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더모트도 아닌데 왜서인지 야당 지도자는 그 이름을 말할 수 없었던 신천지, 볼더모트도 아닌데 시장은 누가 5만원짜리, 그러니까 관리비에도 못미치는 공짜 주거지의 혜택을 받고 있었는지 밝히지 못했던 한마음 아파트 주거주인들. 알베르트 카뮈가 이 책을 쓰던 당시 페스트가 창궐하던 도시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볼더모트도 아닌데 그 이름을 말하지 못했던 건 다름아닌 페스트였다. 지금 일본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거울로 보는 것같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페스트를 부인했던 시 당국과 검사하지 않음으로써 코로나19 확진자 숫자를 업데이트하지 않고, 젊은 갑작스런 주검마저도 폐렴과 뇌수막염 같은 얼토당토않은 병명을 붙여 세계를 속이는 아베 정권에게 이 책을 읽으라 하고 싶다. 어쨌든 부정하고 부인함으로써 외면했던 페스트가 도시를 점령하자, 결국 시당국은 공식화할 수밖에 없었고, 도시는 폐쇄된다. 


이제 도시에는 산 자와, 죽은자, 그리고 살아남을 자와 곧 죽을 자들이 남았다. 도시 밖에 있는 사람과 도시 안에 있는 사람은 언제 재회하게 될 지 모른다. 죽음의 도시가 주검을 처리하는 방식은 아우슈비츠를 연상시킨다. 관이 모자르자 관을 생략하고, 묘지가 모자르자 거대한 구더기가 더 많은 주검을 담기 위해 남녀혼탕체계로 전환되고 바람이 불면 시체처리 냄새를 맡는다. 페스트는 시민들을 도시 안에 유폐시키지만, 비극의 본질은 유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계속된다는 거다. 


성곽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편지 한 통 보낼 수 없고 전화 통화도 가능하지 않는 시대다. 떨어져 있는 연인에게, 가족에게 허락된 건 짧디 짧은 전보 메시지가 전부다. 그 짧은 메시지에 사람들이 담을 수 있는 말은 진부함 밖에 없다. 사랑한다. 잘있다. 보고싶다. 계속된다는 건 끝나지 않는다는 것, 답보 상태의 질병이 계속해서, 이웃의 가족의 친구의 생명을 앗아하고 있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헌신적으로 사람들을 '돌보는' 의사와 민간 보건대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페스트임을 확인시켜주고 격리수용시키는 서류에 사인을 하고, 행정적인 도움을 주는 일 뿐이다. 그 도시가 계속된다는 것은 시민들의 삶이 먹고 마시고 떠들고 즐기는 모든 인간의 삶이 나름대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며 계속된다는 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야말로 피가 철철 흐르듯이 우리의 가슴으로부터 솟구쳐 나왔던 그 말들은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당시 우리 시민들은 생명력을 잃은 구절들을 가지고 우리의 고달픈 삶의 징표들을 전달하고자 애를 쓰며 편지들을 기계적으로 베끼고 있었다. 85


페스트의 발생에서부터 물러가기까지의 기간동안 도시의 모습을 서술자에 의해 객관적인 모습으로 그려진 이 소설에는 도시 풍경 외에, 네다섯 명의 인물이 등장해서, 서술자와의 대화하며 그들의 과거 삶의 궤적과 함께 현재, 그 병든 도시가 그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준다. 후에 밝혀지는 서술자는 실제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임에도 가장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 주인공 베르나르 리유다. 


그토록 악의적인 비방과 근거없는 가짜뉴스에 휘둘리면서도 투명하고 선진적이고도 헌신적인 조치로 묵묵히 질병 관리에 애쓰는 사람들의 보면서, 베르나르의 행동과 많이 겹쳐보인다. 페스트의 전조 증상인 죽은 쥐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올 때, 그의 아내는 다른 병으로 인해 도시 밖의 어느 '산'에 있는 요양원으로 떠나고, 대신 어머니가 살림을 맡아주러 와있다. 그는 자신을 돌보지 않으며 헌신적으로 일하지만 농부처럼 과묵하고 주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다. 따라서 떠난 아내에 대한 애틋함과 페스트에 대한 자신의 불안이 독자들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데, 그 때문에 페스트가 물러나고 도시가 제자리를 찾을 즈음 듣는 아내에 소식은 더욱 애닯고 마음아프다. 아내를 위해 마지막으로 베풀었던 기차 침대칸과 다시 볼 수 없음을 짐작하고 맺혀있던 그 아내의 눈물이 그를 그토록 한 의사를 무기력한 상황으로 몰고가는 페스트 국면에서 그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맡은 일을 묵묵히 해 나가고, 아이들의 죽음을 견딜 수 없이 슬퍼하고, 랑베르의 탈출에 행운을 빌고, 페스트가 죄지은 인간에 대한 벌이라는 신부에게 참고 참았던 감정을 폭발하고, 떠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채울 형용사들에 대해 고민하는 그랑의 말을 들어주고, 보건대를 조직한 장 타루에게서 우정을 느낀다. 


그렇다고 항상 죽음만 생각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휴가 중인 셈이었다. 타루는 이렇게 적고 있다 하지만 가장 나쁜 것은 그들이 잊힌 사람들이었다는 것, 그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296


도시 봉쇄를 결정하고, 그것 때문에 더 큰 혼란을 가져온 이탤리 당국을 보내 랑베르가 생각난다. 

