냥 책보고 혼자 공부했다. 당연히 점수도 별로. 

현대 사회에서 나는 부탁도 거절도 별로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사회 시스템이 누이좋고 매부좋고 그렇게 부탁으로 돌아가는 게 달갑지 않다. 조금 더 나가면 청탁이 되고, 학연 지연 특혜가 되고 그러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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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01-08 1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 제 과세요. ^^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는 일은 즐겁고 가슴 뛰는 경험입니다. 힘든 일도 있지만 여태까지 쌓아온 지식을 잃지 않고도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유사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새로운 걸 배우는 게 점점 힘들어진다. 뇌가 굳어져서라고 흔히 그렇게 말하는데, 새로운 걸 배우려면 안쓰던 근육을 쓰면 여기저기 쑤시듯 스냅스의 연결 경로가 익숙하지 않은 연결망을 만들면서 신경신호들이 그 낯선 곳을 지나가는 게 힘든 모양이다. 아무튼 학교를 졸업한 이후 뭔가 새로운 걸 배우는 건 정말 어렵다. 말과 글이 완전히 다른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처럼 기초 암기를 필요로 할 때 특히 그렇다. 나이 들어 뭔가를 배우려고 노력해 보다가 좌절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뭔가를 시작하려할 때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다. 이것을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아들러가 말하는 불완전함이란 인격의 불완전함이 아니라 새로 시작하는 일에 대한 지식과 기술에 대한 불완전함입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그 즉시 ‘잘하지 못하는 자신’과 마주하게 됩니다. 새로 시작한 일이니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게 ‘잘하게 되는’ 것의 첫걸음입니다.˝


60세에 한국어 공부를 시작한 저자는 2년동안 공부해서 조선일보에 서평을 내기도 했다(많고 많은 신문 중에 하필이면 조선일보라니 일본스럽다). 64세에 중국어 공부를 시작해서 현재 중국어 통역을 하는 칠십여세의 독자도 만났다고 한다. 내가 얼마전 시베리아 횡단 계획을 준비하는 남편을 보고 혹시 하는 마음에 러시아어 공부를 시작한 적이 있는데, 그래도 한 두어달 했더니, 러시아 글자를 보면 더듬더듬 읽고 싶고 어쨌든 반갑다 러시아어야 여유가 생기면 다시 시작할께 라고 하고싶을 마음 정도는 되었다.  그 전에 부산에 있는 러시아 거리(?)에서 느꼈던 완전히 생경함과는 다른 느낌일 거 같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주어진 생을 조금씩 잃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반대로, 삶에서 생긴 지혜가 쌓여간다는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기시미 이치로는 그리스어를 놓은 지 10년만에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번역하여 몇년 전 세상에 내놓았는데, 그 (그리스어를) 잃어버린 10년동안의 시간은 헛것이 아니었다.


˝그리스어에서 멀어진 시기에 아들러 심리학을 배운 것도 그리스어를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마치 보조선을 얻은 느낌입니다. ˝


나는 내가 늘 늙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10대 때엔 철모르는 어린 아이가 아니어서, 부모에게 다 큰 것이 그것도 못해 라거나 다 큰 것이 어린 동생에게 양보해야지라는 꾸지람을 들으면서 나이듦을 저주하기 시작했고, 20대였을 때는 10대가 아니어서 책임없는 철모름이 사라진 불안한 청춘을 살아야 해서 불만이었고, 30대엔 이젠 나머지 인생이 결정된 채 이대로 살아야 해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20대가 아니어서 불만이었다. 그 다음엔 나이를 잊기로 했던 것 같다. 아마도.

원제가 ‘마흔에게‘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딱히 마흔에게 해당되는 내용은 아닌 것 같다. 

˝간병의 현실은 결코 달콤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간병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기꺼이 받아들이는 편이 행복하지 않을까요? ‘간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가 아니라 간병하면서 ‘부모와 함께 있는 시간이 생겼다’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더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미움받을 용기도 읽어보았지만, 왜 기시미 이치로가 그토록 한국에서 인기인지 잘 모르겠고, 이런 하나마나한 말이 어떻게 위로든 도움이든 되는지 모르겠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은 취향의 문제이지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부모의 간병이 너무나도 힘든 어떤 사람이 책을 읽으며 부모와 함께 있는 시간이 생겨서 기쁘다고 마음을 돌리는 일이 생길 수도 있는지는 의심하지 않기로 한다.

˝아저씨 아주머니의 심리란 상대에게 힘이 되기를 바라면서도 상대를 별개의 인격으로 인정하고 대하는 자세입니다. 상대가 어떤 공을 던지더라도, “그건 이상해”라며 할 게 아니라 “그렇구나”라고 받아들이고, 설령 찬성하지 않더라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해하는 것은 찬성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거기에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면 “이렇게 해보면 어때?”라고 제안할 수 있습니다.˝


사실 얼마 전에 읽은 다른 책에서도 그렇고, 누군가를 자신의 잣대로 평가하거나 자신의 기준으로 행동하기를 조언하려 들지 말고 그렇구나 모드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 서로의 공감과 이해, 나아가 신뢰있는 관계의 기반이 된다는 점을 기억해두어야겠다. 

텍스트의 양이 빈약하고, 하나마나한 말들이 많아서 이 책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내게 한 친구가 자기는 이렇게 할아버지 잔소리같은 종류의 에세이들이 늘 가슴을 후벼판다고 한다. 그러므로 기시미 이치로의 베스트셀러 현상을 더는 삐딱한 시선으로 보지 말아야겠다.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하는 잔소리에서 진정 의미와 가치를 찾아낼 줄 아는 사람도 있으니까. 책의 위대함은 읽는 사람 각자에게 다른 의미를 전달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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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01-08 1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기도 제 과세요. 저도 한 시절엔 키릴 문자 독학으로 읽을 줄은 알았답니다. 지금은 다 잊었지만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