우연히 취재차 왔다가 떠나지 못하고 도시에 갇혀버린 랑베르는 자신은 오랑 시민이 아니며, 어떻게 해서든 도시를 빠져나가는 게 새로운 삶의 목적이 되어 버렸다. 서류를 작성하고, 사인을 받으러 다니고, 거절되고, 또다른 사람을 만나서 설명을 하고, 서류를 작성하고 또 거절당하고 그렇게 매일 매일을 도시 탈출에 온 에너지를 쏟느라 막상 나가야 하는 이유였던 연인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지만, 결국 성문을 지키는 사람들과 인연이 닿아 몰래 빠져나갈 기회를 찾게 된다. 위험을 무릎쓰고 도전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페스트 때문에 도시 사정은 한치 앞을 알 수가 없고, 문지기들을 만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서, 이 비공식적 탈출 계획 역시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나가려고 했을 때만큼 번번히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뭔가 쿨하고 그리스인 조르바를 연상시키는 장 타루는 오랑 시민도 아니고, 호텔에서 묵고 있는 이방인에 불과하지만, 랑베르와는 달리 도시의 자원봉사대가 필요하리라 생각하고 보건대를 조직하여 앞장선다. 그 일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었고, 살아남을 가능성은 1/3밖에 안된다고 리유는 타루가 보건대를 조직하겠다고 했을 때, 사실을 알려주지만 타루는 개의치 않고 민간보건대를 조직한다. 타루가 이끄는 보건대의 활약은 짐작하건데 도시의 질서 유지에 큰 도움을 주고 페스트로 마음마저 황폐해졌을 시민들에게 희망을 주었을테지만, 이 소설에서 그런 감상적 개입을 원치 않은 서술자는 보건대의 활약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며, 그 의미마저 축소시킨다. 그의 과거 역시 리유에게 자신을 설명함으로써 알게 되는데, 그의 약간은 냉소적이면서도 초월적인 면은 그의 어릴 때의 환경과 그것이 심어놓은 개인적인 가치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가 발견되는 모순을 통해 이해 가능하다. 


평생 말단 임시직 서기인 그랑은 자신의 건물에 함께 사는 코타루가 목을 매 자살을 기도하는 것을 구해내 의사를 불렀을 때 리유와 알게되는데, 이후 리유에게 자신이 쓰는 글에 대해 계속해서 언급한다. 사랑하는 연인과 결혼했지만, '만사에 무심해졌고, 점점 더 과묵해진 데다, 자신의 젊은 아내에게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한 그랑은 떠난 아내가 남긴 편지를 끌어안고 남은 평생을 살아간다. '제 때 그녀를 붙잡아둘 말들을 찾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주기 위해 편지를 쓰기 시작했으나, 적합한 말을 고르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의사 리유에게 계속 형용사를 바꾸며 의견을 묻고, 또 바꾸고를 되풀이하지만, 편지는 완성되지 못한다. 


'죽음이라는 빈틈없는 평등이 남아있기는 했으나' 공연을 왔다가 페스트 공포에 유페된 극단은 연일 매진 사례를 이루며 공연을 하고, 사람들은 술집으로 몰려다니며 죽음을 나눈다. 재난 영화의 전형처럼 보이는 방화, 약탈, 폭동, 강탈, 반란 등의 사건이 일어나 총격전도 발생하지만, 그것들은 짧은 뉴스 정도로 다룬다. 당연히 기회를 만난 사람도 생긴다. 바로 목을 매 자살을 시도했던 코타르인데, 사형이나 무기징역형을 받을만한 중범죄를 저질러 쫓기고 있던 그는, 모든 공권력이 페스트로 쏠린 덕에 경찰의 주목을 받지 않았고, 여기저기 벌인 자잘한 투기와 불법적인 거래로 호황을 누린다. 소설에서 악인을 뽑아야 한다면 주인공이 될 수도 있을 코타르지만, 여기 나온 모든 등장인물들과 관계를 맺는 그는 그들에게 그냥 이웃일 뿐이며, 랑베르에게 탈출을 주선하기도 한다.


감정을 잘 추스리고 맡은 바 임무에만 집중하는 리유가 딱 한 번 감정이 격해지는 적이 있는데,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오통 판사의 아들을 신부 파눌루와 함께 지켜본 후의 일이다. 파눌루의 열정적인 설교를 기억하는 리유는 그 어린 아이가 어째서 그렇게도 고통스럽게 죽었어야 했는지를 절규하듯 묻는다. 이에 충격을 받은 파눌루는 다소 불안하고 극단에 치닫는 길고 지루한 설교를 하는데, 이후 페스트가 아닌 다른 병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내용이 뭔가 심오해보인다. 


카뮈 자신은 이 소설을 2차대전때 독일에게 함락된 파리에 대한 은유이며 페스트는 나치 전제주의를 상징한다고 하고, 또한 본문 중에도 페스트는 어떤 무언가를 상징하는 듯한 내용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재난 소설로서만 보아도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잘 계산된 인물의 배치와 그들의 역할은 촘촘하게 다양한 인간의 군상과 의미를 전달하고, 리유라는 인물이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보여준 헌신적인 행동과 특히 의미마저 축소시켜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었던 민간보건대의 역할은 훗날 랑베르와 그랑을 모든 인물과 엮으면서 삶의 무엇이 중요한가를 생각하게 하는 천재적인 구성이다. 랑베르의 결정이 있은 후, 잠시 숨을 고르느라 책을 덮어야 했다. 그리고 리유가 만났던, 리유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던 이들 중 허망하게 죽은 자와 죽음에서 살아나온 자들에 대해 한명 한명 모두 감정이입이 되고 특히 리유의 이미지가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읽은 책을 읽자 마자 다시 시작하는 경우가 드문데, 이 책이 그 케이스였다. 비록 알베르의 독립을 반대했던 그의 정치관에는 찬성하지 않지만 카뮈는 진즉 읽었어야 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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